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박빙 (4)
흔히들 그런 생각을 한다.
오프 스피드 피치나 확실한 브레이킹 볼이 없으면 삼진을 잡기 힘들다고, 거기에 공격 일변도인 투수라면 타자들의 노림수에 제대로 걸려들었을 때 난타를 당하며 속절없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하지만.
유현과 땅의 정령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메이저리그라면 어려울 수도 있다.
문제는 현재 유현이 뛰고 있는 곳은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더블A와 트리플A 사이의 수준이라고 평가받는 KBO리그라는 거다.
일단 150km 중반의 패스트볼 3종 세트를 정확히 공략할 수 있는 타자조차 거의 없는데, 심지어 유현은 그 공들을 자신이 원하는 코스로 던질 수 있는 수준급 제구력까지 지녔다.
강속구 투수들이 쓸 만한 세컨드 피치만 제대로 장착해도 답이 안 나오는 게 KBO리그인데, 거기에 제구까지 더해진 것이다.
사실상 유현과 같은 팀인 강태영, 서울 나인테일즈의 김형주, 그 외에 몇 명의 선수들을 제외하면 유현의 공은 난공불락이라고 봐야 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유현이 KBO리그를 폭격하고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당연한 결과임에도 유현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던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했다.
그 결과.
유현은 과감하게 꺼내든 커브를 이용해서 마음 급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제대로 농락할 수 있었다.
6회 이후에는 투구 패턴을 바꿔 하이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했다. 거기에 한 번씩 허를 찌르는 몸 쪽 꽉 찬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로 루킹 삼진을 잡아내는 건 덤이었다.
9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17탈삼진 무실점.
유현이 노히트노런에 이어 KBO리그의 또 다른 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데에 성공했다.
-유현 선수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여환진 선수와 함께 9이닝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새깁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유현 선수. 제구 잘 된 빠른 포심 패스트볼이 얼마나 큰 무기인지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커브에 타자들이 속은 게 결국 포심 패스트볼 때문이거든요. 수직 무브먼트가 너무 좋아 라이징 패스트볼처럼 보이는 저 공이 들어오다가, 105km짜리 커브가 들어오면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타이밍을 뺏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보니까 커브의 제구 자체도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만.
-맞습니다. 스트라이크 존 근처에서 변화하며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효율적으로 속일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게 유현 선수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을 도모하거든요.
9이닝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올린 유현은, 신기록을 갱신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지 않았다.
커브의 제구가 나름대로 괜찮았던 것에 만족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패스트볼 3종 세트를 제구 한 것에 만족했다.
물론 마냥 좋아만 한 건 아니었다.
팀이 아직 1위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마지막까지 팀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유현은…….
“정규 시즌 마지막 선발 등판에서 20승 고지에 오르고 최다 탈삼진 기록까지 달성할 수 있게 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팀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마운드에 오를 수 있도록, 마지막 한 경기까지 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안용석 감독과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남은 다섯 경기에서 불펜 대기를 자처했다.
* * *
투타의 엇박자, 혹은 안 될 팀.
후반기 서울 나인테일즈는 전형적으로 안 되는 팀이었다.
선발투수가 잘 던지면 불펜이 방화를 저지르고, 타선이 터졌다 싶으면 선발투수가 일찌감치 무너져서 경기를 힘들게 만들고, 혹은 대량 실점을 한 경기에서 영봉승을 내주는 등의 무기력한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그럼에도 서울 나인테일즈가 4위 경쟁을 할 수 있었던 건 크게 세 가지였다.
전반기에 벌어둔 승부가 많았던 것, 그리고 순위 경쟁을 하는 다른 팀들의 상태도 대구 재규어스를 제외하면 썩 좋은 편이 아니라는 것, 마지막으로 2017시즌이 끝나고 FA로 영입한 김형주가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를 견인하며 팀이 급격히 추락하는 걸 막아 줬다는 거였다.
하지만…….
9월 27일 대전 펠컨스와의 시즌 15차전에서 유현에게 시즌 20승을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과 함께 헌납하며 대구 재규어스에게 반 경기 차이까지 추격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다음 경기에서도 서울 나인테일즈가 패배하고 대구 재규어스가 승리한다면, 두 팀의 순위가 뒤바뀌게 될 터였다.
“나인테일즈 파이팅!”
“오늘은 이기자!”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경기 전에 파이팅을 외치며 승리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지만, 마음과 달리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전 펠컨스의 선발투수가 이번 시즌 19승을 기록하며 전날까지 유현과 함께 다승 공동 1위였던 세미 제이슨이었으니까.
세미 제이슨은 탈삼진 머신의 전형적인 조건을 모두 갖춘 투수였다.
최고 구속 154km에 이르는 포심 패스트볼, 송현수 투수코치로부터 전수받아 이번 시즌에 확실하게 장착한 체인지업, 낙폭 큰 커브, 거기에 각이 큰 슬라이더까지,
시즌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지나치게 코너워크를 의식하다 보니 포볼이 많았고, 몸에 맞는 공이 자주 나오기까지 했다.
이는 곧 투구 수 관리의 부재로 이어졌다.
6월까지만 하더라도 탈삼진은 10개 이상 잡고도 퀄리티 스타트를 하지 못한 채 조금 일찍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경기가 많았고, 유현의 선발 전환 전까지는 이닝 이터 투수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불펜이 부담을 떠안게 됐다.
하지만.
세미 제이슨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로 코칭스태프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변화에 성공했다.
전반기에 평균 5.1이닝을 소화한 것과 달리, 후반기에는 평균 7.1이닝을 소화한 것이다.
이닝 소화 능력이 좋아진 상황에서 탈삼진 페이스는 여전했다.
시즌 201탈삼진.
탈삼진 2위인 제이미 소시아가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191탈삼진을 기록했기에, 사실상 세미 제이슨의 탈삼진 1위는 확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세미 제이슨은 전력을 다해 투구했다.
자신의 기록과 무관하게, 팀이 마지막까지 1위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승리를 견인하는 호투를 하며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
결국 세미 제이슨이 7이닝 5피안타 무사사구 12탈삼진 1실점으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꽁꽁 틀어막은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스코어는 3대1인 상황.
서울 나인테일즈 입장에서는 경기 후반 역전을 노려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8회 말.
셋업맨 김정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1군에 콜업된 이후 방어율 0.75를 마크하고 있는 괴물 신인을 상대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허용하고 말았다.
최고 구속 155km에 이르는 포심 패스트볼과, 여환진을 연상시키는 서클 체인지업의 조합에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거기에 9회에는 정우연이 올라와 안타 하나를 허용하긴 했지만, 병살타와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끝끝내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전 펠컨스가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시즌 마지막 2연전을 모두 쓸어 담으며 서울 레오파즈의 승차를 다시 한 번 없애는 데에 성공합니다. 시즌 막바지에 6연승을 기록하며 저력을 과시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전 펠컨스는 10연승을 기록한 채 시즌을 끝내고 싶을 것 같은데요?
-서울 레오파즈가 6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두 팀의 승차가 다시 한 번 없어졌습니다. 욕심이 나는 게 맞죠.
한 팀은 1위와의 승차를 없앴고, 다른 한 팀은 결국 5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시즌 막바지.
한때 2위 경쟁을 했던 두 팀의 희비가 완벽하게 엇갈렸다.
* * *
치열한 순위 경쟁으로 인해 대전 펠컨스 선수들은 모두 지쳤다. 아무리 관리를 받아도,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해도 대부분의 선수들은 시즌 막바지가 되면 잔부상에 고생한다.
특히나 이번 시즌 대전 펠컨스 돌풍의 가장 큰 이유인 불펜진의 피로감은 엄청났다.
수호신 정우연만 하더라도 후반기에만 무려 세 번의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며 흔들렸고, 이재왕 정도를 제외한 모든 투수들이 한 번씩 2군에 다녀오며 재조정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아마 김정수라는 괴물 신인이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대전 펠컨스는 훨씬 더 힘든 순위 싸움을 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런 김정수마저도 최근 들어서는 체력이 떨어졌는지 구속이 살짝 낮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거였다.
모든 불펜투수가 힘들어하는 상황.
안용석 감독은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바로 유현을 9월 30일 광주 앨리펀츠와의 시즌 16차전부터 불펜에 대기시킨 것이다.
윤기준이 4회 말에 2실점을 하고 여전히 무사 만루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유현이 난데없이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광주 앨리펀츠 타자들의 시선은 마운드 위에 있는 윤기준이 아니라 불펜에 있는 유현에게로 향했다.
‘유현 저 자식, 저러다 진짜 마운드에 오르는 거 아니야?’
‘저 미친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컨디션이 회복 안 됐어도 150km를 던지는 놈이 불펜 투수로 올라온다라…….’
‘아. 그냥 어느 한 군데 작살나서 꺼져 줬으면 좋겠다. 하느님, 저 미친 새끼 좀 더 이상 안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단순한 전술이다.
에이스 투수, 그것도 20승을 수확하는 동안 방어율 0.49를 마크한 미친 괴물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타자의 입장에서는 절로 기가 죽는다.
마운드에 있는 투수가 흔들리건 말건, 불펜에서 괴물이 튀어나올까 봐 자꾸 신경이 쏠린다.
그리고…….
타석에서 타자가 집중하지 못한다는 건, 투수에게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되곤 한다.
삼진에 이은 병살타.
윤기준이 무사 만루의 위기를 벗어나고서 팀의 4대2 리드를 지켜냈다.
유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앨리펀츠 타자들 집중 못하는데?’
-오늘 윤기준 컨디션이 안 좋은데 잘 됐어. 위기를 벗어났으니까 그래도 6회까지는 책임져 주지 않을까 싶은데.
‘내일 쉬니까 불펜을 모두 투입하고.’
-넌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서 그 빌어먹을 트로트나 계속 들으면 되는 거고.
불펜에서의 무력시위.
보직이 세분화가 되지 않았던 80년대와 9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더러 볼 수 있었다.
0점대 방어율을 몇 번이나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도 팀이 위기에 몰린 상황이 오면 불펜으로 달려가 무력시위를 하곤 했었다.
물론 마운드에 오르는 경우보다 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에이스가 불펜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대 타자의 입장에서는 집중력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높기에 좋은 전술이다.
잘 긁히면 언터쳐블이지만 안 긁히면 배팅볼 투수라고 조롱을 듣는 윤기준은, 4회의 무사 만루 위기를 벗어난 뒤 6회 말 2아웃까지 책임지고서 이재왕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그 즈음.
유현은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아모르 댄스를 들으며 팀을 응원했다.
결과적으로 유현의 불펜 무력시위는 팀이 승리를 챙기는 데에 제법 도움이 됐다.
대전 펠컨스가 광주 앨리펀츠와의 시즌 15차전에 이어 16차전마저도 잡아내며 8연승에 성공한 것이다.
수원 매지션즈와 창원 샤크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유현은 불펜 대기를 자처했다.
수원 매지션즈와의 경기에서는 7회 말에 빅 이닝이 만들어지며 또 다시 무력시위에 그쳤지만, 창원 샤크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6회 초 1사 1․2루 상황.
4대2의 팽팽한 경기에서 세미 제이슨이 실점 위기를 자초하자,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 세미 제이슨에게 공을 건네며 교체 의사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
펠컨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팬들이 격렬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불펜에서 뛰어 나오는 투수를 보고서 기립 박수로 환영했다.
-유현! 유현 선수가 세미 제이슨 선수로부터 마운드를 넘겨받습니다!
-유현 선수의 로테이션을 거르고 세미 제이슨 선수를 올린 이유가 바로 이거였군요!
-대전 펠컨스의 원투 펀치가 같은 날 동시에 출격합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경기마저도 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력시위가 아니었어?”
“나쁜 새끼들. 10위 팀한테 시즌 마지막 한 경기 져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그냥 다 털어 가라, 다 털어 가.”
창원 샤크스 타자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지난 두 경기 불펜에서 대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못내 신경 쓰였는데, 결국 유현이 선발투수가 아닌 두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근데 왜.
하필이면 왜, 하고 많은 팀들 중에서 왜 10위가 확정된 우리를 상대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이러는 거냐고!
무력시위만 하는 거 아니었냐고!
유현은 창원 샤크스 타자들의 짜증 가득 담긴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은 채 속으로 답해줬다.
‘등판 안 한다고는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