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50화 (50/155)

50화 플레이오프 (5)

강태영, 최수환, 유현.

선수단을 대표해서 미디어데이에 참여하게 된 세 선수가 안용석 감독과 함께 대기실에서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눴다.

다만 안용석 감독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미디어데이는 팬들이 많은 기대를 하는 행사임과 동시에, 자극적인 발언을 한 일부 선수들에게 비난이 쏠리는 행사이기도 하다.

최수환이나 유현은 걱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강태영이었다.

워낙 입담이 좋은 강태영이기에 혹여나 상대 선수들과 기 싸움을 하다가 과격한 발언으로 레오파즈 팬들의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까 걱정됐다.

“태영아. 괜히 도발하고 그러지 마라. 레오파즈 팬들이 물고 늘어지면 피곤한 거 알지?”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 어차피 우리가 이길 건데 쓸데없이 기 싸움을 왜 하겠어요. 그냥 웃으면서 좋게 좋게 넘어갈게요.”

강태영은 자신감이 넘쳤다.

사실 플레이오프를 치르기 전만 하더라도 경기 감각이 살짝 떨어진 상태이다 보니, 기세 좋은 울산 알바트로스를 상대로 5차전까지 가는 벼랑 끝 승부를 예상하고 있었다.

다행히 예상과 달리 4차전에서 한국 시리즈 진출을 확정하며 휴식기간이 길어졌다.

덕분에 컨디션 관리에도 여유가 생겼다.

또한 선수단 전체에 자신감이 붙었다.

강태영을 포함해 상당수의 젊은 선수들은 긴 암흑기로 인해 포스트 시즌 경험이 전무했는데,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경험과 자신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이는 유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한국시리즈 진출을 걱정했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이후를 걱정하진 않았다. 일단 진출만 하면 트로피를 들어 올릴 거라 확신했다.

서울 레오파즈는 강하다.

하지만 후반기에 대전 펠컨스가 보여 준 저력을 생각한다면, 서울 레오파즈를 상대로도 결코 밀리지 않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디어데이?

딱히 도발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준비한 대로만 한다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선 상태에서 도발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반면 서울 레오파즈 선수단은 미디어데이 내내 도발을 했다. 정규 시즌 1위로 한국 시리즈 직행한 팀이기에 가능한 자신감에서 나온 도발이었다.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 시즌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전 펠컨스가 페넌트레이스에서 반전을 보여주긴 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도 그 기세를 이어갈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희 레오파즈가 괜히 정규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 직행은 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대전 펠컨스…… 강팀이죠. 하지만 유현 선수를 빼놓고 보면 그다지…….”

“솔직히 위협이 되지는 않네요.”

“상대전적만 보더라도 알 수 있죠. 저흰 펠컨스 상대로 밀려본 적이 거의 없어요.”

문제는 대전 펠컨스의 선수들이 도발에 전혀 반응을 안 한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한쪽이 도발에 반응하지 않으니 미디어데이 특유의 입담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 지루함을 느꼈는지 땅의 정령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아아암. 재미없어.

‘도발하고 그러면 안 돼. 평화롭게 가야지. 말하는 게 조금 짜증나긴 하지만 어쩌겠어. 감독님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진짜? 3루수 생각은 다른 것 같은데?

강태영과 유현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다만 옆에서 조용히 있던 최수환은, 계속된 서울 레오파즈의 도발을 웃어넘기지 못했다.

“페넌트레이스와 단기전은 다르다? 전력에서 더 우위다? 거 참 이상하네요. 저희 팀에는 50홈런 타자도 있고 20승 투수도 두 명이나 있고, 40세이브 마무리 투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레오파즈전 통산 타율이 4할 5푼이 넘는 저도 있네요? 이래도 저희가 전력에서 밀립니까? 전반기에 서울 레오파즈가 강했던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후반기 승률 1위는 저희 펠컨스였습니다. 전력이 밀린다는 말, 저희보다 약한 팀에게 듣고 있으려니까 솔 기분이 나쁘네요.”

와아아아아!

최수환의 발언과 동시에 미디어데이를 직관하러 온 대전 펠컨스 팬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서울 레오파즈가 전반기 최고 승률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면, 후반기 최고 승률은 대전 펠컨스였다. 특히나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에는 모범적인 신구 조화를 보여 주며 서울 레오파즈를 거세게 추격하지 않았던가.

서울 레오파즈가 조금만 삐끗했더라도 1위와 2위가 바뀌었을지도 모를 만큼, 후반기 대전 펠컨스의 기세는 매서웠다.

물론 페넌트레이스와 단기전은 다르다.

보통 전문가들은 한국 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에이스, 그리고 미친 선수.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지은 정규 시즌 1위 팀의 통합 우승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팀들이 통합 우승을 차지했던 건 아니다.

그리고 에이스와 미친 선수라는 조건만 놓고 보면, 대전 펠컨스가 유리한 게 사실이다.

대전 펠컨스에서는 20승 13홀드를 기록하며 방어율 0.48을 마크한 에이스가 있고, 유독 레오파즈를 상대할 때면 고감도 타격을 보여주는 미친 3루수 또한 존재하니까.

-팩트 폭력 지렸다.

‘그러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레오파즈 선수들이 조금 빈정대듯이 말하긴 했지?’

-조금이 아니라 너무 빈정댔지. 과한 도발은 좋지 않지만, 이럴 때는 한 마디 정도 해줘야지. 당하고 그냥 넘어가면 호구야.

‘흐음. 한 마디라…….’

유현이 슬쩍 안용석 감독을 바라보았다.

안용석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고민하던 유현이 마이크를 잡았다.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유현 선수. 편하게 말씀하세요.”

“전 팀이 원하면 몇 번이 됐건 마운드에 오를 겁니다. 그러니까, 레오파즈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다면 일단 제 공을 공략할 방법부터 찾아와야 할 겁니다. 아. 그게 가능했으면 정규 시즌에 이미 했겠죠.”

유현은 자신이 한국 시리즈에서 최선을 다할 거란 뜻을 전하며, 동시에 서울 레오파즈에게 엄청난 고민을 안겨줬다.

아, 물론.

도발에는 도발로 맞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대전 펠컨스는 유현을, 서울 레오파즈는 17승 6패 방어율 3.21을 기록하며 에이스 역할을 해 준 외국인 투수 조나단 린도어를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예고했다.

에이스와 에이스의 맞대결이지만 유현이 더 우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같은 에이스라고 해도 방어율 0.48과 방어율 3.21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일부 서울 레오파즈 팬들은 조나단 린도어가 이닝을 더 많이 소화했기에 유현보다 팀에 더 많은 공헌을 했고 더 좋은 투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 봐야 6.1이닝 차이인데 말이다.

객관적인 지표들을 놓고 보면 유현은 리그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울산 알바트로스도 서울 레오파즈도, 마운드보다는 타석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 유현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최대한 빨리 마운드에서 내리는 걸 목표로 삼았다.

유현이 마운드에서 내려오더라도 대전 펠컨스 불펜에는 좋은 투수가 많다. 울산 알바트로스가, 서울 레오파즈가 이걸 모를 리가 없다.

문제는 유현을 상대하는 것과 다른 투수를 상대하는 건 느낌 자체가 다르다는 거였다.

양 팀 모두 최선의 라인업을 준비했다.

3할 타자만 무려 6명이 있는 서울 레오파즈의 타선이 주는 위압감이 엄청나긴 했지만, 대전 펠컨스의 타선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2루수 장영학-지명타자 최수환-좌익수 강태영-1루수 김태성-우익수 펠릭스 곤잘레스-중견수 제라드 캠프-3루수 송영인-포수 지석한-유격수 하지성으로 선발 라인업을 구성했다.

또한 주요 상황에서는 2루수 정경우와 포수 차영석을 대타로 기용할 계획을 세웠다.

거기에 불펜의 방어율 또한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3점대를 기록했을 만큼 압도적이다.

애초에 대전 펠컨스의 불펜은 시즌 중 몇 번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팀의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불안정한 선발과 낮은 타율이 고민거리였지.

선발은 유현의 합류와 2년 차를 맞이한 세미 제이슨의 적응 완료, 김용우의 포텐셜 폭발, 윤기준의 안정 등으로 인해 고민거리가 해결됐다.

타격 또한 베테랑 선수들의 자리를 새 얼굴들이 잘 채워 줬고, 외국인 투수 대신 타자를 한 명 더 데려오는 선택이 빛났고, 무엇보다 트레이드로 대려온 최수환이 후반기에 타율 3할 7푼 1리 15홈런 45타점 9도루를 기록하며 맹타를 휘두른 게 팀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

시즌 중 몇 차례나 위기가 찾아왔다.

그때마다 일부 언론과 해설위원들은 대전 펠컨스가 무너질 거라고, 각종 지표를 근거로 순위가 떨어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전 펠컨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외부에서 흔들 때마다 대전 펠컨스는 더욱 단단해졌다. 선수단이 똘똘 뭉친 가운데 1점 더 뽑고 1점 덜 주는 끈끈한 야구를 하며 차곡차곡 승수를 쌓아 나갔다.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 올라왔다.

이제 남은 건 한 계단뿐.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예고된 유현은 일찌감치 잠실 베이스볼 파크에 모습을 드러낸 뒤 몇몇 선수들과 함께 몸을 풀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현의 유니폼 상의가 땀으로 흠뻑 젖었을 즈음, 땅의 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뭐가?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 선수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네가 요즘 들어서 네 번째 구종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통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래. 중요한 등판을 앞두고 있으니까 이쯤 되면 슬슬 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아. 난 또 뭐라고.’

유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번째 구종이 탐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만 보더라도 새 구종을 배울 수 있다면 한층 더 완벽한 피칭을 할 수 있을 게 확실하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하냐면 아니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상관없어. 지금 내 공만으로도 충분해. 한국시리즈 우승하고 네 번째 구종을 보상으로 받아야 기쁘지, 공짜로 받으면 생각보다 별로일 것 같거든.’

-지금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행이네. 한국 시리즈 우승만 해라. 그 즉시 네 번째 구종을 가르쳐 줄 테니까.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팀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국 시리즈 우승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차전과 2차전이 중요했다.

실전 감각이 떨어져 있을 서울 레오파즈를 상대로 1차전과 2차전에서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유현과 세미 제이슨은 3할 타자만 6명이 있는 서울 레오파즈의 뜨거운 타선을 최대한 길게 틀어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행히 1회 초부터 대전 펠컨스의 타선이 유현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작전 수행 능력과 빠른 발을 겸비한 교타자들이 2번을 많이 맡았던 반면, 최근에는 중장거리 타자들이 많이 2번에 서는 편이다. 공격적인 2번 타자는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KBO에서도 트렌드가 됐다.

최수환은 공격적인 2번 타자에 썩 잘 어울리는 타자였다. 특히나 서울 레오파즈를 상대로 타율 4할 5푼 5리를 기록하고 있다는 걸 감안했을 때, 서울 레오파즈의 1선발 조나단 린도어 입장에서는 중심 타선보다 최수환이 더 까다로운 상대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조나단 린도어는 최수환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하지 못했다. 1번 타자 장영학을 포볼로 내보낸 상황에서, 최수환에게 보더라인에서 살짝 빠지는 공을 계속해서 던지며 3볼이 됐다.

좋은 공을 던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4구째.

몸쪽으로 꽉 찬 패스트볼을 던져 어렵사리 1스트라이크 3볼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지만, 5구 째에 안타를 얻어맞으며 무사 1,2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최수환을 넘었더니 그 뒤에는 강태영과 김태성이 있었다.

그때부터 조나단 린도어는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강태영과 김태성에게 어렵게 승부하다 연속 포볼을 허용, 밀어내기로 1실점을 한 상황에서 끝내 펠릭스 곤잘레스에게 만루 홈런까지 맞고 만 것이다.

-호오오오옴런! 펠릭스 곤잘레스 선수의 만루 홈런이 터지며 대전 펠컨스가 격차를 벌립니다! 스코어는 5대0!

-아아아. 이 점수는 큰데요? 조나단 린도어 선수가 1회와 2회에 흔들리는 경향이 강하긴 하지만, 밀어내기에 이은 만루 홈런은 치명적입니다!

-심지어 아직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았어요!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 천만다행이게도 조나단 린도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6번부터 8번 타자를 내리 삼진으로 잡아내며 길었던 이닝을 끝마쳤다.

문제는 이미 5점을 내줬다는 거였다.

경기 초반부터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넉넉한 득점 지원을 해준 타선에게 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후우…….’

-긴장 돼?

‘아니. 너무 들떠서 좀 가라앉히려고.’

-신나서 한가운데로 계속해서 던지지만 않으면 돼.

‘걱정하지 마. 들뜬 마음에 목표를 까먹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믿고 지켜봐.’

-그래? 그럼 난 검은 수염 감독 머리 위에서 경기를 관람할 테니 수고해.

이날, 유현의 목표는 하나였다.

팀이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를 가져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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