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9화 (9/155)

9화 벽 (3)

포심 패스트볼 아니면 투심 패스트볼.

둘 중 하나.

단순한 선택지임에도 유현을 상대하는 타자들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일단 투심 패스트볼은 사실상 공략 불가였다.

타자들이 치기 어려운 코스로만 골라서 들어오는데, 겨우 쳐도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추질 못하니 죄다 땅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포심 패스트볼을 마음대로 노려서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있으면 귀신같이 투심 패스트볼이 들어오고, 투심 패스트볼을 신경 쓰다 보면 헛스윙을 유도하기 좋은 궤적으로 포심 패스트볼이 들어왔다.

그 흔한 실투조차 거의 나오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건, 큰 장점이기는 하지만 투수가 타자를 절대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진 못한다.

육안으로 구분하지 못하더라도 감각적으로 타격을 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고, 애초에 투심 패스트볼이 탈삼진을 잡기 위한 구종이 아니니만큼 배트에 맞추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타격한 공이 죄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과,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나와서 수비 쉬프트에 죄다 막힌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확했다.

유현의 구위와 무브먼트가 타자들을 압도하는 수준이었고, 거기에 원하는 코스로 공을 보낼 수 있는 안정적인 제구력이 더해진 탓이었다.

10회 초.

유현을 상대하게 된 서울 나인테일즈의 클린업 트리오 또한 유현의 구위와 무브먼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자존심을 제대로 구겼다.

이 날, 유현의 피칭은 평소와 달랐다.

스트라이크 존 구석구석을 찌르던 평소와 달리, 모든 공이 한가운데로 조금씩 몰렸다.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찌르던 제구력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모양새였다.

딱!

3번 타자 차희성이 3구에서 몸쪽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살짝 몰린 포심 패스트볼을 받아쳤다.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가며 아웃이 되긴 했지만, 전력분석 자료를 통해 본 것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확실히 오늘은 제구가 흔들리고 있다. 작정하고 노려 친다면 못 칠 이유는 없어.’

분명 잘 맞은 라인 드라이브 타구였다.

수비 쉬프트에 걸리긴 했지만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4번 타자 김형주는 차희성의 말을 듣고서 타석에 섰다. 투심 패스트볼이고 포심 패스트볼이고 몰리면 그대로 쳐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초구는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아웃코스 판정이 후한 주심이다 보니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2구는 몸쪽으로 붙는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김형주는 본능적으로 몸을 뺐다.

몸쪽 스트라이크 존으로 바짝 붙이려는 게 제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볼이 되고 말았다.

‘확실히 오늘은 제구가 별로네.’

초구도 2구도, 평소의 유현이었다면 스트라이크 존에 거의 비슷하게 형성됐어야 할 공들이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제구가 안 되는 게 분명했다.

3구는 다시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빼려던 게 제구가 안 돼서 가운데로 살짝 몰렸다.

딱!

김형주는 그 공을 놓치지 않고 거침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히팅 포인트에서 살짝 어긋났지만 타이밍이 정확했기에 타구가 내야를 벗어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잘 맞았다고 생각한 타구가 거의 날아가지 못한 채 내야에서 붕 떴고, 유격수 하지성이 잡아내며 아웃카운트 하나가 늘어났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김형주의 표정은 타석에 들어설 때와 달리 굳어 있었다.

‘무슨 구위가 이따위야? 저 자식 진짜 작년 시즌 말아먹고 방출됐던 거 맞아?’

분명 타이밍은 괜찮았다.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진 않았지만 타이밍이 정확해서 결과와 상관없이 내야를 벗어나는 타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럼에도 타구는 내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유격수 하지성에게 잡히고 말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김형주가 유현의 구위에 밀린 거였다.

KBO 최고의 타격 머신.

메이저리그에 두 시즌만 도전하고 돌아왔지만 부상으로 귀국하기 전까지 타율 2할 8푼 5리를 기록하며 족적을 남겼으며, 서울 나인테일즈와 FA계약을 한 이후에는 장타력까지 향상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최고의 타자 중 한 명.

그런 김형주가 유현의 구위에 완전히 밀렸다.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의 경우 수직 무브먼트가 좋고 회전수도 많다는 걸 전력 분석 자료를 통해 보긴 했지만, 그래봐야 포심 패스트볼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 게 사실이다.

타이밍만 정확히 맞춰 타격하면 안타를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제대로 된 타이밍에 타격을 했음에도 김형주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5번 타자 양수환마저 자신과 같은 코스로 들어온 초구 포심 패스트볼을 타격해서 포수 팝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났을 때, 문득 김형주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저 자식, 진짜로 제구 안 되는 거 맞아?’

2구 연속 같은 코스.

바깥쪽에서 살짝 몰린 코스로 2구 연속 실투가 나올 확률이 높을까? 의도적으로 같은 코스에 연속 투수를 할 가능성이 높을까?

김형주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10회 초가 끝났을 때.

유현의 제구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의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지려 하고 있었다.

* * *

시즌 초.

지난해와 다르게 소위 말하는 포텐셜 폭발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투수건 타자건 팬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맹활약을 보여주며 돌풍을 일으키는 선수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의 선수들은 2017시즌의 유현처럼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만다.

몇몇 변화로 반짝 활약을 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 활약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기량이 동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 나인테일즈의 타자들은 이번 시즌 유현의 맹활약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반짝 활약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전력 분석 자료를 봤음에도 유현을 낮게 봤고, 안치후를 상대할 때 제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확신했다.

올 게 왔구나.

오늘은 칠 수 있겠다.

10회 초 공격만 봐도 그랬다.

안타를 만들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에 공격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어차피 유현이 던지는 건 모두 패스트볼이다.

이번 시즌,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거의 비슷한 비율로 던지고 있었다. 그 외에 다른 구종을 전혀 던지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이건 투심 패스트볼이건 결국은 패스트볼이다. 제구가 흔들린다면 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현이 안타가 나오지 않을 거라 확신한 채, 실투가 아니라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코스로 공을 던졌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잘 속네. 지금쯤 의심하고 있으려나.

‘의심한다고 방망이가 안 따라 나올까?’

-당연히 나오지. 가만있으면 루킹 삼진인데 휘두르고 봐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난 쉽게 아웃카운트를 올리고.’

-팀 입장에선 네가 잘 던지고 있으면 굳이 교체를 하지 않을 거야. 연장전에서 너와 정우연을 함께 기용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우니까.

‘난 팀이 역전해주길 바라면서 단 한 명의 타자에게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

-제일 좋은 건 10회 말에 끝내기가 나오는 건데 힘들지 않을까 싶고, 11회 말 예상해본다.

‘그럼 좋지. 시즌 3승.’

-가즈아!

7구.

유현은 고작 7구로 10회 초를 마무리했다.

승부가 10회에 갈리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투구 수가 많았다면 코칭스태프 입장에서는 11회 초에 다른 투수를 올려야 할까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연투를 했던 유현이기에, 투구 수를 길게 가지고 갔다가 주말 3연전에서 한 경기도 기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유현은 치기 좋은 공을 던져줬다.

타자들의 입장에선 먹잇감이라 생각하고 방망이를 휘두를 게 뻔한 살짝 몰린 공을 말이다.

그리고 유현은, 타자들이 자신의 공을 제대로 쳐내지 못 할 거라 확신을 품은 채 투구했다.

10회 말.

세 타자가 모두 범타로 물러나면서 대전 펠컨스는 점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11회 초에도 유현은 마운드에 올랐다.

“안타를 허용하거나 투구 수가 20구가 넘으면 교체를 할 수밖에 없으니 이해해.”

“알겠습니다.”

물론 유현은 교체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다. 안타를 허용하지도 20구를 넘지도 않았다.

잘 친 것 같은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2루수가 고작 한 발자국 움직여 잡아내며 1아웃, 포수 팝 플라이 아웃으로 2아웃, 유격수 앞 땅볼로 3아웃.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없애는 데에 필요한 건 고작 5구에 불과했다.

2이닝 동안 12구.

제구가 흔들린 것처럼 위장해서 타자들의 적극적인 공격을 이끌어 낸 유현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든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11회 말.

딱!

-차영석 선수. 제대로 꺾이지 않은 슬라이더를 타격. 타구가 쭉쭉 뻗어갑니다! 우익수가 수비를 포기하고 망연자실하게 타구를 바라보기만 합니다! 호오오옴런! 4시간 49분에 걸친 연장 승부를 마무리하는 시원한 한 방!

-차영석 선수가 자신의 시즌 2호 홈런을 끝내기로 기록합니다! 대전 펠컨스가 8승 8패로 다시 5할 승률 복귀에 성공합니다!

-아아아. 정말 대단합니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정찬성 투수를 등판시켰을 때, 당연히 위닝 시리즈를 확보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이번 시즌 대전 펠컨스는 분명 뭔가 다릅니다.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저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연장 승부에서 2이닝을 말끔하게 지워버린 유현 선수가 있습니다.

-이로서 유현 선수는 시즌 3승째를 수확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실점 이닝을 14이닝으로 늘리는 데에 성공합니다.

-유현 선수의 무실점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아마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시즌의 유현 선수는 좋은 투수가 됐다는 겁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분명 좋은 활약을 이어나갈 겁니다.

마무리투수를 무너트린 걸로도 모자라 11회 말에 나온 선두타자가 초구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며 승리를 가져왔다. 덕분에 주중임에도 펠컨스타디움을 꽉 채운 2만 2천 명의 관중들은 경기가 끝나고 한참 지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목 놓아 응원을 이어나갔다.

-펠컨스! 펠컨스! 펠컨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펠컨스라 행복합니다~

-사!랑!해!요!펠!컨!스!

다시 8승 8패.

시즌 5할 성적을 맞춘 안용석 감독은,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5할 사수를 목표로 시즌을 운용해 반드시 가을 야구를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이 날.

대전 펠컨스의 팬들 사이에서는 서울 나인테일즈의 3번 타자이자 유현과 함께 대전 펠컨스에 입단했던 동기 차희성의 인터뷰가 화제가 됐다.

[차희성 ‘유현의 공, 알고도 내야 못 넘기겠더라. 내야에 벽 쳐놓은 줄 알았다.’]

대전 펠컨스 팬들은 다시 5할 승률을 맞췄음에도 가을 야구에 대한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시즌은 길고 대전 펠컨스는 긴 시즌을 버티지 못한 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유현의 활약상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는 걸, 이번 시즌 내내 유현이 좋은 활약을 하게 될 거라는 걸 마침내 믿고 받아들이게 됐다.

해설위원들도 타 팀의 코칭스태프들도, 심지어 직접 상대해 본 선수들까지 유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차희성의 인터뷰를 본 대전 펠컨스 팬들은 유현에게 한 가지 별명을 붙여줬다.

The wall.

시즌 8경기 14이닝을 소화하며 외야로 타구를 보내지 않고 있는 유현이기에, 앞으로도 내야에 벽 쳐놓고 외야로 타구를 보내지 말라 뜻을 품은 애정 어린 별명이었다.

그라운드 볼러에 제법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유현은 자신에게 붙은 별명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해했고, 땅의 정령은 그걸 가지고 한참을 놀려댔지만 말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현은 알지 못했다.

팬들이 지어준 별명이, 은퇴를 할 때까지 자신을 상징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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