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45화 (45/155)

45화 미디어데이 (2)

박명우.

서울 나인테일즈에서 울산 알바트로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포텐셜이 폭발, 4년 연속 4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강태영과 홈런왕 경쟁을 한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대표적인 홈런 타자다.

홈런과 관련된 온갖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타자이지만, 애석하게도 메이저리그에서는 두 시즌만 뛰고 울산 알바트로스로 복귀하고 말았다.

메이저리그 진출 첫 시즌은 나쁘지 않았다.

타율은 2할 4푼 대이긴 했지만 홈런을 25개 기록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낮은 득점권 타율이 문제로 지목당하긴 했지만 후반기에는 득점권에서도 종종 안타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두 번째 시즌이었다.

빠른 공.

정확히는 150km 이상의 변형 패스트볼에 약점이 있다는 걸 파악한 상대 팀들이 집요하리만큼 투심 패스트볼이나 커터 같은 구종 위주로 승부를 하면서 애를 먹었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채 삼진으로 물러나는 경기가 많았고, 삼진이 늘어나다 보니 타격감이 떨어지고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리고 5월 말.

다섯 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내며 겨우 타격감을 회복했나 싶던 찰나, 종아리 부상으로 인해 DL에 등재되는 불운을 겪었다.

8월에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빠른 공에 대한 약점은 여전했고,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출장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결국 메이저리그에서 두 시즌을 끝낸 뒤에 박명우는 울산 알바트로스로 복귀했다.

메이저리그 도전에 실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박명우의 존재감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변형 패스트볼에 대한 적응과 부상이 문제였지 기량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결과적으로 박명우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KBO리그에는 메이저리그처럼 150km 이상의 변형 패스트볼을 원하는 코스에 찔러 넣을 수 있는 투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구위로만 찍어 누르려고 하는 강속구 투수들은 오히려 박명우의 경이로운 홈런 페이스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4년 연속 40홈런을 기록한 클래스는 여전했고, 5년 연속 4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괴물들이 판치는 메이저리그에서는 끝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메이저리그에 유행처럼 번진 150km 이상의 변형 패스트볼에 뚜렷한 약점만을 노출한 채로.

유현이 그 점을 정확히 노려서 말한 것이다.

박명우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약점을 찔리긴 했지만 원래 미디어데이가 상대를 도발하고 기 싸움하는 재미로 하는 게 아니던가. 때문에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없는 말을 지어 낸 것도 아니고 사실만을 말한 건데 화를 낼 이유가 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유현에게는 도발을 할 자격이 있었다.

150km 중반대의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괴물 아니던가. 실제로 박명우는 이번 시즌 유현을 상대로 내야 안타 하나만 기록했을 정도로 상대 전적이 영 별로였다.

뭐…… 애초에 이번 시즌 유현을 상대로 상대 전적이 좋은 타자를 찾는 것 자체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지만 말이다.

“유현 선수. 초구를 한가운데로 주는 건 어때요? 제가 홈런 한 방 시원하게 날려 드리겠습니다.”

“네. 첫 타석에서 초구를 한가운데로 던지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가 유현 선수를 상대로 손맛을 한 번 볼 수 있겠네요.”

“선배님. 제 취미가 강타자를 상대로 허를 찌르는 루킹 삼진 잡기라는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삼진 잡고 나서 어퍼컷 세레모니 격하게 한다고 화내시지 마시고요.”

“홈런 치고 VIP석 스탠드까지 배트 날려도 되죠? 열 받는다고 달려들면 안 돼요.”

유현과 박명우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강태영과 차영석이 미소를 지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그럼 전 플레이오프 MVP만 가져가겠습니다.”

“현아, 태영아. 형은 많은 거 안 바란다. 포수 마스크 안 쓰고 한국시리즈 가게 해 줘. 요새 뼈마디가 쑤셔서 블로킹하기도 힘들어. 농담 아니다. 형 지금 진지하다.”

* * *

대전 펠컨스와 울산 알바트로스.

두 팀 모두 플레이오프에서 이기고 한국 시리즈에 진출해야 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대전 펠컨스는 긴 암흑기를 탈출한 상황에서 한국 시리즈 진출을 통해 오랜 시간 묵묵히 응원해 준 팬들에게 보답해야만 했다.

울산 알바트로스의 경우 2018시즌 내내 구단 안팎으로 문제가 많았다.

몇몇 선수의 사생활 논란과 임의탈퇴로 인한 어수선했던 분위기, 그리고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연이은 트레이드는 관중 감소로 이어졌다.

팬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포스트시즌에서의 선전은 필수였다.

미디어데이가 끝난 직후, 유현이 강태영과 차영석과 함께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했다.

대전 펠컨스는 일찌감치 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을 유현으로 예고했다. 가장 확실한 에이스를 내보내서 일단 1승을 선점하겠다는 뜻이었다.

유현은 다음 날 등판을 앞두고 울산 알바트로스의 전력분석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 1차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될 포수 지석한, 볼 배합의 달인 차영석, 그리고 강태영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과 플레이오프 1차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즈음, 유현은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서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네? 올라오셨다고요? 지금 어디신데요? 네네. 네. 저 지금 펠컨스타디움인데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아님 집에 계실래요? 네. 주차장 와서 연락 주세요.”

유현이 조심스럽게 통화를 끝냈다.

동시에 강태영과 차영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유현의 당황한 기색

“태영아. 나 현이가 저렇게 당황하는 거 처음 보는 거 같다. 너 혹시 무슨 도박하다가 빚이라도 진 건 아니지? 있으면 미리 말해. 커지기 전에 수습해야 하니까.”

“누군데 그렇게 당황하면서 전화를 받아? 수상한데?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아아. 그게 아니라 부모님이 플레이오프 1차전을 직관하려고 대전에 올라 오셨다네. 방금 막 톨게이트 통과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물어 본다고 전화하신 거야.”

“그게 그렇게까지 당황할 일이야?”

“아버지가 내 경기를 절대 직관 안 하시거든. 트라우마가 있어서 말이야.”

“트라우마?”

“응. 처음 직관 오셨을 땐 내가 팔꿈치 부상으로 쓰러졌고, 그다음에 직관 오셨을 땐 백투백투백 홈런 맞고 2군 내려간 다음에 시즌 끝날 때까지 콜업되지 못하다가 방출됐고, 이제 좀 괜찮겠다 싶어서 작년에 직관 오셨는데 태영이 너한테 만루 홈런 맞고 맛이 갔지.”

유현의 아버지는 유현의 경기를 지금까지 딱 세 번 직관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현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강태영에게 만루 홈런을 맞은 이후로 유현의 아버지는 더 이상 유현의 경기를 직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머니에게 전해 듣기로는 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괜히 부정 탈까 봐 TV로도 경기를 안 보고 기사와 하이라이트 영상만 찾아볼 정도로 조심스러워했다나 뭐라나.

“……나 뭔가 되게 죄 지은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전에도 말했지만 너한테 만루 홈런 맞은 건 내가 못해서 그런 거야. 그냥 뭐랄까…… 아버지가 이제는 진짜로 내 경기를 안 보시겠다고 했는데 직관 오신다고 하셔서 당황한 거야.”

“그때랑은 상황이 다르잖아. 지금의 넌 부상도 없고 방출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방어율 1위에 20승을 기록한 리그 최고의 선발투수니까. 이제 좀 마음 편하게 보시려는 거 아닐까? 그 동안 안 보고 싶어서 안 보신 게 아니잖아.”

“음. 역시 그렇겠지?”

안 그래도 유현은 다음 시즌 홈 개막전 즈음에 아버지를 경기장에 초청하려고 했었다.

20승 무패 13홀드에 방어율 0.48.

사실상 시즌 MVP가 확정적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경이로운 시즌을 보낸 유현이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볼 때는 여전히 불안해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기세를 타고 있는데 직관을 왔다가 다시 유현이 부진하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유현은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 한 뒤에 아버지를 부를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아버지가 먼저 직관을 위해 대전으로 올라올 줄이야.

때마침 볼 배합에 대한 회의가 거의 끝날 즈음이었기에, 유현은 주차장으로 나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셔?

‘내가 말 안 했던가?’

-정확히는 내가 물어본 적이 없지. 가끔 통화하는 걸 엿들은 정도? 그나마도 그냥 안부 묻는 정도라서 뭘 알 수가 있어야지.

‘우리 집 냉동실에 있던 오리고기 맛있었지?’

-최고지.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은 오리고기?

‘펠컨스타디움 구내식당 오리불백은?’

-말해서 뭐해. 평점 10점에 9.5점.

‘그거 다 부모님이 키운 오리로 만든 거야. 고향에서 오리 키우시거든. 아마 펠컨스에 납품한 지 20년 정도 됐을 걸?’

-뭐야. 너 금수저였어?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엄밀히 따지면 금수저가 맞긴 했다.

어릴 적부터 돈 걱정은 없이 살았고, 그 덕분에 부모님을 졸라 또래들보다 일찌감치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벽에 막힐 때마다,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마다 유현은 야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오리나 키워야 하나 수도 없이 고민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널 만나기 전에, 그러니까 지난 시즌이 끝나고 서울 레오파즈에서 방출됐을 때 은퇴할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했어. 20대 후반의 나이에 아직도 마땅한 보직이 없는 내가, 심지어 방출까지 당한 상황에서 더 이상 야구를 한다고 매달리는 게 맞는 짓인가 싶었거든.’

-당시 네 성적이라면 그럴 만도 했지.

‘그래서 아버지가 전화로 말씀드렸어. 지금 내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봤는데, 화도 안 내고 그냥 할 말만 하고 끊으시더라.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어. 얼마 있다 안용석 감독님이 날 찾아와 다시 기회를 주셨고, 몇 달 후에 대만 스프링캠프에서 널 만나게 된 거야.’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을 때까지 죽어라 부딪혀 보라고. 사내새끼가 한번 시작했으면 미련이 안 남을 때까지 도전해야 하는 법이라고. 어설프게 하다가 집에 오면 호적에서 파 버릴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좋은 아버지시네.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 키우느라 바쁘셔서 자주 못 뵙고 간간히 전화만 주고받다 비시즌이 돼야 한 동안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현은 부모님께 늘 감사하고 미안했다. 야구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채 방출과 이적을 반복하는 자신을 묵묵히 응원하며, 마지막까지 도전하라고 격려해 준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지난 해.

방출을 당했을 때 아버지가 해 줬던 말이 아니라면 유현은 야구를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그럼 땅의 정령과의 만남도, 그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축복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짐했다.

내일이야말로 아버지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최고의 피칭을 할 거라고.

* * *

유현은 모처럼 부모님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집에서 부모님과 늦은 저녁까지 대화를 나누다가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전에 일찌감치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식사를 먹고서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했다.

마지막까지 전력분석 자료를 확인하고 지석한과 볼 배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모처럼 등판하는 것이기에 불펜에서 가볍게 컨디션을 체크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다행히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와일드카드와 준 플레이오프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틀간의 휴식을 제외하면 꾸준히 훈련을 하며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구위와 제구 모두 최고였다.

남은 건 울산 알바트로스를 상대로 최고의 피칭을 해서 팀에게 1승을 먼저 안기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애국가가 흘러나온 뒤.

마운드에 오른 유현은 전날 통화할 때보다 더, 아니 그 어느 때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표정이 방송 중계 카메라에 날것 그대로 잡히며 그대로 전파를 탔다.

“……아버지? 어머니?”

마운드 위에는 아버지가, 타석에는 어머니가 펠컨스 유니폼을 입은 채 서있었다.

그랬다.

대전 펠컨스는 플레이오프 1차전 시구, 시타자로 유현의 부모님을 초청했다.

선수 유현의 부모님이 아니라, 20년 동안 한 순간도 변함없이 양질의 오리고기를 납품해 준 농장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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