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변화 (2)
공격적인 피칭은 양날의 검이다.
스트라이크 비율을 높인 채 투구한다는 건, 그만큼 타자들 또한 공격할 기회를 많이 잡는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공격적인 피칭이 제대로 통하면 상대 타자들을 효율적으로 잡아낼 수 있지만,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난타를 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투수들에게 공격적인 피칭을 하라고 말한다. 도망가는 피칭만큼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한다.
투수가 주도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투구하는 것과, 볼카운트가 몰려 어쩔 수 없이 스트라이크 존에 우겨넣는 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양날의 검이라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공격적인 피칭이 도망가는 피칭보다 효율적이다.
물론 괜히 양날의 검이 아니다.
아무리 구위와 무브먼트가 좋아도, 아무리 원하는 코스로 깔끔하게 제구할 수 있어도, 투수의 컨디션과 무관하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예상치 못하게 무너질 수도 있는 게 공격적인 투구의 이면이다.
서울 레오파즈와의 주말 2차전에 등판한 유현이 딱 그런 상황에 처했다.
1회 초부터 경기가 영 풀리지 않았다.
두 번의 불규칙 바운드가 모두 출루로 이어지며 무사 1․2루 찬스를 허용하고 말았다.
좋은 찬스를 잡게 된 서울 레오파즈는 대전 펠컨스를 벤치마킹이라도 한 듯 더블 스틸을 시도해서 무사 2․3루를 만들었다.
‘……젠장.’
-제대로 허를 찔렀는데? 맨날 더블 스틸 하기만 하다가 당하니까 기분이 어때?
‘내가 했냐, 타자들이 했지. 우리 타자들이 더블 스틸 할 때마다 속으로 쌍욕을 했을 투수들의 마음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아.’
-흐음…….
땅의 정령이 신음을 흘렸다.
한참 동안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유현의 머리에서 내려와 더그아웃을 향해 총총총 뛰어갔다.
‘야. 어디 가?’
-좋아. 결심했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오늘 경기에서 난 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슬슬 네 문제점에 대해 한번 짚고 갈 때가 된 것 같네.
땅의 정령은 유현이 아니라 안용석 감독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유현은 그런 땅의 정령을 힐끔 바라본 뒤, 이내 신경을 끄고서 투구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애매하게 빠지는 땅볼 타구를 유도해서 타자주자를 잡아내며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올렸지만, 그사이 2루 주자와 3루 주자가 각각 한 베이스씩 진루에 성공해 1실점을 기록하게 됐다.
뒤이어 1사 3루 상황에서 외야 플라이로 아웃카운트와 실점을 교환했고,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하나!]
팬들의 유격수 앞 땅볼 카운트에도 불구하고 다소 굳은 표정을 한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1위 팀과의 맞대결에서 1회 초에만 2실점을 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차영석은 그런 유현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더블 스틸을 허용했으면 안 되는 건데, 내가 너무 느슨하게 생각했어.”
“아뇨. 제 잘못이죠. 주자를 의식했어야 하는데 너무 안일했어요. 견제만 했어도 그렇게 쉽게 뛰지 못했을 거예요.”
“편하게 생각하자. 이제 겨우 2점이야.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고, 더 이상 추가 실점만 없으면 돼. 오늘 네 공 좋으니까 편하게 던져.”
“네. 그럴게요.”
차영석의 말에도 유현은 1회의 2실점을 자신의 책임이라 여겼다.
불규칙 바운드로 인한 출루 허용은 그라운드 볼러에게 있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실책성 내야 안타를 연속으로 허용했지만 야수들이 처리하기 애매하게 불규칙 바운드가 튀어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더블 스틸을 허용한 건 순전히 자신이 느슨하게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주자를 조금 더 의식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반성했다.
난데없이 오늘 경기 내내 아무 말 하지 않겠다고 한 땅의 정령도, 어쩌면 그런 부분을 지적하려 한 게 아닐까 싶었다.
1회 초 2실점한 유현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기 위해, 대전 펠컨스의 타자들은 이번 시즌 3승 7패 방어율 6.51로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기록하고 있는 서울 레오파즈의 기교파 투수를 1회 말부터 사정없이 난타했다.
결국 2와 3분의 2이닝 9피안타 2피홈런 8실점으로 상대 선발 투수를 강판시켰다.
이후에도 대전 펠컨스는 4회와 6회를 제외한 매 이닝 득점을 기록하면서 에이스의 어깨를 가볍게 해줬다.
그리고 유현은 7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문제는 7회에 일어났다.
딱!
-타구가 쭉쭉 뻗어갑니다. 아. 이건 볼 것도 없겠네요. 전광판을 통타하는 대형 홈런이 7회 초에 나옵니다! 서울 레오파즈가 유현 선수에게 시즌 첫 피홈런을 선물해 줍니다! 스코어는 10대3!
-승기가 많이 기운 상황이지만 방금 전 홈런은 의미가 큽니다. 유현 선수에게 첫 피홈런을 안겨준 것만으로도 레오파즈 타선이 내일 경기에서 힘을 낼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겁니다.
-가운데로 몰린 실투였죠?
-맞습니다. 156km짜리 살짝 몰린 포심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고 받아쳤습니다. 아무리 빠른 공이라도 몰리면 맞을 수가 있다는 걸 유현 선수는 명심해야 합니다.
유현은 한참 동안 전광판을 통타한 타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젠가 홈런을 맞을 거라 생각하긴 했다.
100이닝을 넘게 투구하는 동안 피홈런이 없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언제 어느 시점에서 홈런을 허용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실투가 홈런이 된 거였다.
잘 던진 공을 상대 타자가 쳐서 홈런을 기록했다면 깔끔하게 인정했겠지만, 실투가 홈런이 된 게 못내 신경이 쓰였다.
자신이 못 던져서 홈런을 허용한 것만 같았다.
이날, 유현은 7회까지만 마운드를 지켰다.
7이닝 6피안타 1피홈런 5탈삼진 3실점으로 승리투수 요건을 충족한 뒤, 팀이 10대3으로 앞선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팬들은 그런 유현을 향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8회 초 마운드에 오른 이재왕이 한 점을 더 허용하긴 했지만, 대전 펠컨스 또한 7회 말과 8회 말에 각각 1득점씩을 추가했다.
그리고 9회 초에는 실점이 없었다.
결국 대전 펠컨스가 서울 레오파즈와의 2차전을 12대4로 잡으며 6연승을 내달렸고, 유현은 승리투수가 되며 시즌 12승을 수확했다.
시즌 12승.
6월에서야 선발투수로 전향했음에도 선발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며 다승왕 경쟁에 합류한 유현은, 아이싱을 받으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을 걸었다.
-경기 끝났으니까 이제 말한다.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는 표정은 절대 아닌데 말이야.
‘오늘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어. 왜 3실점을 했는지, 혹시 내 투구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문제점은 찾았고?
‘음. 솔직히 모르겠어.’
지난 경기도 그렇고 이번 경기도 그렇고, 투구가 미묘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 다만 그 이유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유현이 답을 알지 못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알면 굳이 내 도움을 받지 않고도 진즉 투수로서 성공했겠지.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하겠네.’
-사실 1회 초는 문제가 없었어. 불규칙 바운드가 두 번 연속으로 일어난 것부터 재수가 없었다고 봐야지. 뭐, 굳이 찾자면 견제를 안 했다는 것 정도이려나?
‘7회 초가 문제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맞아. 너 말이야, 요즘 들어서 지나칠 정도로 힘에 의존하는 피칭을 하고 있다는 생각한 적 없어? 완급조절 따윈 엿 바꿔 먹고 말이야.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는 완급조절 따위 할 필요도 없다더니, 이제 와서 완급조절을 이야기하는 게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제는 완급조절 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건 네가 완급조절의 개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 한 말이고. 그리고 완급조절이 필요가 없다는 말과 힘에만 의존하는 피칭이 동의어는 아니야. 무엇보다 넌 가진 무기를 100퍼센트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가진 무기?’
-그래. 타자들을 헷갈리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순간.
유현의 머릿속에 몇 가지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땅의 정령이 커터와 네 번째 구종을 투구하는 걸 보여 줬을 때와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유현이 던지는 패스트볼 중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 줬다는 것, 그리고 미묘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방식으로 투구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건…….’
-방금 보여 준 이미지가, 네가 가진 무기를 100퍼센트 활용할 방법이야.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아.’
-보여줬는데도 모르면 야구 그만 둬야지.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지난 두 경기에서 왜 자신이 만족하지 못했는지, 뭐가 부족했던 건지 깨달았다.
동시에 각오를 다졌다.
다음 등판 전까지, 땅의 정령이 가르쳐 준 미묘하지만 엄청난 변화를 완성시키기로
변화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시즌 끝날 때까지, 한국시리즈에서도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을 수 있겠는데?’
-당연히 가능하지. 누가 가르쳐 주는 건데.
* * *
7이닝 3실점.
팀의 승리를 견인할 법한 훌륭한 피칭이다.
다만 그 대상이 105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고작 3실점을 허용한 투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5이닝 동안 한 실점과 7이닝 동안 한 실점이 같다는 건,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일부 언론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유현과 관련된 몇몇 기사가 쏟아졌다.
유현도 이제 분석이 될 대로 돼서 이전처럼 괴물 같은 피칭을 하진 못할 거라는 의견과 함께, 이닝을 그렇게 미친 듯이 먹는데 안 퍼지는 게 이상하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관계자의 말을 빌려서 유현의 혹사에 대해 주장하는 칼럼도 있었다.
서울 레오파즈를 상대하면서 구위가 평소보다 좋지 않았고, 제구가 말을 듣지 않으면서 고전을 한 거라나 뭐라나.
정작 유현은 완봉승을 하더라도 100구 내외로 투구 수를 조절했고, 투구 수가 조금 많다 싶으면 코칭스태프와의 상의하에 완투를 할 수 있는 컨디션임에도 8회에 마운드에서 내려가기도 했다.
매 경기 120구 이상 던지며 완투한 게 아니라, 투구 수 관리를 통한 효율적인 피칭으로 긴 이닝을 소화했다는 뜻이다.
7이닝 3실점을 한 경기도, 투구 수가 96구였기에 더 이상 올리지 않고 교체한 거였다.
게다가 서울 레오파즈를 상대하면서 유현의 컨디션에는 전혀 문제는 없었다.
구속과 제구 모두 평소와 똑같았다.
그저 서울 레오파즈가 불규칙 바운드로 인한 2연속 출루를 하면서 운이 따랐고, 더블 스틸 작전으로 상대 배터리의 허를 찌른 게 좋았고, 단 한 번의 실투를 놓치지 않은 게 컸을 뿐이다.
7이닝 3실점을 기록했음에도 유현의 방어율은 고작 0.47에 불과하다.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매번 기록해도 방어율이 오르는 경이로운 시즌을 보내고 있음에도, 일부 언론은 앞으로 유현이 부진할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유현은 그런 언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작자들이 뭐라 하건 무시해. 자극적으로 써서 조회수 높이려는 개수작이니까. 난 진짜 그놈의 관계자랑 최측근이 누군지 얼굴 좀 보고 싶은 심정이다.
“난 원래 기사 잘 안 봐. 근데 태영이랑 영석 선배가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문자한 거 보면, 자극적으로 쓰긴 했나 보다.”
-음.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될 정도?
“개새끼들이네.”
-그 몹쓸 댕댕이들이 앞으로 다시 그딴 기사를 쓰지 못하게, 완벽하게 변한 모습을 보여 주자고.
“그래야지.”
대전 펠컨스가 서울 레오파즈에게 7대3으로 일요일 경기를 내주고 6연승이 종료된 다음 날.
유현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펠컨스타디움에 나와 훈련을 한 뒤 불펜으로 향했다.
차영석은 그런 유현의 공을 받아주기 위해 불펜으로 따라 들어가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너 이러다가 어깨 나간다. 불펜피칭 많이 한다고 좋을 건 없어. 요즘은 불펜투구 안 하고 선발 등판 준비하는 선수들도 많은 거 알지? 불펜투구도 결국 어깨를 소모하는 거니까, 최대한 어깨를 아끼려는 거야.”
“딱 10구만 던져 볼게요.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부탁드릴게요.”
“10구다. 그 이상은 안 돼. 전력투구 하지 말고 가볍게 몸 푼다는 느낌으로 던져.”
“네. 그럴게요.”
팡! 팡! 팡!
유현은 몸을 푼다는 느낌으로 가볍게 투구했다.
감을 잡자는 생각으로 투구했고, 제구가 깔끔하진 않지만 얼추 원하는 코스로 공이 들어갔다.
그리고 유현의 불펜에서 던진 10개의 패스트볼은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뭔가가 달랐고, 그와 이번 시즌 내내 호흡을 맞추고 있는 베테랑 포수는 그 차이점을 명확히 캐치해 냈다.
“이거 설마 새로 준비한 비장의 무기야?”
“괜찮았어요?”
“이런 이상한 걸 어디서 자꾸 들고오는지 모르겠지만, 널 상대해야 할 타자들이 불쌍해 미치겠다. 그리고 너랑 같은 팀이라서 참 다행이다. 이 정도면 훌륭한 대답인가?”
“청와대 대변인 하셔도 되겠네요.”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던지면서 느낌이 좋았고, 차영석 또한 좋다고 말해 줬다. 제구가 조금 불안하긴 해도 실전에서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이건 스트라이크 존에 우겨 넣으려고 던지는 공이 아니었으니까.
‘실전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바로 사용해 줘야지. 마운드에 서면 제일 명심해야 할 게 뭐라고?
‘타자를 혼란스럽게 하라.’
-명심하고 또 명심해. 마운드에 설 때마다 지켜. 그래야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어.
8월 4일 창원 샤크스전.
그날, 유현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선보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