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질주 (2)
대전 펠컨스가 배출한 레전드 투수 안용석이 새 감독으로 부임한다고 했을 때, 대전 펠컨스 팬들은 진심으로 레전드의 귀환을 반겼다.
그리고 딱 한 가지만을 바랐다.
암흑기 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패배 의식을 지워 내고 팀을 리빌딩 해주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
리빌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포스트 시즌 또한 자연스레 따라올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리빌딩은 팬들이나 구단 수뇌부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진행됐다. 시즌이 진행될수록 가속화 된 포지션별 경쟁 구도는, 자연스러운 리빌딩과 더불어 선수들에게 절박함을 심어줬다.
시즌 107경기를 소화한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는 66승 41패를 마크하며 1위 서울 레오파즈와의 승패 마진을 2경기까지 줄였다.
서울 레오파즈가 후반기에 다소 주춤한 틈을 타서 승차를 좁혔다. 시즌 전 5위도 힘들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던 팀이, 후반기 분위기에 따라 1위를 노려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고작 몇 개월 만에 말이다.
리빌딩이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후반기에 5할 승부만 해도 포스트시즌은 확정된 상황이다.
그러자 팬들은 조심스레 욕심을 부려보았다.
정규 시즌 1위.
시즌 막바지까지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다면 마냥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었다.
그리고 안용석 감독은 그런 팬들의 바람을 잘 알고 있었다. 2경기 차를 좁힐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1위를 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2위에만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철저한 계산이 바탕이 됐다.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투수들이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후 복귀를 위해 칼을 갈고 있으며, 부상으로 낙마한 베테랑 김태성과 정경우와 송영인이 1군의 부름을 기다리며 절치부심 중이다.
거기에 본 헤드 플레이가 빌미가 되어 2군으로 내려간 유격수 하지성과 중견수 이영우는 휴식과 훈련을 병행하며 전성기 시절 타격 폼을 찾기 위해 피 나는 노력을 했다.
현재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이 지칠 즈음, 2군에서 선수들이 올라와 빈자리를 채워 주며 선의의 경쟁을 할 거라 믿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제야 슬슬 투타 모두에서 확실하게 계산이 선다는 거였다.
세미 제이슨-유현-윤기준으로 이어지는 1선발부터 3선발까지는 매우 안정적이다.
거기에 이재형이 2군으로 내려간 뒤 대체 선발로 합류한 김용우 또한 매 경기 5이닝 이상을 소화해 주고 있으며, 하민수는 기복이 있긴 하지만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퀄리티 스타트를 가뿐하게 하는 투수다.
특히나 세미 제이슨-유현 원투펀치는 리그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발진이 안정되니 불펜진의 부담이 전보다 줄어들었고, 거기에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맹타와 트레이드로 영입한 최수환의 포텐셜 폭발로 인해 타선이 살아나자 박빙 승부마저 줄어들었다
부담이 줄어들자 불펜진은 이전의 위용을 되찾았다. 몇몇 선수들이 부진해도 2군에서 새로운 선수가 올라와 귀신같이 자리를 잡아 줬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박빙 승부가 줄어들며 클로저 정우연의 세이브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에는 없었다.
후반기가 시작할 때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이제는 거의 안용석 감독이 원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팀이 운용됐다.
안용석 감독은 잡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경기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고 늘어지며 승수를 쌓아 나갈 계획을 짰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를 이용한 전력질주를 통해서 최대한 승수를 쌓아야만 했다.
3위 인천 그리핀스와의 승차도 3경기에 불과하다. 언제 따라잡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까지 최대한 많은 승수를 쌓고 싶은 건 감독으로서 당연한 욕심이었다.
8월 7일과 8일.
서울 레오파즈와 대전 펠컨스의 맞대결.
양 팀의 팬들과 구단 내부에서, 이번 시즌의 분수령이 될 거라고 예상한 시즌 마지막 맞대결이 폭염 속에 치러졌다.
분위기는 서울 레오파즈 쪽이 더 유리했다.
서울 레오파즈는 외인 원투펀치가 나오는 반면, 대전 펠컨스는 4선발과 5선발이 나란히 출격하며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지니까.
긍정적인 점이라면 서울 레오파즈 킬러 최수환의 타격감이 트레이드 이후 미쳐 있다는 것과, 최근 타선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는 것 정도였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땅의 정령은 그라운드에서 훈련하는 대전 펠컨스 선수들을 바라보며 연신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눌러 댔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펠컨스가 레오파즈를 상대로 정규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다 잡을 것 같아서 그래.
‘선발 로테이션으로 보면 우리가 불리하잖아.’
-내가 볼 땐 1차전은 투수전, 2차전은 난타전이 될 거야. 그리고 1차전과 2차전 모두, 오늘 막 2군에서 올라온 펠컨스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키맨이 될 거야.
‘지성이 말하는 거야?’
-응. 주전 경쟁에서 밀려 2군까지 내려갔다 온 유격수가 판을 뒤흔들 거야.
예상을 하는 땅의 정령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대전 펠컨스와 서울 레오파즈의 시즌 15차전은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조나단 린도어가 8이닝 2실점, 김용우가 7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호투한 것이다.
대전 펠컨스는 레오파즈 킬러 최수환 혼자서 3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맹활약했지만, 다른 타자들은 주요 승부처에서 번번이 조나단 린드어의 땅볼 유도에 막히며 득점을 하지 못했다.
-오늘 두 선발투수의 컨디션이 좋네요.
-그렇습니다. 조나단 린도어 선수는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평소보다 안 나오지만, 다양한 변화구로 주요 승부처에서 땅볼 유도를 기가 막히게 해내고 있습니다.
-김용우 선수는 어떤가요?
-최고 구속 151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 142km까지 나오는 슬라이더, 거기에 낙폭 큰 커브까지, 구사하는 세 가지 구종의 컨디션이 모두 최고입니다. 실투로 인해 홈런 하나를 기록한 걸 제외하면 거의 완벽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어요. 아마 이재형 선수가 1군에 올라오더라도 선발진에서 계속 기회를 받을 걸로 보입니다.
조나단 린도어는 변화구를 이용한 땅볼 유도, 김용우는 7회 까지만 무려 11탈삼진을 기록할 정도로 강속구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시원시원한 피칭으로 상대 타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8회 초와 9회 초.
대전 펠컨스 2군 육성 시스템의 교본과도 같은 투수인 김정수가 김용우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 2이닝 동안 4탈삼진을 곁들이며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2대2 상황에서 맞이한 9회 말.
“대주 준비시킬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보직과 무관하게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를 올려야지.”
“네. 대주 준비시키겠습니다.”
서울 레오파즈는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기 위해 마무리투수 한대주를 올리는 승부수를 띄웠고, 대전 펠컨스는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기 않기 위해 어떻게든지 1점만 만들어 내자고 각오를 다지며 타석을 준비했다.
“더도 덜도 말고 한 점만 뽑아보자고.”
“이길 수만 있다면 번트를 대던 도루를 하던 다 할 테니까, 무조건 한 점 뽑자.”
“한 주의 시작부터 연장 가면 지치잖아? 누가 됐던 좋으니 시원하게 끝내자. 얼음물로 샤워시켜 줄 테니까.”
“비상하자 펠컨스!”
“날아오르자 펠컨스!”
5번 타자 펠릭스 곤잘레스로부터 시작한 공격은, 서울 레오파즈가 그리 원하지 않을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빡!
한대주가 던진 초구가 펠릭스 콘잘레스의 몸에 맞으며 출루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아아. 여기에 몸에 맞는 볼이 나오나요?
-몸쪽으로 붙이려던 게 제구가 제대로 안 된 거 같습니다. 이러면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요?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 건데, 공 1개를 던지고 타자에게 1루 베이스를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대전 펠컨스의 더그아웃이 분주해집니다.
그때부터 대전 펠컨스의 벤치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점.
더도 덜도 말고 1점이면 충분하다.
승리에 필요한 점수를 얻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벤치에서는 번트를 지시했다.
안용석 감독은 번트를 좋아하는 스타일의 감독은 아니다. 2018시즌 대전 펠컨스의 번트 횟수가 압도적인 최하위인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점만 만들어 내면 되는 상황에서는, 병살타의 위험을 차단하고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기 위해 번트만큼 좋은 작전도 없다.
딱!
번트 타구가 3루수 방향으로 깔끔하게 흘러갔다. 3루수가 타구를 잡았을 때는 펠릭스 곤잘레스가 2루에 거의 근접한 상황이었기에 재빨리 1루에 송구해서 타자주자를 잡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어진 지명타자 이정협의 타석에서, 대전 펠컨스는 대타를 기용했다.
[와아아아아아!]
[차영석! 차영석! 차영석!]
대전 펠컨스 팬들은 대타로 나와서 무려 5할의 타율을 보여주고 있는 차영석의 이름을 목청껏 외쳤다. 찬스에서 강하고 팀 배팅을 할 줄 아는 차영석이 경기를 끝내 주기를 바랐다.
딱!
차영석은 팬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1루와 2루 사이를 가르는 총알 같은 타구를 생산하며 안타를 기록했지만, 애석하게도 끝내기 안타가 되지는 못했다.
서울 레오파즈의 야수들이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탓에 펠릭스 곤잘레스가 홈까지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부족했던 것이다.
1사 1․3루 상황.
7번 타자이자 이날 혼자서 2타점을 올린 레오파즈 킬러 최수환이 타석에 들어서자, 서울 레오파즈 코칭스태프는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은 채 고의 사구를 지시했다.
근거는 명확했다.
최수환이 3안타 2타점으로 펄펄 난 반면, 7번 타자인 장이원은 3타수 1안타를 기록하긴 했지만 타구의 질이 좋지 않았다. 1안타마저도 빠른 발을 이용해 만든 내야 안타였다.
거기에 회심의 대타 카드인 차영석까지 사용한 상황에서, 장이원과 승부를 한다면 실점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할 법도 했다.
서울 레오파즈는 전진 수비로 압박하면서 병살타를 유도하겠다는 의도를 대놓고 드러냈다.
1사 만루 상황.
서울 레오파즈의 고의 사구 작전에 대전 펠컨스 또한 작전으로 대답해 줬다.
다시 한 번 나온 대타 작전.
타석에 들어선 건 이날 1군에 올라온 유격수 하지성이었다.
딱! 딱! 딱!
유격수 하지성은 서울 레오파즈의 마무리투수 한대주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집요하게 걷어내고, 빠지는 변화구를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참으며 11구까지 이어진 승부 끝에 풀카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12구째.
한대주의 손끝에서 공이 떨어져나감과 동시에, 마운드 위에 선 투수와 타석에서 칼을 갈고 있는 타자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스쳤다.
‘젠장…….’
‘왔다!’
딱!
밋밋하게 떨어지다 만 체인지업.
하지성은 그 공을 놓치지 않았다. 히팅 포인트에 정확히 맞은 타구는 중앙 펜스를 향해 쭉쭉쭉 뻗어 나갔다.
한대주가 고개를 숙였다.
서울 레오파즈의 든든한 수호신이 다시 한 번 역전의 명수에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호오오오오옴런! 끝내기 그랜드 슬램! 대타 하지성 선수가 팀에게 승리를 안깁니다! 팽팽했던 투수전의 결말은 그랜드 슬램이었습니다!
-방금 전 타격은 하지성 선수가 3할 2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20․20 클럽에 가입했던 2016년을 떠올리게 하는 한 방이었습니다. 그때의 타격 폼을 어느 정도 찾은 느낌인데요. 최근 장이원 선수의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던 차였기에,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는 큰 힘이 될 걸로 봅니다.
다음 날.
대전 펠컨스와 서울 레오파즈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하지성은 모처럼 7번 타자 겸 유격수로 출장했다.
그리고 5타수 5안타 2홈런 6타점 4득점을 기록하며, 5타수 4안타 1홈런 4타점 3득점을 기록한 최수환과 함께 서울 레오파즈의 마운드를 제대로 폭격해 버렸다.
도합 16안타 14득점.
타선의 대폭발로 대전 펠컨스는 서울 레오파즈와의 시즌 마지막 2연전을 싹쓸이했고, 두 팀의 승차는 마침내 0이 되어 버렸다.
서울 레오파즈가 승률에서 앞서며 여전히 1위였지만, 1위 사수에 빨간불이 들어온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하지성의 쇼 타임이라고.
‘야잘알 인정합니다.’
-거 참 더럽게 행복하구만. 이 맛에 야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