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39화 (39/155)

39화 박빙 (1)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까지 74승 42패.

대전 펠컨스는 창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에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서울 레오파즈가 후반기 막바지에 연승을 내달리며 승차 없이 승률로 1위인 상황에서 결국 1경기 차이를 벌리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대전 펠컨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결과였다.

맞대결에서 2승을 가져가며 승차를 없앴고 이후에도 6승 1패로 선전했는데, 서울 레오파즈가 7연승을 하는 바람에 다시 승차가 벌어질 거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아쉬움이 남는 만큼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기간 동안 휴식을 병행하며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동안 다른 구단들과 자체적으로 연습경기를 치르며 컨디션을 조율했다. 선수들은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실전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거기에 안용석 감독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역할이 더 부여됐다.

바로 2군에서 칼을 갈고 있는 베테랑 선수들의 컨디션을 두 눈으로 보고 직접 체크하는 거였다.

“흐음…….”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다들 컨디션이 많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이게 다 감독님께서 고생해 주신 덕분입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한 거라고는 선수들이 과하게 의욕이 넘칠 때 적절하게 조절해 준 게 전부입니다. 클래스가 있는 선수들이라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니 알아서들 잘 하더군요.”

“당장 1군에 올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안용석 감독의 시선은 투수보다 타자들에게 더 갔다. 투수진은 이제 젊은 선수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반면, 타선은 아직까지 베테랑 타자들이 해줘야 할 역할이 많았으니까.

특히나 클러치 능력이 있는 1루수 김태성, 작전수행 능력이 뛰어난 2루수 정경우, 안정적인 3루 수비와 정교한 타격을 자랑하는 3루수 송영인의 1군 합류는 남은 28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다행히 세 선수 모두 컨디션이 좋았다.

김태성의 종아리 부상과 송영인의 허벅지 부상은 이제 많이 좋아진 상태였으며, 정경우는 2군에 내려갔던 근본적인 이유인 수비에서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타격이야 세 선수 모두 일가견이 있으니 각각 부상과 수비 문제만 없다면 1군에서 좋은 활약을 해줄 수 있는 선수들임이 분명했다.

혹시나 컨디션이 안 올라왔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건만, 막상 보고 있자니 안용석 감독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제야 한시름 덜 수 있겠어.’

리빌딩은 갑작스럽게 진행하면 안 된다.

베테랑과 신예 선수들의 조화 속에서, 신예 선수들이 경험을 쌓아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대전 펠컨스는 베테랑 투수들의 집단 컨디션 난조, 베테랑 타자들의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반강제적인 리빌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즌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서 2위를 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반강제적 리빌딩이 긍정적인 면모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예 선수들의 기복이었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영학과 최수환처럼 풀타임을 소화해도 문제없을 듯한 선수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선수들은 미친 활약을 해주다가도 이내 기복 있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후반기가 시작하자마자 두 번의 역전패를 허용한 불펜이 그랬고, 최수환이 트레이드 되어 팀에 합류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빈약한 득점력에 고생했던 타선이 그러했다.

가장 이상적인 리빌딩은 베테랑들이 든든히 버텨 주는 가운데 신예들이 잠재력을 조금씩 드러내며 1군에서 경험을 쌓고 자리를 잡는 거다.

대전 펠컨스의 리빌딩은 베테랑들의 부진과 부상으로 신예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이뤄졌기에 자연스레 부작용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위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 시리즈 우승을 바라보려면 베테랑들이 1군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줘야만 했다.

9월 4일.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가 끝나고 KBO리그가 재개되는 날.

대전 펠컨스는 2군에서 머물고 있던 베테랑 타자들 중 김태성과 정경우와 송영인을 1군으로 콜업했고, 유현-세미 제이슨-김용우-윤기준-하민수 순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했으며, 후반기에 부진한 서규영을 2군으로 보내는 대신 선발 로테이션에서 탈락하고 2군에서 절치부심하며 컨디션을 회복한 언더핸드 이재형을 콜업해서 필승조에 추가시켰다.

남은 28경기.

대전 펠컨스가 1992년 이후 무려 26년 만에 정규 시즌 1위를 위한 승부수를 띄웠다.

* * *

9월 확장 엔트리.

다섯 명의 선수를 추가로 1군에 등록할 수 있는 이 기회는, 때론 후반기 순위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확장 엔트리를 통해 순위 싸움에서 이득을 보는 팀은 대부분 선수층이 두터운 팀들이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는 투수 한 명을 2군으로 내려보낸 뒤 베테랑 타자 셋과 투수 셋을 보강하는 걸로 엔트리 등록을 끝마쳤다.

9월 4일.

선발 등판을 앞두고 몸을 풀고 있는 유현을 향해 펠릭스 곤잘레스가 다가왔다.

“와썹, 현!”

“곤잘레스, 지난번에 집에 초대해줘서 고마웠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초대해 줘.”

“월요일에 오는 건 어때?”

“나야 좋지. 언제든지 초대해 줘.”

“뭐야. 곤잘레스 집에서 파티하는 거야? 나도 가면 안 돼?”

“나도! 파티에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

“다들 와주면 좋지. 모두 환영할게!”

월요일에 펠릭스 곤잘레스의 집에서 몇몇 선수들이 모여 파티를 하기로 약속한 가운데, 펠릭스 곤잘레스는 유현과 따로 대화를 나눴다. 통역사의 도움조차 받지 않은 채, 어설프게나마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펠릭스 곤잘레스가 질문을 던졌다.

“좋았어? 알리사랑? 뜨거운 밤? 불탔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음.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건 맞아.”

“알리사 좋은 여자야. 현 좋은 남자야. 둘이 잘 어울려.”

“고마워. 아. 이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프라이버시? 오케이, 오케이. 비밀 지킨다. 나 입 완전 무겁다.”

펠릭스 곤잘레스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듯한 제스쳐를 취한 뒤, 야수들과 함께 러닝을 하면서 여러 대화를 나눴다.

어느새 어설프게나마 한국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나누며 선수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유현은 그런 펠릭스 곤잘레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펠릭스 곤잘레스에게 여러 의미에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메켄 코퍼레이션과 계약한 것도, 알리사 메켄을 만나게 된 것도 결국 펠릭스 곤잘레스가 자리를 마련해 준 덕분이었으니까.

훈련을 끝낸 유현은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참 동안 알리사 메켄과 코코아톡을 주고받다가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오늘 경기에서도 멋있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알리사 메켄의 응원과 함께 말이다.

* * *

유현과 세미 제이슨의 선발 로테이션 순서를 맞바꾼 건,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후반기에 가장 컨디션 좋았던 선발투수가 김용우이기 때문이었다.

2018시즌 대전 펠컨스가 1위인 서울 레오파즈와 1경기 차이로 2위를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마운드다.

특히나 유현을 중심으로 포텐셜이 폭발한 좌완 투수들 덕분에 안용석 감독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유현, 김용우, 김정수.

대전 펠컨스의 좌완 파이어볼러 3인방은 다들 150km 이상의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면서도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투구를 한다.

그중 김용우는 포심 패스트볼과 고속 슬라이더의 조합으로 타자들을 윽박지르는 스타일이다. 거기에 최근에는 유현으로부터 그립을 배운 투심 패스트볼까지 장착하며 주요 상황에서 적절한 범타 유도까지 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작 유현은 김용우에게 배운 슬라이더 그립이 전혀 쓸데가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김용우의 컨디션이 좋기에, 좌완-우완-좌완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1~3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해서 막바지 승부수를 띄우는 게 대전 펠컨스 코칭 스태프의 계획이었다.

9월 4일 부산 유니콘스와의 홈 경기.

1회 초.

딱!

카운트를 잡기 위해 던진 초구 몸쪽 포심 패스트볼이 펜스를 향해 쭉쭉 뻗어 나갔다. 유현의 시선은 한동안 우측 펜스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유현 선수, 카운트를 잡으려고 들어간 초구 포심 패스트볼이 홈런으로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선두 타자 홈런! 부산 유니콘스가 유현 선수에게 시즌 두 번째 피홈런을 선물합니다!

-하하하. 타자의 표정이 얼떨떨한 걸 보니 홈런을 친 게 믿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워낙 제구가 잘 된 공이었거든요.

-그래서 야구가 재밌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공을 던져도 안타나 홈런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05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도 그랜드 슬램을 맞았잖습니까. 유현 선수는 홈런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음. 흔들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유현 선수, 홈런을 맞았는데 웃고 있어요!

캐스터의 말대로 유현은 웃고 있었다.

구위와 제구 모두 좋았다.

몸 쪽으로 완벽하게 파고들었는데 그걸 타자가 공략해서 홈런으로 만들어 낸 거였다.

어떤 구종을 어느 코스로 던지더라도 안타를 맞을 확률은 존재한다. 한참 빠지는 볼을 공략해서도 홈런을 만들어 내곤 하는 게 야구다.

홈런을 맞았지만 유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피홈런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시작부터 홈런을 맞고 1점을 내줬으니, 이제 9회까지 한 점도 안 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2번 타자에게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3루수 앞으로 가는 땅볼을, 3번 타자에게는 커터를 던져 배트를 박살내며 유격수 앞 땅볼을, 마지막으로 악연이라면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 유니콘스의 4번 타자 안대하를 상대로는…….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삼구삼진을 잡아냈다.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은 158km였다.

-오늘 유현 선수, 1회부터 구속이 잘 나오고 있습니다. 포심 패스트볼이 157km에서 158km를 기록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습니다.

-최근 몇 경기는 제구에 신경을 쓰기 위해 구속을 살짝 낮췄었는데, 오늘 경기는 구속을 다시 끌어 올렸는데도 제구에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경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동안 전력투구를 하면서도 제구를 잡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고 하더군요.

-정 해설위원님이 봤을 때 유현 선수의 노력이 효과가 있어 보이나요?

-네. 효과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구속을 살짝 낮췄을 때만큼 제구가 완벽한 모습은 아니라 계속해서 저 공을 던지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아마 구속을 낮춰 투구하다가 상황에 따라 전력투구를 할 것 같습니다.

해설위원의 분석은 정확했다.

유현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기간 동안 알리사 메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단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그렇게 훈련을 하며 가장 많이 신경 쓴 건, 전력을 다해 던진 15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의 제구를 잡는 거였다.

전력투구한 158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은 분명 위력적이다. 다만 그 공이 가운데로 어정쩡하게 몰리는 순간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7이닝 3실점을 했던 경기 이후로는 구속을 살짝 낮추고 그 대신 제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전력투구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행히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동안 제구를 잡기 위해 했던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구속을 살짝 낮췄을 때처럼 철저하게 보더라인을 파고드는 피칭은 아직 불가능하지만, 실투를 던지지 않을 정도로는 제구가 잡혔다.

제구되는 158km짜리 포심 패스트볼.

유현이 다시 자신의 강력한 무기를 어느 정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오늘의 목표는?

‘내줄 점수 1회 초에 다 내줬으니까, 남은 아웃카운트 24개를 깔끔하게 잡는 것. 집에 가면서 알리사랑 기분 좋게 통화하는 것.’

-아. 커플 좀 다 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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