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31화 (31/155)

31화 변화 (3)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강팀과 약팀을 판별하는 기준 중 하나로 연패를 꼽는다.

연승은 길게, 연패는 짧게.

연승을 할 때는 확실하게, 연패를 할 때는 최소한으로 끊는 모습을 보여줘야 강팀이다.

하위권 팀들도 종종 연승가도를 내달린다.

그럼에도 그들이 상위권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건, 상승세 이후 연패를 겪거나 무기력한 경기력을 보여 주며 루징 시리즈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2018의 대전 펠컨스는 긴 연승과 짧은 연패라는 강팀의 덕목을 제대로 보여 주는 팀이었다.

어떤 팀처럼 10연승을 하진 못했지만, 10연승 이후 10연패를 하며 롤러코스터를 타지도 않았다.

서울 레오파즈와의 주말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6연승이 끊긴 후 맞이한 수원 매지션즈와의 주중 3연전.

첫 경기를 잡으며 우려했던 연승 후의 연패를 하지 않았고, 두 번째 경기도 내리 잡으며 위닝 시리즈를 확보하는 전형적인 강팀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줬다.

마지막 경기에서 수원 매지션즈의 타선이 폭발하며 11대 6으로 패배하긴 했지만, 연승이 끊긴 직후의 시리즈에서 위닝 시리즈를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게다가 최근 들어 확실히 타선이 살아나고 있는 모양새였다. 최근 컨디션과 성적만을 놓고 기용하는 방식이 선수단 내부에서 경쟁 구도를 만들어 내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애초에 투수들은 개막 이후 대부분의 경기에서 제 몫을 해주고 있었다. 몇몇 투수가 흔들릴 때마다 2군에서 올라온 투수들이 기가 막히게 자리를 잡아 주면서 투수진이 더욱 견고해졌다.

문제는 득점력이 부족한 타선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박빙 승부는 투수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한 주 동안 두 번의 역전패를 당하는 충격을 겪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넉넉한 득점 지원으로 투수진의 부담을 줄여준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경기 운영이 수월해지는 게 당연했다.

8월 4일.

금요일 하루를 쉬고 맞이한 창원 샤크스전에서 대전 펠컨스는 유현을 선발로 예고했다.

정확히 일주일만의 등판이었다.

일주일 전과 지금, 유현에게는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바로 등판 전에 늘 하던 불펜 피칭을 과감하게 생략한 것이다.

불펜 피칭 또한 공을 던지는 거고, 결국 투수를 더 빨리 지치게 만든다는 땅의 정령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등판 전의 불펜 피칭은 투수에 따라 필요한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몸이 늦게 풀리는 스타일의 투수들에게는 경기 전 불펜 피칭을 통한 컨디션 조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유현은 그런 타입의 투수가 아니다.

경기 전 연습 투구 몇 번 만으로도 조율을 끝마칠 수 있기에, 굳이 불펜 피칭을 하며 체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팡! 팡! 팡!

마운드에 선 유현은 제구에 신경을 쓰며 연습 투구를 몇 번 해보았다.

공이 원하는 코스에 확실히 제구가 되는 느낌이었다. 차영석 또한 만족스러운지 포수 마스크를 벗고 유현에게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오늘 공 좋아. 자신 있게 던져도 되겠다.”

“어제 말씀드렸던 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걱정 붙들어 매라. 월요일에 불펜에서 공 받아준 다음부터, 그 공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했으니까.”

“그럼 전 선배님만 믿고 던지겠습니다.”

13승 무패 13홀드 방어율 0.48

이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는, 7이닝 3실점을 하고서 자신에게 변화를 줬다.

땅의 정령은 2군 스프링캠프 당시부터 유현을 가르칠 때마다 항상 강조했다.

그 어느 순간에도 만족하지 말라고.

더 발전하기 위해, 더 완벽해지기 위해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라고, KBO리그에서 만족하고 안주한다면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없다고.

그래서 유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이 잘한 부분보다 못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강화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 완전무결한 투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이다.

이번에 준 변화는 커터를 배운 것처럼 엄청난 건 아니었다. 몇 가지 사소한 변화에, 약간 눈에 띄는 변화를 하나 추가한 게 전부였다.

불펜 피칭의 생략 또한 변화의 일환이었다.

어쩌면 별거 아닌 변화일 수도 있고, 정작 투구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현은 확신했다.

이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자신을 조금 더 단단한 투수로 만들어 줄 거라고 말이다.

-오늘 경기의 목표는?

‘타자들 농락하기.’

-그 공을 던졌을 때 타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만 해도 재밌지 않아?

‘짜릿해서 미칠 것 같지.’

마운드에 선 투수가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일까? 유현에게는 자신의 계획대로 타자가 따라와 줄 때였다.

오늘 경기에서, 유현은 자신의 의도대로 타자들을 미친 듯이 농락하는 게 목표였다.

* * *

여전히 유현의 인터벌은 빨랐다.

타자들에게 고민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다. 패스트볼 3종 세트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타자의 판단력을 흐릴 필요가 있으니까.

다만 1회 말에 유현이 보여 준 피칭은 평소와는 살짝 다른 부분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보더라인 안쪽으로 살짝 붙인다는 느낌으로 투구했다면, 오늘은 정말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다는 느낌으로 투구했다.

공 한 개 정도의 미묘한 차이.

하지만 그 차이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8대2, 심하면 9대1까지도 갔던 스트라이크/볼 비율이 3회 말까지만을 놓고 봤을 대 7대3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스트라이크 콜을 받을 것 같았던 공이 볼 선언이 되더라도 유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집요한 보더라이 피칭을 이어갔다.

그리고 창원 샤크스의 타자들은 그런 유현의 피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3회 말까지 단 한 타자도 출루를 하지 못했다.

“오늘 유현 컨디션 장난 아닌데?”

“그러게요. 구석구석 찌르고 들어오는 게 전에 상대했을 때보다 더 악랄해요. 안 그래도 까다로운 공이 더 까다롭게 들어와요.”

“레오파즈 놈들은 이걸 어떻게 친 거야?”

“1회에 2점은 운이 좋았고, 7회에 홈런은 유현이 실투를 던진 걸 운 좋게 받아 넘긴 거래요.”

“젠장. 우리도 운에 기대야 하는 건가?”

“불규칙 바운드가 튀던지, 아니면 실투가 들어오던지. 뭐라도 하나 되길 바라야죠.”

실투.

유현은 실투를 던지지 않게 노력했다.

인터벌을 빠르게 가져가면서도 한 구 한 구 정성을 들여 완벽한 제구를 한다는 느낌으로 투구를 이어나갔다.

그럼에도 유현은 4회 말에 첫 출루를 허용하고 말았다. 창원 샤크스 타자들이 바라던 대로 불규칙 바운드가 튀면서 유격수 장이원이 수비 실책을 기록하고 만 것이다.

장이원이 유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괜찮아, 괜찮아. 다음에 타구 가면 잘 잡아 줘. 부탁할게.”

“네! 꼭 잡겠습니다!”

유현은 수비 실책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라운드 볼러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수비 실책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불규칙 바운드가 워낙 기묘하게 튀어 유격수 장이원이 잡지 못하는 게 당연한 수준의 타구였다.

오늘 경기의 첫 출루.

2사 1루 상황, 창원 샤크스의 4번 타자 나중범을 상대하기에 앞서 유현은 땅의 정령과 짧게 간결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출루를 허용한 상황에서 4번 타자라, 새 무기를 시험하기에 딱 좋잖아?

‘좋아. 그럼 개봉박두다.’

-헛스윙 삼진 가즈아!

유현이 모자 끝을 만졌다.

준비한 무기를 사용하자는 신호에 차영석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초구는 몸쪽으로 바짝 붙이는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스트라이크, 2구는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공에 헛스윙을 하며 스트라이크.

3구째.

2스트라이크를 잡아놓은 유리한 상황에서 유현은 나중범에게 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걸렸다.’

아무리 좋은 공이 좋은 코스로 들어오더라도, 들어올 걸 알고만 있다면야 공략을 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나중범은 유현이 자신을 상대로 초구와 마찬가지로 투심 패스트볼을 던질 거라 예상했고, 때문에 정확한 타이밍에 스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느려?’

투심 패스트볼이 평소보다 느렸다.

거기에 초구로 던진 것보다 더 많이 떨어지면서, 결과적으로 나중범은 너무 이른 타이밍에 헛스윙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나중범은 한참 동안 멍하니 차영석의 미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비를 준비하는 야수들에게 말했다.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이 조금 이상해.”

“3구 말하는 거죠?”

“어. 분명 초구도 투심이 들어왔잖아. 그래서 투심에 타이밍을 맞추고 배트를 휘둘렀는데, 평소보다 더 느리면서 낙폭이 크더라고.”

“그러고 보니까 원래 던지던 것보다 더 떨어진 것 같더라고요. 구속도 아까 보니까 147km? 정도 나오는 거 같던데요?”

“지금도 다른 투수들이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보다 많이 떨어지는데, 여기서 더 떨어지면 완전 사기 아니야?”

“그럼 유현이 두 종류의 투심 패스트볼을 던진다는 거예요?”

나중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3구째에 들어온 투심 패스트볼은, 분명 유현이 지금껏 던졌던 투심 패스트볼과 달랐다. 그건 분명 초구로 던졌던 투심 패스트볼과는 다른 공이라고 봐야 할 정도로 차이가 명확했다.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투심 패스트볼을 두 종류로 던지는 것 같아. 지금까지 던진 적 없는 새로운 공이야. 싱커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하는데?”

“싱커치고는 너무 빨라.”

* * *

유현이 투심 패스트볼을 처음으로 공개했을 때, 많은 전문가들은 포심 패스트볼과 비슷한 구속과 엄청난 무브먼트에 혀를 내둘렀다.

보통 투심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변화를 일으키는 정도인데,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싱커를 연상시킬 만큼 무브먼트가 좋았다.

유현과 땅의 정령은, 지난 일주일 간 투심 패스트볼에 한 가지 변화를 더했다.

미묘한 그립과 손 끝 감각의 차이를 통해 기존과 다른 투심 패스트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구속은 145km에서 147km가 나오며 기존의 패스트볼 3종 세트와의 차이가 있는 대신, 웬만한 싱커들 이상으로 떨어지는 각이 컸다.

그리고 유현은 5회와 6회에 그 공을 5개 던져서 모두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유현 선수가 147km짜리 새로운 공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구종일까요?

-투심 패스트볼인 것 같습니다.

-이상하네요. 유현 선수가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보다 느린 대신, 더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던데 아닌가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새로운 무기는 유현 선수가 원래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보다 구속이 더 낮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대략 145km에서 147km 정도인데, 그 대신 떨어지는 각이 제법 큽니다. 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 각이 큰 싱커라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타자들이 저 공에 헛스윙 삼진을 다섯 번 당한 것만 보더라도, 새 무기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봐야 합니다.

-타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하겠네요.

-유현 선수에게 가장 아쉬운 점을 굳이 고르라면 브레이킹 볼과 오프 스피드 피치가 없다는 건데요. 새 투심 패스트볼이 어느 정도 브레이킹 볼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더 많이 떨어지는 대신 느린 투심 패스트볼은 아직까지 제구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손 끝 감각에 집중하며 구사하다 보니 정작 제구 자체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유현은 그 공을 의도적으로 떨어트려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고 있었으니까.

한가운데로 몰리는 것만 아니라면 제구가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설마 원바운드가 되더라도 차영석이 모두 막아줄 거란 믿음이 존재했다.

7회 말.

유현은 세 타자에게 모두 더 떨어지는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투구 수는 81개, 어느덧 삼진은 9개.

하지만 땅의 정령은 유현의 투구 수와 삼진 개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몸을 돌려 전광판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혹시나 유현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까봐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각인데? 사고 한번 치려나?

7회 말까지.

유현이 창원 샤크스 타자들에게 허용한 출루는 4회 말 실책으로 인한 출루가 유일했다.

제구에 신경을 써서 투구하고 있음에도 최고 구속은 156km, 거기에 평소보다 더 제구가 잘 돼서 보더라인 구석구석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귀신같은 피칭을 하고 있다.

덕분에 땅의 정령은 확신했다.

유현이 KBO리그에서 14번밖에 나오지 않은 기록을 세울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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