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굳히기 (4)
상당수의 전문가들은 대전 펠컨스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6월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선수단 내부에 닥친 문제들이었다.
5월과 6월 사이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더러 이탈했고, 날이 더워지면서 슬슬 불펜 투수들의 체력이 떨어질 시기가 다가왔다.
다행히 불펜 투수들은 6월 중순까지도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주전 선수들이 다수 빠진 타선은 안 그래도 부족한 득점력이 더욱 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펠릭스 곤잘레스의 합류로 타선이 살아난 건 사실이지만, 중요 상황에서 밥상을 차려 주지 못하는 1번 타자와 타격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한 하위 타순은 여전한 골칫거리였다.
솔직한 말로 6월 20일 서울 나인테일즈 전까지 18경기에서 13승 5패를 기록한 게 기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타격 지표가 좋지 않았다.
워낙 득점 기회 자체가 적다 보니, 득점 기회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살리지 못하는 경기에서는 허무하리만큼 쉽게 무너지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6월의 대진 운이 최악이었다.
전력이 불완전한 시점에서 6월 29경기 중 1위 서울 레오파즈와 3경기, 3위 인천 그리핀스와 6경기, 4위 서울 나인테일즈와 6경기가 잡혔다.
서울 레오파즈에게는 1승 2패, 서울 나인테일즈에게는 1승 1패, 그리고 인천 그리핀스에게는 1승 2패를 기록한 상황이다.
문제는 대전 펠컨스가 이번 시즌 인천 그리핀스를 상대로 3승 6패의 열세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인천 그리핀스를 상대로 한 열세는 이번 시즌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2016시즌에는 5승 11패, 2017시즌에는 무려 3승 13패였다.
상승세를 타다가도 인천 그리핀스만 만나면 희한할 정도로 맥을 추지 못했다.
이제는 시즌 초와 달리 대전 펠컨스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거라 말하는 대다수의 해설위원들도, 포스트시즌에서 호성적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천 그리핀스 공포증을 극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포스트 시즌에서 맞대결할 가능성이 있는 팀을 상대해 절대적인 열세를 기록한다면, 포스트시즌에서도 힘없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안용석 감독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를 앞두고 투수들과 함께 전력 분석 자료를 죽어라 검토했다. 타자들의 최근 컨디션까지 면밀히 체크하면서 주말 3연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2군에서 투수 한 명을 올렸다.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지나가는 듯 언급한 적이 있던, 대전 펠컨스 2군의 비밀병기였다.
“안녕하십니까! 신인 투수 김정수입니다! 1군에서 자리 잡는 게 목표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합이 바짝 들어간 신인투수 김정수가 선수들에게 깍듯이 인사한 뒤, 이온음료가 가득 든 아이스박스를 더그아웃으로 옮기고 훈련에 참여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땅의 정령은, 러닝을 하던 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도 김정수는 시즌 초의 너와 같은 과정을 겪을 거야.
‘추격조 겸 패전조로서 활약하다가 셋업맨으로 자리 잡는 거?’
-선발투수 전향은 왜 빼먹어? 올해는 아니지만, 아마 내년에는 선발투수로 전향할 가능성이 높아. 괜히 대전 펠컨스가 토미존 서저리를 받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시즌의 반 이상을 푹 쉰 선수를 2018 신인 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지명한 게 아니란 말씀.
‘푹 쉬었으면 어깨는 싱싱하겠네.’
-그것도 너랑 비슷하네. 넌 1군보다 2군에 더 많이 있어서 어깨가 싱싱한 거지만 말이야.
* * *
대전 펠컨스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토미존 서저리를 받은 투수를, 부상 경력으로 인해 다른 팀들이 1라운드 지명을 망설였던 투수를 2018시즌 신인 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지명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한동안 2군에서 정만찬 투수코치로부터 1대1 집중 교육을 받았다.
2군을 폭격하고 1군에 올라온 고졸 신인투수는, 팀이 6대2로 지고 있는 7회 말에 등판해 1군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줬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7회 말을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 공 9개로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한 것이다.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은 KBO리그에서 여섯 번째로 나온 진귀한 기록이기도 했다.
마운드 위에선 눈빛으로 타자들을 찢어 죽일 기세던 김정수는, 선수단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볼을 긁적이고 민망해하며 숫기 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장차 대전 펠컨스를 이끌게 될 차세대 에이스의 등장에 흥분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 2군에 괴물이 있다고 했지! 이제 펠컨스도 투수 왕국이다!
‘확실히 공이 장난 아니네. 포심이 154km까지 찍히고, 거기에 서클 체인지업이 스트라이크 존에서 훅 떨어지니까 타자들 입장에선 답이 없지.’
-아마 저 괴물은 너보다 더 빨리 고속 승진을 할 거다!
‘그럴 거 같네. 저런 서클 체인지업을 던지는 투수면 당연히 주요 보직을 맡아야지.’
7회 말에 최고 구속 154km를 기록했던 김정수는, 8회 말에는 최고 구속 155km를 기록하며 시원시원하게 공을 던졌다.
단순히 구속만 빠른 게 아니었다.
원하는 코스에 딱딱 공을 던지는 수준급 제구력까지 더해지자 빠른 공과 서클 체인지업 조합의 위력이 배가 됐다.
그리고 8회 말에도 세 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며 2이닝 6탈삼진 퍼펙트로 자신의 첫 데뷔전을 끝마쳤다.
결국 경기는 추가 득점을 해내지 못한 대전 펠컨스가 6대2로 패배하며 연승이 중단됐다.
하지만.
또 다시 인천 그리핀스에게 패배했음에도 대전 펠컨스 선수단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 두 이닝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괴물 신인 덕분에 분위기가 살아난 게 컸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원투 펀치인 세미 제이슨과 유현이 나란히 등판한다.
최근 다섯 경기에서 모두 10탈삼진 이상을 잡아내며 절정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세미 제이슨과, 선발 전향 후 네 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한 유현이 등판하는데 절대로 질 수 없었다.
타격감이 떨어진 일부 선수들은 호텔 주차장에서 늦은 저녁까지 훈련을 하면서까지 팀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딱! 딱! 딱!
대전 펠컨스는 1회 초부터 테이블 세터의 연속 안타와 강태영의 3점 홈런, 송영인의 솔로 홈런으로 도합 4득점을 만들어 냈다.
3회 초에는 제라드 캠프가 2점 홈런을 기록하며 스코어를 6대0까지 벌렸다.
-대전 펠컨스가 인천 그리핀스의 선발투수 알렉시스 산도발 선수를 조기 강판시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다들 타격감이 뜨겁네요.
-확실히 대전 펠컨스 타자들의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대전 펠컨스는 이번 시즌, 6득점 이상을 기록한 경기에서 단 1패만 하고 모두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과연 오늘 경기도 승리할 수 있을까요?
-세미 제이슨 선수의 컨디션으로 봐선, 인천 그리핀스 선수들이 어려운 경기를 할 걸로 보입니다. 주자를 내보내도 제구가 흔들리지 않은 날의 세미 제이슨 선수는, 모든 경기에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 피칭을 했거든요.
그리고 이날의 선발투수인 세미 제이슨에게 6점은 승리를 쟁취하기에 차고 넘치는 점수였다.
유현이 땅볼 유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간간이 타자들의 허를 찔러 삼진을 잡아내는 스타일의 투수라면, 세미 제이슨은 전형적인 탈삼진 머신이다.
최대 153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 낙차 큰 커브와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 거기에 각이 크고 구속이 최대 141km까지 나오는 슬라이더까지 던진다.
포심 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 할 거 없이 모두 결정구다.
주자가 나가면 흔들리는 제구가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주자가 나가도 제구가 안정적이었다.
7회까지 115구를 투구하며 15탈삼진 무실점.
홈런 공장인 인천 그리핀스를 상대로 한 3안타만 허용하는 완벽한 피칭을 보여줬다.
8회와 9회.
바통을 넘겨받은 이재왕이 아웃카운트 여섯 개를 깔끔하게 지워내며 경기를 매조지었다.
시리즈 전적 1승 1패.
위닝 시리즈가 걸린 일요일 경기를 앞두고 더 여유로운 건 대전 펠컨스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선발 데뷔 후 4경기 연속 완투승을 기록한 미친 투수가 등판하는 날이니까.
이날.
유현은 굳이 삼진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홈런 공장인 인천 그리핀스 타선을 상대로 무리하게 삼진을 노리기보단, 철저하게 땅볼을 유도하는 피칭을 선보였다.
아, 물론.
타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허를 찌르는 루킹 삼진을 3개 잡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유현은 6회까지 내야 안타를 포함해 4피안타를 허용하면서도 무실점으로 이닝을 틀어막았다.
그사이.
대전 펠컨스 타선이 유현에게 해준 득점 지원은 1회 초 장영학이 터트린 홈런을 통해 얻어낸 2점이 전부였다.
2점이면 불안한 점수 차다.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모든 선수가 10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20홈런 타자도 세 명 보유하고 있는 인천 그리핀스를 상대로는 언제 경기가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유현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2점이면 충분하지.’
-그렇고말고.
유현은 타자들에게 추가 득점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1회 초 이후 안정을 되찾은 인천 그리핀스의 에이스 김광훈의 탈삼진 페이스가 너무 매서웠다. 2회부터 5회 말 2아웃까지, 8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대전 펠컨스 타자들을 말 그대로 압도했다.
문제는 투구 수였다.
김광훈은 토미존 서저리 이후 2년을 재활하며 지난 시즌 후반기에 겨우 마운드로 돌아왔다.
인천 그리핀스의 헤이먼 감독은 김광훈을 철저하게 관리할 거라 약속했고, 실제로 김광훈은 정해진 투구 수를 채우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날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광훈은 코칭 스태프에게 더 던지고 싶다 어필했지만, 7회 초 1아웃을 잡아 놓고 정확히 90구를 투구한 시점에서 마운드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의 맹공이 시작됐다.
2018시즌 들어 8회 이후 타율이 3할 3푼 2리에 달하는 기묘한 타격으로 역전의 명수라는 팀 컬러를 장착한 대전 펠컨스답게, 8회 초 2아웃을 내준 뒤에 무려 5연속 안타를 터트리며 4득점을 추가로 만들어냈다.
스코어는 6대0.
일찌감치 승리투수 요건을 충족한 유현은 8이닝 6피안타 무사사구 3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한 뒤 마운드를 넘겼다.
선발 등판 이후 처음으로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키지 않은 경기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유현은 매 경기에서 완투를 하려는 목적으로 투구를 하지 않았다. 유현의 가장 큰 목적은 최소한의 실점으로 팀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거였다.
8회까지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팀이 6대0으로 스코어를 벌리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선발투수로서 해야 할 역할은 120퍼센트 완수했기에 미련 없이 내려온 거였다.
9회 말.
대전 펠컨스는 마운드를 김정수에게 맡겼다.
“김정수 파이팅!”
더그아웃에서 아이싱을 하며 유현은 김정수의 이름을 목청껏 외쳤다. 김정수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유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타자들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투구를 시작한 김정수에게,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는 데에는 13구면 충분했다.
또다시 세 타자 연속 삼진.
가공할 만한 탈삼진 능력을 선보이며 김정수는 대전 펠컨스에게 위닝 시리즈를 안겼다.
-쟤 다음 주부터 셋업맨이다. 100퍼센트야.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저 녀석 덕분에 가라앉을 뻔했던 분위기가 살아났으니, 결과적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이번 3연전은 의미가 커. 그리핀스를 다시 만나더라도 무기력하게 패배하지 않을 힘이 생겼고, 선수들도 자신감을 얻었어.
‘아마 플레이오프에서 그리핀스를 만나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팀을 상대로 약점을 잡힌다는 건, 한국 시리즈 진출이 불투명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천 그리핀스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거둔 건 의미가 컸다.
시즌 전체를 보면 승차를 1경기 더 벌리는 데에 성공했고, 경기 내용을 보면 더 이상 타자들이 인천 그리핀스 투수들에게 마냥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지 않았으니까.
경기가 끝난 뒤.
대전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안용석 감독은 이례적으로 선수단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들 고생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랬다. 6월에 무너질 거라고,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하지만 우린 버텼다. 6월이 시작할 때 공동 2위였던 인천 그리핀스와의 승차를 4경기로 벌렸다. 남은 시즌,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 3연전처럼만 해줬으면 좋겠다. 너희가 자랑스럽다. 너희와 함께, 정상에 올라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용석 감독의 무덤덤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말은 선수들의 가슴을 울렸다.
동시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포스트시즌 진출이 끝이 아니라는, 플레이오프를 넘어 한국시리즈 진출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게 목적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 말이다.
유현 또한 안용석 감독의 진심 어린 말에 공감하며 다시 한 번 목표를 다잡았다.
다만…….
-갓동님!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이번에야말로 99년도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재현해주십시오! 팬들은,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그런 건 내 머릿속에 말하지 말고 혼자 생각만 하면 안 되냐?’
-우워어어어어!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내 감동 물어내, 망할 지박령아.’
지나치게 감동을 받아버린 햄스터 한 마리 때문에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감동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