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갯벌 야구 (3)
디펜딩 챔피언인 광주 앨리펀츠는 2018시즌 초, 불펜 난조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24경기에서 정확히 12승 12패.
5할 승률을 마크하고 있다지만 지난해 통합 우승을 했다는 걸 감안하면 아쉬운 성적이었다.
대전 펠컨스와의 시즌 5차전.
전날 셋업맨 김유종이 무너졌기에 박빙의 상황에서 믿고 맡길 만한 투수가 마땅치 않았다.
7회 말에 스코어는 3대1, 1사 1․3루.
전날 경기의 분수령이 됐던 바로 그 회에서, 동점 주자들이 나가 있는 가운데 벤치는 마무리투수 김세민을 조기 투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한 점을 내주더라도 이닝을 마무리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3대2는 괜찮지만 3대3, 그리고 역전은 결코 허용해선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시즌,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유현과 정우연은 단 1실점도 허용하지 않으며 팀의 승리를 지켜낸 철벽 듀오이니까.
물론 마음먹은 대로 경기가 풀리진 않았다.
1사 1․3루 상황에서 나온 더블 스틸.
전날과 마찬가지로 3루 주자는 홈 베이스를, 1주 주자는 수비 실책이 더해지며 여유롭게 3루 베이스를 밟았다.
전날과 다른 게 하나 있긴 했다.
더블 스틸을 예상하고 피치아웃을 했을 땐 주자들이 미동조차 하지 않더니, 스트라이크를 잡으려고 들어가니 뛰었다는 것 정도?
대전 펠컨스가 광주 앨리펀츠와의 심리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안용석 표 작전 야구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광주 앨리펀츠의 입장에서도 한 점 차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더블 스틸로 점수를 내줬지만 스코어는 여전히 3대2로 역전을 허용하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더블 스틸로 인해 흔들린 마무리투수 김세민이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의 연속 2루타를 얻어맞으며 4대3으로 역전이 됐다는 거였다.
분명 리드하고 있는 경기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역전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마무리투수를 조기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음에도 역전을 당한 게 뼈아팠다.
다행히 역전 이후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이미 넘어갔다. 대전 펠컨스의 더그아웃은 환호성이 넘치는 반면, 광주 앨리펀츠의 더그아웃에선 침묵만이 맴돌았다.
대전 펠컨스는 승기를 굳히기 위해 전날에 이어 다시 한 번 유현과 정우연 콤비를 각각 8회 초와 9회 초에 투입했다.
8회 초.
선두타자로서 유현을 상대하는 광주 앨리펀츠의 4번 타자 차형수의 목표는 확실했다.
‘넘긴다. 무조건 넘긴다.’
어차피 한 점 차 승부다. 홈런 하나면 동점을 만들 수 있다. 타순 또한 4번부터 시작하니 장타를 노리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노림수가 뻔히 보이는 타자는 어떻게 해줘야 한다?
‘삼진을 잡아서 기를 죽여 놔야 한다.’
-자. 그럼 한번 죽여 봐. 안방에서 해바라기 씨 먹으면서 느긋하게 구경해 줄게.
‘……내 정수리가 네 안방이야?’
-응. 네 정수리가 제일 편해! 완전 좋아!
‘삭발을 해 버리던가 해야지.’
-안 된다! 네 풍성한 모발이 얼마나 푹신푹신한데! 네 신체에서 가장 쓸모 있는 부위란 말이야!
문제는 광주 앨리펀츠가 8회에 상대해야 할 투수가, 시도 때도 없이 헛소리를 남발하지만 야구에 관한 지식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상한 햄스터에게 타자와의 심리전에 대해 제대로 배웠다는 거였다.
게다가 이론을 실천할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투심을 원하면 포심을, 포심을 원하면 투심을, 그러다가 허를 찔러 하이 패스트볼을 딱.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은 모처럼 탈삼진 2개를 수확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웃카운트는 자신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깔끔하게 세 번째 아웃카운트도 지워 버렸다.
이어진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정우연이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광주 앨리펀츠의 희망을 꺾어 버렸다.
“우우우우!”
“때려 치워라!”
“니들이 그러고도 프로냐!”
원정팀 응원석을 반 이상 채운 광주 앨리펀츠의 팬들이 야유를 쏟아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단이 더그아웃에서 철수할 때까지도 팬들의 아우성은 쉽게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유가 나오는 이유는 명확했다.
시즌 25경기를 치른 상황에서 마무리투수가 네 번, 불펜이 도합 여섯 번의 불론 세이브를 기록했다면?
심지어 그중 세 번을 같은 팀에게 당했다면?
게다가 그 팀이 지난해 상대전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던 팀인데, 이번 시즌에는 5승 0패로 절대적 열세에 몰려 있다면?
팬들의 입장에서는 속이 뒤집힐 수밖에.
시즌 전적 5승 0패와 0승 5패, 덕분에 이날 경기를 끝으로 순위표가 바뀌었다.
디펜딩 챔피언 광주 앨리펀츠는 12승 13패를 기록하며 6위로 내려앉았고, 대전 펠컨스는 2연승을 기록하며 14승 14패로 다시 5할 승률에 복귀해 5위로 올라섰다.
* * *
광주 앨리펀츠와의 경기를 끝마친 대전 펠컨스 선수단이 대구로 향했다.
시즌 10승 18패를 기록하며 최하위팀으로 내려앉은 대구 재규어스와의 주말 3연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대전 펠컨스의 주말 3연전 목표는 확고했다.
위닝 시리즈.
최하위 팀과의 경기에서 최소 2승 1패, 최대 스윕을 노리며 승수를 쌓기를 바라는 건 어느 팀 감독이나 같은 마음이리라.
일단 시작은 딱히 좋지 않았다.
선발 로테이션에 새로 합류한 하민수가 7회 말까지 4피안타 1사사구 2실점으로 호투를 했다.
최고 구속 149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낙차 큰 커브의 조화로 무려 11탈삼진을 뽑아내는 괴력투를 선보였다.
문제는 대전 펠컨스의 타선이 대구 재규어스의 신인투수 양준석의 호투에 가로막히며 7회까지 단 1점을 뽑는 데에 그쳤다는 거였다. 안타는 더 많이 쳤지만 병살타 두 번으로 흐름이 끊긴 게 컸다.
1회 초에 나온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의 연속 2루타가 아니었다면 그 1점마저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8회 초.
대전 펠컨스는 강태영의 안타와 제라드 캠프의 포볼로 1사 1․2루의 천금 같은 기회를 잡았다.
1점.
일단 1점이라도 뽑고 보자. 무조건 득점을 올려서 최소 동점을 만들어야만 한다.
확고한 목표를 지닌 채 안용석 감독은 이날 3타수 무안타인 1루수 김태성의 타석에서 대타 차영석을 기용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차영석은 느긋하게 몸을 풀며 타석에 들어섰다. 심판이 빨리 타석에 들어가라고 할 때까지 일부러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보였다.
그사이.
제라드 캠프와 강태영이 눈빛을 교환했다. 차영석은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투수가 차영석을 상대로 초구를 투구하는 그 순간,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가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차영석은 눈에 띌 정도로 크게 헛스윙을 하며 두 선수를 도왔다.
포수 장민후가 다급이 송구를 하려다가 힘없이 허공에 헛손질을 해댔다. 타이밍을 완전히 뺏겨서 송구해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대로 허를 찔리고 말았다.
3번 타자와 4번 타자가 더블 스틸을 시도할 거라고 예상하기 어려웠다.
강태영은 매 시즌 20도루 이상을 기록하는 호타준족이고 제라드 캠프는 타격보단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력을 보고 데려온 선수라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중심타선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포수와 벤치 모두 더블 스틸을 고려하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방심한 게 컸다.
이틀 연속 더블 스틸을 시도했는데, ‘설마 오늘도 시도하겠어?’라고 생각했다.
예상을 깨고 초구부터 과감하게 시도한 더블 스틸 덕분에 1사 1․2루 찬스가 순식간에 1사 2․3루 찬스로 변하고 말았다.
그 순간.
안용석 감독이 미소를 지은 채 박수를 쳤다.
“그래. 이거지. 이거라고!”
지난 두 경기에서 더블 스틸 작전을 지시해 상대 배터리를 흔들며 승리를 쟁취하긴 했지만, 그런 작전이 항상 통하는 건 아니다.
안용석 감독은 시즌 초부터 모든 선수에게 그린 라이트를 부여했고, 결과를 신경 쓰지 말고 과감하게 주루를 하라고 주문했다.
공격적인 주루, 한 베이스 더 가는 야구.
팀 타율이 하위권이 대전 펠컨스가 더 많은 득점을 내기 위해서, 그리고 팀의 체질 개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
안용석 감독이 선수들에게 가장 바라던 모습이 나왔다. 선수들만의 판단으로 더블 스틸을 시도해서 1사 1․2루를 1사 2․3루로 바꾸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야구.
이전까지는 과감한 주루 플레이를 하더라도 비교적 여유로운 상황이나 벤치의 작전 지시가 있을 때 한 거였지만, 방금 전은 달랐다.
철저하게 선수 세 명의 판단만으로 만들어 낸 아름다운 합작품이었다.
꼬박 29경기 만에.
안용석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던 대전 펠컨스 스타일의 야구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음을 느꼈다.
* * *
1루수 김태성 대신 타석에 들어선 차영석이 중견수 앞 안타를 때려내며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를 모두 홈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병살타가 나오며 흐름이 끊기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승리를 위해 필요한 점수는 충분하게 만들어 낸 상황이었으니까.
-8회 말, 대전 펠컨스가 내야에 벽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평일임에도 원정 응원석을 꽉 채운 대전 펠컨스 팬들이 환호합니다.
-유현 선수는 12경기에서 18이닝 동안 단 하나의 장타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유격수 앞 땅볼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있죠. 언제쯤 장타를 허용할까요?
-글쎄요. 선발투수라면 모를까, 계속 셋업맨으로 뛰는 이상 한 동안은 보기 힘들 겁니다. 유현 선수가 컨디션 난조를 겪는다면 모르겠지만요.
대전 펠컨스는 시즌 두 번째로 셋업맨과 마무리 투수의 3연투를 하는 결단을 내렸다.
아무리 날고 기는 투수라도 3연투를 하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어렵다. 구속이 조금 떨어지거나 제구가 살짝 흔들리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유현은…….
팡! 팡! 팡!
연습 투구임에도 시원시원하게 공을 던졌다.
누가 보더라도 컨디션이 최고조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구위와 제구 모두 좋았다.
포수 마스크를 쓴 차영석이 엄청난 구위에 혀를 내둘렀다.
“너 오늘 3연투 맞냐? 왜 이렇게 컨디션이 좋아? 무슨 약 먹고 그런 건 아니지?”
“월요일까지 쉴 생각에 좋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선배님이 공을 받아 주시니 편하기도 하고요.”
“x랄. 은퇴 앞두고 온갖 잔부상 달고 사는 노인네가 뭐가 좋아? 사인 내는 것도 힘들어 죽겠으니까 빨리 빨리 끝내자.”
“10구 안에 끝내겠습니다.”
“그러면 이 형님이 저녁 쏜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유격수 앞 땅볼, 2루수 정면으로 가는 라인 드라이브, 다시 유격수 앞 땅볼.
유현은 공 7개로 아웃카운트 세 개를 지워 버리며 8회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9회 말에는 정우연이 2타자 연속 탈삼진과 중견수 플라이로 대전 펠컨스에게 3연승을 안겨줬다.
팀의 3연승을 책임진 3연투였다.
유현과 정우연은 또다시 주말 경기까지 휴식을 부여받았다. 3연투를 했기에 팀의 승패와 상관없이 무조건 휴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같은 시각에 출근을 해서 동료들과 함께 훈련을 했다.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을 훈련하고 정해진 시간에 씻고 나와 정해진 시간에 더그아웃에서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용석 감독은, 유현의 음악 감상이 어느 정도 끝났을 즈음 그를 원정팀 감독실로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감독님?”
“음, 그래. 앉아.”
유현이 자리에 앉자 안용석 감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즌 전.
전력 외로 분류됐던 방출 선수가 이제는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투수로 성장했다. 안용석 감독의 입장에서는 그런 제자가 기특한 게 당연했다.
그리고 안용석 감독은, 그런 기특한 제자에게 기회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셋업맨은 할 만하고?”
“네. 우연 선배에게 컨디션 관리하는 법을 배우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마운드에 서는 게 행복해 미칠 것 같습니다.”
“선발투수로 전향할 생각은 없고?”
안용석 감독은 돌직구를 던졌다.
유현의 선발 투수 전향, 가을 야구를 위해 안용석 감독이 그리고 있는 마지막 승부수였다.
-생각보다 빨리 이야기하는데?
‘그러게.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올 줄은 몰랐어.’
-당장에 널 선발로 올리지는 않을 거야. 일단은 셋업맨으로 기용하면서 상황을 보겠다는 거겠지. 아마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전향시키려는 거 아닐까 싶은데?
‘그 정도면 충분하지.’
광주 앨리펀츠와의 시즌 5차전에서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은 최고구속 156km를 기록했다.
제구가 되는 156km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고, 고작 1~3km 차이 나는 투심 패스트볼을 세컨드 피치로 구사하는 투수를 셋업맨으로만 기용하고 싶어 할 구단이 얼마나 있을까?
땅의 정령을 만난 순간부터 유현이 선발투수로 전향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현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습니다.”
“그래. 아마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네게 기회가 갈 거다. 그 전에 서드 피치를 장착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서드 피치를 남몰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서 팀의 승리를 위해 기여하겠습니다.”
땅의 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나 몰래 서드 피치 연습하고 있었어?
‘하고 있잖아, 3승 7홀드. 설마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남은 35퍼센트 못 채우겠어?’
-흥! 나한테 야구 배워놓고 전반기에 미션 달성 못하면 나가 죽어야지!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10승 미션을 달성해야 하는 확실한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