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9화 (19/155)

19화 서드 피치 (3)

커터를 실전에서 처음 던진 그 순간.

차희성의 배트가 부러지는 걸 지켜보며, 자신의 정면으로 힘없이 날아온 타구를 잡아 1루로 송구하면서 유현은 확신했다.

자신이 약점 없는 투수가 됐다고 말이다.

10승 미션을 완료한 이후, 유현에게는 약속한 대로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삼진을 잡을 수 있는 구종과,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지워 줄 수 있는 구종.

유현의 선택은 후자였다.

커터를 배워서 상대적으로 우타자에게 약하다는 단점마저 없애 버리고, 세계 최고의 투수를 목표로 삼고 싶었으니까.

유현은 여전히 브레이킹 볼이나 오프 스피드 피치는 던지지 못한다. 기껏 던진 커브는 똥볼에, 연습 삼아 몇 번 던져 본 슬라이더는 너무 빨리 꺾이고 제구가 잡히지 않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그 어떤 브레이킹 볼이나 오프 스피드 피치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주어졌으니까.

브레이킹 볼과 오프 스피드 피치를 던지지 못한다는 건 투수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타자들과의 타이밍 싸움에서 유리한 카드를 쥐지 못한 채 전쟁터에 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 157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고, 고작 1~2km 차이 나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던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단점이 아니라 최고의 무기가 된다.

같은 폼으로 던지는 세 개의 패스트볼을 육안으로 구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실전에서 처음으로 던진 커터의 위력은 유현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유현보다 땅의 정령이 더 좋아했다.

-이번 시즌 씹어 먹고, 내년 시즌에 전승하고 메이저리그 진출해서 사이영 상 받자!

‘나 포스팅으로 진출하려고 해도 이번 시즌 포함해서 네 시즌은 뛰어야 할 건데? 2군에 너무 많이 있어서 1군 등록일수가 부족하거든.’

-이 몸이 그런 것도 생각 안 하고 메이저리그 가자고 하겠어? 아이큐 한 자리 투수는 투구하기만 하면 된다! 다른 건 내가 알아서 한다!

‘그래. 타자들 다 죽일 테니까 저녁으로 뭐 먹을지나 열심히 고민해보고 계셔.’

-저녁은 불화산 치킨!

‘조만간 치킨 쿠폰 100장 모일 것 같던데.’

-잘 됐네. 100장 모이는 날 우리의 저녁 메뉴는 불화산 치킨 10마리다!

‘……말을 말자.’

* * *

커터.

유현이 차희성에게 꺼내든 비밀 무기로 인해서 서울 나인테일즈의 더그아웃이 술렁였다.

경기 전만 하더라도 유현을 상대하게 된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은 비교적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타석을 준비했다.

커브에는 절대 속아선 안 된다. 투심 패스트볼은 우타자에게 비교적 약하다. 허를 찔리지만 않는다면, 타이밍을 제대로 맞췄을 때 안타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단 출루하자. 출루를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1점을 뽑자. 우리도 리그 방어율 1위의 외국인 투수가 등판하는 날이니까 1점이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1회 말, 유현이 커브가 아니라 커터를 꺼내들면서 계획이 한 번 틀어졌다.

유현의 커터는 평범한 커터가 아니었다.

투심 패스트볼처럼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폼에서 나오는데, 구속 차이가 1~2km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육안으로 구분이 불가능했다.

더 큰 문제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순간 슬라이더를 연상시키는 무브먼트를 보여 준다는 거였다.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폼으로 던지는 150km 초중반대의 슬라이더가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육안으로 구분이 불가능한데 무브먼트까지 미쳤으니, 말 그대로 마구가 따로 없었다.

“희성아. 방금 전에 그거 커터 맞지?”

“네. 커터 맞는 것 같아요. 포심이랑 똑같이 들어오다가 스트라이크 존에서 갑자기 훅 휘어져 들어오더라고요. 무브먼트가 미쳤어요.”

“x발, 저걸 어떻게 쳐? 저건 그냥 153km짜리 슬라이더잖아. 저 새끼 진짜 안 걸리는 약 먹고 던지는 거 아냐?”

“그냥 빨리 메이저리그로 꺼졌으면 좋겠다.”

“쟤 1군 등록일수 많이 못 채워서 포스팅으로 진출하려고 해도 아마 서너 시즌은 더 뛰어야 할 걸요?”

“……앞으로 펠컨스랑 경기할 때, 유현이 선발 등판하지 않길 바라야 하는 건가.”

투심 패스트볼만 하더라도 상대하기가 어려운데 거기에 커터까지 추가됐다. 솔직한 말로 이걸 치라고 던지는 건지 전부 다 죽이겠다고 던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지선다가 삼지선다가 됐다.

선택지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지만,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하나 때문에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2회 초.

딱!

-호오오옴런! 차영석 선수! 풀카운트 싸움 끝에 커터를 받아쳐 좌측 펜스를 훌쩍 넘기는 2점 홈런을 만들어 냅니다! 스코어는 2대0! 펠컨스의 안방마님이 파트너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아. 이 점수는 좀 큰데요? 유현 선수가 1회 말, 차희성 선수를 잡아냈던 공을 생각하면 방금 전 2점으로 승부가 갈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커터를 말씀하시는 거죠?

-네. 커터로 인해 지금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할 겁니다. 경기 전만 하더라도 전력 분석에 포착되지 않은 구종이거든요. 심지어 슬라이더성 무브먼트를 보이는 153km짜리 커터입니다. 저건 답도 없어요.

해설위원의 예상이 맞았다.

2회 말.

타석에 들어선 서울 나인테일즈의 4번 타자 김형주의 머릿속은 커터로 인해 복잡했으니까.

유현과 차영석 배터리는 김형주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의 배터리는, 흔들리는 타자는 더더욱 흔들어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악마들이었다.

2스트라이크 노 볼 상황에서 3구로 선택한 건 커터였다. 한복판으로 들어오다가 존을 통과하며 바깥쪽으로 휘어져나가는 커터에 김형주의 배트가 크게 헛돌고 말았다. 투심 패스트볼을 생각하다가 커터가 들어오니 스윙 궤적이 전혀 맞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투심 패스트볼과 정반대의 궤적을 그리지만, 떨어지는 성질의 투심 패스트볼과 달리 꺾이는 커터의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방금 전처럼 슬라이더처럼 사용해 삼진을 잡아내는 것도 가능하고, 우타자 몸 쪽으로 붙여 절대로 좋은 타구가 나올 수 없게 던질 수도 있다.

고작 선택지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하나 덕분에, 유현은 타자들을 상대하는 게 손쉬워졌음을 느꼈다.

* * *

3회도, 4회도, 5회도.

유현은 단 한 명의 타자에게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에게 무기력함을 심어준 유현이 이닝을 마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갈 때, 좌익수 수비를 하고 들어오던 강태영이 말을 걸었다.

“네가 등판하면 나한테 공이 너무 안 와. 9회까지 누워서 수비해도 될 것 같은데?”

“수비가 편해서 힘이 남아돌 텐데 홈런 한 방 시원하게 때려 주는 건 어때?”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네.”

6회 초.

강태영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2회 이후 세 이닝을 잘 틀어막고 있던 제이미 소시아의 초구를 노려 시즌 27호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펠컨스타디움을 훌쩍 넘기는 비거리 155m짜리 장외 홈런에, 평일 경기임에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찬 펠컨스타디움의 관중석이 들썩였다.

‘와. 치란다고 진짜 치네.’

-누누이 말했지만 강태영은 괴물이야. 이번 시즌 60홈런에다가 장타율 0.750은 기록할지도?

‘지금 장타율이 0.795이니까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저 녀석은 KBO에 있을 클래스가 아니야. 아무튼, 대전의 슈퍼스타께서 추가 득점을 해 줬으니 충분하지?

‘아무렴. 3점이면 차고 넘치지.’

그리고 이어진 6회 말.

관중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유현은 지난 경기까지 44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번 경기에서 5회까지 0피안타 무사사구 퍼펙트를 기록하며 5이닝을 추가해 도합 49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KBO리그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은 49.2이닝이다. 유현의 신기록 달성 여부가 6회에는 무조건 결정이 난다는 뜻이었다.

관중들은 유현의 신기록 도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응원조차 아낀 채 눈빛으로만 진심이 담긴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유현은 첫 두 타자를 쉽게 상대했다.

우타자들을 상대로 선택한 위닝 샷은 커터였다. 배트 안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를 공략해 좋은 타구를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우타자 두 명은 허무하게 땅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9.2이닝 무실점.

타이기록이 확정된 상황에서 유현은 9번 타자를 출루시키고 말았다.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흘러간 타구가 불규칙 바운드가 됐고, 유격수 하지성이 타구를 놓치고 만 것이다.

결과는 실책으로 기록됐다.

유격수 하지성이 유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조금 더 침착하게 수비했어야 하는 건데.”

“괜찮아, 괜찮아. 지금까지 잘 막아 줬잖아.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그러지 마.”

유현은 실책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마운드에 설 때면 가장 바쁜 게 유격수 하지성이다. 유현이 땅볼을 유도한 타구의 반 이상이 하지성의 수비 범위 내로 들어가니까.

그리고 하지성은 그중 대부분을 큰 실수 없이 아웃카운트로 만들어 줬다. 지금껏 수많은 아웃 카운트를 잡아줬는데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 실책했다고 뭐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실책이 나온 상황에서 실점 없이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한다면 더없이 좋은 그림이었겠지만…….

타순이 두 바퀴 돌아 다시 마주한 1번 타자를 상대로 2구를 던진 유현의 표정이 굳었다. 포심 패스트볼을 바깥쪽으로 빼려던 게 실투가 되며 한가운데로 몰리고 만 것이다.

이날 경기의 유일한 실투가, 하필이면 제일 중요한 상황에 나오고 말았다.

‘젠장. 하필 지금 실투라니…….’

딱!

그리고 타자는 그 실투를 놓치지 않았다.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빠르게 날아갔다.

발사각을 보면 홈런까지는 아니더라도 장타는 확실한 상황, 1루에 있던 9번 타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2루를 돌아 3루를 향해 내달렸다.

확실한 득점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망했네. 아쉽지만 이번에는 타이기록으로 만족해야겠어.’

유현은 실점을 납득했다.

누가 봐도 2루타가 될 코스였고 실투를 던진 자신이 잘못한 거라고, 중요 상황에서의 실투는 절대로 안 된다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아직 안 끝났다. 포기하지 마.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 몰라?

죽어라 펜스를 향해 달려가며 타구를 확인하던 괴물 좌익수는, 유현이 실점하는 걸 지켜볼 수 없다는 듯 펜스를 밟고 거침없이 뛰어 올랐다.

타구는 강태영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듯이 쏙 들어갔고, 동시에 강태영의 몸이 추락했다.

누워서 수비할 거라고 하더니 정말로 펜스 앞에서 드러누워 버리고 만 것이다.

중견수 이영우와 우익수 제라드 캠프가 달려와 강태영의 상태를 살피려던 그 순간, 강태영이 미소를 지은 채 왼팔을 들어올렸다.

글러브 안에 공이 들어있는 걸 확인시켜 줬다.

“아웃!”

실투를 제대로 노려 친 2루타가 아웃카운트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

강태영! 강태영! 강태영!

펠컨스타디움이 다시 한 번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강태영은 별일 없었다는 듯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나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유현은 그런 강태영을 기다리다 환한 미소를 지은 채 하이파이브를 했다.

“내가 신기록 세워 준 거다?”

“어디 다친 건 아니지?”

“난 통뼈라서 이 정돈 괜찮아.”

“다행이네. 덕분에 살았다. 이따가 한턱 쏠게.”

강태영의 기가 막힌 호수비로 아웃카운트가 올라가며, 유현은 KBO리그의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50이닝으로 갱신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1루 응원석에서는, 유현의 신기록 갱신을 기념해서 음악을 틀어 줬다.

바로 아모르 댄스였다.

‘진짜 틀어 주네? 농담인 줄 알았는데.’

-펠컨스 팬들은 약속한 걸 무조건 지킨다. 10년 동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선수와 코칭 스태프였지 팬들이 아니었어. 올해는 반드시 가을에 야구한다는 말을 11년 연속으로 듣게 될 줄이야…….

‘올해는 정말로 거짓말 안 할 테니 걱정 마셔. 그나저나…….’

유현이 미소를 지은 채 더그아웃과 1루 응원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강태영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더그아웃 앞으로 나온 선수들은…….

고작 30초뿐이기는 하지만, 마치 클럽에 온 것처럼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유현의 신기록 수립을 기념한 일종의 팬 서비스였다.

‘음악을 틀어줬으면 춤을 춰주는 게 예의지. 이 정도의 팬서비스는 괜찮잖아?’

-서울 나인테일즈 얘들 표정이 썩었는데? 조만간 벤치 클리어링이라도 일으킬 기세야.

‘덕분에 상대하기 편하겠네.’

흥분한 타자는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강태영의 호수비로 위기를 극복한 유현이, 의도적으로 타자들을 도발하며 사냥을 준비했다.

오늘 경기에서 더 이상의 실투는 없을 거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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