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절반의 완성 (1)
유현은 올스타전에서 1이닝을 투구해 세 타자 모두 유격수 앞 땅볼로 잡아낸 뒤, 팬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2018시즌 프로야구 올스타전은 치고 박는 난타전 끝에 나눔 올스타가 드림 올스타에게 8대6으로 승리를 거두며 성황리에 끝이 났다.
선수들은 꿀맛 같은 올스타 브레이크 휴식기를 즐겼다. 간만에 만끽하는 며칠간의 휴식에 그 동안 쌓인 피로감을 날려 버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선수가 그런 건 아니었다.
후반기 여섯 번째 경기.
대구 재규어스와의 주말 원정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등판이 예정된 유현은 그때까지 몸이 근질거려 도통 참기가 어려웠다.
셋업맨일 때는 보통 일주일에 2~3회 등판했고, 선발로 전향한 후에도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켰다. 열흘 동안 휴식을 취하는 건 2018시즌에는 사실상 처음이었다.
올스타전에서 1이닝을 투구했다지만 전력으로 투구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벤트 경기다 보니 제 임무를 다했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 쉬다가 쉬니까 뭔가 불안했다.
자신의 자리가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쉬다가 자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마음속 한구석에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올라왔다.
데뷔 시즌 이후 주전 자리를 꿰찬 게 이번이 처음이기에 나오는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결국 관중석에서 동료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유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찼다.
‘등판하고 싶다. 얼른 등판하고 싶다. 빨리 등판해서 이닝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다.’
-감독이 배려를 해줬으면 좀 즐길 줄도 알아라. 불안해하지 말고.
‘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나도 이게 감독님의 배려라는 걸 아는데, 쭈구리 시절의 경험 때문에 영 편하지가 않네.’
-그래도 조급해하지 말고 쉬어라. 어차피 토요일까지는 엔트리 등록도 안 되는 거 알잖아. 그리고 쉬고 나면 보상이 있을 거다.
‘토요일까지 푹 쉬는 게 새로운 미션이야?’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 네 피지컬이라면 최고 구속 158km를 기록할 거라고.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지.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데.’
땅의 정령은 자신이 유현을 선택한 이유가 타고난 피지컬을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만들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의 유현은 자신의 피지컬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이전엔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재능을 낭비하고 있었는지를 10승 12홀드를 기록하는 동안 0.28의 경이로운 방어율을 마크하면서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유현이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땅의 정령은 항상 강조하듯이 말했다.
아직 멀었다고, 구속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고 네 번째 구종을 배워야지 비로소 유현이라는 투수가 완성된다고 말이다.
-다음 등판에서, 넌 베스트 컨디션으로 최고 구속을 기록할 거야.
‘난 항상 베스트 컨디션이었는데?’
-대부분 전문가들은 말해.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투수가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어깨를 소모해야만 해. 중요한 건 어깨를 소모하더라도 좋고 일괄된 자세를 유지하면서 소모하는 거지. 이번 시즌의 넌 그게 되니까 성공하고 있는 거고.
‘요점이 뭐야?’
-좋은 자세로 좋은 공을 던지면서 죽어라 훈련을 한 성과가, 짧지만 충분한 휴식 덕분에 슬슬 그 진가를 드러낼 때가 됐다는 거지.
유현의 시즌 최고 구속은 157km다.
선발투수로 전향한 이후에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을 153km 내외로 유지하면서 타자들을 압도했다.
땅의 정령은 유현의 구속이 거기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거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작 1km라고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자들이 느끼는 1km의 차이는 결코 적지 않다. 특히나 유현 같은 강속구 투수, 심지어 그 투수가 좌완이라면 구속이 1km 늘어나는 것만으로도 타자와의 싸움에서 유리해진다.
정말로 158km를 던질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지만 딱히 의심하지도 않았다.
지금껏 땅의 정령이 야구와 관련해서 한 말은 대부분 맞아 떨어졌으니까.
-다음 경기에서 네 포심이 158km를 기록하지 못하면, 내가 땅의 정령이 아니라 지박령이다.
‘좋아. 다음 경기에서는 태업을 해서 내 머리 위에 있는 돼지가 지박령이라는 걸 증명해야겠군.’
물론 유현이 진짜로 태업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아무리 믿을 수 있는 불펜이라 하더라도 한 시즌 내내 팀의 모든 믿음에 보답하는 건 어렵다.
세이브 신기록을 세울 기세의 투수도 시즌 중에 불론 세이브를 기록하는 게, 세이브 성공률 90퍼센트를 기록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야구다.
전반기 대부분의 경기에서 코칭스태프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던 대전 펠컨스 불펜은, 후반기가 시작하자마자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
수원 유니콘스와의 시즌 10차전을 6대1로 기분 좋게 이긴 다음 날, 시즌 11차전에선 3회까지 도합 6득점을 만들어 내고도 7대6으로 역전을 당하며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것이다.
경기 후반에 나온 두 번의 득점 찬스에서 주루사와 병살타로 흐름이 끊긴 것, 그리고 6회부터 투입된 중간계투들이 줄줄이 무너진 게 컸다.
결국 흐름을 내준 대전 펠컨스는 시즌 12차전에서도 무기력하게 패배하며 9위 팀 수원 유니콘스를 상대로 루징 시리즈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어진 다음 상대는 7위 팀 대구 재규어스였다.
앞서 유니콘스와의 경기와 비슷하게 첫 경기를 비교적 쉽게 잡은 뒤, 세미 제이슨이 6이닝 2실점을 기록하며 마운드를 지켜준 두 번째 경기에서 또 다시 역전패를 당했다.
이 두 번의 역전패는 대전 펠컨스 코칭 스태프를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다.
유현과 세미 제이슨이 꾸준히 긴 이닝을 소화해주고 윤기준도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7이닝을 소화해 주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전 펠컨스 선발진의 소화 이닝은 리그 7위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도 유현이 선발진에 합류하고 매 경기 8이닝 이상을 소화해 주며 시너지가 나니 좋아진 거지,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9위였다.
10위가 투수들의 줄 부상과 역대급 투타의 불균형으로 와르르 무너진 창원 샤크스라는 걸 감안했을 때, 대전 펠컨스 선발진의 이닝 소화 능력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사실상 대전 펠컨스의 전반기는 불펜투수들이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에도, 6월에도, 그리고 최근까지도.
해설위원들은 대전 펠컨스가 포스트 시즌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지 않으려면 불펜투수들의 부담을 줄여 줘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관리를 철저하게 해주며 과부하가 오지 않도록 이닝과 투구 수를 조절하는,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수치만을 놓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대전 펠컨스는 2018시즌에 1점차 승부 가 26번, 2점 차 승부가 25번 있었다.
지금껏 치른 경기의 반 이상이 2점 차 승부 내 접전일 정도로 대전 펠컨스는 2018시즌에 살얼음판 승부가 많았다.
접전이 많고 역전승이 1위라는 건, 그만큼 불펜투수들이 느꼈을 부담감 또한 커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담감이 클수록 투수는 빨리 지친다.
접전 상황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계속해서 이어지면 결국 집중력을 잃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대전 펠컨스의 갯벌 야구는, 부족한 득점력을 보완하기 위해 온갖 작전을 걸고 불펜의 힘을 믿어야만 했던 야구는, 결국 언젠가는 터지게 될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그게 하필이면 후반기가 시작하자마자 한 주에 두 번이나 터진 거였고 말이다.
안용석 감독은 후반기에 불펜진의 힘이 떨어질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했다.
정우연이 끝내기를 허용한 게 당혹스럽긴 했다.
그러나 전반기에만 31세이브를 기록했고 그중 14세이브가 터프 세이브였던 수호신이, 고작 한 경기 무너진 걸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문제는 앞으로였다.
앞으로도 종종 정우연을 비롯한 불펜진이 무너지는 경기가 나올 텐데, 그때마다 무기력하게 패배한다면 팀의 입장에서 좋을 게 없다.
안용석 감독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주간 2승 3패.
일요일 경기를 무조건 이겨 주간 승률 5할을 맞추고 싶은 상황에서, 안용석 감독은 유현을 1군 엔트리에 등록한 뒤 선발로 예고했다.
그리고 타순에 약간의 변화를 줬다.
6월 동안 타율 4할을 기록하며 맹타를 휘두른 장영학과 중견수로 선발 출장한 정장혁을 테이블 세터로, 강태영-제라드 캠프-펠릭스 곤잘레스는 여전히 클린업 트리오였고, 6번 타자로는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좋은 선구안을 지녔고 작전 야구를 구사할 줄 아는 차영석이 자리했다.
그리고 9번 타자는 유격수 하지성이 2군으로 내려간 틈에 임시 주전을 꿰찬 이후 타율 3할 2푼 5리를 기록하며 준수한 타격 컨디션을 보여 주고 있는 장이원이 배치됐다.
장영학과 정장혁 테이블 세터, 송영인이나 이정협이 아니라 차영석이 6번인 것, 그리고 장이원이 9번을 차지한 건 안용석 감독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철저하게 최근 컨디션만을 고려해서 짠 이 라인업은, 현재로선 대전 펠컨스가 다득점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라인업이기도 했다.
전반기 대부분의 경기에 출장하며 다소 지친 송영인과 이정협은 휴식을 부여받았고, 상황에 따라 회심의 대타 카드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결국은 타자들이 투수들의 부담을 덜어 줘야 한다는 생각에, 가장 많은 득점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은 라인업을 기용한 것이다.
-타순이 나쁘지 않아. 송영인과 이정협을 선발에서 제외한 게 내가 보기엔 신의 한 수야. 두 선수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컨디션이 떨어져 있어서 휴식이 필요한 참이었거든. 유일한 문제는…….
‘전반기 마지막 등판에서 완봉승을 기록한 재규어스의 미친 신인이 선발이란 거지.’
-아마 다득점보다는 선발투수를 최대한 빨리 내리는 데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아.
‘그러겠지. 난 최소 동점을 유지하면서 최대한 길게 이닝을 먹어 주고.’
-최대한 길게?
‘미안. 내가 말실수를 했네. 아웃카운트 27개 다 없앨 때까지.’
-좋아. 아주 바람직한 자세야.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지만, 대구 재규어스 왕조는 서울 레오파즈에게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한 이후 갑작스러운 몰락을 겪었다.
KBO리그가 만들어진 이후 페넌트레이스 1위를 가장 많이 기록한 명문 구단이 한국시리즈 준우승 다음 시즌을 9위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시즌 또한 9위였다.
그동안 성적이 좋다 보니 신인 드래프트에서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게 힘들었고, 주전 선수들의 FA로 인한 이탈 및 노쇠화가 겹치자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만 것이다.
부자일 때는 몰랐지만 곳간이 비자 망하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더라.
그래도 2018시즌에는 신예 선수들이 꾸준히 얼굴을 비추며 팀의 미래를 다시 설계해 나갔다.
유현과 같은 날 마운드를 쓰게 될 선발투수는, 전반기 막바지에 자신의 통산 두 번째 선발 등판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괴물이자 대구 재규어스 선수들의 희망이었다.
1회 초.
안용석 감독이 변화를 준 선발 라인업은 성공적으로 효과를 거두는 듯 보였다.
장영학과 정장혁의 연속 안타를 기록한 상황에서 강태영의 진루타와 제라드 캠프의 2타점 2루타로 시작부터 기분 좋게 점수를 낸 것이다.
2실점을 허용한 뒤.
대구 재규어스의 투수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경기 초반 제구가 잡히지 않아 고생하는 신인 투수의 멘탈을 다잡아 줬다.
대구 재규어스의 희망 양진섭은 투수코치의 방문 이후 귀신같이 안정감을 되찾았다. 두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속 슬라이더가 사기네. 저러니까 못 치지.
‘그럼 나는 저것보다 더 빠른, 슬라이더 같은 커터로 타자들을 다 죽여 볼까?’
-오늘의 메인은 커터야?
‘난 커터를 메인으로 쓰고 싶지 않거든? 근데 또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네? 아 이러면 어쩔 수 없이 커터 위주로 투구해야 하잖아.’
-참교육의 시간이군.
1회 말.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자신을 상대로 선발 라인업의 타자 중 무려 7명을 우타자로 기용한 대구 재규어스에게 커터로 참교육을 시켜 주겠다는 생각을 한 채 말이다.
초구는 우타자 몸쪽으로 파고드는, 이제는 유현의 전매특허가 된 커터를 던졌다.
그리고 2구.
바깥쪽 낮은 코스로 정확하게 걸치는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서 2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그 순간 유현은 생각했다.
‘오늘 공이 좀 잘 들어가네?’
-말 했잖아. 느낌이 다를 거라고.
‘음. 왠지 오늘은…….’
-구속이 잘 나올 것 같지?
‘어. 평소보다 잘 나올 것 같은 느낌이야.’
-좋아. 그럼 3구는.
‘하이 패스트볼로 가야지.’
유현은 모처럼 차영석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차영석은 추가로 사인을 내지 않았다. 어떤 코스로 던지든 다 잡아 줄 테니 마음대로 던지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렇게 던진 3구째.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타자는 하이 패스트볼에 크게 방망이를 헛돌리며 삼구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와아아아아!
삼진과 동시에 원정 팀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예상보다 빠른 구속에 당황하며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뭐가 이렇게 빨라? 일부러 타이밍을 더 빨리 가져간 건…….’
전광판을 확인한 타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원정 팀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 이유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58km.
KBO리그 2018시즌 최고 구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