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22화 (22/155)

22화 굳히기 (3)

KBO리그의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은 메이저리그로 떠난 여환진이 보유한 17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당시 기록을 허용한 팀이 바로 서울 나인테일즈였다.

-그러고 보니 나인테일즈가 유독 펠컨스의 에이스들에게 약했지. 정만찬 투수코치한테도 약했고, 안용석 감독과 송현수 투수코치한테도 약했고, 여환진한테도 약했으니까.

‘그리고 나한테도 약하지.’

유현은 6회 초에도 삼진 3개를 추가했다.

그리고 그 3개의 탈삼진 모두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해서 잡아낸 거였다.

5회까지와는 달리 커터를 섞어가며 투구를 했지만, 결정구를 포심 패스트볼로 사용하는 패턴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은 유현의 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아니, 대처를 할 수가 없었다.

빠르고, 수직 무브먼트가 엄청나 라이징 패스트볼처럼 보이는 데다, 정타를 때려도 힘에서 밀리는 포심 패스트볼을 공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정타를 때릴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유현과 차영석 배터리는 철저하게 상대 타자들이 약한 코스로만 결정구를 던졌으니까.

6회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내려온 유현에게, 펠릭스 곤잘레스가 다가와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였다.

유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알아들은 건 ‘환진 여’라는 이름 정도였다.

‘쟤 지금 뭐라는 거야? 환진 선배 어쩌고저쩌고 한 거 말고는 전혀 못 알아듣겠는데?’

답답해하던 유현에게 대답을 한 건 땅의 정령이 아니라 옆에서 이온음료를 마시고 있던 강태영이었다.

“환진 선배보다 더 괴물 같은 투수가 왜 아직도 KBO리그에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미래의 명예의 전당 투수와 같은 팀이라서 너무 좋데.”

“그래? 네가 홈런을 쳐줘서 마음 편하게 투구할 수 있어 그런 거라고, 앞으로도 내가 등판할 때마다 팍팍 득점 지원해 달라고 전해 줘.”

“자긴 매 경기 타점을 올려서 타점왕이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래.”

강태영은 영어를 능숙하게 잘했다.

거기에 타자이면서 외야수라는 공통점 덕분인지 펠릭스 곤잘레스와 금세 친해져서는 둘이서 영어로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현이 땅의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태영이 영어 잘하네.’

-강태영을 본받아.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서 능숙하게 영어 실력을 갈고 닦은 거 보고 뭐 느끼는 거 없어?

‘아이큐 한 자리 투수에게는 자비로운 땅의 정령님이 외국어 능력을 선물로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정도?’

-양심이 없군. 서드 피치를 얻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다른 걸 받고 싶다고?

‘지금 당장이 아니라 메이저리그 진출 전에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영어를 쉽게 배우면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고 좋잖아.’

-흐음, 좋아. 미션을 줄게.

[자비로우신 땅의 정령님의 히든 미션!]

[전반기가 끝내기 전에 퍼펙트게임을 달성하시길 바랍니다! 미션에 성공할 경우, 외국어 하나를 선택해서 원어민 수준으로 마스터 할 수 있습니다!]

전반기 내에 퍼펙트게임 달성.

유현이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경험이 있다.

1피안타 완봉승과 퍼펙트게임은 안타 1개이지만 그 차이가 엄청나다. 1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투수는 더러 있어도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투수는 적어도 KBO리그엔 없다.

사실상 외국어를 공짜로 습득하는 건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더러워서 오늘 당장 환진 스쿨 등록한다.’

-야구 선수는 35퍼센트 DC해 준다고 하니까 이번 기회에 영어 실력 좀 늘리도록!

* * *

7회 초.

유현은 이번 시즌의 첫 실점을 허용했다.

첫 타자에게 탈삼진을 잘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에게 안타에 이어 도루, 그리고 이어진 진루타에 다시 한 번 행운의 내야 안타가 터지며 1실점을 하고 만 것이다.

-유현 선수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이 68과 3분의 2이닝에서 중단됩니다. 차영석 포수와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합니다.

-아마 교체를 하진 않을 겁니다. 7회지만 투구 수는 85개에 불과하고, 행운의 내야 안타로 실점한 거지 장타를 맞거나 사사구를 내줘서 실점을 한 게 아니니까요. 유현 선수의 컨디션은 여전히 베스트입니다.

시즌 첫 실점을 했지만 유현은 무덤덤했다.

마운드에 올라온 송현수 투수코치와 차영석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양푼갈비찜 맛집 아시나요? 오늘따라 매운 게 끌리네요.”

한 시즌 내내 무실점 피칭을 하는 건 게임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실점 과정이 나빴다면 반성해야겠지만 행운의 내야 안타 두 개였다. 그라운드 볼러에게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고, 투구 과정 자체는 괜찮았고 실투 또한 없었다.

때문에 유현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증거로.

유현은 실점을 허용한 직후 포심 패스트볼만 세 개 던져 삼구삼진을 잡아내는 괴력투로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유현 선수가 과감한 피칭으로 삼진을 추가합니다. 실점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입니다.

-저게 바로 이번 시즌 유현 선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아요,

8회에도 유현은 삼진 2개를 추가했다.

투구 수는 101개, 탈삼진은 16개,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세 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머릿속에 문득 안 좋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여환진을 상대로 2피안타 완봉승과 함께 17탈삼진을 내주면서 신기록의 희생양이 된 바로 그 경기가 생각났다.

오늘 경기에서 탈삼진 하나가 더해지면 타이기록, 두 개가 더해지면 신기록의 희생양이 된다.

어느 쪽이건 최악이다.

산 넘어 산이라고,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깼더니 이제는 규정 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말았다.

‘젠장. 이번에도 기록을 내줄 순 없어.’

‘죽어도 삼진만큼은 안 당한다.’

‘아오. 대전 펠컨스 에이스 새끼들은 도대체 왜 우리만 만나면 이러냐고!’

서울 나인테일즈 입장에선 다행이게도, 타이기록과 신기록 중 그 어느 것도 내주지 않고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마지막 공격 기회를 세 타자 연속 땅볼로 허무하게 날리면서 경기가 끝났지만,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경기는 졌지만 기록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고, 유현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 또한 자신들의 손으로 끊었으니까.

만족스럽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남은 두 경기만큼은 반드시 잡아서 다시 한 번 3위 인천 그리핀스와의 격차를 좁히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기에는 충분한 성과였다.

반면 유현의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웠다.

‘쩝. 타이기록까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나 남겨 두고 실패했네. 아쉽다.’

-그래도 탈삼진 능력만큼은 확실하게 보여 줬으니까 남는 장사였다고 본다.

‘그건 그래. 마지막 구종을 배우기 전까지는 땅볼 유도 피칭이 효율적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탈삼진 기록은 그때를 위해 미뤄 놔야겠어.’

이날 경기를 계기로 유현은 다짐했다.

네 번째 구종을 배우고 다시 만나는 날,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반드시 규정 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우겠다고 말이다.

* * *

3연전 중 첫 경기를 유현의 16탈삼진 완투승으로 내준 서울 나인테일즈는, 두 번째 경기에서는 반드시 무기력한 패배를 설욕하고 1승 1패로 동률을 맞춰 위닝 시리즈의 발판을 만들 거라고 다짐했다.

일단 8회까지는 서울 나인테일즈의 흐름이었다.

포크볼러인 윤기준은 잔부상이 많은 선수였고, 35세이브를 기록한 2014시즌을 제외하면 좀처럼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크볼을 줄이고 새 구종을 장착했다.

바로 체인지업이었다.

송현수 투구코치로부터 배운 체인지업을 바탕으로 윤기준은 8이닝 2실점 호투를 펼쳤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선발투수 임정규는 그런 윤기준에 맞서 8이닝 1실점 호투로 2018시즌 최고의 피칭을 선보였다.

펠컨스의 중심 타선인 강태영-제라드 캠프-펠릭스 곤잘레스가 각각 2안타씩을 기록했지만 산발성 안타였고, 중요 승부처에서 두 차례나 병살타가 나오며 애석하게도 1득점에 그쳤다.

안타를 더 많이 기록했음에도 말이다.

대전 펠컨스 입장에서 봤을 땐 전형적으로 안 풀리는 경기였다.

9회 초.

서울 나인테일즈는 팽팽했던 승부의 추를 기울어트릴 기회를 잡았다. 필승조 이재왕을 상대로 1사 만루의 찬스를 잡은 것이다.

4번 타자 김형주가 차분히 공을 지켜봤다.

풀카운트 상황.

이재왕의 전매특허인 포크볼을 노리고 날카롭게 스윙했다. 내야를 꿰뚫는 타구로 득점을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김형주가 휘두르던 배트의 손잡이 부분이 부러지면서, 포크볼을 공략하지 못한 채 헛스윙이 되고 만 것이다.

결과는 헛스윙 삼진.

동시에 포수 차영석이 재빨리 1루로 송구해 1루 주자였던 차희성이 런다운에 걸렸다.

가만히 놔두면 아웃이 되는 상황.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3루 주자가 눈치를 살피다 홈 베이스를 향해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2루수 장영학이 홈으로 송구했고, 차영석이 여유롭게 3루 주자를 태그했다.

1사 만루 상황에서 득점 없이 아웃카운트 두 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이런…….”

이닝이 종료된 후에도 김형주는 한참 동안 손잡이만 남은 배트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타석에 서다 보면 배트가 부러지는 경우는 비일비재하지만, 손잡이만 뚝 부러지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도 배트를 휘두르다가 부러지는 경우라면 더더욱 보기 힘들다.

아니, 한평생 야구를 하며 이번이 처음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해프닝이었다.

-저 정도면 해외토픽 감인데? 오래 살다 보니까 저렇게 배트가 부러지는 것도 다 보네.

‘그러게. 어떻게 스윙을 하는 도중에 배트가 부러질 수 있지? 불량품인가?’

-덕분에 펠컨스가 큰 위기를 넘겼어. 방금 그 상황에서 배트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100퍼센트 장타로 이어졌을 거야. 포크볼이 잘 떨어지긴 했지만 대놓고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반격의 시작인가?’

-9회 말에 1점 차 승부, 거 시나리오 쓰기 딱 좋은 타이밍이네.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이 1사 만루 찬스를 살리지 못한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가 규정 이닝의 마지막 공격 기회를 맞이했다.

강태영으로부터 시작하는 대전 펠컨스 클린업 트리오의 목표는 단순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1점만 뽑자. 어떻게든 점수를 만들어내서 최소한 연장 승부로 끌고 가자.

강태영은 배트를 짧게 잡았다.

큰 거 한 방보다는 출루를 통해 기회를 만들어주는 걸 목표로 삼았다.

9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강태영은 몸 쪽으로 바짝 붙인 포심 패스트볼에 반응하지 않으며 포볼로 1루 베이스를 밟았다.

그리고 2루 도루까지 성공시키며 대번에 무사 2루 찬스가 만들어졌다.

딱!

4번 타자 제라드 캠프는 초구 체인지업을 공략했지만, 히팅 포인트를 살짝 벗어나서 맞은 타구는 아쉽게도 워닝 트랙 앞에서 잡히고 말았다.

그사이 강태영이 태그 업을 해서 1사 3루의 천금 같은 찬스가 만들어졌다.

다음 타자는 전날의 4타수 3안타 2홈런에 이어 오늘도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 주고 있는 펠릭스 곤잘레스.

서울 나인테일즈의 선택은 고의 사구였다.

1루 베이스가 비어 있는데 타격감이 좋은 타자를 상대로 무리하게 승부할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6번 타자 이정협의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수비 시프트에 걸리며 일단은 서울 나인테일즈의 판단이 맞아 떨어지는 걸로 보였다.

9회 말 2아웃.

대전 펠컨스의 선택은 대타였다.

포수 지석한이 타석에 들어섰다.

큰 건 필요 없고 안타 하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차분하게 공을 지켜보았다.

2스트라이크에 몰렸지만 차분하게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들을 걸러냈고, 떨어지는 공에 속지 않으며 결국에는 풀 카운트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공 하나에 승부가 결정 나는 상황.

지석한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안용석 감독이 긴장을 풀어주려 한 농담이 떠올렸다.

“홈런 한 방 시원하게 날려. 그럼 네가 오늘만큼은 대전의 영웅이다.”

딱!

그리고 지석한은 자신을 주전 포수로 낙점한 안용석 감독의 믿음에 제대로 보답했다.

-호오오오오런! 9회 말 2아웃 풀카운트에서 만들어 낸 굿바이 홈런! 펠컨스 팬들이 일제히 기립합니다! 세상에 이런 경기가 있습니다!

-대전 펠컨스의 기가 막힌 대타 작전이 이번에도 성공하네요. 정말 대단합니다! 포심 패스트볼에 강점이 있는 진창연을 상대로 패스트볼에 강한 지석한 선수를 대타로 기용한 게 신의 한 수였습니다!

각종 타격 지표가 하위권인 대전 펠컨스에게 있어 도루 1위와 더불어 1위인 또 하나의 지표.

바로 대타 성공률 1위.

이번 시즌, 대전 펠컨스가 주요 승부처에서 경기를 뒤집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이 맛에 펠컨스 팬 하는 거지.

‘잘하면 내일도 이기겠는데?’

-분위기를 봐선 그럴 가능성이 높지. 첫 경기는 무기력하게, 두 번째 경기는 다 잡은 경기를 놓쳤으니 타격이 심할 거야.

여세를 몰아 대전 펠컨스는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스윕에 성공했다.

4선발 이재형은 기복 있는 피칭을 보여주며 풀타임 2년 차에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긁히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차이가 컸다.

그리고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3차전은 제대로 긁히는 날이었다.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그리고 2018시즌 새로 장착한 커브의 무브먼트와 제구가 모두 흠잡을 데 없었다.

9이닝 5피안타 1사사구 1실점으로 이재형은 개인 통산 첫 완투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날의 경기는 대전 펠컨스 2018시즌 행보에 큰 의미가 있었다.

시즌 전적 12전 9승 3패.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4위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상대 전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데다, 승차 또한 7경기로 벌리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1위인 서울 레오파즈와의 승차는 3경기, 3위인 인천 그리핀스와의 승차는 4경기.

점점 2위를 굳혀가는 모양새였다.

-이제 인천 그리핀스만 넘으면 되겠네.

‘음. 그러고 보니 주말 3연전이…….’

-심지어 원정 경기군.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3연전을 기분 좋게 끝마친 대전 펠컨스가 인천으로 향했다.

시즌 상대전적 3승 6패.

서울 레오파즈와 더불어 유이하게 열세인 인천 그리핀스와의 주말 3연전을 치르기 위해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