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플레이오프 (3)
후반기.
윤기준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더위와 함께 체력이 떨어지며 밸런스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계속 흔들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선발 로테이션을 한 번 거르고 밸런스 찾기에 주력한 뒤에는 어느 정도 좋을 때의 공을 되찾아 시즌 막바지에는 제 몫을 해줬다.
문제는 포스트시즌이었다.
보통 KBO리그의 단기전은 3선발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믿음직한 선발 세 명이 로테이션을 번갈아 소화하며, 4선발과 5선발은 임시로 불펜에 투입해서 투수진을 강화한다.
에이스가 1차전과 4차전에서 선발로 나오고, 상황에 따라 7차전에 불펜 투입되는 상황이 종종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통산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대전 펠컨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내리 이기는 거였다.
1차전과 3차전은 계획대로 됐지만, 2차전에서 세미 제이슨이 난타를 당한 게 뼈아팠다.
분명 컨디션은 좋았고 경기 내내 구위와 제구 모두 나쁘지 않았지만,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자들이 기묘할 정도로 세미 제이슨의 공을 잘 치면서 타격감이 살아나 계획이 꼬였다.
컨디션이 절정에 운까지 따라준 김용우마저도 5이닝 3실점을 하고 마운드를 넘겨야 했을 정도로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의 타격감은 매서웠다.
결국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는 고민 끝에 한국시리즈를 위해 아껴 두려고 했던 윤기준 선발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5차전까지 가면서 체력 소모를 하느니, 4차전에서 기용 가능한 카드를 모두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루 더 휴식을 취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선발 등판이 확정된 윤기준의 컨디션은 좋았다.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한창 좋을 때인 150km까지 올라왔고, 전매특허인 포크볼과 송현수 투구코치로부터 배운 체인지업의 제구가 잘 되면서 효율적으로 타자들을 속였다.
게다가 비장의 무기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윤기준이 선발 등판을 준비하는 동안 유현은…….
“아버지. 저 정말 부상 아니라니까요. 네네. 기준 선배가 컨디션이 좋아서 선발로 나오는 거예요. 상황에 따라 불펜으로 대기할 수도 있어요. 그럼요. 오늘 이겨서 한국시리즈 진출 확정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플레이오프 1차전 직관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신 부모님과 한참을 통화해야만 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태영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응. 오늘 왜 선발 등판 안 하냐고 걱정돼서 전화하셨어. 내가 부상 때문에 등판 못 한다는 이상한 찌라시를 보셨나 봐. 내가 회전근 파열로 수술을 받을 거라 했다는데?”
“하여간 찌라시가 문제야. 난 전에 열흘 동안 2군에 내려가 있으니까 온갖 부상 이야기가 다 나오더라고. 손목, 햄스트링, 종아리, 팔꿈치. 오죽했으면 감독님까지 전화하셔서 진짜로 다친 거 아니냐고 물어보시더라.”
“너 데뷔 이후에 수술한 적 없지 않나?”
“아냐.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그때 수술하긴 했어. 치질 수술이라 문제지.”
“억울할 만도 하네. 치질 수술 했는데 전혀 다른 부위를 다쳤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아님 말고 식으로 기사 쓰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말한다고 들을 양반들이 아니잖아. 그러려니 해야지 뭐 어쩌겠어.”
강태영의 말에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찌라시에 아버지가 불안해하신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화를 낸다 해서 일부 언론들이 자극적인 기사를 안 쓸 것도 아니고, 괜히 난리를 쳐서 기자들과 대립각을 세워봐야 좋을 것도 없는데.
유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등판에 대비해 컨디션을 조율하며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거였다.
* * *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현 대신에 윤기준을 플레이오프 4차전 선발투수로 기용한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시즌 중반과 막바지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때처럼, 아니 그 이상의 피칭을 보여 주며 코칭스태프의 믿음에 확실하게 보답했다.
5회까지 퍼펙트.
단 한 번의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선을 꽁꽁 틀어막은 것이다.
새로 장착한 무기인 유현으로부터 배운 커터로 타자들의 허를 찌른 것이 컸다.
다만 유현의 커터와는 달랐다.
유현은 패스트볼과 같은 폼으로 커터를 구사하는데다가, 땅의 정령의 도움으로 악력을 비롯한 신체 능력을 100퍼센트 활용하는 투구폼을 완성한 덕분에 압도적인 구위를 보여줄 수 있었다.
반면 윤기준은 커터를 슬라이더처럼 던졌다.
구속이 떨어지는 대신 각이 커졌고, 포심 패스트볼과 적절한 구속 차이를 유지하며 헛스윙을 유도하는 걸 주목적으로 삼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위주로 볼 배합을 가져갔고, 체인지업과 포크볼을 간간이 섞어 던지며 수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간 게 좋았다.
그런 윤기준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6회 말.
안타와 이은 볼넷으로 1사 1․2루를 상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첫 위기에 송현수 투수코치와 포수 지석한이 마운드에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불펜에서는 유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 선수! 유현 선수가 불펜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한 번 무력시위를 하나요!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2차전과 3차전에서 불펜투수들을 총동원하며 접전을 치러야만 했죠. 선수들의 피로감 상당할 겁니다.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승부를 5차전까지 끌고 가지 않고 하루라도 더 휴식을 취한 뒤 한국 시리즈를 맞이하고 싶을 겁니다.
-이래서 유현 선수가 1차전에서 82구만 투구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간 걸까요?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점 위기에서 20구 내외로 투구한다고 치면 한국시리즈 1차전이나 2차전에서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라도 큰 부담이 아니라고 봐야죠.
유현은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아니, 정확히는 푸는 시늉만 했다.
전처럼 몸을 푸는 척하면서 가볍게 캐치볼을 몇 번 하는 게 전부였다.
최근 들어 선발 등판에 앞서 불펜 피칭을 생략하며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불펜 피칭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유현의 등판이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스코어는 4대0인 상황.
2점 차 이내로 점수 차이가 좁혀지고 실점 위기 상황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면, 유현의 등판은 없을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이 불펜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무력시위.
시즌 막바지와 마찬가지로 불펜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상대 타자들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리기 위한 작전이었지만…….
딱!
-호오오오옴런! 전광판을 통타하는 대형 홈런! 이성하 선수의 홈런으로 울산 알바트로스가 긴 침묵을 끝내고 추격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스코어는 4대3!
-아아. 윤기주 선수 입장에서는 아쉽겠네요. 포크볼이 잘 떨어졌는데 이성하 선수가 노리고 있었던 게 컸습니다.
2볼 2스크라이크 상황.
윤기준이 결국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스트라이크 존 근처에서 뚝 떨어진 제구 잘 된 포크볼이었지만, 타자가 제대로 노리고 있었던 게 악수로 작용했다.
스코어는 4대3.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턱밑까지 추격을 당하게 됐다.
‘흐음. 오늘은 안 통하네.’
-페넌트레이스랑 포스트시즌은 다르지. 알바트로스 입장에서는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경기니까. 네가 신경 쓰이기는 해도 일단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이 되는 게 당연하지.
‘전략을 바꿔야 하나? 역시 무력시위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뭘 바꿔. 애초에 등판할 생각 하고 있었잖아?
‘기준 선배가 완투승 하면 이대로 무력시위만 하다 퇴근하면 되잖아.’
-그러면 좋겠지만, 슬슬 알바트로스 타자들이 윤기준의 공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어서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어휴. 그럼 뭐 어쩔 수 없이 등판해야지.’
아쉬움이 남는 승부였지만 윤기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2루수 라인 드라이브와 헛스윙 삼진으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아내고서 추가 실점 없이 6회 말을 마무리했다.
이어진 7회 초.
강태영의 솔로 홈런으로 인해 스코어는 5대3, 대전 펠컨스가 다시 점수 차이를 벌렸다.
6회까지 윤기준의 투구 수는 72구.
상황에 따라 완투승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투구 수 관리를 잘한 상태였다.
7회 말에도 다시 마운드에 올라온 윤기준은 고작 4구만 던져서 중견수 플라이와 3루수 땅볼을 유도해 2아웃을 손쉽게 잡아냈다.
문제는 2아웃 상황에서 카운트를 잡으려고 들어간 슬라이더가 통타당하며 2루타를 허용, 다시 한 번 실점 위기를 자초한 거였다.
결국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가 승부수를 꺼내들었다.
“고생했다, 기준아. 잘했어.”
송현수 투수코치가 공을 들고 마운드에 올랐다. 7회 말 2아웃까지 아웃카운트를 잘 잡아낸 윤기준을 격려했다.
그리고 불펜에서는…….
와아아아아!
2018시즌 들어 강태영 다음으로 대전 펠컨스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좌완 파이어볼러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뛰어나왔다.
“부탁한다, 현아.”
“맡겨주십시오, 선배님.”
윤기준이 미소를 지은 채 유현과 주먹을 맞대고서 미련 없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마운드 위에 선 유현은 지석한과 볼 배합에 대해 짧게 대화를 나눈 뒤 연습 투구에 나섰다.
선발 윤기준이 최대한 긴 이닝을 버텨 주고, 2점차 이하의 박빙 승부에서 실점 위기를 맞이하면 유현에게 마운드를 넘긴다.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가 확실한 승리를 위해 준비했던 계획을 실행했다.
* * *
유현은 플레이오프 1차전에도 8회까지 투구했음에도 투구 수를 82구로 조절했다.
삼진은 허를 찌르는 정도에서만 그쳤고,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위주의 보더라인 피칭을 이어가며 땅볼 유도에 집중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결국 4차전에 윤기준의 뒤를 이어 대전 펠컨스의 두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자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1차전에서 유현에게 막혀 무기력하게 지긴 했지만, 2차전에는 세미 제이슨을 확실하게 무너트렸다. 3차전도 패배하긴 했지만 주요 타자들의 타격감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고작 2점 차이다.
베이스가 채워져 있는 상황에서 큰 거 한 방이면 동점이나 역전을 노려볼 수 있는,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 점수 차다.
투수 한 명에게 기가 눌려 창단 두 번째 한국 시리즈를 코앞에 두고서 포기할 순 없었다.
“쫄지 마. 어차피 다 같은 투수야. 세미 제이슨 공도 쳤잖아. 저 자식 공도 칠 수 있어.”
“김정수도 잘한다 잘한다 했는데 결국 2차전에서 홈런 맞았고, 오늘 윤기준도 컨디션 좋았는데 쓰리런 맞았잖아. 유현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다고.”
“유현만 무너트리면 5차전에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어떻게든 동점만 만들어보자.”
“알바트로스 파이팅!”
울산 알바트로스 코칭스태프가 승부수를 띄웠다. 좌타자 타석에서 베테랑 우타자 이태건을 대타로 기용한 것이다.
유현은 좌타자건 우타자건 신경 쓰지 않고 강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타자 상대로 피안타율이 5푼 정도 높긴 했다.
1할과 1할 5푼 차이라서 공략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확률이 높은 쪽을 공략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싸움에 능한 베테랑들은 부진하다가도 대타로 타석에 서면 제 몫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태건은 이번 시즌 선발로 출장하지 못할 때면 주요 승부처에서 대타로 기용되어 중요한 안타와 홈런을 더러 만들어내곤 했었다.
대타 성공률 5할, 결승타 7회.
이태건의 존재는 후반기가 시작하자마자 불펜 난조로 무너질 뻔했던 울산 알바트로스가 시즌 막바지까지 꾸역꾸역 버티며 순위 싸움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
때문에 울산 알바트로스 코칭스태프는 바랐다.
3차전에 대전 펠컨스가 차영석을 기용해서 재미를 봤던 것처럼, 이태건이 유현을 상대로 추격의 적시타를 때려 주기를 말이다.
하지만…….
팡!
“스트라이크!”
유현이 몸쪽 꽉 찬 157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으며 울산 알바트로스 코칭스태프에게 답했다.
추격 따위 꿈도 꾸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