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서드 피치 (1)
유현은 우승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2015시즌과 2016시즌, 유현의 소속팀인 서울 레오파즈가 한국시리즈 2연패의 위업을 달성했으니까.
하지만 그 잔치에 유현은 없었다.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 모두 엔트리에 들지 못한 채 2군에서 경기를 지켜봐야만 했고, 지난 해 준우승을 할 때도 유현은 2군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생에 두 번째 선발 등판에서 완봉승을 기록했다. 갑작스런 기량 하락이나 부상이 아니라면 선발투수로서 남은 시즌 내내 마운드에 오를 게 분명하다.
문제는 팀의 성적인데…….
대전 펠컨스는 6월을 공동 2위로 시작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5할 싸움만 하더라도 포스트시즌은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
정규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 직행을 하는 게 최선이지만, 현재 1위인 서울 레오파즈와의 경기 차이가 7경기라는 걸 감안하면 쉽지는 않다.
심지어 대전 펠컨스가 부산 자이언츠와의 주말 3연전 중 2경기를 잡고, 일요일 경기는 우천 취소되며 주간 5승 0패를 기록했음에도 7경기였다.
지난해 광주 앨리펀츠가 6월 말까지 2위와 12경기 차이를 벌렸다가 시즌 말미 서울 레오파즈에게 1경기 차이까지 따라잡혔던 걸 감안하면 역전이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문제는 대전 펠컨스의 전력이다.
투수력이 좋긴 하지만 전체적인 전력을 놓고 봤을 때 서울 레오파즈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많다.
6월 4일 월요일.
유현은 휴식일임에도 루틴을 지키기 위해 땅의 정령과 함께 펠컨스타디움으로 향하며 대전 펠컨스의 가을 야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도 대전 펠컨스의 전력은 나쁘지 않아. 너와 세미 제이슨 원투펀치면 리그 톱 수준에, 윤기준도 체력 관리만 잘해 주면 15승에 3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기록할 거야. 이재형과 하민수는 기복이 있긴 해도 시즌 끝날 때면 4점대 중반의 방어율을 기록할 수 있는 토종 선발들이고. 불펜은 이제 네가 없어도 안정감이 넘치지. 아쉬운 건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가 맹타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타율 9위라는 것 정도이려나.
“네 말을 듣고 보니까 전력이 괜찮긴 하네. 타격이 좀 아쉽기는 하다. 그래서, 펠컨스가 올해는 정말로 가을 야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을야구는 무조건 하지. 그리고 내가 프런트라면, 너의 선발진 합류로 계륵이 된 앤드류 헤일러를 정리하면서 한국시리즈를 노려볼 거야.
“헤일러의 성적이 조금 안 좋긴 하지?”
-토종 선발들보다 성적이 안 좋고 몸값 낮은 외국인투수를 데리고 있는 건, 리빌딩을 목표로 할 때나 괜찮은 거지 가을 야구가 가시권인 상황에서는 좋은 선택지가 아니야.
“동의해. 그럼 넌 팀이 새로운 외국인투수를 데려올 거라 생각하는 거야?”
땅의 정령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현 시점에서, 그리고 가을야구까지 감안해서 팀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하겠지.
“약점이라…….”
-중요한 건 펠컨스가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는 거야. 현금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팀의 약점을 채워 줄 선수가 나온다면 과감하게 투자할 거야. 이미 5월 중순부터 스카우터를 파견해서 선수를 물색 중이기도 하고.
대전 펠컨스는 이번 시즌을 시작하면서 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
내부 FA선수들과 재계약을 하긴 했지만 대형 계약은 아니었고, 새로 데려온 외국인 선수인 제라드 캠프와 앤드류 헤일러의 몸값은 합쳐서 140만 달러에 불과했다.
세미 제이슨의 몸값이 지난해보다 올라 100만 달러에 성적에 따른 옵션이 붙었지만, 대형 FA를 잡거나 특급 외국인 선수 한 명에게 200만 달러 가까이 지불하는 걸 감안하면 비싼 게 아니다.
즉, 대전 펠컨스는 상황이 맞아 떨어진다면 과감한 투자를 할 자금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투자의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유현이 시즌 첫 선발등판에서 완봉승을 거두면서, 2승 5패 방어율 5.41를 기록하며 외국인 선수이면서도 팀의 선발투수 중 가장 부진한 앤드류 헤일러의 입지가 좁아졌으니까.
심지어 기록한 2승 모두 울산 알바트로스를 상대로만 거둔 거였다.
한국시리즈에서 울산 알바트로스를 만나는 게 아닌 한, 앤드류 헤일러의 활용 가치는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즌 전과 달리 대전 펠컨스는 리빌딩이 아닌 가을 야구를 목표로 해야 하는 상황이다.
팀 사정이 달라진 이상 앤드류 헤일러의 교체는 기정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시기와 방법이 문제지.
“근데 넌 팀의 내부 사정까지 어떻게 다 알고 있냐? 스카우터를 보낸 건 선수인 나도 모르는 건데 말이야.”
-이 몸은 모르는 게 없다.
“솔직히 말해 봐. 너 펠컨스타디움 지박령이지?”
-지박령 따위와 날 비교하다니! 이 몸은 대전 일대를 관리하는 지고지순한 땅의 정령이란 말이다! 넌 날 좀 더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허구한 날 불화산 치킨 노래 불러 대는 햄스터 때문에 위에 구멍이 날 것 같은데 존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제 메뉴 좀 바꾸는 게 어때?”
-우리의 저녁 메뉴에 불화산 치킨은 절대로 빠질 수 없다. 쯧쯧. 불화산 치킨의 매력을 모르는 네가 불쌍하다.
대전 펠컨스의 시즌 전망에 대한 대화 이후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늘 그렇듯 유현과 땅의 정령은 서로를 디스하기에 바빴다.
그사이 펠컨스타디움 주차장에 도착했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몇몇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훈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중에는 티 배팅을 하고 있는 차영석도 있었다.
“인마. 모처럼 이틀 연속 꿀맛 휴식인데 왜 훈련하러 나오고 난리야. 이런 날은 소파에 드러누워서 질릴 때까지 TV보다 잠드는 거야.”
“그러는 선배님은 왜 나오셨습니까?”
“나이 먹고 밥값 하려면 남들보다 배 이상 노력해야 되거든.”
“저도 루틴 지키려고 왔습니다. 겸사겸사 서드 피치도 가다듬고요.”
“지난번에 그 똥볼?”
“아뇨. 이번에는 진짜 서드 피치에요.”
“그래? 이따가 불펜에서 받아줄게, 몸 푼다 생각하고 한 번 던져 봐.”
스트레칭, 파워 트레이닝, 러닝, 쉐도우 피칭까지, 루틴대로 모든 훈련을 끝마친 뒤에야 유현은 땀에 푹 젖은 채 불펜으로 향했다.
투구를 하기 전, 공인구를 만지작거리던 유현에게 땅의 정령이 속삭였다.
-서드 피치를 던질 때 명심해야 할 단 한 가지가 뭐라고 했지?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폼으로 던질 것.’
-오케이. 그것만 명심하면 돼.
팡!
유현의 손을 떠난 공이 차영석의 미트를 파고들었다. 첫 투구고 가볍게 던져서 구위와 제구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스트라이크 존에 확실하게 들어갔던 무브먼트가 괜찮았다.
차영석의 두 눈이 커졌다.
서드 피치를 준비했다고 해서 어떤 구종일까 궁금했는데, 생각한 것보다 굉장한 놈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방금 가볍게 던진 거지?”
“네. 몸 푼다는 느낌으로 던졌습니다.”
“그래도 140km는 나왔겠는데? 전력으로 던지면 투심이랑 비슷할라나?”
“150km는 무조건 넘을 겁니다.”
“캬아…… 죽이는데? 포심과 투심에다가 이걸 섞어 던지면 타자들은 죽어나갈 거다.”
“그럼 다음 경기에서 다 죽여 버려야겠네요.”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투구하긴 했지만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폼으로 던질 수 있다는 걸, 이미지로 봤던 것처럼 무브먼트가 엄청나다는 걸 확인했다.
아마 제대로 던지면 투심 패스트볼과 비슷한 구속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실전에서 서드 피치를 던진다면 타자들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만으로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거기다가 비슷한 구속의 구종이 하나 더 추가되는 거니까.
‘이거면…… 정말로 메이저리그에서도 먹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무조건 먹힌다. 거기에 마지막 구종까지 배우면 사이영 상 확정이고.
‘마지막 구종도 좋지만, 일단은 이것부터 확실하게 가다듬어야지.’
-바람직한 태도다. 대투수가 되려면 가진 무기부터 100퍼센트 활용할 줄 알아야지.
유현은 다음 등판 전까지 서드 피치의 제구를 어느 정도 잡는 걸 목표로 삼았다.
서드 피치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올 때부터 승부를 포기하게 만드는 괴물 중의 괴물이 되고 싶었다.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팀들에게는 대부분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확실하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에이스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거다.
포스트시즌에서 팀의 승리로 이끄는 에이스의 존재는 한국 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나 대전 펠컨스처럼 타격보단 투수력으로 승리를 이끄는 팀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어떤 대투수처럼 4승을 모두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2승은 책임지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면 대전 펠컨스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 6월이지만, 유현의 시선은 벌써부터 마지막 미션이 걸린 한국시리즈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한국시리즈를 바라보는 건 유현만이 아니었다.
* * *
대전 펠컨스는 부산 유니콘스와의 주말 3연전에서 금요일 경기와 토요일 경기를 잡고 위닝 시리즈를 확보했다.
일요일 경기는 오전부터 비가 내리다가 결국 우천 취소가 됐다.
그렇게 대전 펠컨스는 주간 성적 5승 0패를 기록하며 공동 2위였던 인천 그리핀스와의 승차를 1경기로 벌리는 데에 성공했다.
6월 4일 월요일.
유현과 차영석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이 자진해서 펠컨스타디움에 나와 훈련을 하고 있던 그 시간, 배종한 단장과 안용석 감독이 대전의 한 한식당에서 만났다.
정갈한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채워진 가운데 배종한 단장이 본론을 꺼냈다.
“감독님. 이 선수가 이번에 팀에서 나왔습니다.”
배종한 단장이 건네준 스카우트 리포트를 보던 안용석 감독의 두 눈이 커졌다.
“이 선수가 정말 풀린 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몇 년 전부터 눈독을 들였지만 번번이 영입에 실패했던 바로 그 선수입니다.”
“허허허. 어떻게 이런 일이…….”
“팀의 사정이 조금 복잡하더군요. 저희로서는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전과 달리 한 가지 조건만 맞춰 주면 계약하겠다고 하더군요.”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이번 시즌에 기준치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면 장기 계약을 해 달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는 불안정한 생활에 지친 것 같습니다.”
“그 조건만 맞춰 주면 영입은 확실한 겁니까?”
“감독님만 원하신다면 오늘 당장에라도 이 선수와 도장을 찍을 수 있습니다.”
당초 안용석 감독은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가을 야구를 위한 승부수를 던지려고 했다.
유현의 선발투수 전환이 바로 그것이었다.
팀의 사정 때문에 유현을 셋업맨으로 기용하긴 했지만, 사실 유현은 불펜보다는 선발 쪽에 어울리는 스타일의 투수였다.
포심과 투심뿐이긴 하지만 최고 구속이 157km에 두 구종의 구속 차이는 고작 1~2km, KBO리그에서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유현은 자신이 투구한 44이닝 동안 단 하나의 장타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 99구에도 157km를 던질 정도로 체력까지 좋다는 걸 확인한 이상 유현은 앞으로도 계속 선발진의 한 축을 맡게 될 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세미 제이슨, 유현, 윤기준, 이재형, 하민수.
이렇게 5인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돌리는 게 대전 펠컨스 입장에선 최선인데, 그렇게 되면 외국인 투수 앤드류 헤일러의 자리가 없다.
사실 앤드류 헤일러는 리빌딩을 기준으로 봤을 땐 나쁜 선수가 아니다. 실점이 많긴 해도 5~6이닝은 꾸준히 소화해 주고 있으니까.
문제는 대전 펠컨스가 시즌 전 예상과 달리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목표를 수정했다는 거였다.
목표가 바뀐 이상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기대치 또한 달라지는 게 맞다.
결국 안용석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하시죠.”
다음 날 오전.
대전 펠컨스 홍보팀은 KBO에 앤드류 헤일러의 웨이버 공시를 요청하고, 대체 외국인 선수인 펠릭스 곤잘레스의 영입을 발표했다.
만 28세.
2015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으며, 메이저리그 통산 231경기에 출장해 타율 2할 4푼 5리 31홈런 151타점 125득점을 기록, 2018시즌에는 40경기에서 타율 2할 4푼 1리 4홈런 16타점 11득점을 기록한 키 195cm 몸무게 107kg의 좌투좌타.
그랬다.
대전 펠컨스가 투수 앤드류 헤일러를 방출하고 영입한 건 투수가 아니라 타자였다.
외국인 선수 3명 보유 2명 출장이 가능한 규정상 세미 제이슨이 등판하는 날은 제라드 캠프와 펠릭스 곤잘레스 중 한 선수만 기용할 수 있음에도, 대전 펠컨스는 타자를 데려왔다.
타격 9위, 홈런 7위, 득점권 타율 8위.
투수력에 비해 타격 지표가 따라와 주지 못하는 팀의 사정을 감안한 대전 펠컨스의 승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