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질주 (3)
1위 팀과 2위 팀이 맞붙어서 2위 팀이 두 경기를 싹쓸이했다.
덕분에 2경기 차였던 승차가 없어졌다.
수확은 승차가 줄어든 것뿐만이 아니었다.
유격수 하지성이 2016시즌의 타격폼을 되찾은 덕분에, 한동안 홀로 선발 유격수로 출장하며 힘들어했던 장이원의 부담감이 줄어들게 됐다.
서울 레오파즈와의 페넌트레이스 맞대결을 모두 끝마친 뒤, 대전 펠컨스는 아시안게임 브레이크까지 남은 일곱 경기에서 최대한 많은 승수를 쌓는 걸 목표로 삼았다.
다행히 대진 운은 나쁘지 않았다.
투타의 불균형으로 인해 6위로 밀려난 울산 알바트로스와 2경기, 시즌 초의 기세를 이어나가지 못한 채 9위로 내려앉은 수원 매지션즈와 2경기, 연봉 총액 2위일 만큼 과감한 투자를 했지만 8위라는 성적으로 구도 부산을 실망시킨 부산 유니콘스와 2경기, 마지막으로 10위에서 5위까지 올라오는 데에 성공한 대구 재규어스와 1경기까지.
상승세인 대구 재규어스 외에는 사실상 모두 해볼 만한 하위권 팀들이다.
선발 로테이션도 나쁘지 않았다.
남은 7경기에서 세미 제이슨과 유현 원투펀치가 두 차례씩 등판할 수 있다. 에이스들이 등판한 네 경기를 잡고, 남은 세 경기 중 한 경기만 잡아도 5승 2패다.
그 정도 성적을 기록하고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맞이할 수 있다면,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남은 시즌과 포스트시즌 계산이 한결 수월해진다.
인천 와이번스의 분위기가 나쁜 건 아니지만, 기세만 놓고 보면 대전 펠컨스가 더 좋다. 실제로 승수도 대전 펠컨스가 더 많이 쌓으며 꾸준히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코칭스태프는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까지 인천 와이번스와 3경기 이상의 격차만 유지할 수 있다면, 최소 2위로 시즌을 끝낼 거라 확신했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선수들이 대거 복귀할 테고, 9월 확장 엔트리의 수혜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 테니까.
2위와 3위는 천양지차다.
준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치를 때와 플레이오프부터 포스트시즌을 치를 때 선수단이 느끼는 피로감은 차원이 다르다.
최소 플레이오프 직행, 최대 한국 시리즈 직행.
확고한 목표를 지닌 채 대전 펠컨스는 8월의 여름을 뜨겁게 불태웠다.
울산 알바트로스와의 2연전.
세미 제이슨과 유현은 자신들이 어째서 리그 최고의 원투펀치로 불리는지 몸소 증명해 보였다.
세미 제이슨의 경우 울산 알바트로스에게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날만큼은 체인지업으로 타자들의 배트를 연신 헛돌게 만들며 8이닝 5피안타 2사사구 14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했다.
그에 화답하듯 타자들은 11안타 8득점을 합작하며 세미 제이슨에게 대전 펠컨스 외국인 투수 최초의 시즌 15승을 선물로 안겼다.
다음 날 이어진 두 번째 경기.
대전 펠컨스 선수단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최수환의 트레이드 당시 울산 알바트로스로 이적했던 베테랑 투수 중 한 명의 선발 등판이 예고됐기 때문이었다.
‘음. 울산 알바트로스에서 선배님들을 이렇게 기용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아마 1+1 선발일 거야. 울산 알바트로스 투수 팜이 올해 너무 흉작이라,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5선발의 공백을 채우는 게 어려웠겠지. 어설픈 투수를 올리느니 필승조 둘을 묶어서 1+1 선발로 기용하는 게 낫다 판단한 거고.
대전 펠컨스에서 울산 알바트로스로 트레이드 된 베테랑 투수 두 명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잡으며 트레이드 이후 지금까지 무실점 피칭을 이어 오고 있었다.
문제는 팀의 사정이었다.
선발투수 중 한 명이 지독한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갔지만, 당장 그 자리를 채워 줄 선발투수가 당장에는 마땅치 않았다.
고민 끝에 울산 알바트로스 코칭스태프는 1+1 선발 작전을 들고 나왔다.
믿음직한 필승조 두 명이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만 37세와 41세 투수의 1+1 선발.
타선의 힘으로 5위 싸움을 했지만 결국 투수진이 붕괴되며 6위로 내려앉은 울산 알바트로스의 민낯을 보여 주는 기용이었다.
타격에 임하기 전.
대전 펠컨스 선수들은 첫 타석에서 나란히 헬멧을 벗고 고개를 숙이며 팀을 떠난 선배에 대해 예우를 갖췄다.
그리고 1회 초에는 세 타자 모두 외야 플라이로 힘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1회 말.
마운드에 선 유현이 땅의 정령에게 물었다.
‘오늘 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분수령은 4회가 될 거야. 타순이 한 바퀴 돌 시점에서 상대팀 투수는 슬슬 안타를 얻어맞을 가능성이 높거든. 그때 위기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가 중요한데…… 아마 알바트로스 코칭스태프는 두 선수가 6이닝에서 7이닝을 소화해 주길 바랄 텐데 순탄하진 않을 거야. 버티더라도 실점을 얼마나 할지도 문제고.
‘난 내가 어떻게 투구해야 할지 물어본 건데?
-넌 네가 알아서 해.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줬잖아. 날로 먹으려고 하지 마. 그리고 펠컨스의 암흑기를 지탱해 줬던 선수들에게 예의 갖추는 거 잊지 말고.
‘물론. 당연히 예의를 갖춰야지.’
유현은 팀의 암흑기를 지탱했던 옛 필승조에 대해 전력을 다하는 걸로 예의를 갖췄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가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예의는 1구1구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그리고 두 투수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에는 삼진을 잡더라도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지 않았다.
유현이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기 시작한 건, 두 선수가 합이 7이닝 7피안타 2사사구 3실점으로 비교적 역할을 잘 수행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간 이후부터였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울산 알바트로스의 1+1선발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7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3실점을 내주는 데에 그치며 선방했으니까.
문제는 하필이면 마운드에 오른 상대팀 선발 투수가 유현이라는 거였다.
굳이 하나를 더 찾자면 남은 2이닝을 막아 내지 못한 채 6실점을 허용하며 와르르 무너진 불펜 정도일까?
사실 이는 예고된 참사였다.
무실점 호투를 이어가던 필승조 두 명이 1+1선발로 빠진 상황에서, 뜨거운 타격감을 이어 가고 있는 대전 펠컨스 타선을 감당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날.
유현은 9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9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14승을 수확했다.
그리고 언론 인터뷰에서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 마지막 등판을 앞두고 자신의 목표를 밝혔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어 15승 투수 반열에 오르겠습니다.”
* * *
보통 15승은 에이스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세미 제이슨이 울산 알바트로스전에서 15승을 달성하기 전까지, 대전 펠컨스에서 가장 최근에 15승 반열에 오른 투수는 여환진이었다. 정확히는 최근 여섯 번 동안 15승 반열에 오른 투수의 이름이 모두 여환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랬다.
포스트 시즌 진출을 실패한 2008년부터 2017년 사이, 10년 동안 대전 펠컨스에서 15승 투수는 여환진이 유일무이했다.
토종 선발들은 기대치만큼 성장해 주지 못했고, 데려오는 외국인 투수들마다 시즌 중반에 낙오되는 게 매년 반복됐는데 15승을 달성한 투수가 나올 턱이 있겠는가.
세미 제이슨이 대전 펠컨스 외국인 투수 중 최초로 15승을 달성하며 묵은 한을 풀어준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 팬들은 강태영의 시즌 50홈런 도전과 더불어 유현의 행보에 관심을 가졌다.
여환진 이후 사라진 토종 15승 투수의 명맥을 유현이 이어가 주기를 바랐다.
유현의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 마지막 등판은 대구 재규어스와의 원정 경기로 확정됐다.
그 경기 전까지, 대전 펠컨스는 수원 매지션즈와 부산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각각 1승 1패와 2승을 기록하는 데에 성공했다.
8월 16일.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해 대전 펠컨스 선수단이 대구를 방문한 날.
대구의 최고 기온은 38.5도를 기록했다.
한 여름에 훈련을 할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유현은 머리 위에 얼음이 가득 든 봉지를 올려놓고 끈으로 묶어 얼굴에 고정시킨 채로 꿋꿋이 루틴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영석이 혀를 내둘렀다.
“……넌 이 날씨에도 루틴이 지켜지냐?”
“생각보다 참을 만한데요?”
“어휴. 미친 놈.”
유현이 더위를 참으며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건 원래 더위를 많이 안 타는 체질인 것도 있었지만, 땅의 정령의 도움 덕분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매너 있는 땅의 정령님이 특별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폭염 경보와 폭염 특보가 발령된 날에는 당신의 체온이 적정 수준으로 유지됩니다! 더위 먹는다는 핑계로 훈련 거르지 말고 루틴 지키세요!]
땅의 정령의 배려 덕분일까?
훈련을 하는 내내 덥긴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니 열이 올라오는 정도였고, 땀을 흘릴수록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1회 말.
우타자 일색인 대구 재규어스 타선을 상대로 유현은 156km의 포심 패스트볼과 몸쪽으로 꽉 차는 커터를 바탕으로 시종일관 몰아 붙였다.
탈삼진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대구 재규어스의 타자들은 기다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타격을 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반 이상의 타구가 유격수 하지성의 손끝에서 아웃카운트로 연결됐다.
9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8탈삼진 무실점.
8회 말 2사에 허용한 내야 안타로 인해 퍼펙트 행진이 중단되며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완봉승으로 시즌 15승을 달성하며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유현 선수는 아웃카운트를 고작 네 개 남기고 퍼펙트 행진이 중단됐는데도 무덤덤하네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구 재규어스 타자들에게 추가 출루를 허용하지 않은 채 경기를 끝냈습니다. 유현 선수의 심장이 어떤 물질로 이뤄져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을 때처럼 인지하지 못한 채 투구에만 집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경기를 기점으로 마운드 위에서 유현 선수의 집중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거든요. 그 집중력이 제구력의 향상으로 이어지니 타자들만 죽어 나가는 거죠.
해설위원의 말이 맞았다.
유현은 자신의 8회 말 2아웃까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타를 맞는 순간 원정 팀 응원석에서 터져 나온 탄식을 들은 뒤에야 자신이 퍼펙트 행진을 이어 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리고 별 일 아니라는 듯 계속 공을 던졌다.
허용한 안타 하나는 내야 안타였고, 자신은 경기 내내 좋은 공을 던졌다고 확신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서울 레오파즈와의 시즌 마지막 2연전 이후.
대전 펠컨스는 6승 1패를 기록하며 74승 42패로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맞이하게 됐다.
후반기의 시작에 불펜투수들이 두 경기나 역전패를 허용하자, 언론은 대전 펠컨스의 불펜이 위기라는 기사를 연신 쏟아내며 흔들어댔다.
하지만 선수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후반기 19승 7패를 기록했다.
덕분에 3위 인천 그리핀스와의 경기 차를 5경기까지 벌렸다. 사실상 인천 그리핀스에게 순위를 역전 당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문제는…….
여전히 순위표 꼭대기에는 대전 펠컨스가 아니라 서울 레오파즈가 있다는 거였다.
‘결국 1위는 탈환 못했네.’
-음.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난 레오파즈가 주춤하다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에 다시 힘을 낼 거라 생각했거든. 역시 괜히 최근 3년 동안 우승을 두 번 한 강팀이 아니라니까.
‘우리도 잘 했는데 상대가 더 잘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야겠지?’
-사실 난 2위로도 만족한다.
‘의외네. 1위를 노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플레이오프 직행만 해도 한국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거야. 올해는 우주의 기운이 펠컨스를 돕는 해거든.
‘어련하시겠어. 참 지박령다운 생각이다.’
7경기에서 6승 1패.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승수를 쌓았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서울 레오파즈가 같은 기간 7연승을 내달리며 좁혀졌던 승차가 다시 1경기로 벌어졌다는 거였다.
대전 펠컨스는 잘 했지만, 서울 레오파즈가 더 잘해서 같은 기간에 전승을 기록했다.
뭐…… 어쩌겠는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에 더 잘해서 최종 순위표에서는 꼭대기에 대전 펠컨스의 이름을 올리자고 목표를 다잡아야지.
‘휴식기 동안 푹 쉬어 볼까? 여름에는 역시 집에서 에어컨 바람 맞으며 TV보는 게 꿀이지.’
-쉬기만 하려고?
‘그럴 리가 있나. 꾸준히 훈련하면서 단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해야지. 만족하지 말라며?'
그 어느 순간에도 만족하지 말고, 항상 부족한 점을 직시하고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할 것.
유현에게 있어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는 오롯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뜻 깊은 휴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