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53화 (53/155)

53화 한국시리즈 (3)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 봤을  때,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불펜을 총동원해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내리 세 경기를 모두 잡아낸 뒤, 4차전에서 유현을 마운드에 올려 쐐기를 박고 싶었다. 괜히 한 경기를 내줘서 서울 레오파즈가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선발투수 김용우가 5~6회까지 잘 막아 주고, 그 사이 타자들이 승리에 필요한 수준의 득점 지원을 해 준 다음, 불펜투수들을 투입해서 리드를 이어 나가는 최고의 그림을 꿈꿨지만…….

경기는 대전 펠컨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단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계획대로 됐다.

김용우가 6회 초까지 4피안타 2사사구 6탈삼진 2실점으로 서울 레오파즈의 타선을 잘 틀어막은 상황에서, 타선은 최수환의 홈런과 2루타를 앞세워 4점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7회 초에 일어났다.

플레이오프와 달리 불펜 투수로 투입된 윤기준이 4안타를 허용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이 대전 펠컨스의 마운드를 초토화시켰다.

7회부터 9회까지 무려 8실점.

그럼에도 대전 펠컨스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수환의 안타에 이은 강태영의 2점 홈런, 하위 타순에서의 연속 안타로 차곡차곡 점수를 쫓아가려 노력했다.

9회 말에도 1사 만루 찬스를 만들며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기에는 단 1점이 모자랐다.

-서울 레오파즈가 대전 펠컨스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치고 마침내 1승을 챙기는 데에 성공합니다! 시리즈 전적 1승 2패, 아직은 어떤 팀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지 알 수 없습니다!

-서울 레오파즈가 이기긴 했지만 대전 펠컨스의 저력은 정말 엄청난 것 같습니다. 한 점 차이까지 좁혀진 순간,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겁니다.

-4차전은 에이스들의 리턴 매치입니다. 어느 팀이 웃을지, 내일 경기를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최종 스코어는 10대9.

서울 레오파즈가 3차전을 가져가며 1승 2패로 추격을 시작했다.

* * *

한국시리즈 4차전 선발 등판을 앞둔 유현이 일찌감치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영석과 지석한,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4차전에서 사용할 볼 배합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코칭스태프가 유현에게 원하는 바는 명확했다.

1승.

가장 확실한 카드를 선발로 내보내서 1승을 추가해, 시리즈 전적 3승 1패를 만들고 5차전에서 총력전을 펼쳐 우승을 확정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시작된 1회 초.

[유현! 유현! 유현!]

홈 팬들의 열렬한 환호성을 들으며 유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연습 투구를 몇 차례 한 뒤 지석한과 대화를 나눴다.

“컨디션 괜찮은 거 같아.”

“오늘 공 좋습니다, 선배님.”

“오케이. 그럼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가자.”

“넵. 맡겨만 주십시오.”

다행히 유현의 컨디션이 좋았다.

덕분에 지석한은 회의 당시 이야기했던 대로 이상적인 볼 배합을 가져갈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

유현은 우타자를 상대로 초구 투심 패스트볼을 바깥쪽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2구째.

초구를 지켜보았던 타자가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유현이 던진 공은 타자의 배트 안쪽을 파고들었다.

빠각!

[하나!]

배트가 두 동강이 나며 힘없이 흘러간 유격수 앞 땅볼이 아웃카운트가 됐다.

서울 레오파즈는 1차전처럼 유현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우타자 일색의 라인업을 준비했다. 9명 중 무려 7명이 우타자일 정도로 유현을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 내려면 그나마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 낫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는 백업 선수들마저도 주전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주는 서울 레오파즈 특유의 화수분 야구가 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정규 시즌에서는 대부분 이 전략들이 먹혔다.

상대 선발투수의 성향에 따라 선발 라인업을 구성하고,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타 작전으로 제법 많은 이득을 보았다.

문제는…….

‘이야. 커터 잘 들어가네. 오늘 컨디션 장난 아닌데?’

-이렇게 된 이상 오늘 배트 한번 신명나게 박살내 봐. 타자들 배트 줄줄이 박살 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한 경기 최다 배트 브레이커 기록이 몇 개인지 알아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은데.'

-호오. 좋은 아이디어다.

우타자 일색의 라인업이 유현을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 낼 확률이 높은 건 맞지만 그나마도 턱없이 낮았고, 무엇보다 오늘 유현의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몸 쪽으로 커터가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다.

우타자들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공략하기 어려운 구종인데, 첫 타자를 상대할 때부터 배트 안쪽을 기가 막히게 파고들 정도로 제구까지 좋았다.

게다가 1차전과 달리 오늘의 유현은 투구 수 제한이 없었다.

불펜을 아끼고 유현이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해 주는 것, 그렇게 해서 확실한 1승을 챙겨 시리즈 전적 3승 1패를 만들고 남은 경기에서 총력전을 펼치는 게 코칭스태프의 목적이었으니까.

투구 수 제한이 없으니 맞춰 잡을 필요가 없어졌고, 조금 더 제구에 신경 쓰며 타자들을 압도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서울 레오파즈의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단 하나의 안타만 만들어 낸 채 7회 초까지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기만 했다.

* * *

1차전 이후.

안용석 감독은 유현의 기용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플레이오프처럼 불펜으로 투입할지, 그게 아니라면 4차전에 선발 투수로 올릴지 장고를 거듭했다.

결국 안용석 감독의 선택은 선발 투수였다.

타선의 득점 지원이 넉넉하지 않다고 판단됐다면, 그리고 불펜이 믿음직하지 못하다면 유현을 선발이 아니라 불펜으로 기용했을 것이다. 리드를 잡은 박빙 경기에서 실점 위기를 맞이했을 때, 유현만큼 안정적으로 이닝을 틀어막아 줄 투수는 없으니까.

한국시리즈 내내 대전 펠컨스의 방망이는 뜨거웠다.

3차전에서도 1점 차까지 맹추격을 하며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불펜이 3차전에서 대량 실점하긴 했지만 윤기준이 흔들린 게 가장 컸고, 믿을맨인 김정수와 이재왕을 투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3차전을 내주긴 했지만 정석적으로 운용을 하면 4차전에서는 손쉽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존재했다.

그리고 경기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한국시리즈 4차전 서울 레오파즈의 선발인 조나단 린도어는 좋은 투수다. 이닝을 최대한 많이 소화하면서 퀄리티 스타트를 꾸준히 해준

페넌트레이스 1위 팀의 에이스 투수였으니까.

문제는 레오파즈 킬러 최수환과 4년 연속 50홈런을 기록한 강태영의 컨디션이 미쳐 있다는 거였다. 서로 한국시리즈 MVP 경쟁을 하듯이 장타를 쏟아내며 계속해서 조나단 린도어를 대량 실점 위기로 몰아세웠다.

결과적으로 조나단 린도어는 6이닝 3실점 퀄리티 스타트를 한 채 임무를 끝마쳤다. 매 이닝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자랑하며 자신이 왜 레오파즈의 에이스인지를 몸소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조나단 린도어가 내려간 7회 말.

대전 펠컨스 타자들이 유현에게 확실한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서 힘을 내기 시작했다. 펠릭스 곤잘레스부터 시작한 타선이 2루타에 이은 두 타자 연속 포볼로 천금 같은 무사 만루 찬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포수 지석한의 타석.

플레이오프부터 계속 주전으로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기 때문일까?

타격이 다소 주춤한 지석한을 대신해서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가 대타 작전을 지시했다.

차영석이 배트를 들고 나왔다.

‘후우…….’

타석에 들어선 차영석은 심호흡을 했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무사 만루 상황에서 멘탈이 반쯤 나가 있을 투수를 상대로 어떻게 해야 팀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평생을 한 팀을 위해 뛰다가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생애 두 번째 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적을 하자마자 시즌 후 은퇴를 할 거라 선언했다.

선수 생활에는 큰 미련이 없었다.

인천 그리핀스에서 뛰며 우승 반지도 몇 개 끼워 봤고, FA 대박을 통해 제법 많은 돈도 벌었으며, 그리핀스 전담 아나운서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하지 않았던가.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다.

다만…….

자신의 프로 두 번째 팀을 위해, 암흑기를 겪으며 패배 의식에 짙어 있던 선수들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도움을 주고 싶었다. 대타건 백업이건 주전이건 가리지 않고 팀이 원하는 포지션이라며 뭐든지 소화했다.

자신과 띠동갑 이상 차이나는 젊은 포수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 또한 나름 재미였다.

페넌트레이스가 끝난 이후.

차영석은 프런트로부터 코치 제안을 받았다.

시즌 후 해외 연수를 다녀와 2군에서 베터리 코치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을 수락하며 포스트시즌에서는 포수 마스크를 쓰는 대신 지석한의 볼 배합을 돕고 팀이 원하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사 만루 상황.

대타가 노려야 할 건 무엇일까?

안타? 포볼? 몸에 맞는 공?

어떻게든 출루를 하기만 하면 득점으로 이어지니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점짜리 선택지인 것도 아니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대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딱!

-차영석 선수 초구 슬라이더를 있는 힘껏 당겨 칩니다. 타구가 쭉쭉 뻗어갑니다. 넘어갑니다! 넘어갔어요! 차영석 선수의 만루 홈런! 대전 펠컨스가 대타 작전을 통해 쐐기를 박습니다!

-이게 바로 베테랑의 품격입니다. 팀이 원할 때 필요한 상황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주는 것. 아무래도 2018시즌 2차 드래프트의 최대 수혜자는 펠컨스가 되는 모양새입니다.

노림수를 통한 적극적인 스윙, 그리고 큰 거 한 방.

2018시즌 기록한 13개의 홈런 중 대타로 10개를 기록한 베테랑 포수가, 초구 슬라이더를 공략하며 만루 홈런을 만들어 냈다.

살짝 몰린 슬라이더가 얻어맞는 그 순간.

투수는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냥 고의 사구로 거르더라도 정신 나간 대타 성공률을 자랑하는 베테랑 포수를 피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스코어는 7대0.

대전 펠컨스가 4차전 승부의 쐐기를 박았다.

* * *

타자들이 득점을 만들어 주는 것과 상관없이, 유현은 1회부터 9회까지 시종일관 같은 스타일의 피칭을 이어 나갔다. 경기 중에도 상황에 따라 피칭 스타일에 변화를 주며 타자들을 괴롭히던 평소의 모습을 생각하면, 한국 시리즈 1차전과 4차전에서 경기 중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주지 않은 건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현은 변화를 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변화를 줄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게 옳았다.

1차전에서는 맞춰 잡기를 통한 투구 수 관리가 목적이었다면, 4차전에서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혼자 묵묵히 마운드를 지키는 게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커터가 제일 중요했다.

우타자들의 악몽, 우타자들을 상대로 정신 나간 위력을 발휘하는 이 구종을 제대로 말을 듣게 만드는 게 4차전 승부의 관건이었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이날 유현의 공은 타자들에게 절망을 심어 줬다.

배트 안쪽을 귀신같이 파고드는 커터에 타자들은 대처법을 찾지 못했고, 주야장천 땅볼을 양산해 내며 끌려 다니기만 했다. 거기에 잊을 만하면 배트를 부러트리는 모습까지 보여 줬다. 시즌 내내 많은 호투를 했지만, 오늘처럼 커터가 잘 들어가는 날은 없었다.

9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

115구를 투구하며 유현이 받아든 한국 시리즈 4차전 성적이었다.

그나마 허용한 안타 하나도 행운의 내야 안타임을 감안했을 때, 3차전에서 활활 타오른 서울 레오파즈의 타선에 찬물을 제대로 들이부운 최고의 피칭임이 분명했다.

경기가 끝난 뒤.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며 유현은 안 그래도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있을 서울 레오파즈 선수단에게 다시 한 번 절망을 심어 줬다.

“이제 딱 1승 남았습니다. 그 1승을 위해 팀이 원할 때 언제든지 마운드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괜찮습니다. 팀이 원한다면 불펜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유현이 다시 한 번 불펜에서의 무력시위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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