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질주 (1)
8월 4일 창원 샤크스와의 원정 경기는 대전 펠컨스 구단과 팬들에게 있어 여러 의미가 있는 중요한 경기였다.
먼저 유현의 노히트노런 달성.
노히트노런은 대전 펠컨스에게 애증의 기록이다.
지금껏 유현을 포함해 네 명의 선수가 노히트노런을 달성했지만, 정작 대전 펠컨스가 배출한 최고의 투수인 여환진은 KBO리그에서 활약한 7년 동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지 못한 채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야만 했다.
여환진의 기량이 부족해서?
아니었다.
운이 따르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암흑기 에이스의 숙명으로 인한 피칭 스타일이 여환진의 노히트노런을 막았다.
여환진과 유현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두 사람 다 공격적으로 피칭하다 보니 사사구가 적었고, 안타를 맞더라도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찌르며 스트라이크/볼 비율을 높게 가져갔다.
다만 여환진은 상위 타순과 클린업 트리오보다 하위 타순에게 허용한 안타가 많았다.
하위 타순에서는 힘을 뺀 투구를 하다가, 안타를 허용하면 전매특허인 서클 체인지업을 이용해 삼진을 잡거나 땅볼 유도를 하면서 최대한 효율적인 피칭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때문에 1피안타 완봉승은 커리어 통산 여섯 번이나 기록했고 10이닝 완투승도 두 번이나 기록했지만, 노히트노런과는 좀처럼 인연이 없었다.
여환진의 미국 진출 이후 토종 에이스에 목말라 있던 대전 펠컨스 팬들은 새로운 토종 에이스 유현의 등장에 환호하다가, 그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자 펠컨스 샵에 있는 유현과 관련된 모든 상품을 하룻밤 사이 매진시키는 걸로 자신들의 애정을 증명해 보였다.
노히트노런 한 번이 대전 펠컨스 팬들에게 감동과 함께 자부심을 안겨준 것이다.
두 번째는 강태영의 시즌 40호 홈런이었다.
대전 펠컨스 팬들이 암흑기를 버틸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 천재 타자 강태영은 2018시즌에도 미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때문에 팬들은 간절히 바랐다.
강태영이 자신의 커리어 사상 네 번째로 시즌 50홈런을 기록한 뒤 이번 시즌을 끝마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를, 여환진처럼 메이저리그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해주기를 말이다.
팬들이 자신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원한다는 건 강태영 또한 익히 알고 있었고, 언론과 야구 관계자들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었다.
입단 동기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자신은 시즌 40홈런을 기록한 날, 강태영은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숨겨 왔던 포부를 드러냈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뒤 다음 시즌은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싶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트레이드로 데려온 3루수 최수환의 포텐셜이 제대로 폭발했다는 거였다.
사실 대전 펠커스의 불펜투수를 탐내는 구단은 많았고, 때문에 대전 펠컨스는 야수진이 두터운 몇몇 구단과 2주 가까이 물밑 협상을 하면서 팀을 위한 카드를 준비하려고 노력했다.
여러 팀 중 울산 알바트로스와 최종적으로 트레이드가 진행된 건 팀의 의중, 그중에서도 장광한 수석코치의 적극적인 어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수환의 경우 타격 폼에 살짝만 변화를 줘도 타구에 더 힘이 실릴 테고, 선구안도 좋아져서 수준급 3루수라고 목 놓아 외쳤던 것이다.
장광한 코치는 트레이드 직후 팀에 합류한 최수환과 단독 면담을 했다. 그리고 최수환이 데뷔할 때부터 줄곧 봐오며 아쉬웠던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최수환은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송영인의 복귀 후 다시 백업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백업 생활이라면 데뷔 이후 울산 알바트로스에서 한 걸로 충분했다.
타격 폼을 살짝 수정하고 배트를 조금 더 무거운 걸로 바꿨다. 레벨 스윙을 하던 이전과 달리 어퍼 스윙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 변화로 인해 최수환은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이적 후 11경기에서 타율 4할 7푼 5리 7홈런 22타점 15득점 6도루를 기록하며 대전 펠컨스가 2주 동안 12경기에서 9승 3패를 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나 4일 경기에서 보여 준 만루 홈런의 임팩트는 대전 펠컨스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트레이드로 인한 변화와 기회로 인해 제대로 동기 부여가 된 걸로 보였다.
덕분에 팬들은 최수환을 확실하게 인정했다.
송영인이 돌아오더라도 주전 3루수는 최수환이라고, 송영인이 주전을 꿰차려면 시즌 초의 맹활약을 다시 재현해야 한다고 말이다.
8월 5일 창원 샤크스와의 일요일 경기까지 잡아냈을 때, 대전 펠컨스와 서울 레오파즈의 승차는 고작 2경기에 불과했다.
이에 안용석 감독은 선언했다.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까지, 가능성이 보이는 경기라면 과감한 승부수를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 잡을 거라고 말이다.
2군에서 올라올 전력이 다수 있기에 할 수 있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지나치게 정석적인 팀 운영으로 일부 극성인 팬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던 안용석 감독이, 페넌트레이스 1위를 위해 각오를 다졌다.
* * *
한편.
숙소로 돌아온 유현은 땅의 정령과 치킨을 나눠먹으며 뒤늦은 저녁 식사를 했다.
닭 뼈가 수북히 쌓일 즈음, 땅의 정령은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타 그의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수고했다. 따로 보상을 줄 생각은 없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조언을 잘 수용했기에 보상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선택지 중에 골라 봐라
[자비로운 땅의 정령님의 특별 선물! 노히트노런 달성 기념으로 보상이 지급됩니다!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시면 됩니다!]
[목욕탕 투시 1회 이용권(내장 속까지 투시 가능․철컹철컹 책임 안 짐), 윤준모 작가의 기레기 탈출기 7권 전권(냄비 받침으로 쓰기 좋음), 귀신 보는 안경(심장마비 걸려도 책임 안 짐), 유체이탈 1회 체험(다시 몸에 못 돌아와도 책임 못 짐), 예쁜 누나가 나오는 동영상(내가 본 여자 중에 제일 예쁨) 중에 하나를 고르시길 바랍니다.]
…….
유현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그는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고 보상을 바리지 않았다. 긴장을 하지 않기 위해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땅의 정령이 준다고 하니 거절하지 않고 받을 생각이었다.
근데 선택지가 참…….
어째 죄다 고르기 싫은 선택지뿐이었다.
“뭘 고르라는 거야? 이거 보상 맞아?”
-나라면 첫 번째를 고를 것이다. 목욕탕을 훔쳐보는 건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 아닌가?
“남의 내장 투시해서 뭐하게?”
-기레기 탈출기 전권은 어때?
“냄비 받침대 따위 필요 없어. 흐음…… 예쁜 누나 나오는 동영상? 이걸로 하자.”
-좋은 건 알아가지고. 알겠다. 눈 감아라.
유현이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동시에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모의 금발 여성이 컴퓨터 앞에 앉아 양손을 꽉 움켜쥔 채 야구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유현은 여성이 보는 동영상이 뭔지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9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유격수 앞 땅볼로 잡아내는 순간이었으니까.
“Holy shit! @[email protected]#^#@^@!~!!$%@!”
여성은 유현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순간, 의자에서 일어난 어퍼컷 세레모니를 따라하며 영어로 뭔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유현이 알아들은 건 ‘Holy shit’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도통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후 여성은 유현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그 순간을 반복해서 재생하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은 채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들겨댔다.
이미지는 거기서 끝이 났다.
눈을 뜬 유현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땅의 정령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예쁜 누나가 나온다고 했지, 그 누나가 뭘 한다고는 말 안 했다.
“그러니까 방금 본 게 뭐냐고. 보여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네가 방금 본 그 여자는 메이저리그 기자야. 시애틀 메리너스 전담 기자이면서 네 팬이기도 하지. 그리고 지금 너와 관련된 사심이 살짝 담겼지만 객관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한 칼럼을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작성 중이고. 메이저리그 팬들 사이에서는 좋은 칼럼을 쓰는 기자로 나름 유명하니까, 너에 대한 기사 또한 제법 관심을 받을 거야.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나한테 관심을 가질 거라는 소리야?”
-관심이야 이미 가지고 있지.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경기에서도 9개 구단 스카우터가 직관을 했으니까. 강태영에 대한 관심 또한 포함되어 있는 결과긴 하지만 너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 맞아. 다만 칼럼 덕분에 관심이 더 커질 거야. 그 동네는 수준급 투수라면 큰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데려오고 싶어 하는 빅 마켓이 많거든.
“빅 마켓이라…….”
-다음 경기 때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전보다 더 많은 스카우터들이 널 보러 올 테니까.
* * *
8월 6일.
원정을 끝내고 대전으로 돌아온 유현은, 출근 전 소파에 드러누워 아무 생각 없이 TV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유현의 배 위에 올라탄 땅의 정령이 목청껏 소리쳤다.
-기사 떴다! 드디어 떴어!
“진짜로?”
-컴퓨터 켜고 확인해봐라. 진짜로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메인에 너와 관련된 기사가 걸려 있으니까 말이야.
“오케이.”
유현이 곧장 컴퓨터를 켰다.
이내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메인에 자신과 관련된 기사가 걸려 있는 걸 확인했다. 영어를 몰라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사진이 대표 이미지로 첨부되어 있었으니까.
물론 당연하게도 영어로 써진 기사의 내용을 이해할 순 없었다. 야구와 관련된 몇몇 용어들만 알아봤고, 노히트노런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눈치 챘다.
-기사 해석 좀 해줘.
‘네가 여환진 이후 모처럼 나타난 KBO리그의 괴물 투수라고, 이번 시즌 보여준 모습만 놓고 보면 여환진보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활약할 가능성이 높데. 네 구종과 투구 패턴에 관한 분석도 잘 되어 있고, 무엇보다 네가 시즌을 치르면서 노출된 단점을 지난 경기에서 만회하며 두뇌 피칭을 했다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 역시 괜히 네 팬이 아니라니까.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게 객관적인 팩트만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기자님이시네.”
-기사에는 네 유일한 단점도 언급되어 있어.
“단점? 뭔데?”
-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2021시즌까지 뛰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이번 시즌 이후에 일어나게 될 어떤 변화로 인해, 그 시기가 단축될 수 있다고 언급한 채 기사가 끝났어.
“어떤 변화? 전부터 생각한 건데, 혹시 포스팅 제도가 나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되기라도 하는 거야?”
땅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이 포스팅 자격을 충족하기 위해선 2021시즌까지 뛰어야 한다.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유현이 팀에서 방출당하거나, 혹은 포스팅 제도에 어떤 변화가 생기거나.
대전 펠컨스가 굴러온 복덩어리인 유현을 방출할 이유가 없으니, 결국 포스팅 시즌에 변화가 생긴다고 보는 게 맞다.
-맞아. 아마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즈음에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지 않을까 싶은데, 포스팅 제도에 변화가 있을 거야. 그러면 넌 다음 시즌까지만 KBO리그에서 뛰면 포스팅 자격을 얻을 수 있어.
“아시안게임 브레이크라…… 기자가 포스팅 제도 변경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걸 보면, 메이저리그 쪽에서도 소문이 돌고 있나 봐?”
-알 만한 구단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래서 최근 들어 널 보러 오는 스카우터들이 많아진 거고. 물론 앞으로는 더 많아질 거야. 앞으로는 모든 등판이 쇼 케이스라고 생각해. 네 1구 1구가 몸값에 반영된다 생각하면 타자를 상대로 쉽게 승부할 생각을 못 할 거야.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등판이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앞으로는 매 경기 증명을 해보여야 한다.
자신이 비싼 몸값을 받을 가치가 있는 투수라는 걸, 자신을 데려가고 싶다면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남은 경기에서 전승하고 0점대 방어율 다승왕 정도 하면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에게 확실히 주목받을 수 있겠지?”
-그렇고말고.
“거기에 삼진왕까지 하면 초대박 계약은 따 놓은 당상인데 말이야.”
-응. 지금 있는 구종으로 탈삼진 왕 도전해 봐. 지금부터 매 경기에 20개씩 잡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네.
“쳇. 안 넘어오네.”
-욕심이 과하면 독이다.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거에만 집중해라.
피식 웃은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다승왕이 되는 것을 페넌트레이스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2경기 차에 불과하니까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전에 1위를 탈환할 수 있다면 최고겠지.”
팀 또한 지금보다 더 비상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