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생애 두 번째 (1)
대전 펠컨스 팬들의 야구 사랑은 부산 유니콘스 팬들 못지않다. 스타일이 다르지만 관중 동원력으로 따지면 10개 구단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게 바로 대전 펠컨스다.
10년의 암흑기를 겪으면서도 홈 경기 관중 동원 전체 3위, 원정 경기 관중 동원 전체 1위를 기록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암흑기에도 변치 않은 응원을 보내주던 팬들인데, 5월이 끝났는데도 무려 공동 2위라면?
난리가 나는 게 당연했다.
6월의 시작을 알리는 부산 유니콘스와의 원정 3연전을 앞두고 펠컨스타디움의 전 좌석이 일찌감치 매진된 게 그 증거였다.
팬들은 암표를 구해서라도 직관을 하고 싶어 했다. 허나 그 암표조차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대전의 야구 열풍은 뜨거웠다.
새로 나온 밀리터리 유니폼 5만 장이 30분도 안 돼서 모두 동이 났고, 추가로 제작한 5만 장도 순식간에 예약이 다 끝났다.
펠컨스타디움은 평일이건 주말이건,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관중이 꽉 들어찼다.
9경기 연속 홈경기 매진이라는 구단의 새 기록을 세운 날.
대전 펠컨스는 발목 부상으로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거르게 된 윤기준 대신 유현을 선발로 예고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5이닝 3실점.
선발투수로서 보여줘야 할 최소한의 기준치만 만족시켜 준다면 곧장 선발 로테이션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기대 이하라면 올스타 브레이크까지 좀 더 준비를 한 뒤에 다시 한 번 기회를 부여받는 과정을 거칠 터였다.
그리고 유현은, 앞선 기회들을 모두 잡았던 것처럼 이번 기회 또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새벽까지 죽어라 상대 타자들을 분석하고 투구 패턴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컨디션도 좋았고 자신감도 넘쳤다.
경기를 앞둔 유현이 불펜에서 몸을 풀었다.
팡! 팡! 팡!
차영석이 미트를 가져다 대는 코스에 유현은 정확히 투구했다. 포심 패스트볼이건 투심 패스트볼이건 굳이 프레이밍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이스 피칭! 오늘 공 죽인다. 제구도 깔끔한 게, 7이닝 무실점 정도는 거뜬하겠는데?”
“감사합니다, 선배님. 준비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감독님이 말씀하신 서드 피치?”
“아뇨. 서드 피치는 아직 준비가 덜 돼서, 기존에 구사하던 구종 중에 하나를 비장의 무기로 준비해 봤습니다.”
“그래? 한 번 던져 봐.”
“그럼 선배님만 믿고 던지겠습니다.”
유현은 새벽 내내 고민한 끝에 준비한, 타자들을 농락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를 투구했다.
공을 받은 차영석의 표정이 미묘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이내 미소를 짓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사랑스럽게 미친 놈 같으니라고! 솔직히 말해 봐. 현이 너 이 공 던지려고 나랑 호흡 맞추고 싶다 했지? 내일 모래 은퇴할 노인네를 그렇게 고생시키고 싶던?”
“석한이랑 호흡을 맞췄다가는 수비하다 멘탈이 나가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그건 그렇지. 걱정 마라. 절대로 안 빠지게 다 받아줄 테니까, 그 대신에 확실하게 조져. 알았어?”
“물론이죠.”
“널 상대할 부산 유니콘스 타자들이 불쌍하다.”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전날, 그는 안용석 감독에게 지석한이 아니라 차영석과 호흡을 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유현은 딱히 포수를 가리는 스타일의 투수가 아니다.
지석한과 호흡을 맞출 때도, 차영석과 호흡을 맞출 때도 그는 시즌 방어율 0을 기록했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불펜에서 길어야 2이닝 정도를 전력투구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경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던져야 한다.
모든 공을 전력투구하고 죽어라 정면 승부를 하는 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공을 던져도, 아무리 제구가 완벽해도 두 가지 구종을 같은 패턴으로만 던지다 보면 공략을 당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유현 같은 투 피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첫 시즌에 투 피치로 성공을 거둔 신인 선수들 중 상당수가 다음 시즌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원래 유현의 선발 등판은 미션 달성 후 서드 피치를 배운 이후인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윤기준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미션을 달성하지 못한 채 기회를 얻게 됐다.
그래서 임시로 사용할 무기를 준비했다.
문제는 그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차영석 같은 수비가 뛰어나고 타자의 심리를 꿰뚫을 줄 아는 포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시즌을 치를수록 지석한의 수비가 좋아지고 있는 건 맞지만, 아직까지 차영석에 비하면 블로킹과 도루 저지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차영석과 함께라면 비장의 무기를 마음껏 던질 수 있다. 그리고 부산 유니콘스의 타자들을 농락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땅의 정령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악마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
‘네가 가르쳐 준 거잖아. 타자들이 타석에 서면 도망치고 싶어질 정도로 압도하라며?’
-난 그런 공을 던지라고 한 적은 없다.
‘생에 두 번째 선발 등판인데 비장의 무기 정도는 준비해야 될 거 아냐. 그리고 타자가 열 받아야 다음 타석에서도 상대하기 편하지. 씩씩거리면서 콧김 내뿜는 타자의 머릿속이야 너나 영석 선배가 말해 주지 않아도 뻔히 보이잖아.’
-장담할게. 오늘 경기가 끝나면 부산 유니콘스 타자들이 단체로 너한테 패드립을 할 거야.
‘칭찬 고마워.’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마운드에 섰을 때.
유현은 타자들에게 악마로 보이고 싶었다. 타석에 설 때부터 지레 겁을 먹고 정상적인 승부를 하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 정도는 돼야 인터뷰 할 때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사이영 상을 노릴 거라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테니까.
* * *
-프로야구를 사랑해 주시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합니까. 부산 유니콘스와 대전 펠컨스의 시즌 9차전으로 인사드립니다. 이곳은 펠컨스타디움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대전 펠컨스의 선발투수에 갑작스런 변화가 있었죠?
-네, 그렇습니다. 윤기준 선수가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오늘 경기에 등판을 할 수 없기에, 부산 유니콘스에 양해를 구하고 선발 투수를 교체하게 됐다고 합니다.
-기사를 봐서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오늘 경기에서는 대전 펠컨스의 든든한 셋업맨인 유현 선수가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릅니다.
-유현 선수의 경우 선발 투수 경험이 없지 않나요?
-데뷔 시즌에 딱 한 경기 있었습니다. 3이닝을 투구해서 6피안타 4사사구 1피홈런 6실점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렀었죠.
-오늘 경기, 유현 선수가 호투할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5이닝 정도만 가져간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지도 모릅니다. 유현 선수가 투 피치로도 5월까지 무실점 행진을 이어간 건 다양한 스타일의 피칭을 보여 줬기 때문인데, 한 경기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거든요. 게다가 투 피치라 해도 오프 스피드 피치나 브레이킹 볼을 세컨드 피치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보니…….
해설위원은 유현이 긴 이닝을 가져가면 호투를 하기 힘들다고 바라봤다.
최대 5이닝 정도를 최소한의 실점으로 막고, 그사이에 타자들이 승리에 필요한 득점을 올려 줘서 승리투수가 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유현과 땅의 정령의 생각은 달랐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이왕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게 된 거 완투승 정도는 해라. 그래야 저녁에 중국음식 풀코스를 먹어도 양심이 안 찔리지.
‘넌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그러냐. 완투승 정도는 해야지.’
둘의 목표는 완투승이었다.
첫 이닝은 손쉬웠다.
임시로 준비한 비밀 무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유격수 앞 땅볼, 포수 팝 플라이, 2루수 정면으로 가는 라인 드라이브로 아웃카운트를 세 개를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투구 수는 고작 7개였다.
그리고 이어진 1회 말.
딱!
-풀카운트 상황. 강태영 선수, 7구를 있는 힘껏 당겨 칩니다! 맞는 순간 투수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타구가 쭉쭉 뻗어 갑니다!
-호오오오옴런! 전광판 상단을 직격하는 강태영 선수의 시즌 25호 홈런! 대전 펠컨스가 강태영 선수의 3점 홈런으로 1회 말부터 기선 제압을 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시작부터 득점 지원이 나오면 유현 선수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겠는데요?
-팀에서 유현 선수에게 바라는 건 5~6이닝 동안 최소한의 실점으로 버텨 주는 것일 텐데, 이렇게 시작부터 리드를 잡아 주면 여유가 생기죠.
-때마침 카메라가 유현 선수를 잡아줍니다. 어…… 유현 선수,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네요?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당황했다.
오랜만의 선발등판에 긴장하고 있을 줄 알았던 투수가, 더그아웃에서 노래를 들으며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을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심지어 흥에 겨운지 중간 중간 몸을 들썩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실시간으로 송출됐다.
투수 출신인 해설위원은 유현을 보며 생각했다.
저 정도면 강심장이 아니라 그냥 심장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네.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리듬도 타는데요? 홈런 치고 들어온 강태영 선수에게 한쪽 이어폰을 건네줍니다. 강태영 선수의 표정을 보아 하니 최신 가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러다 승리투수 되면 안용석 감독이랑 같이 춤출지도 모르겠는데요?
-대전 펠컨스라면 가능합니다. 지난주에 안용석 감독이 끝내기 홈런 치고 들어온 지석한 선수한테 어부바 해주시는 거 보지 않았습니까.
-더그아웃에게 그런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었죠. 음. 생각해 보니까 지금 대전 펠컨스 더그아웃의 분위기라면 정말로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해설위원과 캐스터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말이 현실이 될 거라는 걸.
* * *
유현은 긴장하지 않았다.
수백 번을 넘게 들어도 질리지 않는 아모르 댄스를 들으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중간 중간 리듬까지 탈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들은 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타자들을 어떻게 상대할지를 고민했다.
2회 초.
부산 유니콘스의 4번 타자 안대하를 상대로 2스트라이크 1볼의 카운트를 잡았을 때, 차영석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인을 냈다.
준비한 그 공을 던지라는 신호였다.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부산 유니콘스의 타자들을 농락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를 던졌다.
안대하.
메이저리그에서 세 시즌을 뛰며 타율 2할 8푼 2리 46홈런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했던 그는, 마지막 야구 인생을 고향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며 친정 팀인 부산 유니콘스에 돌아왔다.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준수한 장타력과 뛰어난 타격 기술을 자랑한다.
안대하는 유현을 상대하면서 자신감이 넘쳤다. 이번 시즌 유현을 상대로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며 유일하게 유현을 상대로 2안타 이상을 기록한 타자이니 자신감이 넘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번 시즌의 유현을 상대로 장타를 만들어 낸 경험은 없었다.
팀이 3대0으로 지고 있는 상황, 선두타자로 나선 안대하의 목표는 확고했다.
장타로 득점의 발판을 만든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은 모조리 다 쳐낼 거다. 던질 수 있으면 던져 봐라. 너도 이제 홈런 하나 맞을 때 됐잖아?
라고 생각했지만…….
느릿느릿하게 날아온 공은 스트라이크 존에 거의 도착할 즈음 뚝 떨어지며 땅에 처박히는 바운드 볼이 됐다.
작심하고 한 방을 날릴 생각을 하고 있던 안대하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헛스윙을 하며 아웃카운트 하나를 내주고 말았다.
머릿속이 패스트볼로 가득 찬 상황에서, 뒤늦게 커브가 들어온 걸 확인했음에도 이미 움직여버린 몸을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커브?’
유현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커브였다.
데뷔 시즌, 포심 패스트볼과 함께 그를 리그에서 손꼽히는 불펜투수로 만들어줬던 바로 그 공.
사실 그리 좋은 공은 아니었다.
커브를 던지지 않은 지 벌써 몇 시즌이 지났고, 패스트볼과 최대한 유사한 투구폼으로 던지려다 보니 무브먼트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존 근처에서 무브먼트가 형성되는 게 이상적인데, 그 전에 땅에 처박혔다. 게다가 구속도 지나칠 정도로 느렸다.
속된 말로 똥볼이었다.
문제는 그 똥볼이,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만을 생각하고 장타를 노리던 안대하의 배트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유현은, 황당한 표정의 안대하와 술렁이는 부산 유니콘스 더그아웃을 향해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서드 피치? 안 던지는 거지, 못 던진다고 한 적 없다. 똥볼도 구종은 구종이잖아? 억울하면 똥볼 공략해서 홈런 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