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한국시리즈 (2)
7회 말까지 70구.
유현이 기록한 투구 수였다.
안타를 무려 8개나 허용했지만 실점이 단 하나도 없었고, 삼진은 고작 2개를 잡는 데에 그쳤다. 기록만 놓고 보면 위기 관리 능력 덕분에 실점을 허용하지 않은 거지, 타자들이 안타를 만들어 내는 데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하면서 애를 먹었다. 아니, 유현을 상대하기 위해 타석에 설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안타를 때려 내면 뭐하나.
2회 말에 1사 1·2루 찬스를 잡은 걸 제외하면 번번이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6회에도, 그리고 7회에도.
서울 레오파즈는 유현을 상대로 안타를 만들어 냈지만 득점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안타를 만들기 위해 공격 일변도로 나가도,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기 위해 작전을 지시해도 모두 통하지 않았다.
서울 레오파즈가 유현에게 꽁꽁 막히는 사이, 대전 펠컨스 타선이 힘을 냈다.
아니, 정확히는 최수환이 힘을 냈다.
6회 초.
자신에게 찾아온 1사 1루의 찬스에서 2점 홈런을 기록하며 스코어를 7대0으로 벌린 것이다.
조나단 린도어는 무려 117구를 던지며 7회 초까지 마운드를 지켰지만, 이미 7점을 내준 상황에서 승기는 사실상 대전 펠컨스에 넘어간 상태였다.
서울 레오파즈 선수단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유현이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선발투수가 7점을 내준 이상 경기는 사실상 끝났다고, 1차전은 대전 펠컨스에게 내줄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8회 말에 유현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오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1구라도 더 던지게 만들어서 다음 등판을 할 때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자고 각오를 다졌다.
안타 하나라도 더 만들면서 괴롭히자고 생각했지만.
-8회 말. 대전 펠컨스가 투수 교체를 단행합니다. 유현 선수가 7이닝 8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고 내려간 뒤, 이재왕 선수가 마운드를 이어받습니다.
-적절한 교체라고 봅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완투에 연연할 필요가 없거든요. 7이닝 무실점이면 선발투수로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고, 70구면 투구 수 관리까지 완벽합니다. 다음 경기를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교체해 주는 게 맞다고 봅니다.
-서울 레오파즈의 뜨거운 타선을 감안할 때 7점 차면 안심할 수 없긴 합니다만, 이재왕 선수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죠?
-물론입니다. 2018시즌 불펜 WAR 1위 선수를 마운드에 올렸다는 건, 2이닝을 맡기면서 승기를 확실하게 잡겠다는 뜻으로 보면 됩니다.
대전 펠컨스가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유현이 내려가고 두 번째 투수로 이재왕이 올라왔다.
5승 2패 20홀드 2세이브 방어율 1.51.
대전 펠컨스 불펜에서 후반기 최고의 히트 상품이 김정수였다면, 시즌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단연 이재왕이었다.
선발에서 불펜으로 전환한 게 신의 한 수가 된 듯, 압도적인 구위와 안정적인 제구를 바탕으로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불펜투수 중 WAR 1위를 기록한 것만 봐도 이재왕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이재왕은 유현처럼 압도적인 구위를 자랑하는 투수는 아니지만, 2이닝 동안 7점을 만회할 수 있는 그저 그런 투수도 아니다.
최고 구속은 148km에, 슬라이더와 포크볼을 베이스로 가끔씩 체인지업을 섞어 던진다. 그리고 그 공을 존 구석구석 자유자재로 제구할 줄 안다.
특히나 유리한 카운트를 잡은 상황에서 던지는 포크볼은, 존 언저리에서 뚝 떨어지다 보니 예상하는 게 아니라면 배트가 따라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구종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연속 탈삼진.
포크볼-하이 패스트볼-포크볼을 결정구로 사용해서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내며 이재왕이 깔끔하게 8회 말을 마무리했다.
이제 서울 레오파즈에게 남은 공격 기회는 한 번.
딱! 딱!
이재왕이 1아웃을 손쉽게 잡았지만, 이후 두 번 연속 풀카운트에서 안타를 허용하며 1사 1·2루가 되고 말았다. 서울 레오파즈가 아웃카운트 두 개를 남겨놓은 상황에서 끝까지 경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가 이재왕을 다독였다.
“1~2점 내줘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던져. 도망 다니지만 마. 맞아도 너한테 뭐라 할 사람 없어."
남은 아웃카운트는 두 개, 스코어는 7대0.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는 이재왕을 교체할 이유가 없었다. 설사 실점을 허용하더라도 이재왕이 남은 아웃카운트 두 개를 지워 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재왕은 그 믿음에 보답했다.
딱!
2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결정구로 선택한 체인지업을 타자가 공략했지만, 유격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가는 땅볼이 되고 말았다.
불규칙 바운드가 형성되며 수비하기 어려운 타구였지만, 유격수 하지성이 안정적으로 잡아내며 깔끔한 병살타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유격수! 타구가 유격수 방향으로 가면서 6-4-3 병살타가 나옵니다! 게임 셋! 대전 펠컨스가 한국 시리즈 1차전을 승리로 가져갑니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병살타의 ‘ㅂ’만 들어도 진저리가 날 겁니다. 한 경기에서 무려 병살타 6개를 기록했으니까요.
-안타 개수는 두 팀이 똑같았지만, 최종 스코어는 7대0입니다.
-득점 찬스에서 계속해서 흐름이 끊기는데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죠. 적어도 오늘 경기만 놓고 보면, 서울 레오파즈는 이길 자격이 없었습니다.
병살타가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6개다.
KBO리그 한 경기 최다 병살타 타이 기록이 무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나왔다. 두 팀이 안타를 똑같이 8개 기록했음에도 한 팀은 7점을 쥐어짰고, 한 팀은 단 1점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최악의 하루였고,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는 투타 모두 완벽하게 계획대로 된 경기였다.
경기가 끝난 뒤.
다시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온 땅의 정령이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 너무 편했다.
‘경기가 좀 싱거웠지?’
-실전 감각이 떨어진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맥없이 무너지더라. 계기가 없으면 내일 경기도 아마 감을 못 잡을 것 같은데?
‘그럼 우린 내일 경기까지 잡아야겠네.’
-무조건 그래야지. 그러려고 이재왕을 제외한 불펜투수들을 아낀 거니까.
* * *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유현은 그라운드 볼러의 진수를 보여 줬다. 출루를 허용하더라도 귀신같이 병살타를 잡아내며 의욕 넘치던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을 힘 빠지게 만들었다.
병살타 6개.
최악의 경기를 펼친 서울 레오파즈의 감독은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경기였으며, 2차전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팬들에게 죄송하다는 짧은 인터뷰를 끝으로 잠실 베이스볼 파크를 떠났다.
한국시리즈 2차전.
대전 펠컨스와 서울 레오파즈는 각각 외국인 투수 세미 제이슨과 제프 듀렛을 선발로 예고했다.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확정지은 리그 최고의 탈삼진 머신 세미 제이슨과, 시즌 18승을 수확했지만 경기당 평균 5.1이닝을 소화한 게 단점으로 꼽히며 시즌 막바지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여 줬던 제프 듀렛의 맞대결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두 선수 모두 숙제를 떠안고 마운드에 올랐다.
세미 제이슨은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보여 준 최악투를 만회해야 한다는 목표가, 제프 듀렛은 시즌 막바지의 부진을 털어내고 전반기 방어율 2.35를 기록했을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일단 시작은 두 선수 모두 좋지 않았다.
대전 펠컨스는 제프 듀렛을 상대로 2번 타자 겸 지명타자 최수환이 솔로 홈런을 때려 내며 선취점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어진 1회 말.
서울 레오파즈가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경기 초반 제구가 잡히지 않은 세미 제이슨을 상대로 안타에 이은 포볼로 연속 출루를 한 뒤, 행운의 내야 안타까지 더해지며 무사 만루 찬스를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동시에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통역을 통해서 세미 제이슨에게 뜻을 전했다.
제구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오늘 구위 좋으니까 한가운데로 몰리지만 않으면 충분히 타자들을 잡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사 만루 상황.
최악의 실점 위기에서 세미 제이슨은 희생 플라이로 1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무사 만루가 1사 1·3루가 되며 여전한 실점 위기 상황임에도, 무사 만루일 때와는 달리 세미 제이슨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사실 방금 전에는 몸 쪽으로 붙이려 했지만 살짝 몰리는 포심 패스트볼을 타자가 쳐서 희생 플라이가 됐다. 장타가 될 법한 코스였지만 구위에서 밀리며 타구가 원하는 대로 쭉쭉 뻗어 나가지 못했다.
덕분에 세미 제이슨이 자신감을 얻었다.
구위가 좋다고 한 송현수 투수코치의 말을 믿고 과감하게 승부를 했다.
체인지업이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흘러가는 땅볼이 되며 추가 실점을 하긴 했지만, 2루에서 주자를 잡아내며 2아웃을 만들었다.
뒤이어 삼구삼진을 잡아내며 힘겨웠던 1회 말을 어렵사리 매듭지었다.
-대전 펠컨스가 무사 만루 위기에서 2실점만을 허용한 채 이닝을 틀어막았습니다. 남는 장사라고 봐야 할까요?
-제가 봤을 땐 충분히 남는 장사입니다. 무사 만루를 허용할 때만 하더라도 세미 제이슨 선수의 제구가 흔들리는 게 눈에 보였는데, 희생 플라이 이후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대량 실점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점수만 허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선 아쉬움이 남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고작 2점으로 승리를 확신하기에는 대전 펠컨스의 타선이 매섭거든요.
무사 만루 상황에서 2실점.
그리고 그 2점은 세미 제이슨이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에게 내준 마지막 점수였다.
2회부터 세미 제이슨은 안정감을 되찾았다.
아니, 안정감을 되찾은 수준을 넘어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을 압도했다. 8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며 서울 레오파즈 타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7회까지 111구를 투구하며 무려 13탈삼진을 잡아낼 정도로 구위가 좋았고, 1회 이후로는 단 1실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서울 레오파즈의 선발투수 제프 듀렛 또한 대량 실점의 위기를 자초하지 않은 채 호투를 이어 나갔다.
문제는 최수환이었다.
1회 초에는 솔로 홈런으로 선제 득점을 올리더니, 선두타자로 나온 4회 초에는 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며 동점을 만든 것이다.
결국 6회 초.
주자가 없음에도 최수환에게 대놓고 빠지는 볼을 던지며 포볼을 허용한 뒤, 강태영에게 2루타를 맞으며 1실점을 더해졌다.
7이닝 4피안타 2피홈런 3실점.
6피안타를 허용했음에도 2실점으로 그친 세미 제이슨과 달리, 제프 듀렛의 입장에선 레오파즈 킬러 최수환에게 애를 먹은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3대2로 앞서나간 채 7회 말이 끝난 순간.
유현은 땅의 정령과 대화를 나눴다.
‘끝난 거 같지?’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너 하는 게 꼭 이미 집에 가서 불화산 치킨 몇 마리 박살 내고 소파에 드러누워 배 두드리는 아저씨 같다? 우리가 오늘 이길 거라고 봐?’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대량 실점을 한 세미 제이슨이 오늘 경기에서 무너질 줄 알았는데 7이닝 2실점으로 잘 버텨 줬잖아. 그럼 끝난 거야. 설사 동점을 허용해서 연장전을 가더라도 결국 펠컨스가 이길 거라고 본다.
세미 제이슨이 마운드에서 내려간 뒤,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는 김정수-정우연 콤비를 차례대로 등판시켜서 경기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김정수가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고 마운드를 넘긴 9회 말, 정우연이 2사 2·3루 위기를 허용하긴 했지만 풀카운트까지 가는 승부 끝에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며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게임 셋. 대전 펠컨스가 3대2로 승리하며 원정 2연전을 싹쓸이합니다. 이제 99년도에 우승을 맛보았던 약속의 땅 대전으로 내려갑니다.
-펠컨스 입장에선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싶지 않을 겁니다. 레오파즈 입장에서 봤을 때는 3차전에서 타격이 살아나며 반격을 하고 싶을 겁니다. 어느 팀이 이기건 재밌는 경기가 될 거라 믿습니다.
-펠컨스의 응원가가 잠실 베이스볼 파크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여기가 꼭 홈인 것 같네요.
2차전 승리가 확정되는 그 순간.
대전 펠컨스 팬들이 기립한 채 어깨동무를 하고서 육성응원을 시작했다. 선수단이 떠나갈 때까지 목놓아 응원하며 우승을 염원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진짜 행복합니다~ 펠컨스라 행복합니다~]
우승 트로피까지 남은 건 2승.
대전 펠컨스가 원정 2승이라는 최고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낸 채 대전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