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박빙 (2)
투수로서 유현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의견이 갈렸다. 2018시즌에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보니 장점을 하나만 꼽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 KBO리그를 평정했던 대투수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유현의 가장 큰 장점은 시즌을 치르면 치를수록 투수로서 성장하고 있는 거라고, 계속해서 공부하며 발전을 모색하는 거라고 말이다.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도 현실에 안주하며 노력하지 않는 일부 선수들과 달리 유현은 아무리 좋은 피칭을 해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더 잘 던지기 위해, 더 좋은 투수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고민했다.
패대기 수준의 커브로 타자들을 농락했던 것도, 위기론이 대두된 이후 투구 패턴의 변화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의 장착으로 한 단계 진화한 것도 모두 고민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땅의 정령이 있었다.
유현의 꾸준한 노력과 고민, 거기에 땅의 정령의 족집게 조언이 더해지며 유현은 KBO리그를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그 다음 장점은 바로 멘탈이었다.
자신의 피칭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결과가 이상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이 계획한 대로 투구를 이어나가며 타자를 상대했다.
유현은 부산 유니콘스를 상대해서 1회 초에 선두타자 초구 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이후 7회까지 단 한 번의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타선을 꽁꽁 틀어막았다.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는 투구였다.
집요하게 보더라인 투구를 하다가도 타자들의 허를 찔러 의도적으로 한가운데에 찔러 넣는 심리전이 기가 막혔다. 거기에 잊을 만하면 던지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도 타자들을 힘들게 만드는 요소였다.
타자들은 유현이 커터를 장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이 빗나갔다.
괴물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하고 한층 더 진화했으니까.
게다가 보더라인을 파고들 때는 구속을 살짝 줄인 채 제구에 신경을 쓰다가도, 윽박질러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판단될 때는 다시 구속을 올려서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 누르는 완급 조절까지 보여주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여섯 개.
유현을 전혀 공략하지 못한 채 삼진만 9개를 당한 부산 유니콘스 타자들은, 마운드에서 내려와 땀을 식히고 있는 선발투수를 바라보며 불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91구를 던져 7이닝 2피안타 2사사구 11탈삼진 1실점.
선발투수가 대전 펠컨스 타자들을 상대로 7이닝 1실점 호투를 펼쳐줬고, 8회 말에도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스코어가 여전히 1대1이라는 게 미안했다.
특히나…….
세 타석 모두 삼진으로 물러나며 자존심을 제대로 구긴 부산 유니콘스의 4번 타자 안대하는, 부디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찬스가 와주기를 바랐다.
특히 마지막 타석에서 바깥쪽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투심 패스트볼을 그대로 지켜보다 루킹 삼진을 당한 게 너무 화가 났다.
딱 한 번.
한 번만 더 기회가 오면 복수를 해줄 거라 다짐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쟤는 어째 만날 때마다 더 괴물이 되어 있냐.”
“진짜 미친 것 같아요. 155km짜리 커터가 제구까지 되면 타자들을 뭘 먹고 살라고.”
“도핑 검사 해봐야 하는 거 아냐?”
“쟤 이번 시즌에 도핑 검사 세 번이나 했는데 안 걸렸어요. 완전 깨끗해요.”
“요즘 도핑에 안 걸리는 약도 나오냐?”
“그럴 리가요.”
“그냥 차라리 약 먹고 미친 거였으면 좋겠다. 그럼 출장 정지 먹어서 당분간 볼 일도 없을 거 아냐. 저 공을 도대체 어떻게 치냐고. 진우야. 너 저 자식한테 어떻게 홈런 때렸냐.”
“초구니까 별 생각 없이 에라 모르겠다 하고 풀스윙 했는데 넘어가던데요?”
“……염병. 도움이 안 되네.”
부산 유니콘스 타자들은 남은 여섯 개의 아웃카운트가 사라지기 전에 1점이라도 뽑자고 의욕을 끌어 올렸지만, 이미 유현의 압도적인 피칭에 기세가 꺾여 큰 의미가 없었다.
유현은 8회 초 우타자 셋에게 연달아 커터를 결정구로 사용해서 유격수 앞 땅볼로 아웃카운트 세 개를 깔끔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이어지 8회 말.
대전 펠컨스가 마침내 팽팽했던 균형을 무너트릴 절호의 찬스를 잡았다.
1사 만루.
천금 같은 기회에 강태영이 타석에 선 것이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기간 동안 절정의 타격감을 과시한 강태영을 상대로, 부산 유니콘스는 1회 말부터 솔로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두 타석에서는 절대 좋은 공을 주지 않았다. 포볼을 내주면 내줬지 안타는 맞지 말자고 생각했다. 결국 포볼 두 번으로 강태영을 출루시켰고, 강태영의 출루는 득점과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포볼을 내주는 순간 밀어내기로 1점을 내주고 말 테니까.
부산 유니콘스의 투수코치와 포수와 통역사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통역사를 통해서 투수에게 코칭스태프의 의사를 전달했다.
“절대 승부하지 마. 밀어내기를 내주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코너워크에 집중해.”
투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안게임을 치른 피로 따위 없다는 듯이 첫 타석부터 홈런을 친 강태영을 상대로 1사 만루에서 승부를 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다행인 건 이번 경기에서 4번 타자 제라드 캠프의 컨디션이 썩 좋아보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이번 경기에서 두 번의 병살타를 기록했다는 거였다.
밀어내기로 한 점을 내주더라도 강태영과의 승부를 피하고 제라드 캠프를 상대해서 잡는다, 그리고 9회 초에 어떻게든 다시 1점을 따라잡는다.
그것이 부산 유니콘스 코칭스태프가 내린 결론이었다.
일단 첫 번째는 계획대로 됐다.
1스트라이크 3볼 상황에서 바깥쪽으로 꽉 찬 슬라이더를 골라내며 강태영이 포볼을 얻어냈고, 결국 밀어내기로 한 점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문제는 제라드 캠프의 타석이었다.
딱!
앞선 세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 한 번과 병살타 두 번으로 힘없이 물러났던 제라드 캠프가, 뚝 떨어지는 커브를 제대로 받아친 것이다.
좌익수가 펜스 앞에서 점프를 해보았지만 타구를 잡아내기에 부족했다. 그 사이 강태영을 포함해 발 빠른 주자 세 명이 모두 홈 베이스를 밟았고, 제라드 캠프는 여유롭게 2루에 들어갔다.
싹쓸이 2루타로 스코어는 5대1.
팽팽했던 균형이 한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이전 이닝까지 7회까지 1실점으로 대전 펠컨스의 타선을 잘 틀어막았던 부산 유니콘스의 투수가 고개를 숙이며 신경질적으로 글러브를 집어 던졌다.
-아. 여기서 균형이 무너집니다. 유현 선수는 8회 초까지 90구를 투구했습니다. 9회에도 올라온다고 가정했을 때, 4점 차는 너무 크죠.
-아시안게임 당시 보여준 강태영 선수의 컨디션을 감안했을 때 밀어내기로 한 점을 내주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라드 캠프 선수가 슬럼프를 겪고 있다가도 귀신 같이 팀에 공헌하며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이번 시즌 몇 차례나 보여준 훌륭한 선수라는 거죠.
-만약 정 해설위원님이었다면 방금 전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저라면 1사 만루 상황을 만들지 않았겠죠. 애초에 중심타선을 상대로 만루 찬스를 허용한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하하하. 정답이네요.
9회 초.
유현이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타자를 상대로 몸쪽 바짝 붙는 커터를 던져 유격수 앞 땅볼, 두 번째 타자를 상대로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투수 정면으로 날아온 타구를 직접 잡아서 아웃, 그리고 마지막 남은 아웃카운트 하나는…….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
이제는 유격수 앞 땅볼과 더불어 유현의 상징 이 된 시원한 어퍼컷 세레모니와 함께 경기가 끝이 났다.
유현은 시즌 16승을 수확하며 마침내 팀 동료 세미 제이슨을 재치고 다승 1위로 올라섰다.
경기가 끝난 후.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고 라커룸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어느새 9시였다.
유현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알리사 메켄으로부터 코코아톡이 와있었다.
-경기 잘 봤어요.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때 제구를 잡으려고 노력한 게 빛을 본 거 같아 다행이에요. 초구 선두타자 홈런은 얻어 걸린 거지, 유현 선수가 못 던져서 그런 게 아니에요. 흔들리지 않고 완벽한 피칭을 보여줘서 고마워요. 멋있었어요. 그리고 다승 1위 축하해요.
유현이 미소가 지었다.
한참 동안이나 오늘 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눈 뒤에야 유현은 라커룸에서 나갔다.
확실히 알리사 메켄은 야구에 일가견이 있었다. 괜히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담 기자가 아니라는 듯, 유현과 대화를 할 때마다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거기에 메시지 하나하나에 유현에 대한 애정이 잔뜩 묻어났다. 이제는 유현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거리낌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유현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 모습을 보며 땅의 정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젠가 널 떠난다면, 그건 네 염장질에 넌덜머리가 나서 그런 거라는 것만 알아둬라.
‘흐음. 너 요즘 외로워 보이는데 암컷 햄스터 한 마리 입양할까? 아님 다른 지박령 좀 찾아볼까?’
-……죽일 거다. 언젠가 꼭 죽일 거다.
‘응. 사랑한다, 인마.’
-퉤. 자다가 숨 막히면 내가 목 조른 줄 알아라.
* * *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가 끝난 후 야구팬들의 관심을 끄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4~5위 싸움.
대구 재규어스는 7월과 8월에 거둔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8위에서 5위까지 순위를 끌어 올리는 기가 막힌 반전 행보를 보여줬다.
반면 불펜이 무너진 울산 알바트로스와 투타의 불협화음 및 투수들의 보직 파괴로 인해 무너져 내린 광주 앨리펀츠는 각각 6위와 7위로 순위가 떨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맞이했을 때 5위 대구 재규어스와 7위 광주 앨리펀츠와의 승차가 3경기에 불과한 데다, 5위 대구 재규어스와 4위 서울 나인테일즈의 승차마저도 2.5경기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7월 이후 투수진이 무너지면서 2위 경쟁을 하던 저력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한 모습을 반복한 게 문제였다.
특히나 서울 레오파즈를 상대로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까지 단 1승도 챙기지 못한 게 순위 싸움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팀 별로 32경기에서 26경기가 남은 상황.
시즌 막바지에 어떤 성적을 거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포스트 시즌 티켓 두 자리를 놓고 싸우는 치열한 순위 싸움은 팬들을 야구장으로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두 번째는 1위 싸움이었다.
서울 레오파즈와 대전 펠컨스.
경기 결과에 따라 대전 펠컨스가 따라잡았다가 서울 레오파즈가 다시 벌렸다가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도 서울 레오파즈는 승차 없이 승률로 1위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까진 따라잡혀도, 결코 대전 펠컨스에게 1위는 허용하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다.
9월 26일까지.
9월에 치른 22경기에서 대전 펠컨스는 15승 7패를 기록하며 뜨거운 9월을 보냈다.
유현은 도합 네 번의 선발 등판 기회에서 4승을 챙기며 고작 3실점만을 하는 짠물 피칭을 펼쳤지만, 애석하게도 대전 펠컨스는 결국 1위를 하지 못한 채 시즌 종료까지 고작 6경기만을 남겨두게 됐다.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 서울 레오파즈 또한 15승 7패를 거두며 두 팀 간의 승차는 결국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직전과 줄어들지도 벌어지지도 않았다는 거다.
확실히 서울 레오파즈는 강팀이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무려 여섯 명의 선수가 차출됐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1위를 지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렇다고 대전 펠컨스가 1위 탈환을 포기했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즌 종료까지 대전 펠컨스는 6경기, 서울 레오파즈는 8경기를 남겨둔 상황.
경기 결과에 따라 대전 펠컨스가 극적으로 1위에 오르며 시즌을 끝마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대전 펠컨스의 목표는 하나였다.
남은 경기에 총력전을 해서 최대한 많은 승리를 챙기고, 서울 레오파즈의 경기 결과를 겸허히 지켜보는 거였다.
다행히 대진운이 좋았다.
이번 시즌 대전 펠컨스에게도 유독 약했던 서울 나인테일즈와 광주 앨리펀츠와 각각 2연전을 치른 뒤, 9위 수원 매지션스와 10위 창원 샤크스와 각각 한 경기씩을 남겨뒀으니까.
문제는 서울 나인테일즈는 4위 사수를 위해, 광주 앨리펀츠는 5위와 2경기 차이 나는 7위인 상황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서 남은 경기들에 사력을 다할 거라는 거였다.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도, 서울 나인테일즈 입장에서도, 광주 앨리펀츠 입장에서도.
저마다 배수진을 치고 총력전을 선언했다.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홈 2연전을 치르기 전, 안용석 감독은 선수단을 소집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