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한국시리즈 (1)
서울 레오파즈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페넌트레이스 종료 이후 휴식을 취하다가 남해에 캠프를 차렸다. 남해에서 자체 청백전을 치르며 선수단의 컨디션 관리에 전념했다.
동시에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팀들의 전력 분석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 그중 서울 레오파즈가 가장 많이 분석하려 노력한 팀은 대전 펠컨스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며 유현이었다.
전력상 대전 펠컨스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현.
시즌 방어율 0.48을 기록한 괴물.
이 괴물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한국시리즈 우승은 힘들다는 게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플레이오프에서 세미 제이슨이 무너지며 2차전을 내주긴 했지만, 결국에는 예상했던 대로 큰 반전 없이 대전 펠컨스가 시리즈 전적 3승 1패를 기록하며 4차전에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유현은 엄청난 활약을 했다.
1차전에서의 호투로 1승을 선취했고, 4차전에서의 불펜 투입으로 울산 알바트로스 타선의 흐름을 끊으며 쐐기를 박았다.
만약 유현이 없었다면?
대전 펠컨스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더라도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결국, 유현을 분석하고 공략법을 찾아내는 게 한국시리즈의 판세를 가를 걸로 보였다.
문제는…….
“아니. 이 자식은 무슨 쿠세도 없어?”
“아무리 봐도 좀처럼 나오는 게 없습니다. 전반기까지만 해도 몇몇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싹 다 고쳐서 보이지 않습니다.”
“후반기에 경기를 치르면서 습관을 없앴다는 건데, 이게 말이 돼? 습관을 없애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투수들이 그렇게 개고생을 하겠냐고.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자식이야?”
유현에게는 대부분의 투수들로부터 발견되는 그 흔한 습관조차 찾아보기 힘들다는 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즌 초만 하더라도 습관이 있었다. 몸 쪽과 바깥쪽을 투구할 때 미세한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타자들이 그 약점을 제대로 공략하기도 전에, 어느새 습관을 고쳐버려서 문제지.
그 결과.
지금의 유현에게는 눈에 띄는 습관이나 약점을 찾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미친 괴물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서울 레오파즈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채로 한국시리즈를 맞이하게 됐다.
시즌 내내 유현을 상대하는 대부분의 팀이 그러했듯, 서울 레오파즈의 코칭스태프와 전력분석팀이 타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기다리다가 삼진 당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노림수를 가지고 스윙을 해라.
* * *
땅의 정령이 안용석 감독의 머리 위로 올라가 편한 자세로 몸을 납작 움츠렸다.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땅의 정령은 유현의 머리 위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수시로 조언을 했지만, 유현이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한 이후로는 조언이 대폭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조언보다는 순수하게 경기를 지켜보며 잡담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오늘은 아예 유현의 머리 위를 떠나 안용석 감독의 머리 위에서 편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마운드에 오른 지금의 유현에게는 조언을 해줘야 할 부분이 딱히 보이지 않았으니까.
선두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는 순간.
유현은 신기하리만큼 가슴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게 꿈이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차분해졌다.
땅의 정령은 늘 강조했다.
마운드 위에서 절대로 흥분하지 말라고, 항상 냉정함을 유지하며 계산한 대로 투구하라고.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했던 심호흡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유현의 삽시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팡!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몸 쪽 높은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과감하게 찔러 넣어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은 157km였다.
많은 타자들이 몸 쪽 높은 코스에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끝끝내 몸 쪽 높은 코스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은퇴한다.
게다가 상당수의 타자들은 150km 이상의 빠른 공에 약점을 보이곤 한다.
따라서 투수가 150km 이상의 빠른 공으로 몸 쪽 높은 코스를 제대로 공략할 수 있다면 이는 곧 엄청난 무기가 된다.
그리고 유현은 그것이 가능한 투수였다.
심지어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은 150km 중반대에, 수직 무브먼트가 너무 좋아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공이 뜨는 것처럼 보인다.
몸 쪽으로 들어오는 157km짜리 포심 패스트볼에 움찔하지 않는 타자가 몇 명이나 될까?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였다.
머릿속으로는 맞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공이 떠오르는 걸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자들이 그러했듯, 서울 레오파즈 또한 유현의 몸 쪽 코스 공략에 움찔하거나 몸을 빼는 전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울산 알바트로스와 서울 레오파즈가 다른 점이 있다면, 유현을 상대로 1회 말부터 안타를 만들어 냈다는 거다.
2회 말에도, 3회 말에도, 그리고 이어진 4회 말에도 서울 레오파즈는 유현을 상대로 안타를 만들어 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서울 레오파즈의 타격코치는 타자들에게 적극적인 스윙을 주문했다. 유현을 마운드에서 일찍 끌어내리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며 자신감이라도 잃지 말라는 취지에서였다.
놀랍게도 이 지시가 효과를 보았다.
유현으로선 보기 드물게 4회 말까지 매 이닝 안타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4회 말.
선두타자에게 좌전 안타를 맞으며 이날의 5번째 안타를 허용한 유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서울 레오파즈의 젊은 타자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좋아 할 수 있어!”
“오늘 유현의 제구가 확실히 별로야. 구위는 괜찮지만 계속 살짝 몰려. 초구 이후로는 몸쪽 꽉 찬 코스로도 안 던지고 있잖아. 그만큼 제구에 자신이 없다는 거야.”
“크게 욕심내지 말고 1점씩 따라가는 걸 목표로 하자. 유현을 마운드에서 일찍 끌어내릴 수 있다면 오늘 경기, 어떻게 될지 몰라.”
확실히 오늘의 유현은 평소와 뭔가 달랐다.
철저하게 보더라인 피칭을 하던 이전 등판 경기들과는 달리, 모든 공이 존 안쪽으로 살짝 몰렸다. 실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략이 불가능한 까다로운 코스도 아니었다.
서울 레오파즈의 젊은 타자들은 평소보다 타이밍을 빨리 가져가는 적극적인 스윙으로 유현에게 계속해서 안타를 만들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득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찬스를 잡으며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문제는…….
-이야. 잘 속는다, 잘 속아. 슬슬 베테랑들은 눈치를 챌 법도 한데 말이야.
서울 레오파즈 타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가시적인 성과는, 사실 유현이 의도한 결과였다.
* * *
-아아아! 여기서 병살타가 나옵니다! 몸쪽으로 파고든 커터를 이용해 6-4-3병살타를 만들어 내며 유현 선수가 다시 한 번 위기를 벗어납니다! 오늘만 병살타를 3개째 유도하고 있습니다! 유현 선수, 위기관리 능력이 정말 뛰어난데요?
2회 말에 한 번, 그리고 3회 말에 한 번, 심지어는 4회 말에도 다시 한 번.
3이닝 연속으로 나온 병살타로 인해 공격의 흐름이 끊겼을 즈음, 대전 펠컨스 투수 출신으로 영구결번이 된 해설위원이 가장 먼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2회 말부터 느끼고 있었던 묘한 기분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제 생각에는 유현 선수가 일부러 안타를 허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안타를 허용한다고요?
-네.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위해서 장타는 안 나오되 안타를 허용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코스로 투구하는 것 같습니다. 범타가 나오면 좋고, 안타를 허용하더라도 병살타를 유도할 자신이 있으니까 저렇게 던지는 겁니다.
-위험한 방법 아닌가요?
-위험하지만 투구 수 관리를 하기에는 분명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여환진 선수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저런 식으로 맞춰 잡는 피칭을 즐겨했습니다. 설사 1~2실점을 하더라도, 긴 이닝을 소화하며 팀에 승리를 안길 수 있으니까요. 핵심은 장타를 허용하지 않는 겁니다.
-유현 선수가 안타를 다섯 개 허용하면서 장타가 하나도 없었던 걸 감안하면…….
-네. 제대로 맞춰 잡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랬다.
유현이 계속해서 안타를 허용한 건 제구가 안 돼서 공이 몰리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짝 존 안쪽으로 몰리는 공을 던져 맞춰 잡는 피칭을 하고 있는 거였다.
범타가 되면 좋고, 안타를 맞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투구했다. 오늘의 구위를 봤을 때 한가운데로만 몰리지 않으면 장타를 허용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한 피칭 스타일이었다.
필요하다면 점수를 내줄 생각 또한 했다.
설사 몇 점을 내주더라도 상관없었다.
실점을 허용하더라도 팀의 승리를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실점하고 최대한 길게 마운드를 지키는 게 오늘 유현의 목표였으니까.
중요한 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거지, 무실점이나 탈삼진을 많이 잡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의 투구 수로 최대한 많은 이닝을 틀어막으며 팀에게 승리를 안기고 싶었다.
이왕이면 불펜투수들도 아끼고 말이다.
예상한 대로 안타가 더러 나왔다.
그리고 유현은 그때마다 몸쪽으로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이용해 귀신같이 병살타를 만들어내며 공격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그쯤 되니 서울 레오파즈 베테랑 타자들은 유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투구하고 있는지, 어째서 계속 안타를 허용하는지를 눈치 챘다.
“저 자식, 일부러 주자가 없을 때는 살짝 몰리게 던지고 있어. 범타가 되면 좋고 안타를 맞더라도 병살타를 잡을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맞아. 처음에는 제구가 흔들리는 줄 알았는데, 병살타 유도할 때마다 제구가 기가 막히게 되는 거 보면 의도하고 던지는 거야.”
“덕분에 안타는 쉽게 만들어 내고 있지만…….”
“득점으로 연결이 안 되는 게 문제지. 젠장.”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병살타 허용 안하고 1점이라도 쥐어짜는 야구를 해야지. 별수 있어?”
“우리도 작전 한 번 제대로 쥐어짜 보자고.”
5회 말.
서울 레오파즈가 다시 한 번 선두타자를 출루시키며 기회를 잡았다.
동시에 벤치에서는 번트 지시가 나왔다.
유현이 맞춰 잡는 피칭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상황에서, 일단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주자를 보낸 뒤에 다시 승부를 할 생각이었다.
딱!
타자가 초구에 번트를 댔다.
3루 선상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타구가 만들어졌고, 1루 주자가 2루 베이스를 밟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문제는…….
번트를 예상하고 유현의 투구와 동시에 앞으로 뛰어 나온 3루수 송영인이, 예상과 달리 재빨리 타구를 잡아 2루로 송구했다는 거였다.
“아웃!”
그리고 결과는 아웃이었다.
1루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기 위해 사용한 번트 작전이, 상대 벤치에 정확히 간파당하며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1구와 아웃 카운트 하나를 교환하고 만 꼴이 됐다.
-아아. 이건 좀 치명적인데요? 서울 레오파즈의 번트 작전이 대전 펠컨스의 벤치에 간파당한 걸로 보입니다.
-안용석 감독은 지난해까지 서울 레오파즈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방금 전 작전을 꿰뚫어 본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경기 전에 안용석 감독과 대화를 나눴는데, 어떤 작전이 나오더라도 모두 다 대처가 가능하다고 자신감 있게 말하더군요. 지금까지의 모습만 놓고 보면 허언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웃카운트 하나를 날렸지만 서울 레오파즈의 코칭스태프를 포기하지 않았다. 번트를 대지 않더라도 1루 주자를 2루로 보낼 수 있는 다른 작전이 남아 있었으니까.
시즌 15도루를 기록한 발 빠른 주자에게 초구부터 도루 지시가 떨어졌다. 허를 찌르는 도루로 2루 베이스를 훔치기를 바랐다.
유현의 투구하자마자 1루 주자가 2루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동시에 지석한이 팔을 옆으로 뺐다.
유현이 던진 포심 패스트볼이 지석한의 미트에 그대로 박혔다. 지석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공을 빼서 2루를 향해 송구했다.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유격수 하지성이 자연 태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송구가 정확했다.
결과는…….
“아웃!”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아웃이었다.
서울 레오파즈의 벤치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하지성의 태그가 1루 주자의 손이 2루 베이스에 닿는 것보다 더 빨랐으니까.
-원심이 유지됩니다! 대전 펠컨스가 피치아웃을 통해 주자를 잡아냈습니다!
-안타깝네요. 타이밍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대전 펠컨스의 배터리에게 제대로 간파당한 게 컸습니다. 이건 초구부터 과감하게 피치 아웃을 한 대전 펠컨스 배터리의 승리입니다.
2아웃을 만든 유현은 다음 타자를 포수 팝플라이로 잡아낸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지석한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쯧쯧. 다 보인다, 다 보여.’
서울 레오파즈의 작전은 너무 뻔했다.
계속해서 병살타로 흐름이 끊기는 상황에서,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기 위해 나올 수 있는 작전이 몇 개나 되겠는가.
번트는 벤치의 지시였지만, 피치 아웃은 유현과 지석한의 합작품이었다. 예상이 맞아 떨어지지 않고 1볼을 내주게 되더라도 아웃카운트를 잡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에 내린 과감한 결정이, 결과적으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만들어냈다.
두 번의 작전 실패로 인해 서울 레오파즈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5회까지 전반전이 끝난 상황.
대전 펠컨스가 확실하게 분위기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