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6화 (16/155)

16화 생애 두 번째 (3)

사실 유현은 선발 등판을 앞두고 걱정했다.

불펜투수로서는 시즌 내내 호투했지만, 선발투수와 불펜투수의 피칭은 엄연히 다르니까.

긴 이닝을 무실점으로 책임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땅의 정령이 그런 유현에게 조언을 하며 마음의 짐을 덜어줬다.

-1이닝이건 9이닝이건 타자들은 네 공 제대로 못 쳐. 포심이랑 투심만 던지는 걸 뻔히 안다고? 그럼 뭐해. 약점만 집요하게 노리고 파고드는 그 공들이, 육안으로 차이를 구분할 수 없고 구위와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는데.

‘정말 그럴까?’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널 왜 선택했는지 잊지 마. 네 공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해. KBO에서 네 공을 제대로 공략할 수 있는 타자라고 해봐야 한 명밖에 없어.

‘한 명? 누군데?’

-강태영.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계획대로 투구해.

불펜으로 5월까지 35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면 호투했던 유현이지만, 처참한 선발 등판의 첫 기억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걱정이 사라진 건 5회 초였다.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 안대하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 세웠던 바로 그 순간, 유현의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짜릿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걸 느꼈다.

선발투수로서의 자신감, 아무도 내 공을 치지 못 할 거라는 배짱, 묵묵히 내 공을 던지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

그 긍정적인 감정들로 인해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고 말았다.

덕분에 시비가 걸릴 뻔하긴 했지만, 벤치 클리어링 상황에서 기피 대상 1호인 차영석 덕분에 별일 없이 넘어갔다.

완봉승.

이전까지는 자신감이 반쯤 결여된 막연한 목표였지만 이제는 달랐다. 유현은 정말로 완봉승을 목표로 한 채 마운드에 섰다.

7회 초 1사.

이날 경기의 두 번째 안타를 허용한 상황에서 안대하가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안대하의 눈에서 불꽃이 튈 것만 같았다.

‘지더라도 네놈은 강판시키고 진다.’

2회에도 5회에도.

안대하는 유현과의 심리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하며 두 번 다 탈삼진을 허용하고 말았다. 특히나 5회에 허용한 루킹 삼진은 일본과 메이저리그를 거쳤던 안대하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다.

이번에는 절대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더라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끌려가다가 지면 안 된다. 최소한 득점이라도 하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다음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무조건 물고 늘어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 되면 몸에 맞아서라도 나가고 만다.

결과적으로…….

안대하는 출루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과는 전혀 다른, 죽어라 물고 늘어지는 싸움을 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여기서 고의 사구가 지시가 나옵니다.

-안대하 선수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1루를 향해 걸어 나갑니다. 앞선 두 타석에서 자존심을 구긴 만큼 잔뜩 벼르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유현 선수의 입장에서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부산 유니콘스의 5번 타자 에릭 반트 선수가 이번 주 컨디션이 좋지 않거든요.

1루 베이스를 밟았음에도 안대하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빚을 갚아 주기는커녕 마지막까지 농락을 당한 것만 같았다.

5번 타자 에릭 반트는 5구까지 가는 싸움 끝에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유격수 앞으로 보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유현이 등판할 때면 수도 없이 만들어 졌던 6-4-3 병살타로 아웃카운트 두 개가 사라졌다.

결국 안대하는 유현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씁쓸히 더그아웃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 승부를 하려는 타자에게 고의 사구라니!

‘그래야 더 열 받을 거 아냐. 5번 타자의 상태가 안 좋은데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승부할 이유도 없고.’

-안대하 부들부들 몸 떠는 거 보이지? 사석에서 만나면 조심해. 선배랍시고 군기 잡으려 들지도 모르니까.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군기 잡으면 다음에 만났을 때 또 루킹 삼진 잡아드려야지.’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8회.

유현은 세 타자를 모두 땅볼로 처리하면서 이닝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어진 9회 초.

첫 번째 아웃카운트는 몸 쪽 꽉 찬 투심 패스트볼에 움찔해서 배트를 내보지도 못한 채 루킹 삼진, 두 번째 아웃카운트는 나름 커트를 해 본다고 했지만 결국 3루수 앞 땅볼로 아웃.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이날의 마지막 상대가 될지도 모르는 2번 타자에게 2스트라이크 1볼 잡은 상황에서, 유현의 투구 수는 98구였다.

-마무리는 그걸로?

‘응. 그걸로 해야지.’

-역시 우린 통하는 게 많아. 노래 취향만 빼고.

완봉승을 장식할 마지막 1구로 유현과 땅의 정령 콤비가 선택한 건, 삼진을 잡기 위한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타자의 방망이가 크게 헛돌았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순간 솟구치는 듯한 무브먼트를 보이는 포심 패스트볼의 궤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157km.

이번 시즌 자신의 최고 구속을 99구에서 갱신하며 유현은 생애 두 번째 선발 등판을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경기 끝! 유현 선수가 9이닝 2피안타 1사사구 8탈삼진 무실점으로 오늘 경기 완봉승을 기록하면서 데뷔 8년 만에 첫 선발승을 기록합니다! 또한 이번 시즌 무실점 행진을 44이닝까지 늘렸습니다!

-연속 이닝 무실점 타이기록까지 5.2이닝, 신기록 갱신까지 6이닝을 남겨 두게 됐네요. 유현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9회 초에 157km라니요! 말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만약 유현 선수가 다음 경기에서도 선발로 다음 등판을 하게 된다면, 신기록 갱신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펜으로 35이닝, 선발투수로 9이닝.

유현은 2018시즌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연속 이닝 무실점 신기록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

* * *

9이닝 동안 99구를 투구하면서, 유현이 던진 볼은 고작 21구였다.

80퍼센트에 가까운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는 피칭은, 제구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스타일이다. 스트라이크 존에 투구한다는 건, 언제든지 타자들에게 안타를 허용할 위험성을 담보로 하는 행위이니까.

유현은 핀 포인트 제구를 구사하진 못하지만, 원하는 코스에 공을 보낼 수 있는 수준급 제구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압도적인 구위와 무브먼트, 그리고 짧은 인터벌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투구에 수준급 제구가 더해지니 난공불락이었다.

거기에 부산 유니콘스 타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느려 터진 커브까지 더해지니, 가뜩이나 좋은 공을 던지는 유현의 위력이 배가 됐다.

유현은 자신의 투구가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뻤다.

4승 12홀드를 기록한 덕분에 드디어 세 번째 구종을 습득할 조건을 충족하게 됐으니까.

그래서일까?

승리투수 인터뷰를 하는 유현의 입가에서는 좀처럼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유현 선수. 데뷔 첫 선발승 축하드립니다. 대전 펠컨스의 든든한 셋업맨으로 활약하시다가 오늘은 임시 선발로 마운드에 오르셨는데요, 앞으로도 선발투수로 등판하시는 건가요?”

“네. 선발투수로 등판하게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유현 선수는 44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다음 등판에서 연속 이닝 무실점 신기록 수립 여부가 판가름 날 것 같은데, 혹시 기록을 의식하고 계셨나요?”

“의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운드 위에서는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투구에만 집중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아 참. 더그아웃에서 계속 음악을 들으며 리듬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셨는데요, 어떤 음악을 듣고 계셨던 건가요?”

“아모르 댄스를 들었습니다.”

“다른 곡은…….”

“아모르 댄스 하나만 들었습니다.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을 때, 2군에서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을 때, 팀에게 방출 통보를 받았을 때, 그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힘을 냈거든요. 저에게는 아모르 댄스가 최고의 노래입니다.”

“아…… 그, 그러시군요.”

슬픈 사연이 담긴 이야기를 유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사연을 들은 대전 펠컨스 팬들은 감동을 받았다. 앞으로 유현이 등판할 때마다 응원석에서 아모르 댄스를 틀 거라고 약속했다.

정작 유현은 사연을 말하고도 감흥이 없었다.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아모르 댄스를 듣는 건 사실 그냥 노래가 좋아서였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기에 등판할 때마다 듣는 거였고, 앞으로도 등판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을 생각이었다.

물론 땅의 정령의 생각은 달랐다.

-걸그룹 노래를 원한다. 트로트 좀 그만 듣고 싶다. 같은 노래만 들었더니 안 보고도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다른 노래 좀 듣자!

“이 노래 여자가 부른 거야.”

-내가 원하는 걸그룹은 그게 아니잖아아아! 뜨와이스! 블락펑크! 여자애들! 랄라랜드! 아모르 댄스 말고 걔들 노래 좀 듣자고!

“좋기만 한데 왜 그리 난리야.”

-걸그룹! 걸그룹! 걸그루우우웁!

땅의 정령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유현이 선택한 노래는 아모르 댄스였다.

* * *

송현수 투수코치가 추천해 준 중국음식점에서 배부르게 식사를 한 유현이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드러누운 유현의 이마에 올라탄 채, 땅의 정령이 방방 뛰며 외쳤다.

-수고했다. 이제 보상을 받을 차례다!

[축하합니다! 미션에 성공했습니다!]

[새 구종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확인 후, 하시길 바랍니다!]

“근데 너, 네 입으로 그 안내말 비슷하게 말하면 부끄럽지 않나?”

-이런 것도 안 하고 그냥 막 퍼주면 너무 날로 먹게 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날로 먹다니, 내가 미션 달성하느라 얼마나 뼈 빠지게 고생했…….

-시끄럽고, 눈 감고 집중해라. 지금부터 선택지가 주어질 테니까.

유현의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자신이 강태영을 상대로 두 개의 구종을 차례대로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구종 모두, 유현이 익히 예상하고 있던 구종이었다.

이미지를 모두 본 유현이 답했다.

“예상했던 구종들이네.”

-변화구에 소질이 없는 아이큐 한 자리 투수한테 가르쳐 줄 수 있는 구종이라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니까. 어떤 구종이 더 마음에 들어?

“둘 다 마음에 드는데?”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다음 미션에서 나머지 하나를 배울 수 있을 거야. 신중하게 생각하고 골라라. 한 번 고르면 무를 수 없으니.

“걱정 마. 보기 전부터 정했으니까.”

유현은 곧장 구종을 선택했다.

어떤 구종이 선택지로 주어질지 상상할 때부터 결정을 내려놓았고, 그 선택이 자신에게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기에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땅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구종 중 어느 걸 선택하더라도 유현에게 도움이 될 테지만, 피칭 스타일을 살리는 데에는 유현이 선택한 구종이 어울렸다.

아마…….

다음 등판에서 유현을 상대하는 타자들은 지옥을 맛보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좋은 선택이다. 불펜 피칭을 할 때 가르쳐 줄 테니까 확실하게 배우도록. 아마 실전에서 몇 번 던져보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러겠지. 투심도 그렇게 배웠으니까.”

-자. 그럼 이제 네 번째 구종을 배울 수 있는 마지막 미션만이 남은 건가?

“마지막 미션은 뭐야? 연속 이닝 무실점 세계 신기록 세우기, 뭐 그런 거야?”

-그런 쉬운 미션을 줄 리가 있나.

잠시 후.

땅의 정령이 목소리를 살짝 변형해서, 딱딱한 기계음을 내듯이 유현에게 미션을 내렸다.

[땅의 정령님의 세 번째 미션!]

[대전 펠컨스가 한국 시리즈 우승을 하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활약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전 펠컨스가 우승만 하면 됩니다!]

[미션을 달성할 경우 선택하지 않은 네 번째 구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너 진짜로 대전 펠컨스 우승하는 거 보고 싶어서 나랑 계약한 거지?”

-노코멘트다.

“펠꼴딱 한 번만 해봐.”

-……구종 뺏어 버린다.

한국시리즈 우승.

땅의 정령이 주는 마지막 미션은, 대전 펠컨스 팬들의 오랜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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