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화 (11/155)

11화 갯벌 야구 (2)

경기가 시작하기 전.

전 주에 1승 5패를 기록하며 분위기가 가라앉은 상황에서, 안용석 감독은 광주 앨리펀츠와의 시즌 4차전을 앞두고 선수단을 격려했다.

“기죽을 필요 없다. 자책할 필요도 없고. 다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줬으면 한다. 벤치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야구를 해. 패배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질 테니.”

안용석 감독의 격려에도 3회 초가 됐을 때, 대전 펠컨스는 5대0으로 밀리고 있었다. 1회부터 3회까지 내리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선발투수 앤드류 헤일러는 4회 초를 삼자범퇴로 잘 막아냈지만, 5회 초 2아웃을 잡은 뒤 3피안타 2실점을 추가로 허용했다.

최고 구속 145km, 무려 여섯 개에 달하는 다양한 구종, 무난한 수준의 제구.

그럼에도 앤드류 헤일러는 난타를 당했다.

결정구가 없는 게 문제였다.

아웃카운트를 확실하게 잡아 낼 구종이 없으니 스트라이크를 잘 잡아 놓고서 철저하게 유인구로만 승부를 했다. 타자들이 유인구에 속지 않아 포볼을 내주거나, 스트라이크 존에 억지로 던지다가 안타를 얻어맞는 패턴이 반복됐다.

그 모습을 보며 땅의 정령은 혀를 찼다.

-쟤는 전반기 못 넘기고 교체되겠다.

‘첫 경기 말고는 계속 불안하긴 하지.’

-사실 저렇게 난타당할 정도로 공이 나쁜 건 아니거든? 문제는 주자가 나가면 지레 겁을 먹고 승부를 피한다는 거야. 그때부터 덩달아 제구도 흔들리지 시작하지. 속된 말로 새가슴 투수야.

‘음. 애초에 팀에서는 헤일러한테 큰 기대를 안 해서 저 정도로 만족할걸?’

-데려올 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주간 1승 5패로 주춤했지만, 눈높이는 여전히 가을야구에 맞춰져 있어. 게다가 이번에 1군으로 올라온 언더핸드랑 우완 선발투수가 잘할 거거든.

‘재형이랑 민수 말하는 거야?’

-어. 그럼 세미 제이슨과 윤기준은 계속 좋았고, 부진했던 선발투수 두 자리를 이재형이랑 하민수가 채운다고 쳐. 그럼 이제 팀은 고민에 빠지는 거야. 비싼 돈 주고 괜찮은 외국인투수로 교체하면 가을야구 할 수 있지 않을까? 가을야구를 위해서라면 투자하는 게 맞지 않을까?

프런트에서 앤드류 헤일러를 대체한 외국인투수를 물색할지까진 알 수 없지만, 이날 앤드류 헤일러의 투구가 기대 이하인 건 맞았다.

웬만해선 선발투수에게 5회까지 맡기는 안용석 감독이, 이미 대량 실점한 상황에서 5회를 채우기까지 0.1이닝을 남겨 두고 앤드류 헤일러를 마운드에서 내렸으니까.

뒤이어 마운드에 올라온 우완투수 장만진은 타자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했다.

5회 초까지 스코어는 7대0.

승리의 여신이 광주 앨리펀츠를 향해 웃어 주고 있었다. 아니, 웃어 주는 것 같았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분명 지고 있는데, 그것도 점수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왠지 모르게 이길 것 같은 날.

대전 펠컨스 선수들에게는 이날이 그랬다.

광주 앨리펀츠의 선발투수 헌터 로아스는 지난 해 20승을 거두며 양원중과 함께 리그 최강의 원투펀치로 팀의 통합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올 시즌은 지난해와 달리 다섯 번의 등판에서 1승 2패 방어율 5.75로 부진하고 있다.

의외인 건 지난해와 달리 부진을 겪는 와중에도 2회부터 4회까지는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짠물 피칭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문제는 1회, 그리고 70구 이후였다.

1회에 대량 실점을 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체력이 떨어질 시점부터 난타를 당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5회 말.

4회까지 총 72구를 투구했던 헌터 로아스를 상대로 선두타자 강태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강태영은 초구와 2구를 지켜보기만 했다.

1스트라이크 1볼.

딱!

3구로 들어온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친 타구가 큼지막한 파울이 됐다.

그리고 그 순간.

강태영은 확신을 품었다.

‘슬슬 맞는데? 해볼 만 하겠어.’

전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긴 했지만 헌터 로아스의 공은 까다로웠다.

빠른 스피드와 구위를 앞세운 하이 패스트볼을 적절히 구사하며 타자들을 윽박질렀고, 변화구는 죄다 무브먼트가 지저분해서 타이밍을 맞추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확실히 힘이 떨어졌는지 이전과 달리 포심 패스트볼의 구위가 스피드에 비해 좋지 않았다.

강태영이 배트를 짧게 잡았다.

딱! 딱! 딱!

스트라이크 이후 존에 들어오는 공을 닥치는 대로 걷어내고, 존에서 빠지는 볼은 건드리지 않은 채 실투를 기다리는 전략.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유인구에 허무하게 당하거나 범타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지만, 컨디션이 좋을 때는 악마가 될 수 있는 방법이다.

강태영은 승부를 13구까지 끌고 갔다.

유인구에 속질 않다 보니 어느새 풀카운트가 됐다. 또다시 유인구를 던질 것이냐, 아니면 정면 승부를 할 것이냐.

광주 앨리펀츠 배터리의 선택은 후자였다.

헌터 로아스가 볼넷을 내주기 싫어했고, 점수 차가 많이 나고 주자가 없는 상황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딱!

그리고 몸쪽 하이 패스트볼로 삼진을 잡아내려던 헌터 로아스는, 자신이 던진 공이 중앙 펜스를 훌쩍 넘어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호오오옴런! 강태영 선수가 시즌 17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대단한 홈런 페이스입니다! 점수는 7대1! 대전 펠컨스가 반격의 서막을 알립니다!

-이러다 월간 최다 홈런 기록도 갱신할 기세입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풀카운트 싸움에서 몸쪽 높은 코스로 패스트볼이 들어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작심하고 쳤어요.

강태영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줬다.

할 수 있다. 포기하지 말자. 설사 패배하더라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끝까지 괴롭히자. 우릴 얕볼 수 없게 만들자.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자.

강태영의 의지는 선수단에 그대로 전해졌다.

무기력했던 타선이 제라드 캠프의 2루타와 송영인의 적시타로 1점을 추가하며, 5회 말에 도합 2점을 따라잡은 것이다.

그리고 6회 말에는 유격수 하지성의 시즌 2호 홈런이 폭발하며 다시 1점.

그사이 장만진이 2와 3분의 1이닝 4탈삼진 무실점 호투를 하며 광주 앨리펀츠의 타선을 원천 봉쇄하고 자신의 임무를 끝마쳤다.

7대0으로 사실상 넘어갔다 생각됐던 경기가 어느새 7대3이 됐다.

여전히 점수 차이가 제법 나지만 광주 앨리펀츠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방심할 수 없었다.

7회 말.

광주 앨리펀츠는 필승조인 김유종이 마운드에 올리며 추가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반면 대전 펠컨스는 4번 타자 제라드 캠프부터 타순이 시작하기에 반드시 추가 득점을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비상하자, 펠컨스!”

“비상하자, 펠컨스!”

더그아웃에서 선수단은 다 함께 파이팅을 외치며 7회 말을 맞이했다.

딱!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제라드 캠프는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잡으려고 들어온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받아쳐 우측 펜스를 통타하는 2루타를 만들어 냈다.

5번 타자 김태성은 4구째에 들어온 하이 패스트볼을 받아 쳤지만, 배트 끝에 맞으며 아쉽게도 워닝트랙 앞에서 잡히고 말았다.

제라드 캠프는 그사이 태그 업을 해서 3루 베이스를 밟았다.

1사 3루 상황.

3루수 송영인이 김유종의 유인구에 속지 않고 5구만에 포볼을 얻어내 1사 1․3루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경기가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양 벤치에서 분주하게 사인이 나오는 가운데 7번 타자 지석한 대신 대타로 차영석이 기용됐다.

차영석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빠지는 초구와 2구를 미동조차 하지 않고 지켜봤다.

3구는 스트라이크를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상황, 김유종이 바깥쪽 낮은 코스로 살짝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을 투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송영인이 2루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포수 김만석이 다급히 2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그리고 얼핏 3루를 바라보았을 때, 4번 타자답지 않게 이번 시즌에만 5도루를 기록하고 있는 제라드 캠프가 홈으로 내달리고 있는 게 보였다. 2루를 향해 전력 질주할 것 같던 송영인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속도를 줄인 채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제야 광주 앨리펀츠의 야수진은 대전 펠컨스의 벤치에서 어떤 작전을 지시했는지 알아챘다.

-더블 스틸! 대전 펠컨스가 더블 스틸을 시도합니다!

-제라드 캠프가 홈으로 내달립니다!

더블 스틸.

1사 2, 3루를 만들기 위한 도루 시도가 아닌, 3루 주자가 홈 베이스를 밟게 만들기 위한 작전이 시도된 것이다.

“송구! 송구!”

김만석이 다급히 외쳤다.

2루수 안치후가 다급이 홈을 향해 송구를 시도했지만…….

-2루수 안치후 선수가 다급히 홈을 향해 송구를…… 아아아! 송구가 빗나갑니다!

-그사이 제라드 캠프 선수로 여유롭게 홈 베이스를 밟습니다! 1루 주자 송영인 선수는 3루로 내달립니다! 김만석 선수가 3루로 다급히 송구!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3루심은 송영인 선수의 발이 더 빨랐다고 판단했습니다!

-광주 앨리펀츠가 비디오 판독을 요청합니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긴 했거든요. 방금 전 더블 스틸 작전은 송영인 선수의 세이프 여부와 상관없이 좋은 작전이었습니다. 허를 찌르는 작전으로 한 점을 추가로 만회한 것이니까요.

-스코어는 7대4, 역전이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에서…… 비디오 판독 결과가 나왔습니다. 세이프입니다! 여전히 주자는 1사 3루입니다!

-이렇게 되면 작전은 완전 성공이죠!

배트 한 번 안 휘두르고 1점을 뽑아냈다. 1루에 있던 주자는 발이 그리 빠른 편이 아님에도 공격적인 주루를 통해 3루까지 들어갔다. 주요 승부처에서 최고의 작전과 최고의 판단이 나왔다.

시즌 초부터 지금까지 안용석 감독은 번트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타자들에게 마음껏 도루해도 된다며 그린 라이트를 부여했다.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 한 베이스 더 가는 야구.

실수가 많긴 했지만 대전 펠컨스는 시즌 26경기를 치르는 동안 팀 도루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도루 최하위를 기록했던 느림보 팀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공격적인 주루의 효과는 단순히 한 베이스 더 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벤치에서 다양한 작전을 시도할 수 있게 해주고, 상대의 수비를 흔들어 실책을 유도하기에도 좋다.

방금 전처럼 말이다.

이 한 번의 작전이, 다급함에서 나온 실책이 경기를 완전히 뒤집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차영석은 배트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채 포볼을 얻어내고 1루 베이스를 밟았다.

투수코치가 잠시 마운드를 방문했지만 교체는 없었다. 아직 점수 차가 있으니 김유종에게 믿고 맡기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김유종은 삼진을 잡아내며 위기를 벗어나는 것 같았지만, 1번 타자 이영우에게 다시 한 번 포볼을 내주고 말았다.

2사 만루.

추가 득점의 갈림길에서 최근 여섯 경기 동안 단 2안타만을 기록하며 부진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정경우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리고 대타 지시는 나오지 않았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스포츠계에서 유명한 이 격언이 어째서 나오게 됐는지 정경우는 몸소 증명해 보였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딱!

초구를 제대로 노리고 당겨 쳐서 그대로 담장을 넘겨 버렸으니까.

-호오오오옴런! 그랜드 슬램! 정경우 선수가 자신의 시즌 두 번째 홈런을 그랜드 슬램으로 장식합니다! 이제 점수는 7대8!

-대전 펠컨스가 7회 말에 빅 이닝을 만들며 승부를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대전 펠컨스의 불펜에서 이제 막 유현 선수와 정우연 선수가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불안불안한 수비와 예전 같지 않은 타격으로 인해 노쇠화가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던 2루수 정경우는, 베테랑의 품격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며 판을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8회 초.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는 광주 앨리펀츠의 클린업 트리오였다.

-가자. 타자들에게 절망을 심어 줘. 네가 마운드에 오르면 사타구니가 누렇게 물들게 만들라고!

‘큰 거야 작은 거야?’

-둘 다 지리면 되겠네!

‘그거 좋네. 둘 다 지리게 해주자고.’

정말로 둘 다 지리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유현을 상대한 광주 앨리펀츠의 클린업 트리오는 지독한 답답함을 느꼈다. 분명 잘 맞은 것 같은데, 타이밍이 괜찮았는데 타구가 모두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투심 패스트볼은 무브먼트가 사기라 정타를 만들 수 없었고, 포심 패스트볼은 타이밍을 잘 맞추더라도 구위에 밀렸다.

오늘따라 체인지업이 유독 잘 떨어지던 장만진을 상대하는 것도 곤욕이었지만, 유현을 상대하는 순간 타자들은 의욕을 잃었다.

타격을 하면 범타나 내야 플라이고, 타격을 안 하면 삼진을 당하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말 그대로 내야에 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셋업맨이라서 길어야 2이닝 정도만 무기력함을 느끼면 되지만, 선발투수로 나왔다가는 한 경기 내내 무기력함을 느껴야 할지도 모르니까.

결국 대전 펠컨스는 유현과 정우연이 2이닝 동안 단 한 타자에게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7회 말에 만들어 낸 빅 이닝을 승리로 연결했다.

다음 날 치러진 시즌 5차전 7회 말.

광주 앨리펀츠가 3대1로 리드하는 상황에서 1사 1․3루가 되자 마무리투수 김세민을 조기 투입하는 승부수를 띄운 시점.

다시 한 번 더블 스틸 작전이 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3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1루 주자는 실책으로 인해 3루 베이스까지 들어갔다.

-오우야! 나 이 상황 전에 본 적 있어! 이거랑 거의 똑같았어! 이게 바로 데자뷰인가?

‘응. 나도 어제 본 것 같아. 어제도 이랬어.’

-또 속냐, 바보들아! 상대 전적 5승 0패 확정이다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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