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41화 (41/155)

41화 박빙 (3)

“시즌이 시작하기 전, 대다수의 해설위원들은 우리가 최하위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거라 생각한 해설위원은 있었어도, 1위 경쟁을 할 거라 예상한 해설위원은 없었다. 생각해 봐. 우리가 2위를 할 거라고 예상한 해설위원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래.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이런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구단에서도, 팬들도, 그리고 아마 너희들과 나조차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한 경기 한 경기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시즌은 끝나가고, 우리는 아직도 2위야. 지금 성적만으로도 우린 이미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경이로운 시즌을 만든 거야.”

생각해 보면 그랬다.

대전 펠컨스가 포스트 시즌에 갈 거라 예상한 해설위원들도 와일드카드 경쟁을 할 거라고 본 거지, 1위 경쟁을 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대전 펠컨스 승수를 쌓아 나가도 순위가 상승함에도 시선은 항상 정적이었다.

5월에는 5월 위기론, 6월에는 6월 위기론, 7월에는 7월 이후에는 여름 위기론을 이야기하며 대전 펠컨스를 흔들어 댔다. 온갖 지표들을 근거로 대전 펠컨스의 성적이 운이라고 비아냥댔다.

대전 펠컨스 선수들은, 그리고 코칭스태프들은 언론에서 제기한 위기론에 대해서 따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경기로 증명해 보였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상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지치게 만들고, 이길 수 있는 경기는 탄탄한 불펜을 바탕으로 확실하게 이기는 강팀의 면모를 보여 줬다.

그 결과.

시즌 종료를 6경기 남겨두고 1위와 2경기 차이, 3위와는 무려 5경기 차이를 벌리며 사실상 최소 2위는 확정 지은 상황이다.

더 이상 그 어떤 언론도, 그 어떤 해설위원도 대전 펠컨스에게 위기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미 목표는 충분히 이뤘다.

남은 경기 전패를 하더라도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이 확정됐으니까.

1위를 못 한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었다.

다만…….

“오늘 이렇게 선수단을 소집한 건, 시즌이 끝나기 전 너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애들아.”

“네, 감독님!”

“이번 시즌, 정말 잘해줬다. 펠컨스의 감독이라는 게 매 순간 행복하게 해줘서 고맙다. 너희가 아주 자랑스럽다. 너희와 함께 야구를 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하다.”

선수들이 미소를 지었다.

시즌 막바지.

지치고 성한 곳이 없을 시기임에도 선수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시즌 초만 해도 선수단 내에 팽배했던 패배 의식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 자리를 어떤 팀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어떤 팀과 붙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채웠다.

안용석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남은 여섯 경기, 팬들에게 절대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하자. 마음 한구석에조차 후회가 남지 않을 경기를 하자.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자.”

“네, 감독님!”

“비상하자 펠컨스!”

“날아오르자 펠컨스!”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친 뒤 훈련을 하기 위해 라커룸에서 나갔다.

그리고 유현은…….

-울어? 울어? 울어? 우는 거야?

‘……감동 깨지 마라, 망할 지박령아.’

-동네 사람들! 아이큐 한 자리 투수가 감동 받아서 운데요! 팝콘 먹으면서 구경하세요!

‘너 때문에 감동이 깨졌으니까 책임져.’

살짝 감동을 받았다가 경거망동하는 땅의 정령 때문에 감동이 깨져버렸다.

* * *

시즌 전적 4승 10패로 열세.

서울 나인테일즈가 시즌 중에 무려 일곱 차례나 시리즈 스윕을 하고 5연승 이상을 무려 네 번이나 거뒀음에도 5위인 대구 재규어스와 1.5경기 차이로 4위 싸움을 하고 있는 건, 서울 레오파즈에게 시즌 전패를 당한 것과 대전 펠컨스를 상대로 상대전적이 열세인 게 제일 컸다.

심지어 3위인 인천 그리핀스를 상대로도 7승 9패로 열세였다.

하위권 팀들을 상대로는 선전했지만, 1위부터 3위 팀들에게 약한 게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대로라면 어떤 식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건 준 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에서 허무하게 발목을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더 문제는 시즌 막바지 경기 양상에 따라 6위로도 밀려날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 전적이 열세인데 9월 성적마저 좋은 대전 펠컨스를 만나 경기를 치르게 됐다는 거다.

대전 펠컨스의 최근 기세는 무서웠다.

시즌 종료까지 여섯 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무려 89승 49패에, 최근 경기만 놓고 보면 4연승을 거뒀고 네 경기 연속 10득점 이상을 만들어냈다.

다른 시즌이었다면 손쉽게 1위를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성적이었지만, 서울 레오파즈라는 장벽에 막혀 2위에 머물고 있었다.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1위도 가능하다.

대전 펠컨스의 입장에서도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2연전을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안용석 감독은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마지막 2연전에 유현과 세미 제이슨 원투펀치를 선발로 예고하고 나섰다.

절대로 질 생각이 없다는,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드러낸 것이다.

대전 펠컨스 타선은 1회 초부터 유현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줬다.

무사 1․2루 상황.

타석에 강태영이 들어섰다.

결국 이번 시즌에도 시즌 50호 홈런 돌파에 성공하며 투수들의 공포가 된 강태영을 상대하게 된 서울 나인테일즈의 에이스 제이미 소시아는, 강태영을 상대로 과감하게 승부했다.

물론 좋은 공은 주지 않았다.

초구와 2구 모두 강태영에게 유일한 약점으로 평가받고 있는 바깥쪽 높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스트라이크 콜을 받았고, 3구는 커브를 던졌지만 강태영이 속지 않으면서 볼이 됐다.

2스트라이크 1볼 상황.

강태영과 대전 펠컨스 코칭스태프는 상대 베터리의 허를 찔렀다.

한참 빠지는 볼을 억지로 쳐서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흘러가는 땅볼 타구가 만들어졌다. 타구의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1루수가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왔고 투수가 재빨리 베이스 백업을 들어간 덕분에 1루에서 아웃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투수가 투구함과 동시에 주자들이 뛰기 시작했고, 1루수가 공을 잡았을 즈음에는 이미 3분의 2 이상을 내달린 뒤였으니까.

히트 앤 런 작전을 통해 무사 1․2루가 1사 2․3루로 변했다.

시즌 51홈런 144타점을 기록하고 있는 타자에게 히트 앤 런 작전을 지시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태영은 개의치 않았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기록과 성적보다 작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안용석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여기서 1~2점만 뽑으면 이번 경기를 쉽게 가져갈 수 있어.’

1회부터 과감하게 히트 앤 런을 지시한 건 유현이 선발 등판하는 경기에서 2~3점 정도만 뽑아내면 확실하게 승리를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 깔린 선택이었다.

뒤이어 4번 타자 제라드 캠프가 중앙 펜스를 통타하는 2루타를 쳐내며 스코어는 2대0.

거기에 펠릭스 곤잘레스의 외야 플라이로 만들어진 2사 3루 상황에서 폭투가 나오며 스코어는 3대0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유현은…….

-점수 차이 넉넉해서 좋네. 3점이면 승리투수가 되기에 충분하잖아?

‘차고 넘치지.’

-오늘의 목표는?

‘포스트 시즌 전에 마지막으로 나인테일즈 타자들 기죽이기.’

-바람직하군.

모처럼 만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괴롭힐 수 있을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었다.

* * *

연습 투구를 하면서 유현의 컨디션은 좋았다. 구속과 제구 모두 나쁘지 않았다.

땅의 정령의 축복 덕분에 컨디션 관리가 용의한데 루틴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으니, 컨디션이 나쁜 게 오히려 이상한 거였다.

호흡을 맞추게 된 안방마님 차영석 또한 유현의 공을 받아주며 연신 나이스를 외쳤다.

“오늘 공 좋네. 그나저나 나인테일즈도 참 대단하다. 오늘도 또 우타자 일색이냐.”

“좌타자 일색은 더 답이 없잖아요.”

“크흐흐. 널 상대로 하는 거면 그렇긴 하지. 리드는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네. 아. 가끔씩 그것도 던질까 하는데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으려나?”

“혹시나 나인테일즈가 올라올지도 모르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기를 죽여 놔야죠.”

“흠. 그건 그렇지. 오케이. 상황 봐서 적당히 섞어 던지는 걸로 하자.”

“네.”

1회 말.

유현이 마운드에 섰다.

선두 타자와 2번 타자를 각각 유격수 앞 땅볼과 2루수 정면으로 가는 라인 드라이브를 유도해 잡아내면서 손쉽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문제는 3번 타자 차희성의 타석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3루수 땅볼로 보였던 타구가 갑자기 크게 튀어버렸고, 글러브에 맞은 타구가 파울 라인 밖으로 크게 튀어버린 것이다.

그 사이 타자주자 차희성은 전력질주를 해서 1루 베이스를 밟았다.

결과는 안타로 기록됐지만 굳이 내주지 않았어도 될 다소 아쉬운 안타였다.

그렇게 1회 말부터 맞이한 찬스에서 서울 나인테일즈의 4번 타자 김형주가 타석에 들어섰다.

컨텍트 좋고 장타력도 있고 노림수도 뛰어나고 상황에 따란 변화하는 타격 스타일까지, 유현 입장에서도 분명 김형주는 까다로운 타자였다.

거기에 9월 타율이 무려 4할 2푼 5리에 홈런도 여섯 개가 있을 정도로 타격감까지 좋다.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초구는 몸쪽으로 들어간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2구는 바깥쪽으로 빠진 커터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지 못하면서 볼, 3구는 다시 포심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붙여 던지며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2스트라이크 1볼 상황.

김형주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유현은…….

‘싱커?’

-100% 노리고 있을 듯. 싱커 던지기 딱 좋은 타이밍이잖아.

‘그럼 역으로 이용을 해줘야지.’

김형주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보았다.

유현이 모자 끝을 만졌다. 사인을 접수한 차영석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4구 째.

유현의 손에서 공이 떠나갔다. 김형주가 예상한 대로 유현은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서 스트라이크 존을 제법 벗어난 떨어지는 공을 던졌다.

다만 싱커가 아니었다.

유현이 던진 공의 구속은 140km 중반대가 아닌 105km가 나왔고, 심지어는 땅에 처박히며 원바운드가 됐다. 그나마 다행이게도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문제는 그 별 볼 일 없는 공에 김형주의 배트가 따라 나갔고,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기에 허무하게 헛스윙을 당하고 말았다.

느려 터진 커브.

유현이 오랜만에 타자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던 무기를 다시 한 번 꺼내들었다.

* * *

포스트 시즌과 페넌트레이스는 다르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몇 경기 만에 결과가 달리다 보니 긴장감이 크고, 그만큼 치열하게 싸우며 온갖 작전과 심리 싸움이 더해진다.

투수와 타자 모두, 몇 경기에서의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유현이 간간히 연습을 하던 커브를 다시 한 번 꺼내든 건 그런 의미에서였다.

여전히 구위는 별 볼 일 없다.

그나마 이전과는 달리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떨어질 수 있도록 가다듬은 게 유일한 성과라고 봐도 될 만큼 형편없는 공이다.

문제는 150km 중반대의 패스트볼 3종 세트를 던지는 유현을 상대할 때, 패스트볼 중 하나를 예상하고 있다가 105km짜리 커브가 난데없이 들어오면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헛스윙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거였다.

최근 들어 유현이 삼진을 잡아낸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이 반 이상이었고, 그 다음으로 많은 게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7회 말까지 14개의 삼진을 잡아냈고, 그중 6개를 커브로 잡아낼 만큼 비중이 높았다.

정작 커브를 예상하고 스윙을 하지 않으면 몸쪽에 꽉 찬 공으로 루킹 삼진을 잡아내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즈음부터 대전 펠컨스의 전력분석 팀은 포스트시즌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서울 레오파즈와 인천 그리핀스, 그리고 서울 나인테일즈에 대해 현미경 분석을 해서 코칭스태프에게 자료를 전달한 것이다.

워낙 피 말리는 포스트시즌 경쟁을 하고 있다 보니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타석에서 의욕이 넘쳤고, 어떻게든 점수를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노림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스윙했다.

문제는 노림수가 대부분 거기서 거기라는 것, 그리고 적극적인 스윙을 하는 타자들은 유현에게 좋은 먹잇감이란 거였다.

유현은 집요하게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일단 2스트라이크를 잡았다 하면 타자들의 예상과 정 반대의 공을 던져 삼진을 잡아버리니 당하는 입장에선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여섯 개.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이 갱신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은 곧 경기라도 일으킬 듯이 유현을 노려보았다.

“아니, 도대체 왜 저 새끼는 왜 우리만 만나면 저 지랄이야? 우리한테 무슨 원수졌어? 펠컨스 에이스들은 왜 다들 이래?”

“진짜 돌아버리겠네.”

“저 자식 오늘 공 미쳤어요.”

“제가 지난번에 유니콘스의 진우한테 저 자식한테 어떻게 홈런 쳤나 물어봤거든요?”

“물어보니까 뭐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풀스윙 하래요. 얻어 걸리는 거 말고는 답이 없다고.”

“……x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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