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32화 (32/155)

32화 변화 (4)

유현이 선발 전향 이후 완투를 밥 먹듯이 하다 보니, 몇몇 투수 출신 해설위원들은 유현에게 기대감을 품었다.

퍼펙트게임.

KBO리그 역사상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 기회는 몇 번 있었다.

경기가 반환점을 돌 때까지 출루를 허용하지 않고 무결점 피칭을 보여 준 적이 있으니까.

문제는 실투였다.

수비 실책으로 인한 출루와 안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유현이 무결점 피칭을 이어가다 허용한 안타 중 상당수가 실투를 공략당면서 만들어진 거였다.

그 말인 즉, 실투만 줄인다면 출루 허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하면 실투를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완벽한 투구를 할 수 있을까?

일주일 사이.

유현은 땅의 정령과 특훈을 하며 해답을 찾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이번 경기에서 어느 정도 빛을 발했다.

불펜 피칭을 생략하며 어깨 소모를 줄이고, 주요 상황에서는 전력투구보다 제구에 신경 썼으며, 새로운 스타일의 투심 패스트볼에 타자들의 방망이가 연신 헛돌았다.

일주일 동안 푹 쉰 덕분에 유현의 컨디션은 좋았다. 그럼에도 최고 구속이 156km에 머무는 데에 그칠 만큼, 구속보다는 보다 완벽한 제구에 초점을 맞춘 채 실투를 던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유현은 거기에 완급조절을 더했다.

하위타순을 상대로는 구속을 조금 더 줄였다.

단, 이전과 달리 쉽게 승부하지는 않았다. 구속만 줄였을 뿐 제구에 신경 쓰며 철저하게 까다로운 코스로만 투구했다.

타자들이 자신의 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걸 지켜보며, 승부수가 먹힐 때마다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며 유현은 확신했다.

자신의 변화가 틀리지 않았다고.

동시에 깨달았다.

어느 순간 자신이 주요 상황에서 타자와 힘 대 힘으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감이 아닌 오만이었다는 걸 말이다.

파이어볼러들은 더러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타자들과 정면 승부를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감 있게 투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그게 스스로를 함정으로 빠트리는 최악의 판단이라는 걸, 정면 승부만큼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기 쉬운 투구 패턴이 없다는 걸 모른다.

자신감이 투수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니까.

‘컨디션이 좋을수록 더 철저하게 제구하고 약점을 후벼 파야 한다. 제구 안 된 전력투구한 공보다, 80퍼센트 힘으로 던지는 제구 잘 된 공이 더 위력적이다. 절대 타자와 힘 대 힘으로 승부하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유현은 땅의 정령으로부터 배웠던 것들을 계속해서 되새기며 투구에만 집중했다.

그 때문일까?

유현은 자신이 21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단 하나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걸, 대기록까지 남은 아웃카운트가 고작 여섯 개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땅의 정령은 유현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유현의 피칭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 * *

유현이 마운드에서 단 하나의 안타조차 허용하지 않고 실책으로만 한 차례의 출루를 허용한 채 언터쳐블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던 그때.

대전 펠컨스 타자들은 창원 샤크스의 언더핸드 선발투수를 4회 초에 강판시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2번 타자 겸 3루수로 선발 출장한 최수환이 있었다.

1회 초부터 빠른 발을 이용해 3루타를 만들어내며 선취 득점의 발판을 마련하더니, 3회 초에는 자신의 통산 첫 만루 홈런까지 기록했다.

이후에도 대전 펠컨스 타선들은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주자를 보냈다 하면 반드시 득점으로 연결하는 집중력을 보여주며 7회 초까지 11대0으로 점수 차를 벌렸다.

거기에 8회 초에는 강태영이 자신의 시즌 40호 홈런을 무려 인사이드 파크 홈런으로 장식하며 스코어는 12대0.

사실상 승리가 확정된 듯한 점수 차에도 불구하고 유현은 8회 말에 마운드에 올랐다.

투구 수 81개로 7회 말까지 삼진을 아홉 개 잡으면서 실책으로 인한 출루를 한 차례 허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피칭을 선보였다.

남은 여섯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기 위해, 유현은 마운드 위에서 다시 한 번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투구에만 집중한 탓에 정작 대기록이 진행 중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한편.

실책으로 인한 출루 한 번을 기록한 게 전부인 창원 샤크스 타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힘없이 당하기만 할 거야?”

“그럴 순 없죠.”

“더도 덜도 말고 일단 안타 하나만 치자. 오늘 유현의 공이 너무 좋긴 하지만…… 어떻게든 안타 하나만 만들어보자고.”

“다 좋은데 그 빌어먹을 새 투심 패스트볼만 안 던졌으면 좋겠어요.”

“가뜩이나 미친놈이 투심 패스트볼을 두 종류로 던지니까 감당이 안 돼요. 오늘따라 실투도 안 나올 정도로 컨디션도 좋은데요?”

“나오긴 나왔지. 한참 빠지는 공이 나와서 의미가 없었을 뿐이지.”

“아무튼, 일단 안타 하나를 치는 걸 목표로 하자. 그 다음은 일단 안타부터 치고 나서 생각하도록 하고.”

“샤크스 파이팅!”

그 어떤 팀도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질 땐 지더라도 대기록의 희생양은 아니었다. 차마 그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8회 말에 12대0이면 이미 승기는 기울었다.

그럼에도 창원 샤크스 타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을 불태웠다.

비록 지금은 최하위지만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창단 첫 시즌을 제외하고는 매 시즌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 만큼 창원 샤크스는 강팀이었다. 한국 시리즈에서 3승을 먼저 기록하며 우승 트로피를 거의 들어 올릴 뻔한 적도 있었다.

상대하는 팀들마다 무조건 위닝 시리즈를 하겠다며 덤벼드는 통에 고난의 시즌을 보내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기록을 헌납하는 건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더도 덜도 말고 안타 하나.

확고한 목표를 지닌 채 창원 샤크스의 타자들이 타석에 임했다.

문제는…….

‘쯧쯧쯧. 다 보인다, 다 보여.’

대전 펠컨스의 베테랑 안방마님이 타자들과의 심리 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능구렁이라는 것, 그리고 마운드에 있는 괴물 같은 선발투수의 제구가 오늘따라 유독 미쳤다는 거였다.

공 반 개 차이.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들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때마다 타자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볼 카운트가 불리해지면 살짝 빠지는 하이 패스트볼이나, 존 앞에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며 싱커보다 더 떨어지는 새 투심 패스트볼이 들어온다.

안타를 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찬 타자들 입장에서는 그 공들에 스윙이 나가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시원한 헛스윙 삼진.

알면서도, 뻔한 패턴임에도 안타를 노리고 있기에 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는 전략이 통하느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하이 패스트볼과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에 반응하지 않고 참는 순간, 집요하게 보더라인에 걸치는 투구를 반복한다. 타자가 약한 코스를 쉴 새 없이 후벼 파며 물어뜯는다.

어떻게 타격을 하더라도 좋은 타구가 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알면서도 타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타격을 할 수밖에 없다.

타격을 하지 않으면 삼진이 될 테니까.

게다가 오늘의 주심은 몸 쪽에는 관대하고 바깥쪽에는 야박한 스타일이다. 좌타자 입장에서는 투심 패스트볼이, 우타자 입장에서는 커터가 몸 쪽 깊숙이 파고들면 도통 답이 나오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8회 말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아웃카운트는 각각 하이 패스트볼과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로 헛스윙 삼진을 유도, 세 번째 아웃카운트는 투수 정면으로 날아온 공을 본능적으로 잡아내며 손쉽게 아웃카운트를 챙겼다.

아웃카운트 세 개를 남겨두고 투구 수는 94개.

삼진을 11개나 잡고 8회까지 이닝을 소화한 것에 비하면 그리 많은 투구 수는 아니었다.

게다가 8회에도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156km로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기에, 9회 말에도 구위가 떨어질 가능성은 낮았다.

9회 말.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조용해?’

-이제 눈치 챘냐.

‘그러고 보니 오늘은 너도 거의 말을 안 걸었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집중력이 좋은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지만, 궁금하면 전광판을 봐. 대신 경기 끝나고 후회해도 난 책임 못 진다.

‘전광판?’

유현이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실책으로 인한 출루 외에 오늘 창원 샤크스의 타자들에게 단 한 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1구 1구에 집중하며 실투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보니, 자신이 대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보통 선수들은 대기록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해당 선수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괜히 말을 걸어서 집중력을 흐트러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렇다고 땅의 정령과 대화를 한 유현의 집중력이 흔들렸냐면…….

‘노히트는 뭐 보상 같은 거 없어?’

-일단 하고 말해라.

‘그래. 노히트 한 다음에 불화산 치킨 사주고 조르다 보면 뭐라도 하나 주겠지.’

아니었다.

유현의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공을 잡는 순간, 방금 전 땅의 정령과의 대화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은 채 투구에만 집중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첫 번째 타자를 상대로는 4구째에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서 헛스윙 삼진, 두 번째 아웃카운트는 2구째에 타자가 투심 패스트볼을 타격해 준 덕에 유격수 앞 땅볼로 손쉽게 잡아냈다.

카운트가 들려오지 않았다.

혹여나 자신들의 응원이 대기록까지 아웃카운트를 하나 남겨둔 상황에서 유현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까 봐 걱정한 것이다.

그리고 유현은…….

딱!

좌타자 몸 쪽으로 바짝 붙는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했다.

그리고 원정 응원석을 바라보았다.

[여섯!]

대기록을 달성하는 순간에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응원에, 유현이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긴장감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임 셋! 경기가 끝납니다. 유현 선수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시즌 13승을 달성합니다! KBO리그 통산 15번째 노히트노런이 나왔습니다!

-구속을 살짝 줄이고 제구에 포커싱을 맞춘 것과, 구속은 조금 더 느리지만 떨어지는 각이 큰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준비해 온 게 주효했습니다. 안 그래도 타자들에게 공포로 자리매김한 유현 선수가 한 단계 더 강해졌네요.

-이 선수, 과연 이번 시즌이 끝날 때 어떤 성적을 기록하고 있을지 기대됩니다.

경기가 종료되자마자 유현은 차영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경기 내내, 아니 이번 시즌 선발 등판을 하며 호흡을 맞춘 모든 경기에서 최고의 리드를 보여준 차영석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포수 마스크를 벗은 차영석이 마운드 위에 서있는 유현에게 달려왔다. 유현을 끌어안은 채 몇 바퀴를 돌리고서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현! 유현! 유현!]

원정 응원석을 가득 채운 대전 펠컨스 팬들이 기립한 채 유현의 이름을 연호했다. 창원 샤크스의 팬들마저도 박수를 치며 대기록을 달성한 투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유현은 모자를 벗은 채 관중석을 향해 몇 차례 인사를 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9이닝 12탈삼진 무실점.

새 무기를 장착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에 KBO리그 통산 15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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