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굳히기 (5)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치른 대구 재규어스와의 3연전에서 대전 펠컨스는 무려 1881일 만에 스윕패를 허용했다.
이번 스윕패는 여러 의미로 타격이 컸다.
대구 재규어스가 통합 4연패를 하던 시기에도 유독 상대 전적이 좋았던 대전 펠컨스였기에, 스윕패가 유독 뼈아프게 다가왔다.
게다가 과정마저 좋지 않았다.
시즌 13차전은 역전패, 14차전은 선발 투수 이재형이 4이닝 7실점으로 무너지며 패배, 15차전도 역전패를 당했다.
최악인 건 3연전에서 실책 7개를 기록하며 모처럼의 행복 수비로 팬들이 뒷목을 붙잡게 만들었다는 거였다. 3연전 기간 동안 내준 사사구도 무려 20개에 달했다는 거였다.
본 헤드 플레이와 도망가는 피칭으로 인해 잡을 수 있는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결국 안용석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6월 29일.
부산 유니콘스와의 3연전을 앞두고 중견수 이영우, 유격수 하지성, 선발투수 이재형, 불펜투수 안명현과 장만진을 2군으로 내리며 1군 엔트리를 대거 조종한 것이다.
그리고 빈자리를 신예들로 채웠다.
중견우 이영우의 자리는 2군에서 타율 3할 5푼 20도루를 기록하며 퓨처스 올스타에 선정된 정장혁과 펠릭스 곤잘레스가 번갈아 가며, 유격수 하지성의 자리는 4월부터 꾸준히 백업으로 출장하며 가능성을 보여 준 고졸 루키 장이원이, 거기에 이번 시즌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는 투수 세 명이 1군에 등록됐다.
엔트리 조정 후.
안용석 감독은 선수단을 소집했다.
불과 며칠 전 대전으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냉정하고 차갑게 코칭스태프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라운드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보여 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선수는 알아서들 짐 싸서 2군으로 내려가길 바란다. 1군은 이름값으로, 연차로 야구를 하는 곳이 아니다. 안일하게 야구를 하는 선수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다.”
다섯 명의 선수를 내리며 안용석 감독은 선수단 전체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야구장에서만큼은 항상 최선을 다하라고, 나태해지는 순간 1군에서 네 자리는 사라질 거라고, 붙박이 주전은 없다고 말이다.
이영우와 하지성의 2군행이 그 증거였다.
대부분의 포지션에서 경쟁 구도를 가져가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안용석 감독이지만, 이영우와 하지성에게만큼은 예외였다.
두 사람의 수비와 야구 센스가 타격 부진을 감안하고서라도 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최근 들어 두 사람은 수비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조급한 마음 때문에 타격 폼도 흔들리고, 덩달아 수비에서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며 실책을 남발했다. 나와서는 안 되는 본 헤드 플레이로 소중한 한 경기를 내주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붙박이 주전을 고집하는 건 팀의 사기를 떨어트릴 뿐이었다. 지금은 과감하게 선수단에 새 활력을 불어 넣을 때라고 판단했다.
부산 유니콘스와의 주말 3연전만 놓고 보면 안용석 감독의 판단은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리드오프 겸 중견수로 출장한 정장혁이 5타수 5안타 2도루, 유격수 겸 8번 타자로 출장한 장이원이 5타수 3안타 1도루를 기록하며 타선에 활력을 불어 넣은 것이다.
상대 선발을 난타해 4회까지 무려 10득점을 하며 1선발 세미 제이슨에게 넉넉한 득점 지원을 안겼다.
세미 제이슨은 7이닝 7피안타 1사사구 12탈삼진 무실점으로 시즌 탈삼진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고, 넉넉한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시즌 10승 달성에 성공했다.
대전 펠컨스의 역대 외국인 투수 중 가장 빠른 시점에서 10승을 거둔 거였다.
사실 10승을 거둔 외국인 투수가 거의 없긴 했다. 근 20시즌 동안 10승을 수확한 외국인 투수가 고작 세 명 있었을 정도로, 대전 펠컨스는 외국인 투수와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대전 펠컨스는 2018시즌부터 허용된 외국인 선수 장기 계약 제도를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사용한 구단이 됐다.
세미 제이슨, 제라드 캠프, 그리고 펠릭스 곤잘레스까지, 팀의 외국인 선수 세 명 모두와 장기 계약을 한 것이다.
총액과 옵션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존재했다.
세 선수 모두 2022시즌까지, 2018시즌이 끝나고도 도합 네 시즌 동안 대전 펠컨스와 함께하게 됐다는 거였다.
-매우 합리적인 투자로군.
“제이슨은 일본에서 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래서 장기 계약을 한 건가?”
-무시할 수 없는 이유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구단과 선수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는 거지.
“이해관계?”
-선수들은 대전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랐고, 프런트는 지금 함께하는 세 선수보다 더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게 쉽지 않을 거라 판단했거든. 제일 몸값이 높은 펠릭스 곤잘레스가 옵션을 다 채워도 4년 600만 달러인데, 그 정도면 대형 FA보다 훨씬 싸잖아?
“네 말대로 합리적인 투자네.”
수준급 외국인 선수의 존재는 곧 팀의 성적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2017시즌과 2018시즌의 대전 펠컨스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외국인 선수들의 맹활약이 2위 사수에 큰 힘이 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는 팀의 미래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세 선수 모두와 장기 계약을 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만약 강태영이 이번 시즌 후 메이저리그로 떠나더라도, 펠컨스의 순위가 급락할 일은 없을 거야. KBO리그에서 좋은 외국인 선수 셋이면 전력의 반이라고 봐야 하거든.
* * *
6월 29일을 기준으로 올스타전 투표가 마무리됐다.
1992년 이후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대전 펠컨스에게 팬들은 열광했고, 이는 곧 올스타전 투표로 이어졌다.
대전 펠컨스의 선수들은 나눔 올스타에서 유격수와 지명타자와 외야수 한 자리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 득표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유현은 그중 중간투수 부문에서 2위와 격차가 제법 큰 득표율 1위 차지하며, 생에 두 번째 올스타 선발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데뷔 시즌 이후 첫 올스타전을 앞두고 있음에도 유현은 별 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울산에서 땅의 정령과 어떤 맛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까 고민할 뿐이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남은 두 번의 선발 등판 또한 유현의 고민거리가 되지 못했다.
매일매일 컨디션이 절정이었으니까.
실제로 이날 부산 유니콘스의 타자들은 유현의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1득점을 하긴 했지만 단 2안타를 만들어 내는 데에 그쳤고, 9회까지 철저하게 유현에게 농락을 당하다가 6월의 마지막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일요일 경기는 폭우가 쏟아지며 일찌감치 우천취소가 됐다. 안용석 감독은 일요일 등판 예정이었던 윤기준의 등판을 화요일로 예고했다.
시즌 내내 우세를 점했던 광주 앨리펀츠와의 주중 3연전에서는 아쉽게도 1승 2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윤기준이 첫 경기를 7이닝 2실점 호투하며 잘 잡아줬지만, 이후 두 경기에서 광주 앨리펀츠의 달아오른 타선을 막아 내지 못했다.
-우려했던 대로 슬슬 불펜들의 힘이 떨어지는군. 안용석 감독이 고민이 많겠어.
“희망 고문당하는 기분이야.”
-뭐가?
“아니, 그렇잖아. 2위를 굳히나 싶으면 따라잡히고, 굳히나 싶으면 따라잡히고 있잖아. 이러다 시즌 끝날 때까지 살얼음판을 걷게 생겼어.”
-펠컨스 팬이 될 자격이 부족하군. 믿고 기다려라. 기다리다 보면 보답을 해 줄 거다.
“그렇게 기다렸더니 10년 동안 최하위만 다섯 번 했잖아. 아. 여섯 번인가?”
-……남의 아픈 곳을 그렇게 사정없이 찌르는 거 아니다, 이 악마야.
유현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당당하게 대전 펠컨스 팬임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맞는 유니폼은 왜 없냐고 헛소리하는 땅의 정령을 놀리는 건, 최근 유현의 소소한 재미 중 하나가 됐다.
물론 장난은 길지 않았다.
유현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오후에 있을 선발 등판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 이기면 전반기에 10승 채우겠네.”
-전반기 선발 등판은 오늘로서 마지막인데, 성공적으로 완주한 소감이 어때?
“올스타전이 울산에서 열린다던데, 울산 맛집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이 정도?”
-바람직한 소감이군.
“10승 채우고 기분 좋게 맛집 투어, 아니 올스타 브레이크를 즐겨 보자고.”
광주 앨리펀츠에게 1승 2패로 루징 시리즈를 기록한 대전 펠컨스는, 창원으로 넘어가 최하위 팀인 창원 샤크스를 만났다.
첫 경기는 세미 제이슨이 15탈삼진을 잡아내는 괴력투를 선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두 번째 경기에서 선발 등판한 유현은 24개의 아웃 카운트를 자신의 손으로 잡아냈고, 그 중 21개를 땅볼로 잡아내는 신들린 피칭을 선보였다.
5득점을 등에 업은 유현이 전반기 마지막 선발 등판에서 8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중간계투로 3승, 선발투수로 전향한 이후 7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되며 7승, 도합 10승을 채우며 결국 전반기에 10승 투수 반열에 올라섰다.
전반기 32경기에 등판해 96이닝을 투구하고 10승 무패 12홀드 55탈삼진 3실점.
방어율은 무려 0.28이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전반기 마지막 선발 등판을 마무리했다.
-고생했다. 아쉽지만 결국 히든 미션은 달성하지 못했군.
“……전반기 내에 퍼펙트를 달성하라는 게 정상적인 미션이었다고 생각해?”
-네 능력이 부족해서 퍼펙트게임을 하지 못한 걸 어쩌겠어? 억울하면 하지 그랬냐.
“말을 말자.”
-정 원한다면 기회를 주도록 하지. 울산 알바트로스와의 전반기 마지막 3연전에서 대전 펠컨스가 몇 승 몇 패를 할지 맞추면 미션을 달성한 걸로 인정해 주겠다.
“2승 1패로 위닝 시리즈.”
-흐음. 다시 한 번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남자는 직진이지. 2승 1패 가즈아!”
-좋아. 후회하지 말도록.
* * *
전반기 선발 등판을 모두 끝마쳤음에도, 유현은 선수단과 동행하며 루틴을 지켰다.
1~2년의 짧은 커리어 하이는 재능으로도 가능하지만, 롱런을 위해서는 철저한 루틴이 답이라는 땅의 정령의 말을 수없이 되새겼다.
창원 샤크스에게 2승 1패를 기록하며 주간 3승 3패를 마크한 대전 펠컨스의 전반기 마지막 상대는, 물 오른 타선의 힘으로 치열한 5위 경쟁 중인 울산 알바트로스였다.
7월 10일 화요일.
경기를 준비하는 대전 펠컨스 선수들은 의욕이 넘쳤다. 전반기 마지막 3연전을 위닝 시리즈로 장식하고 기분 좋게 올스타 브레이크 휴식기를 즐기기 위해서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반면 안용석 감독은 고민이 많았다.
최근 들어 불펜 투수들의 컨디션이 전체적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재왕과 김정수와 정우연 외에는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재왕과 김정수가 최근 들어 자주 등판했고, 정우연은 손톱 부상이 잦아 철저하게 투구 수를 관리해 줘야 하는 투수라는 거였다.
게다가 최근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의 타격감이 좋고,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게 될 에이스 세미 제이슨은 유독 울산 알바트로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현실적으로 불펜 투수들의 활약이 있어야 이길 수 있는 3연전이다. 어떤 식으로 투수들을 기용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다.
대전 펠컨스 타선은 1회 강태영의 3점 홈런에 힘입어 선취점을 올렸지만, 이후 주요 승부처에서 병살타와 주루 미스로 인해 흐름이 끊기며 추가 득점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다.
이재형을 대신해 선발로 마운드에 선 대졸 신인투수 김용우는 5이닝 4피안타 1사사구 8탈삼진 2실점으로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끝마쳤다.
이후 서규영이 6회, 김정수가 7회를 깔끔하게 막아내며 리드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8회 초.
공격을 준비하는 울산 알바트로스 선수들은 역전 의지를 불태웠다.
“오늘 이재왕은 투구 수 때문에 휴식을 부여받아서 못 나와. 지금 대전 펠컨스 불펜에서 누가 나오건, 정우연이 2이닝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면 죄다 거기서 거기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한 점만. 연장으로 끌고 가도 우리가 유리하다 생각하자고.”
“한 점 차 승부인데 이대로 질 순 없잖아?”
“더도 덜도 말고 일단 한 점만 노리자고!”
승부처에서 허무하게 물러난 건 양 팀 다 마찬가지였지만, 자존심은 울산 알바트로스 타자들이 조금 더 상했다.
안타를 더 많이 쳐놓고 병살타를 무려 세 개나 기록하며 흐름이 끊겼으니까.
8회와 9회.
남은 두 이닝 동안 최소한 1점이라도 뽑아서 승부를 뒤집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도 승부수를 띄웠다.
와아아아아!
대전 펠컨스 팬들이 8회 초의 아웃카운트를 지우기 위해 불펜에서 뛰어나오는 한 선수의 모습을 보며 환호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응원단장은 아모르 댄스를 재생시켰다.
-유현! 유현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대전 펠컨스가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두고 마지막 3연전에서 이기고 말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타석에 들어선 서울 알바트로스의 4번 타자 박명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유현이 왜 여기서 나와?”
유현의 불펜 투입.
울산 알바트로스와의 3연전을 확실하게 잡고 2위를 굳히기 위한 안용석 감독의 승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