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휴식 (1)
KBO리그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맞이했다.
대표팀에 차출되지 않은 대부분의 선수들은 한여름에 찾아온 꿀맛 같은 휴식을 반겼다.
체력과의 싸움이라 할 정도로 2018시즌의 여름은 유독 더웠고, 그로 인해 체력이 떨어진 불펜투수들이 7월 이후 팀을 막론하고 줄줄이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2군에서 절치부심한 선수들이 올라와 부진한 선수들의 자리를 채워 준 팀들은 승승장구했고, 그러지 못한 팀들은 지지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서울 레오파즈와 대전 펠컨스, 그리고 인천 그리핀스는 승승장구한 팀들이었다. 팀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새 얼굴이 튀어나와 빈틈을 메꾸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반면 2위 경쟁을 하다가 지독한 불펜진의 난조로 지금은 격차가 제법 벌어진 4위까지 밀려난 서울 나인테일즈와, 6월까지만 해도 5위로 선전하다 마찬가지로 불펜진이 집단 난조를 겪으며 6위로 밀려난 울산 알바트로스는 후자였다.
팀 성적과 별개로 상당수의 선수들이 지독한 무더위로 인한 체력적 어려움을 호소했기에,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는 대부분의 팀들에게 있어 반가운 휴식기임이 분명했다.
물론 KBO리그 전체로 봤을 때는 마냥 반갑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가 발표될 때부터 줄곧 이어져 온 선수 차출과 관련된 공정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으니까.
인터넷에서 가장 논란이 된 건 유현이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에 발탁되지 못했다는 거였다.
최종 엔트리가 발표할 즈음에 유현이 불펜투수로서 고작 2개월여 맹활약하다 선발투수로 막 전향한 시기였기에 그때는 야구팬들도 그럴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이후 부상으로 낙마한 몇몇 투수들의 자리에 끝끝내 유현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거다.
아시안게임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유현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차출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대부분의 야구팬들은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설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상으로 낙마한 투수들 대신에 차출된 투수들이 모두 미필 투수였고, 유현은 군필 투수이기에 논란은 커졌다.
그리고 분노에 찬 대전 펠컨스 팬의 댓글 하나가, 2만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은 팩트 폭력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니 ㅅㅂ 15승 무패 13홀드 방어율 0.39 투수가 아직 검증이 안 된 거면 다들 투수들은 뭐임? 그냥 대놓고 군 면제 때문에 그렇게 뽑은 거라고 해라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 말고. 베스트 전력 타령하는 거 꼴 보기 싫어서 은메달 기원한다. 제발 은메달 따서 돌아와라. 응원한다.]
물론 유현은 그런 논란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에 발탁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동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으니까.
유현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첫날부터 일찌감치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뿐만 아니라 몇몇 선수들도 자진해서 훈련을 나왔지만, 가볍게 러닝을 하며 몸을 푼 뒤 대부분 트레이닝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반면 유현은 날이 한창 더워지기 전인 오전에 러닝과 쉐도우 피칭을 끝마쳤다.
훈련 후 샤워를 하고 나온 유현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땅의 정령은 유현의 팔뚝 위에 앉은 채 식판 한쪽을 가득 채운 고기를 야금야금 주워 먹으며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구내식당 오리주물럭이 맛있어.
‘응. 펠컨스타디움 구내식당 밥이 맛있긴 하지. 아주머니들 음식 솜씨가 일품이잖아.’
-불화산 치킨 다음으로 맛있는 거 같다.
‘많이 먹어.’
식사를 끝마친 유현이 향한 곳은 트레이닝 룸이었다. 한참 더운 시간에는 밖에서 훈련하기보단 트테이닝 룸에서 근력 운동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원래부터 유현은 근육량이 많은 편이었다.
다만 땅의 정령을 만나기 전까진 자신의 탁월한 신체 능력을 100퍼센트 활용할 줄을 몰랐고, 신체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게 된 이후에야 잠재력을 폭발시키게 됐다.
물론 그 이면에는 철저한 훈련이 있었다.
그저 키 크고 덩치 좋아 보였던 외관이 몇 달 사이 탄탄한 근육질 몸매로 바뀌었다. 불필요한 지방을 걷어내고 근육량을 더 늘린 덕분에 몸 좋은 몇몇 선수들마저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한 몸매가 만들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현의 탄탄한 상반신이 땀으로 흠뻑 젖을 즈음, 한 선수가 유현을 향해 다가왔다.
바로 펠릭스 곤잘레스였다.
“헤이, 현.”
“곤잘레스. 오늘은 가족들하고 시간을 보낼 거라 하지 않았어?”
“그러려고 했는데 손님이 와서 말이야.”
“손님?”
“혹시 저녁에 시간 돼? 손님이 널 보고 싶어 하거든. 실례가 안 된다면 널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말이야.”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에어컨을 틀어놓고 소파에 드러누워서 TV를 볼 생각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에 펠릭스 곤잘레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당연히 시간 되지. 초대해 줘서 고마워.”
* * *
펠릭스 곤잘레스의 대전 외곽에 있는 마당이 넓은 전원주택이었다. 대전 펠컨스 프런트에서 가족이 다 함께 한국으로 온 그를 배려해서 구해준 집이었다.
마당에서는 팔렉스 곤잘레스의 아내가 한창 바비큐를 굽고 있었다.
전에 펠컨스타디움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펠릭스 곤잘레스의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어?’
-나도 모른다.
‘이럴 거라 예상하고 보여 준 거 아니었어?’
-내가 무슨 미래라도 보는 줄 아냐. 난 그냥 미국에서 네게 관심이 있는 기자가 있고, 그 기자가 제법 영향력이 있다 보니까 보여 준 거야. 근데 진짜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있지?
‘곤잘레스랑 아는 사이인가?’
-분위기를 보니 곤잘레스의 아내와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알리사 메켄.
유현과 관련된 기사를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던 기자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알리사 메켄.
기자 생활 8년 차인 만 28세의 기자는, 유독 한국 야구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가 한국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한국에 계속 관심이 갔다.
야구 전문 기자이다 보니 한국에 대한 관심은 곧 KBO리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여환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5시즌 연속 15승을 거두는 걸 보고, 문득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매리너스도 저런 선수를 데려올 수 있으면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창단 이후 월드 시리즈 우승 문턱조차 밟지 못한 팀의 전담 기자의 눈에, 2018시즌이 시작하면서 한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유현이었다.
유현이 개막전 이후 패전조로 처음 마운드에 오르는 걸 봤을 때, 야구 전담 기자인 그녀의 본능이 말해 줬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거다. 그리고 여환진 이상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성공할 거다.
문제는 유현이 처해 있는 환경이었다.
유현은 규정 이닝을 채운 게 데뷔 시즌이 유일한 선수였고, 포스팅 자격을 얻으려 해도 2021시즌이 끝나야 가능했다.
다행히 유현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KBO와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포스팅 시스템 개선을 위해 긴밀한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포스팅 자격 조건을 데뷔 후 7시즌이 아니라 5시즌으로 낮추는 결단을 내렸다.
아직 발표하지만 않았을 뿐, 포스팅 시스템 개선은 사실상 확정난 상황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유현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2년이 앞당겨 질 수 있다. 그리고 일본처럼 최고 입찰액 2천만 달러를 적어낸 다수의 구단과 협상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구단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알리사 메켄은 유현을 만나고 싶었다. 유현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다행히 알리사 메켄은 대한민국행 비행기를 탈 그럴 듯한 핑계를 만들 수 있었다.
펠릭스 곤잘레스의 아내가 알리사 메켄의 오래된 친구였고, 그녀를 보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며 겸사겸사 유현을 만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안녕하세요. 알리사 메켄입니다. 당신의 팬입니다. 칼럼도 적었습니다. 사인해 주세요.”
알리사 메켄은 캐리어 가방에서 주섬주섬 대전 펠컨스 유니폼을 꺼냈다. 자신의 등번호 77번을 마킹해 놓은 유니폼을 꺼내든 채 어설픈 한국어를 하며 펜을 건네는 금발 여성의 모습에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시애틀 매리너스 전담 기자가 무슨 일로 한국에 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팬으로서 사인을 원한다면 해줘야지.
‘당연히 해줘야지.’
유현은 흔쾌히 사인펜을 건네받았다. 유니폼을 받아든 채, 알리사 메켄의 이름 스펠링을 물어보며 사인을 해나갔다.
그 사이 알리사 메켄은 노래를 불렀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바로 대전 펠컨스의 공식 응원가를 말이다.
알리사 매캔은 정말로 대전 펠컨스의 팬이었다. 유현의 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전 펠컨스 또한 사랑하게 되었다나 뭐라나.
-아이러니하군.
‘뭐가?’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적 없는 팀의 전담 기자가, 10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을 못 한 팀의 팬이 됐다는 게.
‘흐음.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두 팀 다 이번 시즌에는 포스트 시즌에 갈 가능성이 높지 않나?’
-높지. 갑자기 팀이 무너지지만 않으면 이번 시즌에는 매리너스도 모처럼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을 거야. 와일드카드이긴 하지만 말이야.
10년 동안 암흑기를 겪었던 팀의 토종 에이스와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가 없는 팀의 전담 기자는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했다.
알리사 메켄의 할머니는 한국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어도 기본적인 의사소통 정도는 가능할 만큼 능숙했다. 유현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유현을 만나러 오기 전에 벼락치기 공부를 한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유현 선수. 혹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얼마 전 유현과 관련된 칼럼을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올렸다.
메이저리그 몇몇 구단들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객관적인 수치들을 바탕으로 한 칼럼이었고, 번역된 기사를 본 유현 또한 만족감을 드러냈었다.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이지만 워낙 좋은 칼럼을 적어준 그녀의 부탁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메이저리그 진출 전에 메이저리그 전담 기자와 인터뷰 할 기회가 오늘 말고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칼럼 고맙게 봤어요.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인터뷰 응할게요.”
“고마워요. 오늘 말고 내일 해도 될까요?”
“내일요?”
“네. 오늘은 기삿거리 없어요. 하지만 내일은 있어요.”
유현이 알리사 메켄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KBO에서 선수들의 포스팅 자격 조건을 7시즌에서 5시즌으로 축소하며, 2009시즌 이후 데뷔한 모든 선수에게 소급 적용할 거라고 발표했으니까.
이 소급 적용은 2011시즌에 데뷔한 유현에게도 적용되는 거였다.
덕분에 유현은 다음 시즌까지만 KBO리그에서 뛰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게 가능해졌다.
기사 내용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도, 유현은 런닝과 쉐도우 피칭을 하며 루틴을 지키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유현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전날 헤어지기 전 연락처를 교환했던 알리사 메켄으로부터 맞춤법은 엉망이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코코아톡이 와 있었다.
유현이 알리사 메켄과 만난 건 유성구에 위치한 한식집이었다. 정갈한 음식과 다양한 찬거리가 마음에 들어 선수들과 몇 차례 온 곳이었다.
식사를 주문하자마자 알리사 메켄이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통역 어플을 켜고서 영어로 유현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휴대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다음 시즌이 끝나는 대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