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굳히기 (1)
투수의 세레모니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 게 배트 플립이다. 배트 플립은 허용하면서 왜 투수가 세레모니를 하는 건 안 되냐는 거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2018시즌을 기점으로 10개 구단은 선을 넘지 않는 투수의 세레모니는 허용하는 걸로 방침을 바꿨다.
야구의 재미를 위해, 관중 증가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세레모니를 권장한 것이다.
유현은 삼진을 잡을 때마다 어퍼컷 세레모니를 했고, 삼진을 당한 타자들 중 꽤나 많은 이들이 그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타자가 배트 플립을 하는 것처럼 투수의 세레모니 또한 공식적으로 허용이 됐으니까.
서울 나인테일즈의 선수들은 어퍼컷 세레모니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아무리 신기록을 갱신했다 하더라도 더그아웃 앞에서 춤을 추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
연속 경기 출루 기록을 갈아치운 타자가 홈런을 치고서 텀블링 세레모니를 했던 걸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이 의욕을 불태웠다.
겁 없이 세레모니를 하는 저 망할 투수를 반드시 강판시키고 마리라 다짐했다.
“강태영이 수비를 잘해서 그렇지 확실하게 장타가 될 코스였어.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실투가 들어오면 칠 수 있어.”
“일단은 1점을 목표로 하자. 저 정신 나간 괴물 새끼가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키게 놔둘 거야?”
“그럴 순 없지.”
“망할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 좀 깨보자고.”
“나인테일즈 파이팅!”
한편.
실투로 인해 실점을 할 뻔했던 유현은 비교적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실투만 던지지 말자. 차영석의 리드를 믿고, 내 공을 믿고 계산한 대로만 던지면 이길 수 있다.
8회까지는 그렇게 됐다.
6개의 아웃카운트를 지우는 데엔 공 15개면 충분했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는 타자들에게 유현은 좋은 타구가 나올 수 없는 코스로만 투구했다.
문제는 9회였다.
9회 말, 선두타자를 상대로 2구를 공략당해 안타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퍼펙트는 6회 말에 깨졌지만 노히트를 기록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웃카운트 세 개만 더 잡으면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아쉽게 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땅의 정령이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질책했다.
-안 좋은 버릇이 또 나오는군!
‘으음. 내가 너무 쉽게 승부하려고 했나?’
-잘 알고 있네. 완급 조절? 나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서운해.
‘뭘 잊어?’
-네가 내 축복을 받았다는 걸. 120구를 전력투구해도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99구에 157km 찍었던 거 기억 안 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땅의 정령으로부터 처음으로 받은 미션의 보상 중에 체력 회복 속도 2배 증가가 있었고, 유현은 지난 등판에서 99구에 157km를 기록할 정도로 지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 등판 후 고작 이틀 만에 컨디션이 100퍼센트에 가깝게 회복됐고 말이다.
웬만해서는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다는 건데, 그걸 알면서도 유현은 완급 조절을 신경 쓰고 있었다.
완급 조절이 선발투수라면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이는 유현 한정으로 잘못된 생각이었다.
땅의 정령이 말한 대로 120구를 던져도 지치지 않는다면, 체력 안배를 신경 쓰는 게 무의미했다.
‘120구를 전력투구해도 지치지 않는 거면, 어떻게 해야 지치는 거야?’
-밤새 술 먹고 한숨도 안 잔 상태에서 루틴도 안 지킨 채로 3일 연속으로 선발 등판해 120구씩 던지면 지치려나?
‘안 지친다는 거네.’
-그러니까 완급조절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완벽하게 던질 수 있게 노력하단 말이야! 아무리 좋은 공도 타자들이 원하는 코스로 들어가면 공략당할 수 있다는 거 몰라?
‘잔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그렇게 해야겠네.’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평범한 투수가 아니라는 걸, 야구와 관련해서만큼은 그 어떤 코치와 감독보다 뛰어난 햄스터와 함께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그리고 전력투구를 했다.
3구째에 우타자 몸 쪽으로 붙는 커터를 던져 투수 앞 땅볼을 유도, 매끄럽게 수비를 해서 2루수에게 송구했고 2루수가 곧장 1루로 송구하며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2개를 지워 버렸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이날 경기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맞이한 찬스를 병살타로 허무하게 날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은 뭐다?
‘삼진을 잡아 줘야 제 맛이다.’
유현은 지난 등판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아웃카운트의 위닝 샷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지금쯤 커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타자에게, 바깥쪽 높은 코스로 꽉 차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서 4구 째에 헛스윙을 유도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삼진.
지난 등판과 마찬가지로 유현은 27개의 아웃카운트를 홀로 책임지는 데에 성공했다.
지난 경기와 다른 게 있다면 투구 수가 95구로 줄었다는 것과 삼진이 4개로 줄었다는 것, 그리고 연속 이닝 무실점 신기록을 53이닝으로 늘렸다는 거였다.
95구를 투구해 9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4탈삼진 무실점으로 2경기 연속 완봉승.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피칭이었다.
유현! 유현! 유현!
경기가 끝난 뒤, 펠컨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유현의 이름을 목 놓아 외쳤다.
유현은 팬들을 향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는 걸로 화답했다. 1루 응원석에서 아모르 댄스가 흘러나오자 리듬을 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 진행된 언론 인터뷰에서 유현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제 능력이 닿는 데까지 늘려 보겠습니다.”
* * *
흔히들 야구의 꽃은 홈런이라고 한다.
비슷한 수준의 투수와 타자가 있을 때, 대중들은 호투하는 투수보다 홈런을 치는 타자에게 더 열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KBO리그가 몇 년째 타고투저 현상이 뚜렷하다 보니, 팬들이 열광할 만한 선발투수들이 씨가 말랐다는 거였다.
기껏해야 각 팀의 에이스 정도였다. 물론 대부분은 토종이 아니라 외국인 선수였다.
토종 선발 중에서는 광주 앨리펀츠의 에이스 양원중 정도를 제외하면 최근 몇 년 동안 최정상급 폼을 유지하는 투수가 없었다. 타자와 불펜에서 새 얼굴이 계속 나오는 것과 달리 토종 선발을 키워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이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동향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근 10년 동안 유환진을 제외한 투수들이 모두 메이저리그 진출에 실패한 반면, 타자는 무려 7명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으니까.
그렇다면 KBO리그에서 선발투수가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고, 나아가서 합당한 대우를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유현은 땅의 정령을 통해 일찌감치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리그를 씹어 먹으면서 대기록도 세우면 되지. 날 보기 위해 스카우터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도록 미친 활약을 보여주면 되잖아.’
-그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기록은?
‘연속 이닝 무실점을 늘리는 거지. 하는 김에 연속 경기 완봉승 기록도 도전해 보고.’
-정답.
‘노히트나 퍼펙트는 어려우려나?’
-하고 싶은 거 다 해. 너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거 잊지 마. 커터까지 배운 이상, 이제 네가 할 일은 리그를 초토화시키는 것뿐이야.
토종 선발들의 성장세가 더딘 상황에서 선발 전향 이후 두 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한 유현의 주가가 폭등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직 제대로 분석이 되지 않아서 호투하는 거라고, 본격적으로 분석이 들어가면 유현 또한 흔들리는 시기가 올 거라고.
유현은 세간의 시선에 실력으로 답했다.
6월 13일.
울산 알바트로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시즌 세 번째 선발 등판을 해, 9이닝 3피안타 1사사구 6탈삼진 무실점으로 세 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은 62이닝으로 늘어났다.
세 번째 완봉승은 유현의 입장에서도 나름 의미가 있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가 유현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경기장을 찾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현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자신이 등판할 때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경기장에 상주하게 만들어 버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현의 선발투수 전향은 결과적으로 대전 펠컨스에게 큰 도움이 됐다.
매 경기 불안함을 노출했던 앤드류 헤일러의 자리를 3연속 완봉승으로 장식해 준 덕분에, 1선발부터 3선발이 안정을 찾았으니까.
4선발인 이재형과 5선발인 하민수가 기복이 있긴 해도 6이닝 가까이 꾸준히 소화해 줬다. 선발 로테이션조차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다른 팀에 비하면 대전 펠컨스의 선발진은 호화 그 자체였다.
6월 17일까지.
대전 펠컨스는 선발진의 안정세와 리그 방어율 1위에 빛나는 불펜진의 호투에 힘입어 15경기에서 10승 5패를 기록했다.
1위인 서울 레오파즈가 12승 2패를 기록하면서 승차가 오히려 벌어졌지만, 선수들도 코칭스태프도 팬들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시즌 전 압도적인 꼴찌 후보였던 팀이 6월 중순까지 2위다. 그것도 3위와의 격차를 3경기까지 벌리는 데에 성공하면서, 갑작스런 하락세만 없다면 포스트시즌 진출이 유력하다.
가을 야구에 목말라 있는 팬들 입장에선 2위만 계속 유지해 주더라도 감지덕지였다.
물론 불안 요소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타선의 침체였다.
2루수 정경우, 1루수 김태성의 부상, 멘도사 라인을 맴도는 유격수 하지성의 타격 부진, 중견수 이영우의 체력 고갈로 인한 슬럼프 등이 겹치며 팀 타율이 9위에 머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전 펠컨스는 무너지지 않았다.
선수들은 낮은 타율을 보완하기 위해 공격적인 주루를 선택했다. 적극적인 도루와 더블 스틸을 바탕으로 한 베이스 더 가는 야구를 추구하면서 부족한 득점력을 보완하려 노력했다.
도루 1위를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로 실책 유도율 1위를 기록, 지는 경기는 최소한의 소모로 지며 이기는 경기는 확실하게 잡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접전 상황일 때마다 영웅이 나왔다.
6월의 17경기에서 대전 펠컨스 팬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는 유현, 그리고 2루수 장영학이었다.
데뷔 후 4년 동안 홈런이 4개에 불과했던 2루수 장영학은, 6월 1일에 시즌 첫 1군 합류 이후 15경기에서 5홈런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타율은 무려 4할 5푼이었다.
거기에 클러치 능력이 확실한 1루수 겸 지명타자 이정협, 변화구에 강점이 있고 연장만 갔다 하면 홈런을 때리는 3루수 송영인, 시즌 대타 타율 6할을 기록하며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 주고 있는 차영석까지.
중요할 때마다 영웅이 튀어나오며 질 것 같다가도 이기는 역전승의 귀재다운 면모를 보여 줬다.
목표였던 5할 승부 이상의 성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코칭스태프는 고민이 많았다. 주전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으로 인한 타격 침체는, 결국 투수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여름이 되면 체력이 떨어진 투수들이 나올 테고, 매 경기 최소한의 득점으로 팀의 승리를 지켜주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더 많은 승리를 챙기기 위해서는 타선이 반드시 살아나야만 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새 외국인 선수인 펠릭스 곤잘레스의 데뷔전이 확정됐다.
18일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홈경기에서 중견수 겸 6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기로 했다.
팀에서는 대타로 출전하며 적응 시간을 가지길 바랐지만, 선수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선발 출장이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선발투수는 유현이었다.
* * *
6월 17일.
루틴대로 훈련을 끝마친 유현은 최근 다섯 경기에서 타율 2할을 기록하며 슬럼프를 겪고 있는 강태영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현아. 넌 슬럼프 왔을 때 어떻게 해결했어?”
“해결을 못 했지. 그래서 1군보다 2군에 많이 있었잖아.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겠더라고.”
“슬럼프 좀 안 겪었으면 좋겠어. 매일 베스트 컨디션이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편하게 생각해 보는 건 어때?”
“편하게?”
“응. 슬럼프가 오면 일단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점점 슬럼프가 오래 가는 거라 하더라고. 차라리 그럴 땐 한 가지만 노리고 편한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가는 게 좋을 수도 있데.”
“편하게라…… 땡큐. 내일은 그래 봐야겠어.”
강태영은 유현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유현이 아니라 그 누가 하는 조언이라도 진지하게 들을 생각이었다.
물론 유현의 조언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라 땅의 정령이 해준 말이었다.
핏기가 가신 소고기를 맛있게 먹으며 땅의 정령은 강태영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저 괴물 타자는 이번 주 안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슬럼프를 극복할 거야.
‘태영이가 슬럼프니까 확실히 타선의 힘이 떨어지긴 하더라. 빨리 극복하길 바라야지.
-슬럼프가 없는 선수는 없어.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슬럼프를 극복하느냐는 건데, 강태영은 그게 되니까 슈퍼스타인 거야. 아까 배팅 연습하는 걸 보는데 몸이 가벼워 보이고 타구에 제대로 힘이 실리더군. 거기에 이 몸이 조언까지 해줬으니, 내일 경기에서 장타 하나 치고 시원하게 슬럼프 탈출할 거야.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결과적으로 땅의 정령의 말이 맞았다.
딱!
1회 말 2아웃 상황, 강태영이 근 일주일 만에 서울 나인테일즈의 에이스 제이미 소시아를 상대로 경기장을 벗어나는 초대형 홈런을 때려 낸 것이다.
비거리가 무려 152m였다.
‘……저 정도면 힘이 많이 실린 수준을 이미 넘어선 것 같은데?’
-음. 저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표정 보니 완전히 돌아왔네.’
-오늘은 강태영의 날이 될 거다.
슬럼프 탈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강태영의 장외 홈런으로 대전 펠컨스는 1회 말부터 기분 좋게 리드를 잡았다.
최근 세 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한 유현이 등판한 경기에서 선취점을 올린 건 의미가 컸다.
고작 한 점이지만 1회 초부터 156km를 기록했던 유현의 컨디션을 감안했을 때,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에게 득점을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심어주기엔 충분했으니까.
2회 초.
유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오늘의 목표는?
‘지난번에 호되게 당해 놓고도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꾸린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최대한 많이 삼진을 잡는 것.’
-슬슬 탈삼진 능력을 보여 줄 때가 됐지.
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을 상대로 좌우놀이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