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5화 (15/155)

15화 생애 두 번째 (2)

구속 105km에 무브먼트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똥볼 중에 똥볼.

유현은 3회까지 그 공을 세 개 던졌다.

그리고 세 번 모두 탈삼진을 잡아냈다.

탈삼진을 당한 타자들의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포심 패스트볼이나 투심 패스트볼에 삼진을 당하면 상대의 공이 좋았다고 인정이라도 할 텐데, 똥볼에 삼진을 당하니 자괴감 들고 괴로우며 절로 욕이 나왔다.

‘x발. 저 타이밍에 저걸 던져?’

‘돌아 버리겠네. 저 새끼 독심술 쓰는 거 아냐?’

포심을 예상하면 투심이, 투심을 예상하면 포심이, 둘 중 아무거나 들어오라 생각하면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한 커브가 들어왔다.

타자들의 심리를 꿰뚫는 차영석과, 새벽까지 전력 분석 자료를 탐독하며 부산 유니콘스 타자들의 공략법을 연구한 유현의 합작품이었다.

타순이 한 바퀴 돈 4회 초에도.

타자들은 여전히 유현의 공에 대처를 하지 못했다. 땅볼 세 개로 허무하게 이닝이 끝났다.

탈삼진 세 개를 곁들인 4이닝 퍼펙트.

불펜 등판을 할 때처럼 피칭을 했다면 슬슬 안타를 허용했을지도 모르지만, 타자들의 허를 찌른 커브를 준비해 온 게 주효했다.

원바운드 되고 무브먼트도 별 거 없는 커브라는 걸 아는데도 타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패스트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을 때, 커브가 들어오는 걸 알아도 이미 시작한 스윙을 멈추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커브를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으면 제구가 잘 된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든다.

스윙을 하면 히팅 포인트에도 제대로 안 맞고 구위에도 밀려 타구가 멀리 안 뻗어나간다. 그렇다고 스윙을 하지 않으면 루킹 삼진을 당한다.

유현과 차영석 베터리가 부산 유니콘스의 타자들을 완벽하게 잡아내는 사이, 타선에서는 1회 말에 이어 3회 말에 4연속 안타로 3점을 추가했다.

스코어는 6대0.

대전 펠컨스의 막강 불펜을 감안할 때, 5회까지만 잘 막아 주면 유현은 생에 두 번째 선발 등판에서 첫 선발승을 챙길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2018시즌.

대전 펠컨스는 6득점 이상을 기록한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니까.

부산 유니콘스가 단 한 번의 출루도 해내지 못한 상황에서, 5회 초 부산 유니콘스의 상징이자 KBO리그 연봉 1위인 안대하가 이 날 경기의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안대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유현은 그 눈빛에서, 안대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읽어냈다.

‘그 빌어먹을 똥볼 다시 한 번 던져 봐. 펠컨스타디움의 펜스를 넘기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깨닫게 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 같지?’

-정확히 읽어 냈네. 타자의 노림수가 뻔히 보일 때 어떻게 해 줘야 한다고 했지?

‘앞으로 내가 등판하는 날 타석에 설 때마다 똥오줌 다 지리게 만들어놔야 한다고 했지.

-넌 내가 한 말을 매우 확대 해석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난 그냥 지리게 만들라고만 했다.

‘그게 그거지.’

유현은 안대하를 상대로 초구부터 3구까지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2스트라이크 1볼을 잡아냈다.

그리고 4구째.

안대하는 커브가 들어올 거라고 예상했다.

다시 한 번 커브로 자신에게 헛스윙을 유도할 거라 생각하고 스윙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커브에 속지 않는다면 유현이 던질 선택지는 결국 두 개의 패스트볼뿐, 투심 패스트볼을 파울로 만들어 내고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면 승부에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스트라이크 존 근처에서조차 떨어지지 않는 형편없는 커브 따위, 알고 있으면 얼마든지 걸러 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유현은…….

“스트라이크 아웃!”

커브를 기다리며 스윙을 참은 안대하에게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을 선물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 156km.

이 날 던진 공 중 최고 구속이었다.

-루킹 삼진! 유현 선수가 2회 초에 이어 다시 한 번 안대하 선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한가운데 몰린 패스트볼에 안대하 선수가 루킹 삼진 당한 거, 정말 오랜만 아닙니까?

-맞습니다. 유현 선수가 안대하 선수와의 심리전에서 이겼다고 봐야 합니다. 배짱이 정말 두둑하네요. 강타자를 상대로 한가운데에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안대하 선수가 커브를 노릴 거라 확신했더라도 말이죠.

“x발…….”

안대하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똥볼에 헛스윙을 당한 것도 기분이 더러웠지만, 한복판에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에 루킹 삼진을 당한 건 그 이상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거기에 투수 놈은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어퍼컷 세레모니까지 해대고 있다.

안대하가 유현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경기가 끌려가면 답이 없다.

오늘 경기야 이미 6대0이니 내준다 치더라도, 내일과 모래 경기를 위해서라도 계속 분위기가 끌려가면 최악이다.

뭔가 반전의 요소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투수가 어퍼컷 세레모니를 해줬다.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딱 좋았다.

괜한 시비를 거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괜한 시비를 걸려는 게 맞다. 기세가 오른 투수를 방해하기 위한 뻔하디 뻔한 개수작이지만…….

선발 경험이 한 번뿐인 8년 차 투수를 흔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뭔 발? 너 지금 욕했냐?”

“아니, 형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연봉 30억짜리가 원 바운드된 똥볼에 헛스윙 삼진 당하고 한복판으로 들어온 포심에 루킹 삼진 당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어따 대고 화풀이야?”

“아니, 형님. 저 자식 어퍼컷 하는 거 못 봤습니까? 저건 좀 아니잖습니까.”

“그럼 넌 앞으로 홈런 치고 배트 플립 하지 마라. 타자들은 할 거 다 하면서 왜 투수한테만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자빠졌어.”

“하아. 아무리 그래도 어퍼컷은 좀 그러지 않습니까? 이건 진짜 아니죠.”

“x까. 되도 않는 시비 걸고 싶으면 지금 당장 배트 들고 마운드로 뛰어가. 네가 마운드에 도착하는 게 빠를지, 내가 널 패대기치는 게 빠를지 실험해 보는 것도 재밌겠네.”

안대하는 잊고 있었다.

대전 펠컨스의 안방을 지키고 있는 18년 차 노장이,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하면 상대 선수들을 묵사발 냈던 미친개라는 걸.

키 197cm 몸무게 115kg의 거구 외국인투수도 엎어치기로 제압하고 부모님 안부를 물었던 양반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걸.

지금 여기서 유현에게 뭐라 한마디 하거나 마운드 쪽으로 조금이라도 다가간다면, 몇 초 내로 등짝과 그라운드가 키스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안대하의 기세가 한층 수그러들었다.

“네네. 들어갑니다. 간다고요.”

유현을 살짝 노려보기만 했을 뿐,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땅의 정령이 속삭였다.

-덩치 값 못하네.

‘그래도 다행이네. 저렇게 시비 걸까 걱정돼서 영석 선배가 공을 받아줬으면 한 거였거든. 석한이가 포수 마스크를 썼으면 100퍼센트 시비 걸렸을 거야.’

-시비 걸리는 게 싫으면 어퍼컷을 하지 말아야지, 어퍼컷 해놓고 시비 걸리는 걸 걱정하는 건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냐.

‘열 받으라고 일부러 한 건데? 화가 난 타자가 제일 상대하기 쉬운 타자라며?’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라고 가르쳐 준 게 아닐 텐데.

‘뭐 어때. 잘 써먹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리고 사실, 투수가 세레모니 하는 게 싫으면 배트 플립부터 안 해야 되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150km짜리 공도 50km짜리 공도 다 같은 공이다. 어떤 공을 던지건 투수의 마음이다.

어퍼컷 세레모니?

그렇게 따지면 타자들이 홈런을 치고 배트 플립을 하는 것도, 적시타나 역전타를 치고 세레모니를 하는 것도 하면 안 되는 게 맞다.

게다가 최근 들어 투수들도 주요 상황에서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면 세레모니를 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세레모니 또한 야구의 재미 중 하나라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 물론.

부산 유니콘즈 타자들이 흥분한 건 155km 내외의 패스트볼을 거침없이 던지면서 105km짜리 똥볼을 던지는 게 자신들을 농락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똥볼이 정상적인 커브가 아닌 건 맞다.

당하는 선수의 입장에서야 기분이 더러울 수도 있지만, 뭐 어쩌겠는가.

억울하면 안타 치고 홈런 쳐서 되갚아 줘야지.

* * *

애초에 유현은 삼진을 잡을 생각을 하고 커브를 비장의 무기로 준비한 게 아니었다.

타자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서 들고 나온 카드고, 이번 경기 이후에는 사용하기 힘든 전략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냥 보여주기용 카드인 건 아니었다.

타자들이 작심하고 패스트볼을 노린다고 생각될 때면, 어김없이 커브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하여 삼진을 잡았다.

5회까지 유현이 잡은 네 개의 탈삼진 중, 안대하를 상대해서 포심 패스트볼을 제외한 세 개가 모두 커브로 잡은 거였다.

그리고 6회 초.

2아웃을 잡은 상황에서 유현은 이날의 첫 안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향한 타구를 유격수 하지성이 백핸드 캐치 후 곧장 1루로 송구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타자의 발이 베이스를 먼저 밟으면서 안타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아아아. 유현 선수의 퍼펙트 행진이 6회 2사에서 깨지고 맙니다.

-부산 유니콘스의 타순이 테이블 세터로 이어집니다. 유현 선수,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않고 이닝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대기록이 중단된 상황에서 실점이 나온 케이스가 많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해설위원은 유현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했다.

현역 시절 9회 말 2아웃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가다가 안타를 허용하고, 이후 홈런을 맞아 패전투수가 된 경험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정작 유현은 퍼펙트 행진이 깨진 걸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3할 타자들은 죄다 잡아내고 1할 3푼 5리를 기록하고 있던 포수한테 안타를 맞다니! 여러분! 여기 아이큐 한 자리 투수가 있어요!

‘음음. 방금 그거, 실투였지?’

-실투였다. 가운데로 너무 몰렸어.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제구가 동반되지 않으면 맞는다는 거 명심해. 메이저리그에서 106마일 던지고 끝내기 홈런 맞는 거 봤잖아.

‘더 노력해야겠어.’

유현은 자신의 실투를 반성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저 첫 실투를 안대하 같은 타자에게 던졌다면 안타가 아니라 홈런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니까.

유현이 안타를 허용하자마자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녁 뭐 먹을 거냐?”

“오늘따라 중국음식이 끌리네요.”

“튀긴 음식은 몸에 안 좋으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말고, 동파육 잘하는 집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가서 식재료를 모조리 거덜 내고 오겠습니다.”

저녁 식사 메뉴에 대해 말이다.

벤치에서는 유현을 교체할 생각이 없었다. 스코어는 6대0에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는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송현수 투수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한 건 타이밍을 끊어 주기 위해서였다.

첫 안타를 만들어 낸 부산 유니콘스의 기세가 오르지 않도록, 유현이 실투를 신경 쓰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공을 투구할 수 있도록.

잠시 후.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은 이날 처음으로 포심 패스트볼만 3개를 던져 1번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6회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삼진을 잡아낸 마지막 공은 안대하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공과 마찬가지로 156km를 기록했다.

-유현 선수, 6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6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갑니다. 투구 수는 고작 65개. 과연 7회에도 마운드에 오를까요?

-개인적으로는 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6회까지 무실점으로 마운드를 지킨 것만 하더라도 코칭스태프의 계산을 뛰어 넘는 호투일 겁니다. 스코어가 6대0으로 벌어진 상황에서 임시 선발인 유현 선수를 길게 끌고 가지는 않겠죠.

해설위원의 생각과 달리 유현은 7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유현을 임시 선발로만 쓰고 말 거라면, 다시 필승조로 돌릴 거라면 해설위원이 말한 대로 6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 조건을 채운 상태에서 투구 수가 그리 많지 않을 때 교체해 주는 게 맞다.

하지만.

코칭스태프도 유현도 대체 선발 한 번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상황에서 유현의 선발 로테이션 진입은 확정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스테미너.

과연 유현은 몇 구까지 구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80구가 넘어가고, 100구에 근접해도 구위가 떨어지지 않을까?

던질 수 있을 때까지 던져 봐라.

단, 100구가 마지노선이다.

코칭스태프의 허락을 받은 뒤, 유현은 마운드에 오르며 땅의 정령에게 물었다.

‘나 6회까지 65구 던졌지?’

-65구 맞아.

‘넉넉하네.’

투심 패스트볼 그립을 쥔 유현이 미소 지었다.

‘아웃카운트 9개 잡는 데에 35구면 차고 넘치잖아?’

-맞는 말이다.

9이닝을 모두 책임지는 것.

목표 달성을 위해 유현이 다시 마운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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