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27화 (27/155)

27화 절반의 완성 (2)

-158km! 유현 선수의 3구가 158km를 기록하며 이번 시즌 최고 구속을 갱신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유현 선수. 자신이 기록했던 시즌 최고 구속을 다시 한 번 갱신하네요. 컨택에 일가견이 있는 이희민 선수가 타격 타이밍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이 들어왔습니다.

-타자들은 유현 선수의 공을 실제 구속보다 더 빠르다고 느낀다죠?

-그렇습니다. 릴리스 포인트를 최대한 길게 끌고 가는 스타일이다 보니 체감 구속이 빠른 편입니다. 158km가 아니라 165km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순식간에 지나가겠는데요?

-타격 타이밍이야 어떻게든 맞출 수 있겠지만, 유현 선수의 포심 패스트볼은 수직 무브먼트와 회전수 모두 리그 1위입니다. 타이밍을 맞춘다 해서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죠. 투심과 커터의 무브먼트는 말할 것도 없고요.

2018시즌.

유현의 구속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상승했다.

한동안 157km에 머물렀던 최고 구속은, 결국 올스타 브레이크 휴식기를 지나 158km를 기록하며 정점을 찍게 됐다.

물론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유현은 환호성이 들린 뒤에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광판을 확인했고, 자신이 이번 시즌 최고 구속을 다시 한 번 갱신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오우씨. 진짜 158km네?’

-내가 뭐라고 했어. 158km 찍을 거라고 했지? 그 동안 하루도 안 거르고 죽어라 훈련 시켰는데 슬슬 성과가 나올 때가 됐지.

‘그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지

유현은 2번 타자와 3번 타자를 상대로도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던졌다. 타자들은 평소보다 빠르고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채 연신 탈삼진을 내줬다.

결국 유현은 공 11개로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한 채 1회 말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세 번째 탈삼진을 잡은 하이 패스트볼의 구속이 다시 한 번 158km가 기록됐다.

차영석과 유현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기분 좋게 주먹을 맞댔다.

“중간에 리드 패턴 바꿔 줘서 고마워요, 선배님. 덕분에 편하게 던졌어요.”

“이 사랑스럽게 미친놈아! 안 그래도 정신 나간 구속이 더 올라가? 어떻게 된 거야?”

“며칠 더 쉬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아서 포심으로 승부하고 싶더라고요. 공 어땠어요? 좋았어요?”

“어떻긴 뭘 어때. 손바닥 찢어지는 줄 알았지. 투심과 커터도 평소보다 구위가 묵직해서 놀랐는데, 포심까지 그렇게 찍히면 타자들 입장에서는 답 없어. 오늘 네 공 절대 못 쳐.”

“그럼 오늘은…….”

“전에 했던 것처럼 삼진 한 번 제대로 잡아 보자고. 커터랑 투심은 낮게, 포심은 높게. 오케이?”

“네. 타자들 제대로 죽여 보죠.”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했던 탈삼진 쇼를, 오늘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 * *

[유현 진짜 미쳤다. 오늘 공 장난 아닌데?]

[ㄹㅇ 미침;; 타자들이 포심에 아예 타이밍을 못 맞추는데? 포심이 뭐 저렇게 뜨냐?]

[유현 포심 돌았ㅋㅋㅋㅋㅋ 메이저리그까지 포함해도 수직 무브먼트 1위라던데 실화냐]

[ㄴㄴ저거 전광판 잘못된 거임. 메이저리그 들먹이면서 오버하지 마삼.

[응, 아니야. 방금 또 158km 나왔어~]

[오늘 진짜 컨디션 좋은 듯. 삼진 잡으려고 작정하고 던지는데 치질 못하네ㅋㅋㅋ]

[펠컨스 팬들 오늘은 심심하겠네]

[ㅇㅇ나 직관 중인데 카운트 안 해서 심심함. 시원시원하게 삼진 잡아주니까 좋긴 한데, 카운트 못 하니까 허전함ㅜㅜ]

사실 유현은 팬들의 환호성을 유도하는 전형적인 에이스 투수와는 스타일이 다르다.

삼진보다는 땅볼 유도를 주 무기로 한다.

거기에 효율적인 투구 수 관리로 긴 이닝을 소화하며 실점을 거의 하지 않는 괴물 같은 투수지만, 대부분 팀의 에이스들처럼 화끈한 탈삼진 쇼를 펼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팬들은 유현을 응원하기 위해 한 가지 기가 막힌 방법을 떠올렸다.

유현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유격수 앞 땅볼 유도로 아웃카운트가 올라갈 때마다, 마치 삼진을 잡은 것처럼 카운트를 시작한 것이다.

대구 재규어스와의 원정, 후반기 첫 경기에서 대다수의 대전 펠컨스 팬들은 유현이 유격수 앞 땅볼 유도를 많이 할 거라 예상했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두 번이나 쓴맛을 제대로 본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었으니까.

유현의 커터는 우타자에게 마구다.

대구 재규어스의 전력 분석 자료에는, 유현의 커터 공략법이 짧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차피 가만있다가 삼진을 당할 거라면 일단 스윙이라도 해 봐라. 땅볼이 애매한 코스로 가서 내야 안타가 되길 바라거나 수비 실책이 나오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는 유현의 커터를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유현은 자신의 패스트볼 3종 세트를 모두 결정구로 사용할 정도로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그중 커터는 실투가 아니면 우타자가 공략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대부분 구단들의 평가다.

그럼에도 대구 재규어스의 코칭스태프는 유현을 상대로 우타자 일색의 라인업을 꾸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유현은 우타자에게 악몽이지만 좌타자에게는 지옥 그 자체이며, 최근 대구 재규어스의 우타자들의 타율이 좋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좌타자건 우타자건 모두 맥을 추지 못 할 거라면, 그나마 득점 확률이 높은 타율 좋은 타자들로 라인업을 채우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유현은 그런 대구 재규어스의 타자들을 상대로 탈삼진 쇼를 벌었다.

팬들의 예상과 달리 유격수 앞 땅볼은 5회까지 고작 한 번 나왔다. 그를 대신해 어퍼컷 세레모니가 9차례 나왔다.

5회까지 투구 수는 60개.

스트라이크/볼 비율을 8대2로 가져가며 공격적인 피칭을 한 덕분에, 삼진을 9개나 잡았음에도 투구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5회 말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루킹 삼진으로 잡아내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유현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양진섭이 내려가기 전에는 추가 득점 만들어내기 힘들겠지?’

-응. 1회 초에 조금 더 흔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어렵지. 뭐, 그래도 7회는 못 넘길 페이스라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선발 등판하는 1회에 무려 2득점을 올려준 걸 다행이라고 해야지. 2점이면 승리투수가 되기엔 차고 넘치는 점수잖아?’

-캬아. 자신감 보소.

2018시즌.

유현은 한 경기에서 2실점 이상을 내준 적이 없다. 1실점 한 경기가 세 번 있긴 했지만,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그 이상의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1회 초에 2실점을 허용하며 흔들렸던 대구 재규어스의 선발투수 양진섭은 이후 귀신같이 안정감을 되찾았지만, 상대 선발투수가 유현인 상황에서 2실점을 허용한 건 컸다.

대규 재규어스의 타자들은 유현의 무지막지한 구위에 연신 선풍기를 돌렸으니까.

유현은 마지노선을 1실점으로 잡았다.

팀이 2대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이기에, 최대 1실점까지만 허용한다는 생각으로 탈삼진 위주의 경기 운용을 보여줬다.

6회 말.

이날 처음으로 1사 2루의 위기를 맞이하자 유현은 다시 피칭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삼진보다는 땅볼, 동점의 위기를 자초하느니 최대 1점만 내주고서 아웃카운트를 잡겠다는 계산을 하고 접근했다.

오늘 가장 많이 던진, 한 타자를 상대로 7구까지 가는 풀카운트 싸움을 한 유현이 선택한 결정구는 몸 쪽으로 바짝 붙는 커터였다.

딱!

타격 타이밍이 괜찮았다.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힘이 제법 실렸다.

타자는 자신이 유현의 커터를 공략해서 2루수 키를 훌쩍 넘기는 안타를 만들어 내며 추격의 발판을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점프하고 푸쳐핸섭!

타격과 동시에 땅의 정령이 신호를 보냈다.

유현은 본능적으로 번쩍 뛰어오르며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안타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타구가 유현의 글러브에 아무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빨려 들어갔다.

유현이 착지를 하자마자 몸을 틀었다.

리드 폭을 크게 잡은 채 3루 쪽으로 몸이 쏠려 있던 2루 주자를 잡기 위해 빠르게 송구했다.

2루 주자가 다급히 귀루를 선택했지만, 유격수 장이원의 깔끔한 수비로 인해 자동 태그가 됐다.

결국 유현은 실점 위기에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내며 위기를 마무리했다.

-내가 너 살렸다. 방금 그거, 네가 못 잡았으면 무조건 안타였어.

‘땡큐. 덕분에 살았어. 이따 맛있는 거 사줄게.’

-흠흠. 대구에 양푼갈비찜 맛집이 있다고 하던데 말이야. 오늘 저녁은 갈비로?

‘너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그나저나…… 다섯 개 정도 더 잡을 수 있으려나?’

-아마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지금처럼 탈삼진 위주의 피칭을 해도 좋아. 늘 말하지만.

‘타자들은 내 공 절대로 못 친다고?’

-정답.

6회까지 탈삼진 10개, 남은 아웃카운트는 9개.

유현은 오늘도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꿋꿋이 마운드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탈삼진 다섯 개를 추가해서, 타자들의 머릿속에 커터만큼이나 포심 패스트볼이 무서운 무기라는 걸 제대로 각인시키기로 했다.

* * *

시즌 초.

2루수 정경우가 타격 부진에 수비 실책까지 더해지며 최악의 슬럼프를 겪을 때, 대전 펠컨스 2군에서 구세주가 등장했다.

장이원.

연예인 뺨치게 잘생긴 외모의 고졸 신인은 5월까지 펠컨스의 2루 베이스를 든든하게 지키며 팀의 상승세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6월 초.

2루수 장영학이 타격 폼 수정을 통해 포텐셜을 폭발시키자 상황이 달라졌다.

장영학의 맹타가 일시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코칭스태프는, 장이원을 2루가 아닌 유격수 백업으로 기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고교 시절만 하더라도 장이원의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대전 펠컨스가 상위 라운드에서 장이원을 지명한 것 또한, 타격보다는 수준급의 유격수 수비가 프로에서도 통한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팀의 사정으로 인해 2루수로 기용됐던 신인은 잠시 휴식을 가지며 자신의 원래 포지션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부진을 겪던 하지성이 2군으로 내려가자 유격수로 선발 출장하며 기회를 붙잡았다.

팬들이 하지성의 공백을 아쉬워하지 않도록 안정적인 수비와 기대 이상의 타격 실력으로 신인왕 경쟁에 불을 지폈다.

코칭스태프가 생각하는 장이원의 가장 큰 장점은, 유독 박빙 승부에서 팀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보탬이 되는 수비를 자주 한다는 거였다.

7회 말.

유현은 내야 땅볼에 이은 3루수의 실책성 플레이로 인해 1사 1,2루의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스코어는 여전히 2대0인 상황.

유격수 정이원이 위기 상황에서 팀의 승리를 굳히는 센스 넘치는 수비를 보여줬다.

수비 쉬프트가 걸린 상황에서 2루와 3루 사이 애매한 위치로 빠지는 날카로운 타구를 본능적인 다이빙 캐치를 통해 잡아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2루로 송구, 2루수 장영학이 1루로 송구하며 6-4-3병살타가 만들어졌다.

안타가 됐어도 할 말이 없는 타구를, 기가 막힌 수비를 통해 병살타로 바꿔버리며 아웃카운트 두 개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병살타! 앞선 이닝에서는 유현 선수가 동물적인 수비로 위기를 벗어나더니, 이번 이닝에서는 유격수 장이원 선수가 기가 막힌 수비로 유현 선수를 확실하게 돕습니다.

-장이원 선수 확실히 수비 범위가 넓어요. 하지성 선수가 기본기 좋고 안정적인 타입이라면, 장이원 선수는 기본기가 다소 부족하지만 넓은 수비 범위와 동물적인 감각으로 펠컨스 팬들을 흐뭇하게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현 선수의 어깨가 가벼워졌겠어요.

-맞습니다. 점수 차이가 크지 않은 경기에서는 이런 수비 하나가 투수에게 엄청난 힘이 됩니다. 득점이 많으면 좋지만, 득점이 아니더라도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처럼 말이죠.

와아아아아아!

장이원! 장이원! 장이원!

그 엄청난 수비에, 원정 응원석을 가득 채운 대전 펠컨스 팬들이 장이원의 이름을 연호했다.

유현은 머리 위로 양손을 들어 올려 박수를 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장이원의 등을 가볍게 툭 치는 걸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이번에는 유격수가 널 살렸네.

‘오늘 저녁은 이원이랑 같이 먹게 생겼네.’

-야수들에게 항상 고마워해라. 투수는 결코 자신의 능력만으로 27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잡아낼 수 없다는 걸 명심하고.

‘당연히 고마워하지.’

두 번의 실점 위기.

그중 한 번은 유현이 스스로, 다른 한 번은 수비의 도움을 받아서 벗어났다.

이어진 8회 말과 9회 말.

유현에게 더 이상의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