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47화 (47/155)

47화 플레이오프 (2)

유현은 경기에 앞서 철저하게 전력 분석을 하며 어떤 타자를 상대로 어떤 식으로 승부를 할지 미리 계산하는 스타일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투구를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6구 연속으로 볼을 내준 것도, 박명우를 상대로 초구를 한가운데에 찔러 넣은 것도 모두 철저한 계산 아래 투구한 거였다.

그리고 보통은 한 경기 내내 어떤 스타일로 피칭을 할지 정해놓고 투구를 하는 편이기도 했다.

플레이오프 1차전.

울산 알바트로스의 강타선을 상대로 유현이 준비한 피칭 스타일은, 이른바 ‘난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만 죽어라 던질 테니 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쳐봐라.’였다.

와일드카드, 그리고 준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파트너인 울산 알바트로스가 총 7경기를 치르는 동안 대전 펠컨스는 한국 시리즈 진출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타자들은 컨디션을 점검하면서 상대 투수에 따른 노림수와 타격 스타일을, 투수들은 상대 타자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볼 배합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대전 펠컨스 전력분석팀이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의 약점 아닌 약점을 찾아냈다.

[와일드카드와 준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의 스윙이 전체적으로 커졌다. 타격감이 좋다 보니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장타를 노리고 들어온다.]

그리고 전력분석이 실제로 맞았다.

장타를 노리며 커진 스윙은,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현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유현은 철저하게 보더라인 피칭을 이어 나갔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비중을 반반 수준으로 높였고, 가끔씩 포심 패스트볼을 섞어서 던지는 수준으로 불 배합을 가져 나갔다.

단순한 스타일의 피칭이다.

문제는 유현이 정규 시즌이 끝난 이후로 푹 쉰 상태라 컨디션이 좋다는 것, 반면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자들은 와일드카드를 거쳐 준 플레이오프를 5차전까지 치르고 올라왔기에 상대적으로 지쳐 있다는 거였다.

그 와중에 5차전에서 대량 득점으로 승리를 쟁취하면서 타자들의 스윙이 평소보다 살짝 커져 있는 상태이기까지 했다.

안타보다는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스윙.

사실 유현을 상대하는 입장에서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건 나쁜 선택지가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며 풀 스윙을 해서 홈런을 친 타자도 있지 않았던가.

문제는 일찌감치 스트라이크 존을 파악한 유현이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을 계속해서 던지며 타자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는 거다.

존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155km의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공략해서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내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장타를 노리는 스윙으로는 스윗 스팟에 제대로 맞추는 게 어려웠고, 제대로 맞지 않은 타구는 모두 유현의 구위에 밀려서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물망 수비에 잡히고 말았다.

게다가 유현은 영리하기까지 했다.

타자들이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만을 의식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포심 패스트볼을 몸쪽 높은 코스로 찔러 넣어 헛스윙 삼진을 유도해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 유현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4회 초.

선두타자 이성하가 빠른 발을 이용해 내야 안타를 만들었고, 그 뒤에 불규칙 바운드로 인한 수비 실책성 내야 안타가 추가로 더해지며 순식간에 무사 1․2루의 위기 상황이 만들어졌다.

3번 타자 김현성은 유현을 상대로 번트를 댔다.

상대 투수가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을 이용한 땅볼 유도의 달인인 유현이다. 보내기 번트로 1사 2․3루를 만들어 병살타의 위험을 없애고, 최소 1득점이라도 올려서 추격의 발판을 만들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다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김현성의 보내기 번트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데에 그쳤다.

투구하자마자 재빠르게 몸을 앞으로 움직인 유현이 1루수 방향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공을 잡아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2루로 송구하면서 1루 주자를 잡아낸 것이다.

-아웃! 1루 주자가 2루에서 아웃됩니다! 유현 선수의 깔끔한 수비가 1사 2․3루를 만들려던 울산 알바트로스 벤치의 계획을 어그러트렸습니다. 투구를 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게 주효했습니다.

-방금 전 수비가 유현 선수의 또 다른 장점입니다. 이 선수, 투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수비 실력 또한 일품입니다. 워낙 투구를 잘해서 수비 실력이 티가 안 나긴 하지만요.

-방금 전 수비는 정말 일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타구 판단이 아주 좋았어요!

1사 2․3루를 만들려고 했지만 유현의 호수비로 인해 1사 1․3루가 되고 만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박명우가 유현을 상대하게 됐다.

2스트라이크 2볼.

승부처에서 유현과 지석한 배터리의 선택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박명우의 배트가 크게 헛돌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이 투구를 하자마자 1루 주자가 재빨리 2루를 향해 뛰었다. 포수 지석한은 포구와 동시에 앉은 채로 2루를 향해 송구했다.

그와 동시에 3루에 있던 이성하가 홈플레이트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렸다.

대전 펠컨스가 상대 팀의 허를 찌르며 더러 사용해서 재미를 봤던 더블 스틸 작전을 역으로 울산 알바트로스가 사용한 것이다.

유격수 하지성이 다급히 홈으로 송구했다. 정확한 송구로 3루 주자 이성하의 발이 홈 베이스에 닿기 전에 태그했지만…….

“세이프!”

심판의 판정은 아웃이 아닌 세이프였다.

포수 지석한이 더그아웃을 바라보며 제스쳐를 취했다.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는 곧장 홈에서의 태그 상황에 대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아웃으로 판정이 난다면 그대로 이닝이 끝날 것이고, 세이프로 판정이 난다면 1점을 내준 채 2사 2루 상황에서 이닝이 이어질 터였다.

잠시 후.

전광판을 통해 홈에서의 태그 상황이 팬들에게도 공개가 됐다.

와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원정 팀 응원석이 아닌 홈 팀 응원석에서.

-아. 이건 아웃 같은데요? 전광판을 통해 결과를 확인한 대전 펠컨스 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습니다.

-확실히 지석한 선수의 태그가 더 빨랐습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긴 했는데 송구가 좋았습니다. 유격수 하지성 선수의 송구가 살짝만 늦거나 어긋났어도 태그에 실패했을 겁니다.

비디오 판독 결과가 나왔다.

포수 지석한의 태그가 3루 주자 이성하의 발이 베이스에 닿는 것보다 아슬아슬하게 빨랐다는 게 드러나면서 결국 판정이 번복됐다.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두 개가 사라졌다.

무사 1․2루의 찬스가 무산되는 순간, 유현은 기분 좋게 어퍼컷을 했고 땅의 정령은 유현의 머리 위에서 물개박수를 쳤다.

그리고 VIP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유현의 부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동안 춤을 추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끝났네. 무사 1․2루 찬스가 무산된 건 너무 큰데?

‘응. 끝난 것 같아.’

무사 1․2루는 유현에게도 분명 위기였다.

안타를 허용하지 않더라도 상대 팀의 작전에 따라 실점을 허용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몇 차례 실점을 허용하기도 했다.

번트에 이은 더블 스틸 작전 자체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았다. 발 빠른 주자를 이용해서 허를 찌르기에 괜찮은 작전이었다.

문제는 유현이, 그리고 대전 펠컨스가 울산 알바트로스에서 작전을 시도할 거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현을 상대로 찬스를 잡은 상당수의 팀들이, 안타보다는 작전을 통해서 득점을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무사 1․2루 위기를 벗어나는 순간.

유현은 확신했다.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기선 제압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 * *

4회 초에 찾아온 찬스 이후.

울산 알바트로스는 유현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찬스를 잡지 못한 채 5회부터 8회까지 계속해서 삼자범퇴로 힘없이 물러났다.

땅볼, 수비 쉬프트에 걸린 라인 드라이브, 헛스윙 삼진, 루킹 삼진.

다양한 방법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과정에서 타자들은 유현의 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나름 타이밍이 잘 맞았다 생각하는 공도 구위에 밀리며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는 범타가 되고 말았다.

좀 잘 맞았다 싶은 타구는 수비 시프트가 걸려서 귀신같이 대전 펠컨스 내야수들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갔다.

-울산 알바트로스 선수들의 타구가 좀처럼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네요.

-오늘따라 유현 선수의 구위가 좋다 보니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투구하고 있음에도 좀처럼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무슨 타구가 칠 때마다 내야를 벗어나질 못해요!

-내야에 그물망이라도 쳐놓은 것 같습니다.

플레이오프 1차전.

기선제압이 필요한 경기에서 대전 펠컨스가 승리를 쟁취하는 데에 그리 많은 투수가 필요하지 않았다.

8회까지 82구.

2피안타 1사사구만을 허용하며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를 보여준 유현은, 스코어가 6대0까지 벌어지자 9회에는 김정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유현과 마찬가지로 푹 쉬고 나온 김정수의 구위는 미쳐 있었다. 살짝 뜨는 듯한 무브먼트를 보여주는 포심 패스트볼과, 스트라이크 존에서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의 조화에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자들은 연신 헛스윙을 해댔다.

세 타자 연속 삼진.

대전 펠컨스가 단 두 명의 투수만을 기용하며 플레이오프에서 1승을 선취했다.

* * *

플레이오프 1차전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유현의 원맨쇼였다.

타선이 6득점을 해주긴 했지만, 물이 오른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선을 상대로 8이닝 2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추격 의지 자체를 꺾어버린 게 컸다.

더 무서운 건 8회까지 고작 82구를 던지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는 거다.

8이닝을 소화했음에도 투구 수가 적다는 건, 4차전이나 5차전에 유현이 다시 한 번 선발로 등판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유현을 상대로 팀이 승리를 가져간다?

가능할 수도 있다.

팀의 선발투수가 유현과 마찬가지로 긴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주면서, 불펜투수들도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연장전으로 간다면 말이다.

혹은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스윙으로 운 좋게 홈런을 만들어 내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확률이 낮아서 문제지.

울산 알바트로스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2차전과 3차전을 내리 이기며 2승 1패로 앞서나가는 거였다.

그래야 설사 4차전에서 유현이 나와 패배하더라도 5차전에 승부를 걸 수 있을 테니까.

딱! 딱! 딱!

-백투백투백 홈런! 큽니다, 커요!

-전날 유현 선수의 구위에 번번이 막혔던 울산 알바트로스의 중심 타선이 1회 초부터 세미 제이슨 선수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미 제이슨 선수의 공도 장난이 아닌데 1회 초부터 난타를 당하네요!

-이건 그냥 팀 상성 말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알바트로스 선수들이 세미 제이슨 선수에게 강한 겁니다. 네.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일단 2차전은 1회 초부터 울산 알바트로스가 원하는 대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지난 시즌부터 상대전적이 좋았던 세미 제이슨을 상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승부한 게 주효했다. 1회 초부터 중심타선의 3연속 홈런이 나오며 말 그대로 타선이 대폭발했다.

대전 펠컨스 또한 2회에 5연속 안타를 포함해 만루 홈런을 만들어 내며 추격하는 모습을 보여 줬지만, 그때마다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은 장타를 터트리며 다시 격차를 벌렸다.

양 팀의 선발투수들이 4회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치열한 난타전 결과, 승리를 차지한 건 울산 알바트로스였다.

울산으로 넘어가서 치르는 3차전에서는, 다행히 대전 펠컨스가 승리를 챙겼다.

다만 쉽지 않은 승리였다.

6대4.

두 점 차로 승리를 거뒀고, 무려 여섯 명의 투수를 투입해서 어렵사리 승기를 내주지 않았다.

승부처는 7회 초였다.

1사 1,2루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가 승부수를 띄웠다. 2번 타자 겸 지명타자 정경우의 타석에서 차영석을 대타로 기용한 것이다.

포수 마스크를 쓰지 않고 한국 시리즈 우승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던 차영석은, 포수 마스크를 쓰는 대신 대타로 나와 2타점 2루타를 쳐내며 격차를 벌리는 득점을 만들어냈다.

계속해서 추격해오던 울산 알바트로스는 차영석의 2타점 2루타 이후 더 이상은 추격하지 못하며 결국 3차전을 내주고 말았다.

이어진 4차전.

울산 알바트로스가 총력전을 선언한 상황.

대전 펠컨스가 선발로 예고한 건 유현이 아니라 플레이오프 내내 더그아웃에서 얼굴을 비추지 않아 의아함을 자아냈던 윤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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