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굳히기 (6)
‘으음…….’
-왜? 급똥이라도 마려워?
‘내 호투가 이번 시리즈를 1승 2패로 만들지 2승 1패로 만들지 3승으로 만들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어.’
-3승이 될 것 같으면 시원하게 방화하려고?
‘내가 미쳤냐. 환진 스쿨 1년 등록해서 영어 마스터 같은 거 보상으로 안 받아도 상관없거든?’
-알고 있으면 됐다. 혹시나 더위 먹어서 미친 건 아닐까 하고 물어봤어. 야수들 슬슬 지칠 때 됐으니까 길게 끌지 말자.
‘좋아. 빠르게 빠르게 가자고.’
유현은 지난 토요일에 선발 등판을 했었다.
3일이 지나서 컨디션이 어느 정도 회복됐고 1이닝만 책임져 주면 된다지만, 정상 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1회부터 155km 내외의 강속구를 거침없이 던지던 유현이, 초구로 던진 커터의 구속은 151km에 머물렀다.
평소보다 구속이 살짝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구속은 떨어졌어도 무브먼트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제구 또한 괜찮았다. 무엇보다 오늘의 유현이 책임져야 아웃카운트는 세 개에, 주어진 임무 또한 커터를 장착한 유현에게는 손쉬웠다.
우타자 셋.
그것이 안용석 감독이 유현을 투입한 이유였다.
투입 가능한 투수 중 우타자를 가장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카드가 바로 유현이니까.
유현은 울산 알바트로스의 4번 타자 박명우를 상대로 몸 쪽 꽉 찬 커터를 계속해서 던졌다. 스윙을 하면 정타가 나오지 않고, 스윙을 하지 않으면 스트라이크가 되는 악마의 코스였다.
알고서도 못 치는 공이라는 말이 있다.
우타자들 입장에선 유현의 커터가 그랬다
구속은 150km에서 152km 사이로 평소보다 적게 나왔지만, 무브먼트가 살아 있는 커터가 몸 쪽으로 완벽하게 제구가 되니 우타자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타구를 만드는 게 불가능했다.
더 미치겠는 건…….
무기력하게 삼진을 당하느니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커터를 노리면 바깥쪽으로 빠지는 투심 패스트볼을, 반대로 투심 패스트볼을 생각하면 다시 커터를 던진다는 거였다.
유현은 좋은 공을 던진다.
하지만 이번 시즌 타자들을 유현을 상대로 애를 먹고 있는 건, 좋은 공을 던지면서 빠른 인터벌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피칭으로 타자들과의 수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장점은, 선발 등판 후 3일 만에 불펜으로 투입된 유현이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빠각.
커터를 노리던 박명우의 배트가 두 동강이 났다. 유격수 앞으로 날아간 타구는 재빨리 1루로 송구되며 아웃카운트 하나가 올라갔다.
이후 두 타자도 모두 유격수 앞 땅볼로 가뿐하게 잡아내고서 유현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웃카운트 세 개를 깔끔하게 없앴다.
그렇게 유현은 정말로 2018시즌 전반기의 마지막 등판을 끝마쳤다.
좌완투수이면서 우타자 스페셜리스트.
유현이 8회 초의 아웃카운트 세 개를 지워 버리자 대전 펠컨스 팬들은 확신했다.
오늘 경기는 이겼다고 말이다.
그리고 9회 초.
대전 펠컨스의 수호신 고무팔 정우연이 펠컨스타디움 마운드에 올라 터프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대전 펠컨스는 유현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하고 2군에서 투수 한 명을 올렸다.
* * *
엔트리에서 제외됐지만 유현은 2군에 합류하지 않았다. 여전히 1군 선수단과 동행하며 함께 훈련하고 함께 행동할 예정이었다. 규정으로 인해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지 못할 뿐이었다.
유현의 1군 엔트리 제외는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휴식을 주고, 동시에 2군에서 투수를 콜업해 전력을 보강하기 위한 조치였다.
펠컨스타디움으로 출근하기 전, 유현은 차영석에게 코코아톡을 보냈다.
[선배님, 불화산 치킨 5500마리 감사합니다. 소중히 잘 쓰겠습니다.]
대만 2군 스프링캠프 당시.
차영석은 유현이 시즌 중 2군으로 내려가면 자신의 연봉을 모두 주겠다고 호언장담했고, 그 당시 들었던 말을 잊지 않고 있던 유현이 코코아톡을 보낸 거였다.
물론 진짜로 연봉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1군 선수들 중 강태영과 더불어 가장 친한 차영석에게 장난을 친 거였다.
-근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냐?
‘내가 쓸데없는 걸 잘 기억하는 편이라서 말이야. 이따 영석 선배 표정이 볼만하겠네.’
-늙은 능구렁이 포수가 고작 그 정도에 당황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흐음. 그러려나?’
땅의 정령의 예상이 맞았다.
유현의 코코아톡을 받고도 차영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유현을 당황시켰다.
“……이게 뭐에요?”
“뭐긴 뭐야, 인형이지.”
“인형을 왜 저한테 주시는지 물어본 건데요.”
“딸내미가 사달라고 졸라서 샀는데 네 생각나서 하나 더 샀다. 애인도 없어서 외로울 텐데 그거라도 껴안고 자라고. 연봉은 이걸로 퉁 치자. 싫어? 싫으면 너 선발 등판할 때 쓰러지고. 아. 나이를 먹으니까 공 받기가 슬슬 힘드네.”
“싫은 건 아니고 좀 당황스러워서요.”
“비싼 거니까 소중하게 다뤄. 10만 원 짜리야.”
“1000분의 1이네요.”
“연봉 털리면 이혼 당해. 좀 봐줘. 올스타전 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출근을 하자마자 유현은 라커룸에서 차영석에게 햄스터 인형을 선물 받았다.
그것도 무려 1m짜리 인형을 말이다.
‘혹시 말이야. 영석 선배는 네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닐까? 널 보고 있다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 햄스터 인형을 선물한 거지.’
-그럴 리가 있나. 요즘 인기 있는 캐릭터 인형이라서 선물한 거에 의미 두지 마라.
‘음. 역시 그런 거겠지?’
-그렇다니까. 그나저나 애인 생긴 거 축하한다. 애인이 참 짐승미가 넘치네.
‘……걸신들린 지박령한테 놀림 당하는 게 지겨워서라도 올해는 진짜 연애 좀 해야겠어.’
-그게 됐음 진즉 만났겠지.
‘팩트로 패지 마라. 아프니까.’
유현은 땅의 정령과 티격태격하며 햄스터 인형을 라커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인형의 머리 위에 땅의 정령을 올려놓았다.
턱을 매만지며 인형과 자신을 번갈아보는 유현의 시선에, 땅의 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그렇게 쳐다보냐. 땅의 정령 처음 봐?
‘아니. 얘보다 네가 더 귀여운 것 같아서.’
-당연하지. 이 몸보다 귀여운 생명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수컷은 사양한다.
‘어련하시겠어.’
* * *
페넌트레이스 144경기 전부를 감독의 계산대로 운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선수들의 당일 컨디션이나 경기 중 생기는 변수는 감독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전반기 마지막 3연전을 앞둔 안용석 감독의 고민은 타선보다 투수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대전 펠컨스의 타선은 펠릭스 곤잘레스가 합류하고 2군에서 맹활약한 신예들을 꾸준히 콜업하면서 점점 득점력이 좋아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70득점을 기록하며 상대 팀 마운드를 초토화시킨 울산 알바트로스나, 한 주에 팀 20홈런을 합작하는 인천 그리핀스처럼 압도적인 득점력을 기대할 만한 타선은 아니다.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관건은 결국 마운드다.
마운드 운용이 계산대로 되는 날에는 경기가 쉽게 풀리고, 꼬이는 날에는 경기를 풀어 나가는 게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울산 알바트로스와의 전반기 마지막 홈 3연전은 경기가 계산대로 술술 풀렸다.
토요일 경기에서 필요한 투수는 단 2명이었다.
선발투수 하민수가 7과 3분의 1이닝 2실점으로 호투한 뒤, 1사 2루 상황에서 김정수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임무를 끝마쳤다.
그리고 김정수는 삼진 두 개를 잡아내며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은 채 8회를 매듭지었다.
9회 초.
대전 펠컨스가 5대2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운드는 여전히 김정수가 지켰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 끝! 대전 펠컨스가 5대2로 울산 알바트로스를 제압하며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에서 위닝 시리즈를 확정짓습니다!
-김정수 선수의 공은 정말이지 좋네요. 오늘 경기에서도 모든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습니다. 1군 콜업 후 잡아낸 아웃카운트의 85퍼센트가 탈삼진입니다. 그 선수는 정말 괴물이에요.
-안용석 감독의 입장에서는 김정수 선수가 정말 사랑스러워 보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힘이 빠지려는 마운드에 새 동력을 공급하고 있는 투수니까요. 신인이 저렇게 잘 하면, 베테랑들도 자극을 받아서 팀 전체의 분위기가 살아나는 효과도 있고요.
위닝 시리즈를 확보한 상황에서 치르는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서, 안용석 감독은 총력전을 선언했다. 혹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모든 전력을 총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울산 알바트로스 또한 총력전을 준비했다.
2패로 루징 시리즈가 확정된 상황에서 전반기의 끝을 스윕패로 장식할 수는 없었다.
간절하게 승리를 갈구하는 두 팀의 경기는 생각 이상으로 싱겁게 흘러갔다.
대전 펠컨스가 1회 말부터 타자 일순으로 화끈한 타격을 과시하며 7득점을 올린 것이다.
5회까지 무려 15득점, 8회까지 도합 24득점으로 울산 알바트로스 마운드를 문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모두 타자들이 타점과 득점을 올리고 멀티 히트를 기록하며 타선이 대폭발한 미친 경기였다.
울산 알바트로스에 약한 1선발 세미 제이슨은 6실점을 기록하긴 했어도 7회 초 1아웃까지 마운드에서 121구를 투구하며 버텼다.
이후 대전 펠컨스는 휴식이 부여된 김정수를 제외한 모든 투수를 총동원해서 남은 2.2이닝을 비교적 여유롭게 지켜냈다.
최종 스코어는 24대6.
전반기 마지막 시리즈에서 스윕을 가져오며 대전 펠컨스는 55승 35패, 3승 인천 그리핀스와의 승차를 5.5경기까지 벌리며 성공적으로 전반기를 끝마쳤다.
압승을 거뒀으면서도 대전 펠컨스 팬들은 마냥 웃을 수 없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 많은 대전 펠컨스 팬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거 점수 좀 나눠서 뽑지…….]
득점력이 약한 팀의 웃픈 댓글이었다.
* * *
규정으로 인해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지 못하는 유현은, 강태영의 도움을 받아 VIP석에서 불화산 치킨과 족발을 먹으며 땅의 정령과 관중으로서 경기를 관람했다.
그리고 유현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모든 팬들에게 웃으며 사인을 해줬다. 원하는 팬들에게는 사진도 찍어 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팬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이 한가득 쌓여 주차장에 다녀와야만 했다.
‘야구 잘하면 건강식품을 돈 주고 사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혼자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부모님 좀 보내 드려야 하나. 흐음. 너도 좀 먹을래?’
-정령이 아픈 거 봤냐. 건강식품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맛없어서 싫은 건 아니고?’
-내 입은 불화산 치킨과 족발을 먹기에도 부족하거든.
‘맛없어서 싫은 거 맞네. 그나저나, 더그아웃이 아니라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고 있으니까 뭔가 좀 어색하네. 그치?’
-사인도 실컷 해 줬으니 이제 마음껏 경기를 즐겨라. 휴식을 만끽하는 것 또한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한 덕목 중 하나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미션 실패하는데.’
-미션이 중요하냐, 팀 승리가 중요하냐.
‘당연히 팀 승리지.’
미션과 상관없이 유현은 진심으로 대전 펠컨스의 승리를 응원했다.
팬들과 함께 선수들의 응원가를 따라 불렀으며, 승부처에서 대전 펠컨스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진심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팬들과 함께 신이 나서 어깨동무를 한 채 춤을 추기도 했다.
전반기 마지막 3연전에서 스윕을 확정한 뒤.
선수단이 그라운드로 나와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 박수를 쳤다.
그리고 선수단에서 직접 주문 제작해서 들고 있는 플랜카드의 문구는, 유현에게 후반기 목표를 다시금 되새겨줬다.
[올해만큼은 양치기 소년이 되지 않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강태영의 스포츠카에 남자 네 명이 탔다.
차 주인인 강태영, 그리고 차영석과 유현과 김정수였다.
네 사람이 차에 함께 탄 이유는 간단했다.
울산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을 즐기기 위해, 보다 정확히는 올스타전을 핑계로 울산에서 유명한 맛집들을 돌아다니기 위해서였다.
“선, 선배님. 이런 차를 타고 다니려면 연봉을 얼마나 받아야 하나요?”
“정수 너 정도면 2~3년 안에 살 수 있을 걸? 구단이랑 이야기 잘하면 장기 렌트로 비교적 싸게 장만할 수 있으니까 연봉 오르면 알아봐.”
“이야. 역시 슈퍼스타는 차도 으리으리하네!”
“저도 선배님이 연봉 주시면 이런 차 한 대 중고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널 휴게소에서 버리고 가버리면 연봉을 안 줘도 될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어.”
“아. 휴게소 하니까 생각났는데 요즘 소떡소떡이 그렇게 인기라면서요. 들려서 먹고 가죠.”
“정수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 전 다 좋습니다!”
“그래? 그럼 전 메뉴 다 먹고 가자.”
휴게소에서 먹을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즐거워하는 남정네 넷을 보며, 땅의 정령은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게 바로 신종 지옥 체험인가. 올스타전까지 땀내 나는 남자들하고만 있을 필요는 없잖아아아아!
유현은 땅의 정령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팀 동료들과 올스타 브레이크를 마음껏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