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굳히기 (2)
좌완투수를 상대로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가져가는 경우는 많다. 좌완투수의 경우 우타자를 확실히 잡아낼 만한 결정구가 없어 애를 먹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를 보고 좌우놀이라고 한다.
지난 맞대결 당시.
서울 나인테일즈는 유현을 상대로 선발 라인업의 여섯 자리를 우타자로 채웠지만, 1피안타 완봉승을 헌납하는 굴욕을 당했다.
헌데 이번에는 4번 타자 김형주를 제외한 모든 타자를 우타자로 배치했다. 더 극단적인 우타자 일색 라인업으로 유현을 공략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물론 유현은 자신을 겨냥한 좌우 놀이에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유현과 땅의 정령의 목표는 메이저리그다.
지난 세 경기 연속 완봉승으로 유현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에게 이닝 이터의 능력이 있다는 걸 얼핏 보여 줬다.
이번 경기에서 보여 줄 건 두 가지였다.
자신에게는 좌우놀이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탈삼진 능력이 없다는 세간의 시선을 때려 부수는 거였다.
KBO리그에서 좌우놀이에 애를 먹는다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고 한들 리그를 지배하는 활약을 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삼진은 투수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범타는 안타든 실책이든 출루를 허용할 가능성을 내포하지만, 삼진은 낫아웃 상황에서 실수라도 하지 않는 한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니까.
괜히 스카우터들이 탈삼진 능력을 투수를 평가하는 주요 잣대 중 하나로 삼는 게 아니다.
유현은 매 경기 꾸준히 삼진을 잡아내고 있지만, 탈삼진 능력보다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통한 땅볼 유도 능력이 돋보이는 투수다.
타자의 허를 찔러 삼진을 잡아내는 모습을 더러 보이지만, 그 어떤 스카우터와 해설위원도 유현의 탈삼진 능력에 집중하지 않았다.
땅의 정령은 늘 강조했다.
아무리 그라운드 볼러라도 꾸준히 삼진을 잡아 줘야 한다고, 그래야지 타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자신에게 탈삼진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앞으로 자신을 상대하게 될 타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해 터지도록, 통하지도 않는 좌우놀이 따위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마지막 구종만 배우면 진짜로 kkk 머신이 될 텐데.’
-응. 한국시리즈 우승하고 와.
‘됐네요. 뭐…… 지금 있는 구종만으로도 삼진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다.
1회 초.
유현은 우타자 세 명을 상대로 커터만 다섯 개를 던져 모두 땅볼을 유도해 냈다.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는 서울 나인테일즈 우타자들에게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에서 몸 쪽으로 급격히 꺾이는 커터는 마구 그 자체였다.
2회 초.
4번 타자 김형주로부터 시작되는 공격을 앞두고,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유현의 커터에 대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지난번에 상대할 때보다 커터 제구가 좋아진 것 같은데? 한가운데에서 몸쪽으로 훅 꺾여 들어오는 게 완전 마구야.”
“아니, 저게 무슨 커터야. 저건 그냥 154km 짜리 슬라이더 아니냐고.”
“그렇다고 포심이랑 투심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저 놈을 어떻게 공략해야 되냐?”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그것뿐이겠지?”
“좋아. 1회는 어쩔 수 없었다 치고, 이제부터는 계획대로 가 보자고.”
“나인테일즈 파이팅!”
경기 전 전력 분석 타임 때, 전력 분석 팀에서는 유현 공략법을 조심스레 제안했다.
사실 공략법이라 하기에도 민망했다.
최대한 공을 많이 보며 투구 수를 늘려 9회 전에 마운드에서 내리자는 단순한 계산법을 가지고 접근한 거였으니까.
안타를 못 만들어도 상관없었다.
카운트가 불리하게 몰리더라도 최대한 공을 지켜보고, 2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존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공을 걷어 낸다는 느낌으로 타격하는 것.
난공불락인 유현을 상대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상대법이었다.
문제는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생각이 유현과 땅의 정령에게 간파 당했다는 거였다.
-다들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네.
‘오늘 커터 제구가 잘 되네. 저걸 어떻게 쳐야 하지? 아. 안 되면 투구 수라도 많이 늘려서 최대한 빨리 내려오게 만들자.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정답. 그럼 여기서 네가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1회에 깔아 놓은 밑밥이 헛되지 않도록 kkk 머신이 되어 실컷 괴롭혀 주는 것.’
-잘근잘근 씹어 먹어줘. 포스트 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팀이라면 무조건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
‘당연히 그래야지.’
서드 피치로 커터를 습득한 후.
두 경기를 소화하고서 유현은 이제야 커터의 제구가 원하는 대로 칼같이 되는 걸 느꼈다.
유현은 1회 초에 우타자 셋을 상대로 오로지 커터만 던지며 자신의 커터가 지난 경기보다 더 날카로워졌다는 걸 대놓고 드러냈다.
고작 5구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5구 덕분에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의 머릿속에 커터를 제대로 각인시켰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공략을 포기하고서 투구 수를 늘리려고 작정한 타자들을 상대로 삼진을 잡는 것만큼 쉬운 작업도 없다는 걸 알기에, 삼진 퍼레이드 위해서 설계한 거였다.
유현의 생각을 모르는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은 계획대로 투구 수 늘리기 작업에 들어갔다.
‘맛있게 잘 받아 먹겠습니다.’
유현은 2회 초에 맞이한 서울 나인테인즈의 4번부터 6번 타자를 상대로 시원하게 어퍼컷을 세 번 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좌타자인 김형주를 상대로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커터를 던져 헛스윙 삼진, 우타자인 5번 타자와 6번 타자를 상대로는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을 유도했다.
그리고 이어진 2회 말.
이날 데뷔를 한 새 외국인 선수 펠릭스 곤잘레스에게 득점권 찬스가 찾아왔다.
5번 타자 송영인이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 던진 커브를 제대로 받아쳐 펜스를 통타하는 2루타를 만들어 낸 것이다.
타석에 선 펠릭스 곤잘레스는 여유가 넘쳤다.
KBO리그 데뷔 첫 타석임에도 긴장감 따윈 보이지 않았다. 더블 A에서 동료였던 제라드 캠프의 응원을 들으며, 여유롭게 제이미 소시아의 공을 두 개 지켜보았다.
그 즈음.
해설위원은 펠릭스 곤잘레스와 제이미 소시아와 관련된 흥미로운 자료를 전달받았다.
-어…… 방금 제작진으로부터 자료를 하나 건네받았는데요, 펠릭스 곤잘레스 선수가 코칭스태프에게 데뷔전을 오늘 치르고 싶다 적극적으로 어필한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음? 무슨 특이한 기록이라도 있나요?
-네. 펠릭스 곤잘레스 선수가 제이미 소시아 선수를 상대로 통산 12타수 8안타 4홈런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워낙 좋은 기억이 있다 보니 데뷔전을 앞당겼나 보네요.
-말씀하시는 순간 펠릭스 곤잘레스 선수의 타구가 쭉쭉 뻗어갑니다! 큽니다! 커요!
-아. 이건 볼 필요도 없네요. 넘어갔습니다.
-호오오오옴런! 펠릭스 곤잘레스! KBO리그 데뷔 첫 타석을 전광판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스코어는 3대0! 대전 펠컨스가 대단한 타자를 데려온 것 같습니다!
-저 정도면 적응은 필요 없겠어요. 부드럽게 스윙하면서도 임팩트 순간에는 힘을 제대로 전달할 줄 아는 좋은 타자로 보입니다.
KBO리그 데뷔 첫 타석에서 홈런을 기록한 새 외국인선수에게 팬들은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그리고 선수들은 더그아웃에서 펠릭스 곤잘레스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전통적인 세레모니와 함께 첫 홈런을 축하해줬다.
‘부드럽게 스윙한 것 같은데 타구에 힘이 제대로 실렸네. 쟤도 완전 괴물인데?’
-말했잖아. 펠릭스 곤잘레스의 정도의 선수라면 KBO리그에서 여포가 된다고. 여전히 문제투성이지만, 최소한 이전보다 득점력은 나아질 거야.
2018시즌 내내 득점력 부족으로 고민이 큰 대전 펠컨스에게, 펠릭스 곤잘레스의 합류는 천군만마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부드럽게 스윙하면서도 임팩트 순간에 제대로 힘을 전달하는 기술이 대단했다.
150km 이상의 빠른 공에 약점이 있어서 그렇지, 메이저리그에서도 변화구 공략은 잘 해내곤 했던 펠릭스 곤잘레스다. 사방이 괴물인 메이저리그와 달리 파이어볼러가 극소수인 KBO리그에선 수준급 활약을 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3회 초.
도합 3점의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마운드에 오른 유현의 목표는 2회와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세 타자 모두에게 삼진을 잡아내는 걸 목표로 한 채 공인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세 타자 모두에게 하이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해 내며 여섯 타자 연속으로 삼진을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이쯤 되니 서울 나인테일즈의 선수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못 느낄 수가 없었다.
유현의 피칭은 대놓고 이상했으니까.
“선배님. 쟤 지금…….”
“어. 나도 느끼고 있어. 커터를 안 던지고 있다 말하려는 거지?”
“네. 형주 선배님께 커터를 던진 이후, 우타자들을 상대로는 커터를 안 던지고 있습니다.”
“저 자식, 지금 우릴 가지고 노는 거야.”
그랬다.
유현은 2회 초 선두타자였던 4번 타자 김형주를 상대로 커터를 던진 이후, 다섯 타자 연속으로 커터를 던지지 않았다.
커터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을 우타자들에게 역으로 커터를 던지지 않으면서 허를 찌르는 피칭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여섯 타자 연속 삼진이었다.
4회 초.
마운드에 오른 유현에게 투수 출신인 해설위원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현 선수, 2회와 3회의 아웃카운트 여섯 개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습니다. 오늘은 유독 삼진을 많이 잡는군요.
-지금 유현 선수는 삼진을 잡기 위해 영리한 피칭을 하고 있습니다. 1회 초에 커터만 연속으로 던졌죠? 커터를 의식하게 만든 뒤, 우타자들에게 커터를 던지지 않고 결정구로 포심 패스트볼을 사용하고 있어요.
-어? 그러고 보니 김형주 선수를 상대한 이후 다섯 타자 연속 커터를 던지지 않고 있군요.
-문제는 이제 슬슬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이 유현 선수의 변칙 투구에 대해서 눈치를 챘을 거라는 거죠. 다섯 타자 연속으로 당했으면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합니다.
-그럼 유현 선수가 피칭 스타일을 바꿀까요?
-저라면 안 바꿉니다. 아니, 바꾸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해설위원의 단호함에 캐스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칭 스타일을 파악 당했다면 변화를 주는 게 좋을 텐데, 어째서 바꾸지 말라는 건지 그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 하시던 말씀과 너무 다른데요? 투수가 피칭 스타일을 파악당하면 안 된다고, 매 이닝 다른 스타일의 투구를 하는 게 이상적인 선수라고 말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근데 오늘 같은 경우는 다릅니다. 지금 유현 선수는 알면서도 못 칠 공을 던지고 있거든요.
-알면서도 못 칠 공이요?
-1회부터 지금까지, 유현 선수가 던진 포심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이 155km입니다. 평소보다도 평균 구속이 높게 나오고 있죠. 유현 선수의 컨디션이 그만큼 좋다는 겁니다. 보니까 포심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도 평소보다 좋아요. 심지어 제구까지 잘 됩니다. 저건 알아도 못 쳐요.
해설위원의 말이 맞았다.
유현은 투구 패턴을 바꾸지 않았다.
반면 유현이 커터를 던지지 않는다는 걸 파악한 서울 나인테일즈의 우타자들은 포심 패스트볼을 적극적으로 노리고 타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다른 성과는 없었다.
4회에도, 그리고 5회에도.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2대1의 비율로 던졌다. 누가 보더라도 적극적으로 삼진을 유도하는 피칭을 했다.
그걸 알면서도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아웃카운트를 내줬다.
어떤 타자는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 삼진, 어떤 타자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투심 패스트볼에 루킹 삼진, 어떤 타자는 히팅 포인트에 정확히 맞추는 깔끔한 타격을 했지만 힘에서 밀려 중견수 플라이, 또 어떤 타자에게는 포심 패스트볼만 연속으로 던져서 삼구삼진.
유현의 피칭에는 거침이 없었다.
-제가 말했죠? 저건 못 친다고.
5회까지 유현은 안타를 두 개 내줬지만 도합 1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서울 나인테일즈에게 단 1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사이 대전 펠컨스 타자들은 유현이 아직 규정 이닝을 채우지 못한 관계로 여전히 리그 방어율 1위를 기록 중인 제이미 소시아를 확실하게 무너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3회 말에 나온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의 백투백 홈런, 그리고 4회 말에 나온 펠릭스 곤잘레스의 3루타를 비롯한 도합 4안타로 4회까지만 무려 9득점을 한 것이다.
결국 제이미 소시아는 4회를 다 채우지 못한 채 3과 3분의 2이닝 9피안타 2사사구 4피홈런 9실점으로 KBO리그 데뷔 이후 최악투를 선보이고서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거기에 5회에는 3루수 송영인의 시즌 8호 홈런까지 터지며 점수는 10대0.
덕분에 유현은 반환점을 돈 6회 초에 편안한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12개, 기록한 삼진은 10개.
유현이 땅의 정령에게 물었다.
‘여환진 선배가 세운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이 몇 개였는지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