54화 한국시리즈 (4)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단 1승.
그 1승을 쥐어짜기 위해,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는 4차전이 끝난 이후 늦은 새벽까지 머리를 맞대고 선수기용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역시 답은 상황에 따라 불펜을 총동원해서 5차전 승리를 가져오는 겁니다.”
“다행히 현이가 완봉승을 거둬준 덕분에 불펜 운용에 숨통이 트였습니다."
“그 대신 현이는 7차전에서나 기용할 수 있겠지.”
“6차전에서는 무리겠죠?”
“일단 6차전까지는 시위만 하는 데에서 그쳐야지. 4차전에서 투구 수가 너무 많았어. 시즌 내내 거의 쉬지 않기도 했고. 현이가 불펜을 아껴준 상황에서 무리하게 기용할 필요는 없겠지.”
유현은 정규 시즌에 185.1이닝을 투구했다.
문제는 이게 시즌 초에는 불펜으로 맹활약하다 6월이 돼서야 선발로 전향하면서 기록한 투구 이닝이라는 거다.
일각에서는 유현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다고, 이러다가 혹사로 인해 언제 부상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유현은 대전 펠컨스로부터 철저하게 관리를 받으며 컨디션 조절을 한 채 마운드에 올랐고, 비정상적으로 많아 보이는 투구 이닝과 달리 선발 등판 시 경기 당 평균 투구 수는 96.6구로 다른 팀의 에이스 투수들에 비해 적었다.
즉, 이닝을 길게 소화하면서도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통해 부담을 최소화했다는 뜻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유현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불펜 대기를 하겠다고 말한 것과 달리,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는 적어도 5차전과 6차전에서는 유현을 기용할 생각이 없었다.
우승 트로피의 향방이 7차전에서 결정되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유현을 아낄 생각이었다. 유현을 앞당겨서 기용했을 때 경기를 놓치기라도 하면, 7차전에 기용할 선발 투수가 없어지니까.
그리고…….
이미 3승을 수확한 상황이기에 유현이 없더라도 쐐기를 박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서로 총력적인 펼친다고 감안했을 때, 연이은 패배로 남은 경기를 모두 이겨야 하는 서울 레오파즈보다 단 1경기만을 잡으면 되는 대전 펠컨스가 유리한 게 사실이다.
한국 시리즈 5차전.
세미 제이슨과 제프 듀렛의 리매치에서 경기 초반에 웃은 건 세미 제이슨이었다.
3회까지 무려 아홉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며 탈삼진 머신의 위용을 보여줬다.
반면 제프 듀렛은 1회 말에 제구가 잡히지 않아 고전하며 4실점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2회 말과 3회 말에는 안정을 되찾으며 삼자범퇴로 대전 펠컨스의 타선을 틀어막는 데에 성공했다.
경기의 3분의 1이 지났을 때.
두 팀의 입장 차이는 명확했다.
대전 펠컨스는 1회 말에 얻어낸 귀중한 리드를 지켜내며 타자들이 추가 득점을 하길 바랐고, 뒤가 없는 서울 레오파즈의 입장에선 어떻게든지 세미 제이슨을 흔들어서 득점을 올리고 추격의 발판을 만들어야만 했다.
4회 초.
세미 제이슨이 던진 카운트를 잡기 위해 던진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에 1번 타자가 기습 번트를 통한 출루를 시도했다.
타구가 3루 쪽으로 느리게 흘러갔다.
“세이프!”
3루수 송영인이 타구를 잡아 1루로 송구했지만, 아쉽게도 타자의 발이 조금 더 빨라 내야 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서울 레오파즈가 3연속 안타를 만들어내며 1득점을 하고 무사 2․3루 찬스를 잡아 추격의 발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출루를 한 주자들은 언제든지 도루를 할 수 있다는 듯 리드 폭을 넓게 잡고서 끊임없이 세미 제이슨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세미 제이슨은 분명 좋은 투수다.
압도적인 탈삼진 능력을 앞세워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피칭은 분명 일품이지만, 장점만큼 단점 또한 뚜렷한 투수이기도 하다.
세미 제이슨의 가장 뚜렷한 약점은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 상대 팀이 작전을 걸었을 때 흔들리는 모습을 더러 보인다는 거다.
그리고 서울 레오파즈는 그 약점을 집요하게 물어뜯으며 1득점을 한 뒤, 무사 2․3루 찬스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결국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현이 불펜으로 향했다.
* * *
유현은 불펜에서 가볍게 캐치볼을 하며 그라운드의 상황을 신경 썼다.
오늘, 유현은 등판을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가 불펜에 와서 캐치볼을 하고 있는 건, 불펜에서의 무력시위가 그 자체만으로도 상대 팀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는 좋은 작전이기 때문이었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쓰일 수밖에 없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유현이 정말로 마운드에 올라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전에 1점이라도 더 뽑아놔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타자들은 조급해지고, 조금 더 공격적으로 타석에 임하게 된다.
딱!
5번 타자가 초구를 건드려 희생 플라이를 만들어냈다. 아웃 카운트 하나와 1득점을 맞바꿨고, 2루 주자가 3루까지 나갔다.
나쁘지 않았지만 좋은 결과도 아니었다.
그 희생 플라이 하나가 흔들리던 세미 제이슨이 다시 안정을 되찾게 만들어줬으니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6번 타자와 7번 타자를 상대로 연속 헛스윙 삼진을 잡아낸 세미 제이슨이 거칠게 가슴팍을 두들기며 포효했다. 내야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유현이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세미 제이슨이 안정을 되찾은 순간, 더 이상 불펜에서 무력시위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네.
‘그러게. 여기서 대량 실점으로 이어졌으면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르는데, 희생 플라이 이후 안정감을 되찾아서 다행이야.’
-2점 차면 나쁘지 않아. 총력전을 펼친다면 충분히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점수야. 게다가 펠컨스는 미래의 주전 3루수께서 정신 나간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시리즈 타율 6할은 진짜 미친 거지.’
-단기전 승리에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했지?
‘에이스와 미친 선수.’
-펠컨스는 둘 다 있네?
‘그럼 이겨야지.’
대전 펠컨스는 1회 말 이후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찬스를 맞이한 상황에서 나온 좋은 타구가 서울 레오파즈의 그물망 수비에 걸려들며 계속해서 아쉬움이 남는 결과를 낳았다.
다행히 서울 레오파즈 또한 세미 제이슨을 상대로 4회 초의 2득점 이후 6회 초까지 추가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세미 제이슨은 6이닝 6피안타 1사사구 13탈삼진 2실점으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제프 듀렛 또한 6회 말까지 마운드를 지키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1회 말에 대량 실점을 한 이후로는 큰 위기를 겪지 않고 호투를 해줬다.
결국에는 불펜 승부로 넘어갔다.
대전 펠컨스와 서울 레오파즈 모두 한 템포 빠른 투수 교체를 가져갔다. 단 1실점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투수들은 전력을 다했다.
2대4의 스코어가 무너진 건 8회 말이었다.
딱!
최수환이 카운트를 잡으려고 들어온 초구 바깥쪽 낮은 슬라이더를 그대로 걷어 올려서 중앙 펜스를 훌쩍 넘겨버린 것이다.
-홈런! 호오오옴런! 최수환 선수가 한국 시리즈 5차전에서도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이 선수, 정말 한국시리즈에서 미친 타격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매 경기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스코어는 2대5! 대전 펠컨스가 다시 격차를 벌립니다!
-대전 펠컨스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면, 누가 MVP가 될지 안 봐도 알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내년에 펠컨스에서 연봉 두둑하게 챙겨줄 것 같습니다.
최수환의 솔로 홈런으로 2대5로 앞서가는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는 수호신 정우연을 마운드에 올렸다. 정우연이 마지막 1이닝을 틀어막고 우승을 확정지어주기를 바랐다.
만일을 대비해서 기용 가능한 불펜투수들이 불펜에서 몸을 풀며 대비를 했다.
2대5의 리드를 잃지 않고 남은 아웃카운트 세 개를 깔끔하게 잡아내 우승을 확정한다.
그것이 대전 펠컨스의 계획이었다.
아웃카운트 두 개는 순조롭게 잡았다.
문제는 2아웃을 잡은 상황에서, 정우연이 안타와 포볼로 1․2루 위기를 자초한 거였다.
송현수 투수코치가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랐다. 투수교체를 단행하지 않고 정우연을 달랬다.
“맞아봐야 동점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던져. 주자 두 명 다 홈에 들어와도 돼. 홈런만 안 맞으면 되니까 최대한 낮게 깔자.”
“알겠습니다, 코치님.”
사실 정우연은 전통적인 의미의 마무리투수와는 거리가 살짝 있는 투수다.
최고 구속 145km.
보통 150km 내외의 강속구 투수들이 마무리투수를 맡는 것과 달리, 정우연은 구위보단 뛰어난 제구와 다양한 구종을 통한 수싸움으로 타자들과의 승부에서 이기는 스타일이다.
문제는 제구가 흔들릴 때다.
아웃카운트 두 개를 손쉽게 잡아냈지만 제구가 베스트 컨디션일 때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결국 2사 이후 1․2루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최대한 낮게, 가운데로만 안 몰리게.
정우연이 팀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초구로 존에서 살짝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던졌다.
딱!
그리고 타자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체인지업을 받아쳤다.
정우연이 고개를 숙였다.
맞는 순간 홈런임을 직감한 것이다.
-오진열 선수가 초구 체인지업을 받아쳤습니다. 타구가 쭉쭉 뻗어갑니다. 큽니다, 커요!
-주자들은 이미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강태영 선수가 다급히 타구를 쫓아가보지만, 잡아내기에는 타구가 너무 큽니다!
중요한 무대에서 치명적인 블론 세이브를 저지르고 말았다. 시즌 43세이브를 수확했지만, 정작 중요한 한국시리즈에서 제 몫을 못하고 동료들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해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홈런을 맞아도 동점이지만, 다 잡은 경기를 놓쳤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은 한 선수는 펜스를 지지대 삼아 거침없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펜스 끝을 살짝 넘어가려고 하는 타구를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쿵!
둔탁한 소리를 내며 추락한 강태영이 두 바퀴를 두른 뒤 대자로 드러누웠다. 힘없이 들어 올린 그의 왼손 글러브 안에는, 펜스를 넘어가야 했던 공이 들어 있었다.
순간의 정적.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이어진 엄청난 환호성이 펠컨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다.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이었다.
-잡았습니다! 잡았습니다! 강태영 선수가 잡았습니다아아아아! 중요한 순간, 말도 안 되는 호수비로 오진열 선수의 홈런을 뺏어냈습니다! 경기가 이렇게 종료됩니다! 최종 스코어는 2대5. 대전 펠컨스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통산 두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을 확정짓습니다!
-선수단이 일제히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옵니다!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네요? 단체로 관중석을 향해 절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승리를 만끽하고 나서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데, 대전 펠컨스 선수들은 일단 감사부터 하고 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선수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선수들보다도 더 간절하게 우승을 염원했을 분들 아닙니까.
-이미 몇몇 선수는 펑펑 울고 있네요. 김태성 선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콧물까지 흘러나왔습니다. 2001년에 데뷔해서 첫 우승이니, 저렇게 감격할 만도 합니다.
-오늘은 마음껏 울어도 됩니다. 대전 펠컨스 선수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우승이 확정된 그 순간.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샴페인을 터트리는 대신 그라운드에 모여 관중석을 향해 수 차례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나서야 샴페인을 터트리고 우승 세레모니를 펼쳤다. 친정팀을 우승으로 이끈 안용석 감독을 헹가래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사랑해요, 펠컨스! 흐어어어엉! 우승해 줘서 고마워요! 내년에도 우승해 줘요!
‘시끄러워. 너 때문에 자꾸 감동이 깨지잖아.’
-울지 마요, 김태성 선수! 울지 마요, 강태영 선수! 내년에 메이저리그 가서 50홈런 때려줘요
‘……아. 수신차단 하고 싶다.’
유현은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적잖게 감동했지만,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미친 듯이 우는 땅의 정령 때문에 선수들과 함께 감동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한국 시리즈 MVP는 매 경기 홈런과 장타를 터트리며 한국 시리즈에서 무려 6할 1푼 9리의 타율을 기록한 최수환이 선정됐다. 2승을 기록한 유현은 최수환과 제법 큰 표차로 2위에 머물렀다.
그날 밤.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우승을 만끽했다.
구단에서 급하게 준비한 호텔 연회장에서 우승의 기쁨을 즐기며 잊지 못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호텔 스위트룸에서 눈을 뜬 유현의 머리 위에 땅의 정령이 올라타며 말을 걸었다.
-수고했다.
-이제 보상을 받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