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49화 (49/155)

49화 플레이오프 (4)

초구부터 제구 잘 된 157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몸쪽으로 꽉 차게 들어오면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보통 타자들은 움찔하게 된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다. 설사 몸을 빼지 않더라도 저 공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이태건도 마찬가지였다.

몸쪽으로 꽉 차게 들어오는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에 움찔했고, 덕분에 타이밍을 놓치며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저 미친 공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모두 쳐낸다는 생각으로 물고 늘어져야 했다. 노림수를 가지고 들어가면 귀신같이 노리는 공만 피해서 투구하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으니까.

큰 거 하나 노리는 스윙도 나쁘진 않지만 확률이 너무 떨어진다. 가장 현실적인 건 일단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모조리 파울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건드리며 그 과정에서 좋은 타구가 나오기를 바라는 거였다.

2구를 파울로 연결하고 3구째.

바깥쪽으로 빠지는 투심 패스트볼에 배트를 휘둘렀지만 정타가 되지 않았다. 파울을 만들려고 했지만 힘에서 밀리며 유격수 앞으로 힘없이 흘러가는 땅볼이 나오고 말았다.

이태건은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살 수 있어!’

타구가 느려서 유격수 하지성이 앞으로 달려 나와 포구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고, 잘하면 1루에서 승부를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스타트를 일찌감치 끊은 2루 주자는 3루에서 세이프 되는 게 확실했다. 자신만 1루에서 살아남는다면 2사 1․3루의 찬스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태건이 1루 베이스를 밟는 것과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유격수 하지성의 송구가 1루수 김태성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결과는…….

“아웃!”

아웃이었다.

이태건이 더그아웃으로 신호를 보냈다. 울산 알바트로스 더그아웃에서는 곧장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며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전광판을 통해 1루에서의 아웃/세이프 판정과 관련된 영상이 흘러나왔다.

-아아. 이건…….

-미묘하네요. 여러 각도로 봐도 판정을 뒤집을 만한 근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원심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태건 선수의 발이 아주 조금만 더 빨리 들어왔다면 판정을 번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울산 알바트로스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비디오 판독을 통해 원심을 뒤집을 만한 확실한 근거가 나오지 않으면 원심이 유지된다. 판정하기에 미묘한 타이밍이라는 건, 원심이 유지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태건은 1루에서 아웃으로 처리됐고, 울산 알바트로스는 2사 1․3루를 만들 수 있었던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 *

유현에게 막혀 추가 득점 찬스를 놓쳤지만 울산 알바트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8회 말에 유현을 강판시키고 9회에 올라오는 투수에게 승부를 보자.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나가자.

확실한 계획을 가진 채로 8회 초를 맞이했지만…… 8회 말 공격을 맞이하기도 전에 계획이 어긋나고 말았다.

8회 초.

마운드에는 대전 펠컨스에서 트레이드된 이후 울산 알바트로스의 필승조로 자리매김한 베테랑 좌완 투수가 올라왔다.

그의 임무는 추가 실점 없이 팀이 8회 말을 맞이할 수 있도록 아웃카운트 세 개를 깔끔하게 잡아내는 거였다.

일단 아웃카운트 2개는 계획대로 됐다.

좌익수 플라이와 헛스윙 삼진으로 삼진을 잡아내며 9구만에 아웃카운트 두 개를 올렸다.

문제는 2아웃부터였다.

8회 이후 타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역전의 명수 대전 펠컨스가, 2사 이후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전 동료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내야 안타, 중견수 앞 안타, 중앙 펜스를 통하는 2루타, 우익수 앞 안타, 다시 한 번 중앙 펜스를 통하나는 2루타까지.

대전 펠컨스 타선이 5연속 안타로 4득점을 추가로 올리며 스코어가 5대3이었던 스코어가 순식간에 9대3까지 벌어졌다.

울산 알바트로스는 2루타를 맞으며 2실점을 한 순간 투수를 교체했지만, 안타와 2루타로 2실점을 추가 허용하고 말았다 결국 다시 한 번 투수 교체를 한 끝에야 불타오른 대전 펠컨스 타선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아아아. 이건 큰데요! 너무 커요!

-투수 세 명을 투입한 끝에야 불붙은 대전 펠컨스의 타선을 겨우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울산 알바트로스가 6점 차이를 뒤집을 수 있을까요?

-8회 말, 유현 선수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울산 알바트로스 입장에서는 지금 이 상황이 절망적으로 느껴질 것 같습니다.

7회 말의 천금 같은 찬스를 놓친 이후, 울산 알바트로스는 더 이상 추격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포기를 한 건 아니었다.

유현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며 공략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 되면 투구 수라도 늘리겠다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공을 배트에 맞히는 데에 집중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변화를 일으키며 밑으로 가라앉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에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유현이 같은 공으로 2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두 번 연속으로 삼진을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면…….

“스트라이크 아웃!”

자신과 승부를 할 생각이 없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 채고서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을 던져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7회에 3개, 8회에 12개.

유현이 1과 3분의 1이닝 동안 15개의 투구 수를 기록하고서 자신의 임무를 끝마쳤다.

9회 말.

유현을 대신해서 9회에 마운드에 오른 건 대전 펠컨스의 수호신 정우연이었다.

전날 경기에서 세이브를 수확하며 팀의 승리를 지켰던 정우연은, 오늘 경기에서는 세이브 기록과 상관없이 한국 시리즈 진출을 위해 필요한 마지막 아웃카운트 세 개를 지우려고 마운드에 올랐다.

안타 하나를 허용하며 울산 알바트로스가 다시 한 번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나 싶었지만…….

헛스윙 삼진에 이은 5-4-3 병살타로 아웃카운트 세 개가 삽시간에 지워졌다.

-경기 끝! 대전 펠컨스가 3승 1패로 울산 알바트로스를 누르고 서울 레오파즈의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됐습니다!

-서울 레오파즈 입장에서는 대전 펠컨스보다는 울산 알바트로스가 올라오길 바랐을 거 같습니다. 펠컨스가 좀 더 까다로운 상대일 테니까요.

-확실히 지금의 대전 펠컨스는 강합니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 베테랑들이 팀에 합류하면서 전력이 탄탄해졌어요. 대전 펠컨스가 한국시리즈에서도 플레이오프와 같이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정우연이 가슴팍을 툭툭 친 뒤 하늘을 향해 검지를 들어 올리는 세레모니를 하고서, 마운드를 향해 달려오는 포수 지석한과 포옹을 했다.

동시에 대전 펠컨스 선수단이 너 나 할 거 없이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한국시리즈 진출에 대한 기쁨을 몸으로 드러냈다.

특히나 2006년에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이 있는 몇몇 노장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팬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그 누가 예상했을까.

다시 한 번 한국 시리즈에 올라가기 위해 이토록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소리 질러어어어어어어어!

유현의 머리 위에서 내려와 선수들 사이에서 방방 뛰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유현이 피식 웃었다.

‘어째 나보다 네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2006년부터 지금까지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암흑기를 겪으면서 이 순간을 하루에도 몇 번씩 꿈꿨는지 네가 아냐고!

‘네네. 마음껏 즐기세요. 태성 선배는 울컥하신 것 같네. 암흑기에 유독 저평가를 받으며 비난을 많이 받으셨으니 울컥하실 만도 하지.’

-어흐흐흑. 울지 마요, 김태성 선수! 당신은 대전 펠컨스의 살아 있는 전설이에요! 당신이 울면 팬들도 마음이 찢어져요!

‘……울던지 웃던지 하나만 하면 안 되냐?’

-웃픈데 어쩌라고!

유현은 몇몇 선수들과 가볍게 포옹한 뒤,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자 막춤을 추는 걸로 한국 시리즈 진출의 기쁨을 드러냈다.

그렇게 대전 펠컨스가 2006년 이후 무려 12년 만에 한국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 * *

한국 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대전 펠컨스 선수단에게 하루의 휴식이 주어졌다.

대전 펠컨스 선수 중 일부는 휴식일에 맞춰 펠릭스 곤잘레스의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선수단 단합 겸 배불리 먹고 푹 쉬며 쌓인 피로를 떨쳐낼 생각이었다.

고작 네 경기지만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의 부담감은 차원이 다르다. 네 경기를 치르며 다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기에 휴식이 간절했다.

유현은 일찌감치 집에서 나와 땅의 정령과 함께 펠릭스 곤잘레스의 집으로 향했다.

얼마나 운전을 했을까?

펠릭스 곤잘레스의 집에 도착하기까지 20km 정도가 남았을 때, 난데없이 알리사 메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좋은 소식을 전해줬다.

[유현 선수. 저 한국시리즈 보러 갈 거 같아요.]

“정말요?”

[네. 매리너스가 결국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떨어졌잖아요. 그 덕분에 조금 일찍 휴가를 받았어요. 겸사겸사 개정된 포스팅 제도와 관련된 기사를 쓰려고 한국행 티켓 끊었어요. 이제 곧 비행기 탈 테니 내일 도착할 것 같아요.]

“목표는 태영이겠네요.”

[제 목표는 항상 유현 선수인데요? 기사야 강태영 선수 관련해서 쓰긴 하겠지만요.]

“목표가 저라서 좋네요.”

뜬금없는 알리사 메켄의 돌직구에 유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가끔 영상통화를 할 때를 제외하면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서 원거리 연애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유현은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시즌 내내 대한민국을 벗어날 일이 없기도 하고 말이다.

때문에 알리사 메켄과 유현 커플이 택한 방법은, 자신들의 감정을 그때그때 솔직하게 표현하며 꾸준히 애정을 확인하는 거였다.

서로에 대한 호감이 사라지지 않도록 말이다.

유현과 알리사 메켄 커플의 오글거리는 대화를 들으며 땅의 정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커플 지옥 솔로 천국. 커플 지옥 솔로 천국!

‘아 참. 스프링캠프 갔다 와서 암컷 햄스터 한 마리 입양할 건데, 취향이 있으면 미리 말해 줘. 감안해서 입양할 테니까.’

-이이익! 날 모욕하지 마라!

‘커플 만들어 준다 해도 싫다고 하네.’

-언젠가 꼭 복수할 거다. 반드시 복수할 거다.

알리사 메켄과 기분 좋게 통화하고 땅의 정령을 놀리는 사이 유현은 어느새 펠릭스 곤잘레스의 집 앞에 도착했다.

이후 유현과 선수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거실에 한데 모여 레오파즈와 관련된 전력 분석 영상을 보기도 했다.

한참 전력분석을 보던 중, 강태영과 최수환이 한국 시리즈를 앞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으음.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국 시리즈 우승하면 전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겁니다. 그래서 꼭 우승이 필요해요.”

“전 개인 목표는 없고, 일단 펠컨스가 우승하길 바라요. 펠컨스가 제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알바트로스에서 백업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절 선택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제가 왜 레오파즈 킬러라고 불리는지 보여 줄게요.”

“근데 너 플레이오프에서 안타 하나 쳤잖아.”

“아, 선배! 플레이오프는 이상하게 잘 맞은 타구도 아웃돼서 힘들었다니까요! 그래도 마지막 경기에 대타로 나와서 2루타 쳤잖아요! 한국 시리즈는 다를 거예요!”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목표는 똑같았다.

한국시리즈 우승.

팀을 위해서도, 선수 개개인의 커리어를 위해서도 한국시리즈 우승이 반드시 필요했다.

무려 12년 만에 찾아왔고, 앞으로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건 모든 선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다음 날.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하며 컨디션을 조율한 뒤 저녁에 알리사 메켄을 만나려고 했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사 메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국시리즈 끝나고 봐요. 지금은 절 만날 때가 아니라 훈련과 휴식을 병행하며 컨디션을 유지할 때라고 생각해요. 유현 선수가 마운드 위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길 기대할게요.]

알리사 메켄은 현명한 여자였다.

혹여나 자신을 만나는 게 유현의 한국시리즈 준비에 방해가 될까 봐 만남을 한국시리즈 이후로 미루자고 제안했다.

덕분에 유현은 알리사 메켄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한국 시리즈 준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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