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8화 (18/155)

18화 서드 피치 (2)

앤드류 헤일러는 자신이 팀에서 방출됐다는 사실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열흘 정도 대전에 남아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팀의 오퍼를 기다리겠다 했고, 대전 펠컨스 프런트는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앤드류 헤일러가 출국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을 약속했다.

6월 5일 화요일.

훈련 시간에 맞춰 펠컨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 앤드류 헤일러는 선수단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몇몇 선수들과는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이별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앤드류 헤일러는 더그아웃에서 늘 밝았고, 팀의 승리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중계 카메라가 더그아웃을 잡을 때면 늘 웃으며 파이팅을 외치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계약은 별개의 문제다.

리빌딩이 아니라 가을 야구를 바라보는 팀의 입장에서는, 결정구가 없어 2스트라이크를 잡아 놓고도 투구 수가 늘어나 야수들의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앤드류 헤일러를 계속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더그아웃을 떠나기 전.

앤드류 헤일러는 통역사를 통해 진심 어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팀의 승리에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대전 펠컨스가 꼭 우승하기를 바란다고.

팀의 목표가 바뀌며 떠나게 된 투수.

유현은 그런 앤드류 헤일러가 안타까웠다. 팀으로부터 방출을 당할 때의 자신의 모습과 앤드류 헤일러의 축 처진 어깨가 겹쳐 보였다.

물론 그와 별개로 새로 영입한 펠릭스 곤잘레스가 팀에게 큰 전력이 될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펠릭스 곤잘레스는 제라드 캠프와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다. 발 빠르고 수비 잘하는, 전형적인 호타준족이라고 보면 됐다.

다른 게 있다면 내야와 외야를 모두 소화할 수 있고, 제라드 캠프와 달리 메이저리그 경력이 제법 된다는 것 정도일까?

펠릭스 곤잘레스에 대한 평가는 대한민국이건 미국이건 비슷했다.

KBO리그에서 풀타임 뛸 경우 트리플A 올스타로 뽑혔던 2014시즌만큼은 해 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펠릭스 곤잘레스는 타율 3할 2푼 1리 23홈런 105타점 95득점 23도루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콜업의 발판을 마련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KBO리그와 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를 감안했을 때, 적응 여부와 상관없이 펠릭스 곤잘레스가 기본 이상을 해줄 거라는 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는 땅의 정령 또한 비슷했다.

-내야와 외야 모두 소화 가능한 유틸리티인데 타격은 KBO리그급이 아니야. 풀타임을 뛰면 3할에 최대 40홈런 정도는 거뜬할 거야. 컨택 좋고 더 장타력 있는 제라드 캠프라고 보면 돼.

‘그 정도면 괴물인데?’

-KBO리그에서는 괴물이지. 메디컬 테스트 통과하고 비자 발급받고 하면 아마 6월 20일 안에 입국하겠지. 타이밍이 딱 좋아.

‘뭐가?’

-6월 말이면 슬슬 투타 모두 힘이 떨어질 때잖아. 새 동력으로 인해 팀이 처지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아.

‘확실히 내부에서건 외부에서건 6월이 고비라 말하고 있기는 하지. 타선이건 불펜이건 피로 누적으로 힘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펠릭스 곤잘레스는 분명 좋은 전력이 될 거야. 게다가 네 자리를 대신할 새싹이 2군에서 무럭무럭 크고 있는데, 아마 6월 말이나 7월 초 내로 1군에 합류할 걸? 155km를 뿌리는 좌완인데 서클 체인지업을 장착해서 괴물로 진화 중이지.

그러고 보니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2군에서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신인이 있는데, 덩치를 키우면서 구속이 올랐고 거기다 최근에는 서클 체인지업을 장착하며 문자 그대로 2군을 폭격 중이라고.

만약 그 신인이 팀의 기대치만큼 빠르게 성장해 준다면, 본격적인 여름을 앞두고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불펜에 큰 힘이 되어 주리라.

* * *

투수 한 명에 타자 두 명으로 외국인 선수를 구성하는 건, 예상과 다르게 시즌을 치르면 치를수록 투수층이 두터워진 대전 펠컨스이기에 할 수 있는 과감한 선택이었다.

세미 제이슨이 등판하는 날에는 두 선수 중 한 명만 기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타선 보강을 하지 않으면 가을 야구에 진출하더라도 맥없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의 의견이 일치했다.

다행히 유현의 선발 등판과 비슷한 시기에 1순위로 점찍어줬던 선수가 풀리면서 대전 펠컨스는 기가 막힌 선택을 하게 됐다.

단, 그 선택이 당장에 빛을 발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땅의 정령이 말한 대로 메디컬 테스트와 여권 발급과 적응을 거치다 보면, 펠릭스 곤잘레스는 아마 빨라야 6월 20일 전후로 첫 선을 보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마도 스트라이크 존 적응을 생각하면 제 기량을 발휘하는 건 최소 열흘은 더 걸릴 터였다.

안용석 감독은 대타 기용이 아니라 풀타임 출전을 아예 7월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차 적응과 팀 적응을 완벽하게 끝낸 뒤부터 풀타임으로 출전시키겠다는 뜻이었다.

6월의 첫 두 경기를 모두 승리로 장식했던 대전 펠컨스는, 잠실 베이스볼 파크에서 치러진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주중 3연전 첫 경기에서 4대 1로 패배하며 5연승을 마감했다.

타선이 서울 나인테일즈의 선발투수 채우천의 8이닝 4피안타 1사사구 11탈삼진 1실점 호투에 가로막히며 빈타에 허덕인 게 컸다.

다행히 2차전에서는 선발투수 세미 제이슨이 7이닝 무실점 호투해하며 2대0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1승 1패.

위닝 시리즈와 루징 시리즈를 판가름하는 주중 3연전의 마지막 경기에서, 대전 펠컨스는 유현을 선발투수로 예고했다.

-이기면 2위 굳히는 각이다.

‘그럼 이겨서 굳혀 줘야지.’

대전 펠컨스는 서울 나인테일즈와 6월에 여섯 번 맞붙는다. 그리고 이 여섯 차례의 경기가 순위 싸움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았다.

2위인 대전 펠컨스와 4위인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승차는 2경기에 불과했으니까.

1위인 서울 레오파즈가 일찌감치 치고 나간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와 인천 그리핀스와 서울 나인테일즈가 치열한 2위 싸움을 하는 모양새였다.

일단은 1승 1패.

시즌 전적은 대전 펠컨스가 6승 2패로 압도적이지만, 서울 나인테일즈가 지난주에 치른 여섯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쟁취하며 도합 8연승으로 상승세를 탔던 걸 감안했을 때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다.

팀의 연습과 위닝 시리즈, 그리고 순위 경쟁을 하는 팀에게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목표를 지닌 채 선수들은 경기를 준비했다.

유현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등판이었다.

왜냐면 유현은 오늘 경기에서 보상으로 받은 서드 피치를 처음으로 공개할 생각이었으니까.

다행히 연습 투구를 할 때부터 컨디션이 좋았다. 원하는 코스에 제대로 공이 들어갔고, 구속도 몸을 풀 때부터 일찌감치 154km를 기록했다.

특히나 포심을 던질 때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며 볼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볼의 회전수가 많고 수직 무브먼트가 커서 흔히 말하는 라이징 패스트볼처럼 보이는 건데, 이는 곧 유현의 컨디션이 좋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안방마님으로 호흡을 맞추게 된 차영석은 공을 받아줄 때마다 연신 나이스를 외쳤다.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인은 평소처럼 내가 낼까, 아님 포심으로 삼진 잡을 때처럼 네가 낼래?”

“전 선배님 사인이 좋습니다.”

“오케이. 오늘 나인테일즈 타자들 제대로 죽여 보자.”

“싹 다 죽여 버리죠.”

유현은 여유를 가지고 마운드에 섰다.

몸을 풀 때부터 컨디션이 워낙 좋아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과 호흡을 맞춘 베테랑 포수의 볼 배합은 리그 최고 수준이다.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투수 리드, 필요하다면 같은 구종을 몇 번이건 계속 요구할 수 있는 배짱, 거기에 어떤 구종을 던져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수비 실력까지 지녔다.

인천 그리핀스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차영석과 손발을 맞췄던 외국인 투수 중 한 명은 너클볼러였다.

16승 4패 방어율 2.51을 기록하고 한국시리즈에서도 1승 1세이브로 맹활약을 했던 그 선수는, 차영석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다음 시즌의 전반기를 통째로 날리자 1승 6패 방어율 6.45를 기록하고 전반기가 끝나기 전에 방출당하고 말았다.

차영석을 제외하면 너크볼을 마음껏 던져도 받아 줄 수 있는 포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 기량이 쇠퇴했다지만 포수로서의 경험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타격이 무뎌지면 무뎌졌지, 2018시즌 들어 도루 저지율이 무려 4할 5푼에 달할 정도로 차영석의 수비는 물이 올랐다.

그리고 유현은 그런 차영석을 믿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요구하는 코스에 투구했다.

-유현 선수가 고작 4구만에 서울 나인테일즈의 테이블 세터를 더그아웃에서 쉬게 해줍니다. 아웃카운트 두 개가 삽시간에 사라졌습니다.

-유현 선수가 이번 시즌 들어 호투하고 있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 준 아웃카운트 두 개라고 생각합니다. 포심을 던지건 투심을 던지건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기가 막히게 찌릅니다. 그리고 절대 타자가 원하는 코스에 공을 주지 않죠. 배트를 휘두르면 땅볼이고 휘두르지 않으면 삼진이니, 타자의 입장에서는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는 거죠.

-제구가 받쳐 주기 때문에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 말씀이시군요.

-네. 유현 선수의 포심과 투심은 엄청납니다. 그 엄청난 공들이 자유자재로 제구가 되니까 난공불락이 되는 거죠.

-정 해설위원께선 유현 선수의 호투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라고 보십니까?

-네. 전 계속 이어질 거라고 봅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좌타자를 상대로 허용한 안타가 하나고, 나머지 안타는 모두 우타자에게 허용했다는 것 정도겠네요. 그나마도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1할 8푼일 정도로 낮습니다. 아마 우타자를 상대할 방법만 찾는다면 KBO리그에서는 유현 선수를 공략하지 못 할 겁니다.

좌타자에게는 고작 1안타, 그것도 수비 실책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안타를 허용한 게 전부다.

그 외의 안타는 모두 우타자에게 허용했다.

유현의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은 1할 8푼.

좌투수가 우타자에게 기록한 피안타율치고는 낮지만, 이것이 현재까지는 타 팀들이 유현에게서 찾아낸 유일무이한 약점이었다. 좌타자를 상대로 유현은 수비 실책이 없으면 출루 자체가 불가능한 괴물 중의 괴물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서울 나인테일즈는 유현을 상대로 테이블 세터와 4번 타자 김형주를 제외한 타자들을 모두 우타자로 채웠다.

그리고 유현은 자신의 약점이 우타자를 상대할 만한 확실한 구종의 부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투심 패스트볼은 마구에 가까운 구종이지만, 상대적으로 우타자들에게는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는 구종이기도 했다.

그래서 서드 피치로 우타자를 상대할 수 있는 구종을 택한 것이고.

3번 타자 차희성.

유현과 차영석 베터리는 타율 3할 3푼 1리 9홈런 45타점 33득점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어 가고 있는 우타자를 서드 피치의 첫 먹잇감으로 정했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타자 중 여섯을 우타자로 채운 건 괜찮은 선택이었고 본다. 그나마 널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타자 일색 라인업인 건 맞으니까.

‘얼마 전까지는 그랬었지. 지금은 아니고.'

-난 네가 서드 피치로 그걸 선택할 줄 알았어.

‘다른 선택지가 나빴던 건 아닌데, 그걸 배우면 약점을 없앨 수 있으니 당연히 그걸 배워야지.’

-맞는 말이다. 자. 그럼 저 타자에게 확실하게 보여 줘라. 널 상대로 어설픈 좌우놀이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야.

초구는 바깥쪽에 꽉 차는 투심 패스트볼로 파울, 2구는 몸 쪽으로 바짝 붙는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서 파울.

2스트라이크 노 볼 상황.

차영석이 사인을 냈다. 고개를 끄덕인 유현이 서드 피치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공을 보며, 차희성의 머릿속에서는 순간적으로 두 가지 생각이 공존했다.

저게 실투였으면 좋겠다.

어차피 가만히 있어서 삼진을 당할 거라면 아웃되더라도 배트는 제대로 휘둘러보는 게 맞겠지?

분명 코스는 한가운데에 몰리는 실투였다.

그럼에도 차희성이 걱정을 한 건, 유현이 우타자를 상대로 실투인 것처럼 위장해 한가운데로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삼진을 잡은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고민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만히 있어 봐야 한복판에 들어오는 공에 삼진을 당할 테니, 차희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일단 배트라도 제대로 휘둘러보는 거였다.

다행히 타이밍은 괜찮았다.

유현의 공이 국내에서 보기 힘든 155km의 내외의 강속구인 건 맞지만, 타이밍 자체를 맞추는 건 수준급 타자들에겐 충분히 가능했다.

타이밍을 맞추는 것과 별개로 결과가 좋지 않으니까 그게 문제인 거지.

분명 실투라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실투가 아닌 투심 패스트볼이라 해도 바깥쪽으로 빠져야 맞는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순간, 공은 몸쪽으로 급격히 꺾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슬라이더처럼.

빠각.

차희성의 배트가 두 동강이 났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153km.

차희성은 자신의 배트를 박살 낸 공이, 꺾이는 순간 슬라이더라고 생각했던 그 구종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참을 고민하다 답을 내렸다.

‘방금 그거…… 설마 커터야?’

컷 패스트볼.

앞으로 수없이 많은 타자들의 배트를 박살 낼, 우타자들의 악몽이 될 유현의 서드 피치가 실전에서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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