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38화 (38/155)

38화 휴식 (3)

“양키스와 레드삭스가 1순위, 애스트로스와 인디언스와 로키스가 2순위. 이 다섯 구단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줬으면 합니다.”

“후보가 많지는 않군요.”

“계약 조건만 맞춰 준다면 다른 팀도 상관없긴 합니다만, 조건이 비슷하다면 제가 말씀드린 팀들과 우선적으로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원하는 팀들 중 한 곳과 계약할 수 있게 될 겁니다. 당장 미국에 돌아가는 대로 유현 선수에 대한 홍보를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홍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더 많은 구단들이 경쟁해야 그만큼 원하는 조건을 받아내기 쉬워지는 법이니까요.”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경쟁이 붙으면 몸값은 올라가는 법이다.

KBO리그 출신 메이저리거 중 가장 성공한 여환진만 보더라도, 메이저리그 진출 1년 전에 에이전트와 계약하고 현지 홍보에 열을 올렸었다.

덕분에 마이너리그 거부권을 포함해 선수가 원하는 각종 조항들이 포함된 좋은 계약을 따낼 수 있었고 말이다.

반면 현지 홍보가 미흡했던 일부 선수들 같은 경우는 생각보다 많은 구단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선수들이 가장 원하는 마이너리그 거부권을 포함시키지 못한 채 계약을 해야만 했다.

현지 홍보의 결과가 원하는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대환영이었다.

“한데 로키스는 왜 포함된 겁니까?”

“투수들의 무덤에서 그라운드 볼러가 사이영 상을 받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사실, 로키스만큼 좋은 투수가 간절하게 필요한 팀이 있을까도 싶고요.”

앞선 네 구단은 자신의 합류로 월드 시리즈 우승 확률이 높아질 팀을 땅의 정령의 조언과 최근 성적 등을 고려해서 고른 거였지만, 콜로라도 로키스가 후보에 포함된 건 전적으로 땅의 정령의 개인적인 의견을 반영한 거였다.

투수들의 무덤을 홈구장으로 쓰는 팀에서 사이영 상 투수가 나오는 것처럼 극적인 드라마가 어디 있겠냐고 말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양키스, 레드삭스, 에스트로스, 인디언스를 최우선 후보로 놓고 협상할 것이며, 아마 로키스에게까진 기회가 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한마디로 콜로라도 로키스가 후보에 들어간 건 땅의 정령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하하. 확실히 로키스에서 사이영 상을 받는다면 역사에 남을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일단 말씀하신 후보들 중 유현 선수가 원하는 조건을 맞춰줄 수 있는 팀과 계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좋네요.”

유현은 메켄 코퍼레이션과 계약을 했다.

메켄 코퍼레이션이라면 어떤 팀과 계약을 하건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맞춰줄 거라 믿었다.

그들이 준비해 온 상세한 프리젠테이션 자료는 유현에게 자신이 원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따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계약서를 작성한 직후.

데이비드 메켄이 내내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아 참. 정말로 떨어지는 공을 장착하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유현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데이비드 메켄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 투 피치만으로는 투구 패턴이 단조로워 선발 투수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커터를 장착했고, 어느 순간부터 정면 승부를 고집하는 듯한 모습이 나오는 것 같더니 집요한 보더라인 피칭과 변형 투심 패스트볼 장착을 통해 노히트노런 게임을 만들어 내는 기염을 토했다.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는 것.

데이비드 메켄은 어쩌면 그것이 유현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었다.

재능이 뛰어난 선수는 많다.

하지만 그 재능에 안주한 채 발전하지 못하는 선수 또한 많다. 유현보다 더 좋은 재능을 가지고도 메이저리그 마운드조차 밟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지금처럼 계속 노력하고 발전을 꾀한다면 사이영 상도 막연한 목표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선수와 좋은 계약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유현 선수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유현은 데이비드 메켄과 알리사 메켄 부녀와 함께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코스 요리에 황홀함을 느꼈다.

-맛있다. 너무 맛있어. 괜히 비싼 코스 요리가 아니야! 어쩜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지?

‘많이 먹어. 앞으로 이런 음식 먹을 일이 거의 없을 테니까.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라면 모를까.’

-연애를 해라. 연애하면 이런 음식 자주 먹으러 올 거 아니냐.

‘연애를 한다고 이런 곳에 올 거라는 건 편견이야. 그리고 난 지금 야구가 너무 재밌어서 딱히 연애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 금발 미녀를 보고도 연애 생각이 없어?

‘흐음. 진짜 예쁘긴 하네.’

-청춘남녀가 눈 맞는 게 죄는 아니잖아. 야구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 햄스터는 이렇게 연애에 대해 잘 아는데 왜 암컷 햄스터를 못 만날까.’

-……죽일 거다. 네가 저 여자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할 즈음, 널 죽일 거다.

그날 밤.

적당히 술에 취한 데이비드 메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유현과 알리사 메켄은 밤새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즌 중이라서 술을 입에 대지 못했고 알리사 메켄만 와인을 마셨지만, 취기를 빌리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즐겁고 좋은 시간이었다.

* * *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았다.

준결승전에서 만난 일본 대표팀과 결승전에서 만난 대만 대표팀에게 계속해서 초반부터 대량 실점을 하며 경기 내내 끌려 다녔으니까.

준결승전에서는 3회까지 5실점, 결승전에서는 4회까지 7실점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실점 과정에서 나온 두 번의 유격수 실책이 인터넷상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와 별개로 투수들의 컨디션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다면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 초반부터 대량 실점하며 마운드가 불안함을 노출했는데 어떻게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요악하자면 강태영 쇼였다.

준결승전에서는 홀로 1홈런 6타점을 기록하며 대표팀의 11대9 승리에 기여하더니, 결승전에서도 첫 타석 무사 만루 상황에서 싹쓸이 3루타를 쳐내며 추격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러자 대만 대표팀은 강태영을 상대로 계속해서 고의사구 지시를 내렸다. 두 번째 타석에서 강태영이 1사 만루 찬스를 맞이하자 고의사구를 지시해서 1점을 허용했지만, 이후 병살타를 유도하며 추가 실점의 위기를 벗어났다.

세 번째 타석과 네 번째 타석에서도 강태영은 고의사구로 배트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1루로 걸어 나가야 했다.

문제는 9회 말에 일어났다.

11대11의 동점 상황, 2사 만루.

고의사구 지시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강태영은 왜 자신이 국제전 통산 5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지 대만 대표팀에게 몸소 보여 줬다.

2스트라이크를 먼저 허용했지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풀카운트를 만든 끝에 이어진 13구.

딱.

강태영이 몸 쪽으로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타구를 제대로 받아쳤다. 쭉쭉 날아간 타구는 결국 좌측 펜스를 깔끔하게 넘어가 버렸다.

-호오오오오옴런! 끝내기 그랜드 슬램! 강태영 선수가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금메달을 안깁니다!

-대만 대표팀의 입장에서는 밀어내기로 한 점을 주는 선택까지 하며 강태영 선수와의 승부를 피했는데, 결국은 강태영 선수에게 발목이 잡히고 마네요! 이럴 거면 첫 타석에서도 강태영 선수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뭐든지 겪어 봐야 아는 법이거든요! 맞아 보니까 너무 아파서 안 되겠다 싶었겠죠!

아시안게임을 군 면제 수단으로 이용한다 생각하는 일부 야구팬들은 싫어할 수도 있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9회 말 2아웃 풀카운트 상황에서 강태영의 그랜드 슬램이 나오며 짜릿하게 금메달을 확정짓게 됐다.

그리고 그 때, 알리사 메켄과 함께 그 장면을 TV로 보고 있던 유현은 강태영의 몸값이 올라가는 소리가 인도네시아에서 대한민국까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리사 메켄 또한 유현과 같은 생각이었다.

“강태영 선수 몸값 좀 올라가겠네요.”

“환진 선배 때도 그랬지만,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생각보다 국제대회 성적을 중요시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여환진 선수가 메이저리그 진출 당시 대한민국 언론의 예상보다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건 뛰어난 국제대회 성적 덕분이었죠. 워낙 큰 경기에 강하다 보니까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팀에서 크게 베팅을 한 거죠.”

“태영이도 국제대회 성적이 메이저리그 진출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까요?”

“국제대회 통산 타율이 5할이 넘으니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죠.”

“아쉽네요.”

“뭐가요?”

“제 메이저리그 진출 전 마지막 국제대회가 아시안게임인데 발탁되지 못했잖아요. 몸값 올릴 기회를 놓친 거 같아서 조금 그래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알리사 메켄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시안게임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발탁되지 못한 걸 아쉬워하는 유현을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유현 선수. 한 리그에서 선발투수가 방어율 0점대를 기록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그건 그 선수가 해당 리그에 어울리지 않는 투수라는 뜻이에요. 국제대회 성적과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는 업적이에요.”

-이 여자 말이 맞다. 너에게 국제대회 성적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너도 알고 있잖아?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현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국제대회 성적은 무의미하다는 걸, 리그를 초토화시키고 있는 성적만으로도 메이저리그 진출에 있어 유리한 입장이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국제대회 이야기를 꺼낸 건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위해 횡설수설한 거였다.

그 노력이 통한 걸까?

아니면 알리사 메켄이 처음 만날 때부터 유현에게 호감이 있었던 덕분일까?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흐음. 그나저나 아쉽네요.”

“뭐가요?”

“휴가가 거의 다 끝나 가니까요. 아버지가 강태영 선수와 계약하는 거만 지켜보고, 기사를 작성한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아…….”

“유현 선수, 겨울에 또 볼 수 있을까요? 개인 훈련을 할 때 좋고,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봐도 좋아요.”

유현은 직감했다.

알리사 메켄이 자신에게 또 보고 싶다고 한 건 기자로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네. 또 볼 수 있을 거예요.”

유현은 반쯤 돌직구를 던진 알리사 메켄과 짧지만 진심이 담긴 말로 화답했다.

알리사 메켄은 대한민국에 있는 동안 상당수의 시간을 유현과 함께 보냈다. 훈련이 끝난 이후 유현은 선수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가 아니면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알리사 메켄에게 할애했다.

그사이 자연스럽게 좋은 감정이 싹튼 것이다.

사흘 후.

메켄 코퍼레이션은 공식적으로 강태영과 유현과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걸 발표했고, 그 사실을 미국에 가자 먼저 알린 건 알리사 메켄이었다.

그리고 알리사 메켄은 대한민국에서의 볼일을 마친 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현에게 장문의 코코아톡을 남기고 말이다.

유현은 한참 동안이나 맞춤법이 엉망진창인 코코아톡을 읽고 또 읽었다. 땅의 정령이 연거푸 정수리를 꾹꾹 누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금발 미녀와의 2주, 행복했어?

‘음…….’

유현은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굳이 대답이 필요 없는, 여러 의미가 담긴 제스쳐였다.

그렇게 짧으면서도 길었던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가 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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