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갯벌 야구 (4)
선발투수 전향이 예정됐다지만 유현에게 딱히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여전히 야구장에서의 유현은 루틴을 지키려 노력했고, 더그아웃에서 트로트를 들으며 자신만의 흥을 즐기는 미친놈이었고, 마운드에 올랐을 때는 내야를 넘어가는 타구를 허용하지 않는 악마였다.
대구 재규어스와의 시즌 5차전.
3연투로 인해 휴식을 부여받은 유현은 경기를 앞두고 더그아웃에서 생각에 잠겼다.
‘선발투수라…….’
데뷔 이후 유현은 딱 한 번 선발투수로서 마운드에 올랐다. 5선발을 맡았던 베테랑 투수가 부진으로 2군에 내려간 뒤 기회를 얻은 거였다.
그리고 그날.
유현은 3이닝 5피안타 4사사구 1피홈런을 허용하며 무려 6실점으로 선발투수와 불펜투수의 경기 운용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공부했다. 매 이닝 전력투구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유현에게, 선발투수로서의 경험은 색다른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유현은 단 한 번도 선발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했다.
데뷔 시즌에 선발 등판 한 번 하고 8년 차에 다시 기회를 잡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사실 기회라고 해 봐야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유현은 미래보다 현실에 충실하기로 했다. 일단은 셋업맨으로서의 역할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다.
미션을 달성해야 서드 피치를 배울 테니까.
서드 피치에 고민하던 유현이, 정수리를 긁는 척 자연스레 땅의 정령에게 해바라기 씨를 먹여 주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근데 서드 피치로 어떤 구종을 가르쳐 줄 거야?’
-비밀이야!
‘어차피 늦어도 다음 달 안에는 배울 것 같은데, 그냥 가르쳐 주면 안 돼?’
-정 원한다면 힌트 정도는 줄 수 있어.
‘그럼 힌트라도 줘.’
-서드 피치는 내가 제시하는 두 구종 중 하나를 네가 선택해서 배우게 될 거야. 선택하지 않은 구종은 다음 미션을 달성하면 배울 수 있어.
‘선택이라…….’
땅의 정령은 투구폼 변경을 통해 포심 패스트볼의 위력을 극대화시켜 줬고, 투심 패스트볼을 가르쳐 주며 유현을 환골탈태시켜 줬다.
둘 중 하나.
어떤 구종일지 둘 다 대충 예상이 되긴 했다.
변화구에 재능이 없다고 했으니 가르쳐 줄 구종이야 손에 꼽을 정도 아니겠는가.
‘어느 걸 배우더라도, KBO리그를 씹어 먹는 것 정도야 문제없겠지. 둘 다 배우면 정말로 사이영 상을 노릴 수 있을 거고.’
* * *
연투를 할 수 있다는 건 투수에게 축복이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불펜투수라도 연투를 하면 컨디션이 조금씩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베스트 컨디션이 아님에도 팀이 원하는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유현은 달랐다.
땅의 정령의 축복 덕분에 컨디션이 빠르게 회복됐고, 부상 확률 또한 현저히 감소했다. 거기에 땅의 정령으로부터 전수받은 철저한 자기 관리까지 더해졌다.
덕분에 3연투를 하더라도 모든 공을 베스트 컨디션으로 던지는 게 가능했다.
3연투?
작정하고 던진다면 3연투가 아니라 한 주 동안 치러지는 모든 경기에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그런 마음과 달리 유현은 팀으로부터 철저한 관리를 받았다.
지난해의 필승조처럼 4연투를 하거나 일주일 동안 8이닝을 투구하지도 않았고, 지는 경기건 이기는 경기건 팽팽한 경기건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속된 말로 팔이 갈리는 혹사를 당하지도 않았다.
확실하게 승리를 챙겨야 하는 경기에서 3연투를 한다는 건, 그만큼 팀의 신뢰를 받고 있단 뜻이기도 하기에 유현은 좋게 받아들였다.
혹사 논란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3연투를 시켜 준 코칭스태프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덕분에 미션 달성을 위한 승수와 홀드 쌓기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으니까.
대전 펠컨스는 개막전부터 4월까지 미세먼지로 취소된 한 경기를 제외한 31경기에서 16승 15패를 기록하며 5위로 5월을 맞이했다.
그리고 5월 첫 번째 주.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주중 3연전 중 두 번째 경기와 세 번째 경기, 홈으로 돌아와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대구 재규어스와의 주말 3연전 첫 경기에 등판하며 다시 한 번 3연투를 했다.
3이닝을 투구하며 3홀드를 수확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처럼 홀드를 올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갯벌 야구, 역전의 명수.
5월의 대전 펠컨스를 상징하는 말들이었다.
분명 질 것 같은데, 패색이 짙은 경기인데 기적같이 뒤집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 기적은 주로 8회나 9회에 일어났다.
9회에 동점을 만들고 연장을 가서 이긴 게 세 번, 9회 말에 끝내기로 이긴 게 세 번, 8회에 역전을 한 게 마찬가지로 세 번.
5월에 16승 8패를 기록했는데, 그중 무려 9승이 8회 이후의 역전승이었다.
대전 펠컨스를 상대하는 팀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상하게도 대전 펠컨스만 만나면 경기 후반, 어이없는 실책 이후 실점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넘어가는 상황이 빈번하게 나왔으니까.
한 해설위원은 대전 펠컨스의 기가 막힌 역전승 행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전 펠컨스를 상대하는 팀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갯벌에 빠진 거라고,
그때부터 언론이건 팬들이건 대전 펠컨스의 야구를, 안용석 감독이 만들어 가고 있는 야구를 갯벌 야구라 부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어느새 다리가 모두 잠겨 버리고 마는 갯벌은, 상대를 죽어라 물고 늘어지며 괴롭혀서 무려 다섯 팀의 마무리투수에게 블론 세이브를 선물해 준 대전 펠컨스에게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그 중심에는 불펜의 맹활약이 있었다.
유현과 정우연.
5월의 마지막 날을 기준으로 평균자책점 0과 0.50을 기록 중인 두 투수도 대단했지만, 새로 필승조에 합류한 서규영과 이재왕의 방어율도 5월이 끝났을 때 1점대일 만큼 불펜 투수들의 활약이 팀의 상승세를 견인하는 핵심 요소였다.
불펜 평균자책점 1위.
무려 3.15로, 2위인 서울 레오파즈와 0.97 차이가 날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이었다.
박빙의 승부에서, 확실히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기가 막힌 역전을 해낸 경기에서.
대전 펠컨스의 불펜은 승리를 지켜줬다. 2018시즌에 단 한 번의 블론 세이브를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승리를 지켜내며 철벽 뒷문을 자랑했다.
이겨야 할 경기를 이기는 것.
지난해까지는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지면서 대전 펠컨스의 상승세에 원동력이 됐다.
물론 불안 요소가 없는 건 아니었다.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시도하다 아웃되어 공격의 흐름이 끊기는 상황이 더러 나왔고, 팀 타율 2할 7푼 5리로 9위이다 보니 대량 득점이 나오는 경기가 별로 없었다. 또한 세미 제이슨과 윤기준을 제외하면 기복 있는 피칭을 하는 선발진, 1루수 김태성과 2루수 정경우를 비롯한 주축 선수들의 부상까지.
그럼에도 대전 펠컨스는 5월의 기적과도 같은 상승세에 힘입어 시즌 성적 32승 23패를 기록, 인천 그리핀스와 공동 2위로 5월을 마무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대전 펠컨스 팬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올해는 정말로 가능하다고, 우리도 드디어 10년 만에 가을에 야구할 수 있다고.
대전 펠컨스가 패배할 때마다 언론과 타 팀의 팬들 또한 입을 모아 말했다.
올 게 왔다고, 대전 펠컨스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하면 결국에는 다시 순위를 찾아갈 거라고.
밖에서 떠들어 대거나 말거나.
안용석 감독은 팬들의 염원에 보답하기 위해 남은 시즌 동안 5할 승부를 할 거라고 선언했다.
이기는 경기는 확실하게 잡고, 지는 경기에서는 최대한 불펜을 아끼고 주축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통해 5강에 들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5할 싸움을 하겠다고 선언한 다음 날, 부산 유니콘스와의 원정 3연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서 안용석 감독의 계산이 어긋났다.
“기준이가 다쳤다고?”
“네. 아들이랑 놀아 주다가 발목을 삐었다고 합니다. 다음 주면 등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 등판은 불가능합니다.”
“으음.”
창원 샤크스와의 홈 3연전을 스윕하며 5월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한 그날 저녁, 부산 유니콘스와의 주말 3연전 첫 경기에 선발투수 등판이 예정되어 있던 윤기준의 부상 소식이 들려왔다.
다행히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다.
발목을 살짝 삐어서 다음 주 등판에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문제는 당장 내일 있을 경기에 누굴 선발투수로 올려야 하는지였다.
선발 로테이션을 앞당기는 건 안 된다. 잘못했다가는 모든 투수들의 컨디션을 망치는 최악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결국 임시 선발이 필요하다는 건데…….
고민 끝에 안용석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을 내일 선발투수로 기용하지.”
“정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잘됐어. 예정보다 빨라지긴 했지만, 이참에 테스트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녀석이라면 기준이의 공백을 잘 채워 줄 거야.”
만약 테스트가 성공한다면?
포스트 시즌 진출, 나아가서는 한국 시리즈 우승을 위한 마지막 승부수를 예상보다 빨리 던지게 될 것도 같았다.
* * *
유현은 5월 한 달 동안 팀이 치른 24경기 중 11경기에 등판했고, 총 16이닝을 투구했다.
홀드는 총 다섯 개 올렸다.
5월 한 달 동안 5홀드를 추가하며 3승 12홀드, 미션 달성에 단 1승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5월을 끝마치게 됐다.
홀드 기회가 거의 나오지 않다 보니 기록을 쌓아 나가는 게 어려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만 가더라도 6월 안에 미션을 달성하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서드 피치를 배우고 선발투수로 전향하는 것.
유현은 창원 샤크스와의 홈 3연전에 등판하지 않았다. 두 경기는 각각 7대1과 11대 5로 이겼고, 마지막 경기는 9회 말에 나온 제라드 캠프의 끝내기 3점 홈런으로 이겼으니까.
덕분에 컨디션이 좋았다.
여차하면 부산 유니콘스와의 주말 3연전에서 3연투를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 유현에게, 늦은 저녁 집 앞까지 찾아온 안용석 감독은 선발 등판을 제안했다.
“내일 선발 등판을 하라고요?”
“그래. 기준이가 아들하고 놀아주다가 발목을 삐어서 등판을 못 하게 됐거든. 다음 주는 괜찮을 것 같은데 당장 내일이 문제지. 누군가 임시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가줘야 해. 나랑 송 코치는 그게 현이 너이기를 바라고.”
“으음. 갑작스럽네요.”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 1+1 선발을 고려하고 기용하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
“감독님. 만약 제가 내일 등판에서 기대 이상의 호투를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기준치를 채워 주기만 한다면 계속 선발로 남겨 둘 생각이다. 예정됐던 선발투수 전환이 빨리 찾아왔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기준치가 어느 정도입니까?”
“5이닝 3실점 정도?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전 자신감 빼면 시체니까요.”
“하하하. 그래. 기대감 안고 지켜보마.”
5월의 상승세에 유현이 많은 역할을 해준 건 사실이지만, 지금의 대전 펠컨스 불펜은 유현이 없더라도 리그 최고 수준인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2군에서 준비 중인 비밀 병기도 있다.
만약 유현이 선발 등판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준다면, 기복이 심한 선발진에서 한 자리를 맡아 주는 게 팀의 운영에 더 도움이 된다.
안용석 감독의 입장에선 마지못해 미뤄놨던 결단을 내릴 수도 있고 말이다.
문제는…….
‘저기. 정령님. 서드 피치는…….’
-응. 안 돼. 돌아가. 10승 못 했잖아.
‘맛보기라도 안 될까? 투심 패스트볼도 맛보기로 던질 수 있게 해줬었잖아.’
-이번엔 그런 거 없다. 서드 피치가 없어도 완봉 정도는 거뜬하다는 걸 보여 줘! 첫 선발승에 성공하고 겸사겸사 미션 달성해서 서드 피치도 배우면 되겠네!
‘……망할.’
유현이 아직 땅의 정령으로부터 서드 피치를 배우지 못했다는 거였다.
시즌 내내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던진 그라운드 볼러가, 미션 완료까지 1승을 남겨둔 상황에서 생애 두 번째 선발 등판을 확정지었다.
기대치를 충족하면 선발진에 안착하고,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다시 셋업맨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당연하지만 유현은 셋업맨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1선발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대전 펠컨스를 넘어 KBO 투수들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 그래서 합당한 몸값을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
그 시작이 될 경기에서.
유현은 타자들을 농락하기 위해 늦은 새벽까지 선발 등판을 준비하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