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43화 (43/155)

43화 박빙 (5)

유현은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시즌 15차전에 등판하고서 꼬박 6일을 쉬었다.

불펜에서 무력시위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공은 캐치볼 수준으로 가볍게 던진 것에 불과했고, 사실상 컨디션 조절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세미 제이슨에게 선발 로테이션을 양보했다. 다승왕이 욕심났다면 로테이션대로 선발 등판을 하면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확실한 1승을 위해서라면 세미 제이슨이 선발로 마운드에 오른 뒤, 실점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마운드를 이어받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다승왕?

탐나긴 하지만 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투수의 가치가 단순히 다승만으로 결정되는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까.

1사 1․2루.

주자가 모두 들어오면 동점이 되는 위기 상황에서, 유현은 포수 지석한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오늘 공 좋습니다, 선배님.”

“땡큐. 오늘은 커브 안 던질 거니까 경기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편하게 리드해 줘.”

“네, 알겠습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유현은 선발로 전향한 이후 항상 차영석하고만 호흡을 맞췄다. 때문에 지석한과 호흡을 맞추는 건 근 몇 달 만이었다.

뭐…….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차영석과 지석한은 투수 리드 스타일이 비슷했다. 지석한이 조금 더 공격적이고 과감하긴 하지만, 애초에 공격적인 승부를 즐기는 유현에게는 문제될 게 없었다.

타석에는 창원 샤크스의 프랜차이즈 타자 남중범이 들어섰다. 유현은 남중범에게 생각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은 채 투구를 시작했다.

팡!

몸 쪽으로 파고드는 공에 남중범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빼고 말았다.

그러나.

몸 쪽으로 붙은 것 같았던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언저리에서 슬라이더와 유사한 무브먼트를 보여 주며 존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전광판 기록된 구속은 155km.

유현은 종종 좌타자에게 커터를, 우타자에게 투심 패스트볼을 몸 쪽으로 붙여 던지는 척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몰리는 투구를 즐겨 한다.

문제는 타자의 입장에선 150km 중반대의 패스트볼이 몸 쪽으로 깊게 들어오면 몸을 빼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거다.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코스를 즐겨 사용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몸 쪽으로 깊게 파고들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부상의 위험 때문에 몸을 뺄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유현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상황에 따라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잘 이용한다는 거다.

창원 샤크스의 프랜차이즈 타자 남중범은 유현의 위협적인 초구에 인상을 팍 썼다.

‘망할. 도대체 저 미친 새끼를 왜 마지막 경기에서 불펜으로 투입하는 건데? 플레이오프 직행은 확정됐으니 컨디션 관리에는 문제없다 그거야? 커터가 155km가 나오면 도대체 어떻게 치란 거냐고.’

2018시즌.

당초 예상과 달리 투수들의 집단 부상과 타자들의 연이은 부진이 더해지며 창원 샤크스는 마지막 다섯 경기를 남겨 둔 상황에서 일찌감치 최하위가 확정되고 말았다.

다음 시즌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시즌 막바지에 분전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건만, 하필이면 마지막 경기 역전 찬스에서 마운드에 올라온 상대 팀의 두 번째 투수가 20승을 수확하면서 0점대 방어율을 사수한 괴물이다.

180이닝을 넘게 소화하면서 사사구를 고작 11개 허용한 미친놈을 상대로, 그나마 득점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결국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적극적인 스윙.

가만히 있다가 삼진을 당하느니 일단 노림수를 가지고 휘두르기라도 해보는 게 최선이었다.

딱!

남중범이 몸 쪽으로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을 공략했다. 타이밍도 나쁘지 않았고, 타구에 힘도 제법 실린 것 같았다.

문제는 타구가 향하는 방향에 유격수 하지성이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

수비 쉬프트를 통해서 6-4-3 병살타를 만들어내며 유현이 1사 1․2루 위기를 벗어났다.

[하나!]

팬들이 유격수 앞 땅볼을 카운트했다.

유현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야수들에게 박수를 치고, 포수 지석한과 주먹을 맞대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세미 제이슨이 유현을 향해 달려오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나이스!”

“공 죽였다!”

“현! 네가 최고야! 시즌 끝나고 커터 그립 가르쳐주기로 한 거 잊으면 안 돼!”

이번 시즌 대전 펠컨스에게 일어난 또 하나는 변화는, 더그아웃 분위기가 지난 10년과 다르게 밝고 시끄럽다는 거였다.

이기는 경기건 지는 경기건 선수들은 항상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고, 좋은 플레이가 나오면 박수갈채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용석 감독은 스프링캠프 때부터 모든 선수들에게 쉴 새 없이 강조했다.

그 어떤 팀을 상대하더라도 기죽지 말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를 즐기라고.

생각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상위권 싸움을 하기 시작하면서 선수단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패배 의식이 많이 옅어졌다. 그럴수록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밝아지고 대화가 많아졌다.

시즌 마지막 경기.

벌써부터 포스트 시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선수들의 목표의식 또한 확실했다.

8회.

유현이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세 타자에게 모두 땅볼을 유도하면서 아웃카운트 세 개를 손쉽게 만들어 냈다.

이날의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았다.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 그리고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에 커브를 한두 개 섞어 던졌다. 코너워크에 집중하며 철저하게 범타를 유도했다.

9회 초.

여전히 마운드에는 유현이 서 있었다.

9월에 치열한 순위 싸움을 하면서 불펜 투수들이 많이 지친 상황에서, 유현은 팀에 도움이 되기 위해 6일을 푹 쉰 뒤 선발 등판해야 할 날에 불펜으로 출격했다.

체력이 남아돌고 컨디션까지 좋으니 남은 이닝을 홀로 책임지지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서 있는 느낌이 어때? 색다르지 않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마지막 순간에 마운드에 서있는 건 기분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팀들의 남은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최소 플레이오프 직행이 확정됐고, 만원 관중이 목청껏 응원하고 있다면 더더욱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하지만…….

유현은 예상과 달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헛소리야? 아직 시즌이 남았는데 뭐가 마지막 경기라는 거야?’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인 건 맞잖아?

‘페넌트레이스에서 아무리 잘해 봐야 한국 시리즈 우승 못하면 의미 없다며? 마지막 경기에서 웃는 게 승자라며? 나에게 마지막 경기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경기지, 지금이 아니야.’

-역시 내가 교육을 잘 시켰다니까.

‘걱정 마. 우승하고 실컷 경거망동 할 거니까.’

10년 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를 이뤄 낸 거지만 유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기회가 온 김에 확실히 잡고 싶었다.

팀이 한국 시리즈에서 우승하기를 바랐고, 우승에 대한 보상으로 땅의 정령으로부터 네 번째 구종을 배우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서울 나인테일즈 전에서 다시 커브를 꺼내 들었고, 이번 경기에서는 포심 패스트볼을 제외한 볼 배합을 하고 있는 거다.

만약 포스트 시즌 진출로 만족할 거였다면 불펜에서의 무력시위 또한 자처하지 않았으리라.

선두타자를 상대로 유격수 앞 땅볼, 두 번째 타자에게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 그리고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딱!

[넷!]

전매특허인 유격수 앞 땅볼을 통해 만들어 냈다. 유격수 하지성의 송구가 1루수 김태성의 글러브에 파고들며 대전 펠컨스가 27번째 아웃카운트를 잡는 데에 성공했다.

와아아아아!

펠컨스! 펠컨스! 펠컨스!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대전 펠컨스 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청껏 펠컨스를 외치며 선수들에게 힘을 나눠 줬다.

144경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 한 선수단에게, 팬들은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선수단과 코칭스태프가 일제히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곤 팬들을 향해 거듭 절을 한 뒤, 미리 준비해 온 현수막을 들어 올렸다.

[올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 * *

10월 6일.

마침내 2018시즌 페넌트레이스가 끝났다.

결국 순위표 꼭대기에 이름을 올린 팀은 대전 펠컨스가 아니라 서울 레오파즈였다.

대전펠컨스는 95승 49패로 여느 시즌이라면 당당하게 1위를 했을 성적으로 시즌을 끝마쳤지만, 96승 2무 46패로 경이로운 시즌을 보낸 서울 레오파즈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사실 서울 레오파즈의 전력은 압도적인 성적을 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더러 존재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매 시즌 10승 이상을 책임져 주며 3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의 디딤돌이 되어 줬던 토종 선발 투수 두 명이 부진했고, 기존 선수의 부진으로 인해 중간에 교체한 외국인 타자마저도 형편없는 성적을 기록하다가 9월이 돼서야 밥값을 하기 시작했으며, 지난해 30홈런을 기록한 1루수가 갑작스러운 부진으로 6월까지 1할 9푼 1리 5홈런 21타점에 그치며 세 차례나 2군에 다녀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서울 레오파즈는 서울 나인테일즈에게 4일 동안 1위를 내줬던 걸 제외하면, 시즌 내내 굳건히 1위 자리를 지켰다. 대전 펠컨스에게 승차 없이 승률로 1위를 지키는 위기를 몇 번 겪으면서도 끝끝내 1위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비결은 특유의 화수분 야구였다.

한 선수가 부진하면 귀신같이 2군에서 다른 선수가 올라와서 공백을 채워준 덕분에 큰 위기 없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며 1위를 할 수 있었다.

토종 선발투수 두 명의 부진은 결국 시즌이 끝날 때까지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지만, 그 공백을 방어율 2위를 자랑하는 탄탄한 불펜진과 타율 1위의 타선으로 보충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서울 레오파즈가 1위를 했지만 2018시즌에 가장 많은 이슈를 몰고 다닌 건 반전의 시즌을 보낸 대전 펠컨스였다.

압도적인 최하위로 예상됐던 팀이 시즌 막바지까지 1위 싸움을 하는 저력을 보여 줬고, 유현과 세미 제이슨이라는 걸출한 20승 투수를 두 명이나 배출하며 KBO리그의 흥행 돌풍을 이끌었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음에도 대전 펠컨스 선수단의 그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직행이 확정된 상황임에도 말이다.

기회를 잡은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직행이 확정된 이상 2006년 이후 오랜만에 한국 시리즈 진출까지 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안용석 감독은…….

“월요일까지 펠컨스타디움 근처에서라도 얼씬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플레이오프 엔트리에서 빼버릴 테니 다들 그리 알도록.”

선수단 전체에 이틀간의 휴식을 부여했다.

개인적으로 훈련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펠컨스타디움 내에서는 훈련을 금지시켰다. 한 시즌을 바쁘게 달려온 선수단에게 긴장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덕분에 유현도 아침에 가볍게 운동을 하고 온 뒤에는 하루 종일 소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만 푹 쉬어도 될까? 운동 갔다 왔으니까 예능이나 보면서 하루 종일 소파에서 뒹굴다가 오리고기나 구워 먹게.”

-그래. 고생했으니까 오늘만큼은 푹 쉬어라.

“땡큐. 그럼 일단 내 머리 위에서 내려와.”

-안 돼. 네 머리가 제일 푹신해서 앉아 있긴 좋단 말이야.

“내가 꼭 내년에는 암컷 햄스터 입양하고 만다.”

10월 9일.

대구 재규어스와 울산 알바트로스의 와일드카드전이 열리는 날.

이틀 동안의 휴식을 끝낸 유현이 플레이오프 준비를 위해 다시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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