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벽 (2)
-입맛이 나랑 비슷한 걸 보니 대성하겠어. 메이저리그 가서 60홈런 치고 시즌 MVP 정도는 가볍게 받을 수 있을 거야.
‘조용히 좀 해주면 안 될까? 쟤가 왜 나랑 같이 밥을 먹으려고 하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거든.’
-왜긴 왜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지. 같이 뭔가를 먹자는 건 관계가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는 뜻이야. 라면 먹고 갈래 몰라?
‘전국구 슈퍼스타가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고?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지. 난 티 안 나게 음식이나 먹을란다~ 둘이 알아서 잘 이야기해보셔.
주문한 돼지국밥과 수육이 나온 직후, 새우젓 한 반 스푼을 국밥에 집어넣은 강태영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응? 뭐가 미안해?”
“지난 시즌 너한테 연장 끝내기 만루 홈런 때린 거 말이야.”
“아아아…… 난 또 뭐라고. 그 날 이후로 내가 부진해서 그런 거라면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못 한 거니까.”
“그래도 미안해. 그전까지는 잘 하고 있었잖아.”
“네가 만루 홈런을 안 때렸어도, 난 분명 얼마 못 가 무너졌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미안해 할 이유는 전혀 없어.”
유현과 강태영은 대전 펠컨스 입단 동기라는 걸 제외하면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나는 일화라면 대전 펠컨스에서 방출될 당시 강태영이 동기들을 모아서 식사 자리를 마련했었다는 것과, 지난 시즌 강태영에게 연장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은 것 정도?
당시의 만루 홈런은 전적으로 강태영이 잘 친 거였고, 설사 강태영에게 만루 홈런을 맞지 않았더라도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유현은 자신의 공을 믿지 못하는 반쪽짜리 미완성 투수였으니까.
대화가 잠시 끊겼다.
복잡한 표정으로 유현을 바라보던 강태영이 어렵사리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다.
“사실 나, 작년 시즌이 끝나고 구단에서 포스팅을 허락해줬어. 내가 원한다면 일본이든 미국이든 가도 좋다고 했는데, 내가 안 갔어.”
“좋은 기회인데 왜? 너라면 여환진 선배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 못 이룬 게 있잖아.”
“못 이룬 거?”
“포스트시즌 진출 말이야.”
발전하는 타자.
강태영은 매 시즌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갱신하며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투수들이 집요하리만큼 좋은 공을 주지 않아도, 승부처에서 자신과 상대하지 않으려 해도 그의 성적은 매년마다 계속 좋아지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대전 펠컨스는 10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기에, 강태영이 팀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명확했다.
사실 유현은 강태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 큰 무대로 나갈 기회가 있음에도 스스로 걷어찬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강태영이 대전 펠컨스 선수들 중 그 누구보다도 포스트 시즌 진출에 목말라있다는 거였다.
“이런 말 하면 설레발친다고 뭐라고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올해는 정말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동의한다. 역시 야구를 잘하니 안목 또한 훌륭하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그리고 이왕이면 입단 동기인 네가 함께했으면 좋겠어. 지금 네 컨디션이라면 팀의 사정만 아니었어도 선발투수로서 맹활약을 했을 텐데.”
-암. 우리 유현이는 셋업맨으로 있기 아깝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동기끼리 잘해서 가을야구 한 번 해보자는 거야.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경기를 너와 우연 선배가 깔끔하게 마무리해준다면, 유광 점퍼를 동나게 할 수 있을 거야.
-올해 펠컨스의 유광 점퍼는 매진돼서 웃돈을 줘도 구하기 힘들 거다!
땅의 정령과 강태영.
둘은 서로 대화할 수 없다. 땅의 정령의 모습은 유현에게 보이고 목소리는 그에게만 들리니까.
그럼에도 땅의 정령은 강태영과 대화를 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을 뻔 했다.
‘너 말이야. 내가 아니라 태영이랑 계약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흥. 알아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가는 미친 천재에게 이 몸은 필요 없어. 재능 덩어리지만 아이큐가 한 자리인 투수에게나 필요하지.
‘솔직히 말해봐. 너 태영이 팬이지?’
-아니다. 난 그냥 야구 잘하는 선수를 좋아할 뿐이야. 너는 이제 겨우 마음에 들려고 하는 수준이니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야!
‘네네. 시즌 20승에 0점대 방어율 정도는 찍어줘야 하지 않겠습니다.’
-알면 됐고!
다음 날.
유현은 평소와 같은 시간에 부산 시립 야구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훈련을 이어나갔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불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굳이 휴식일까지 불펜 근처에 있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퇴근을 한 건 아니었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팀의 4연승을 위해 동료들을 응원할 생각이었다. 동시에 시즌이 시작한 이후 줄곧 품고 있던 의문 하나를 해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 이온음료를 마시며 유현이 땅의 정령에게 물었다.
‘나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야구와 관련된 질문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이 몸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지. 말해봐.
‘나 말이야, 어째서 구속이 늘어난 거야?’
-구속이 늘어난 게 아니라, 원래 그렇게 던졌어야 하는데 못 던졌던 거야. 아마 최대 158km 정도까지는 나올 걸. 그걸 라이징 패스트볼로 던진다고 생각해 봐. 타자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않겠어?
‘그렇게나 높게 나온다고?’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잊지 마. 네 능력은 강태영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아.
최고 구속 158km.
아직 실감할 수 없지만 유현은 땅의 정령의 말을 믿었다. 지금까지 땅의 정령이 한 모든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예전에는 자신의 공을 믿지 못했고 타자에게 맞으면 걱정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스스로의 공을 믿었고, 타자와의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묵묵히 마운드에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최고 구속 158km를 기록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유현은 그 시기가 빨리 오기를 바랐다.
만약 그때가 되면, 팀은 자신을 계속 셋업맨으로 남겨 둬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질 테니까.
* * *
유현도 정우연도 등판하지 못한다.
3연투를 했기에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인 휴식을 보장받은 상황.
대전 펠컨스의 팬들은 의문을 품었다.
과연 유현과 정우연이 등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리드를 잡았을 때, 다른 불펜투수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말이다.
다행히 안용석 감독은 팀의 4연승이 걸린 경기에서 불펜 고민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됐다.
경기가 시작부터 크게 넘어간 덕분이었다.
1회 초 나온 강태영의 3점 홈런과 제라드 캠프의 백투백 홈런으로 인해 점수 차이가 4대0으로 벌어진 상황에서, 강태영은 2회 초 만루 홈런까지 때려내며 이날 경기의 쐐기를 박았다.
2회 초가 끝났을 때 스코어는 8대0.
부산 유니콘스의 입장에선 스윕패를 면하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 시작부터 분위기가 심하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따라가는 점수를 뽑기도 어려웠다.
부산 유니콘스와의 3연전을 앞두고 1군으로 콜업된 윤기준이 6이닝 2피안타 1사사구 8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쳤고, 뒤이어 마운드에 오른 서규영이 7회부터 9회까지를 단 1안타로 막아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그리고 친정 팀의 가을야구라는 목표를 위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스스로 고사한 괴물 강태영은, 세 번째 타석과 네 번째 타석에서도 홈런을 기록하며 이 날 경기에서 팀이 얻어낸 10득점 중 9득점을 홀로 책임졌다.
4연타석 홈런.
KBO리그에서 단 두 명만이 이름을 올린 진귀한 기록으로, 그 중 한 명이 2016시즌 50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강태영이었다.
커리어 사상 두 번째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고 팀의 10대0 승리, 1335일 만의 부산 유니콘스전 스윕승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강태영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프로 리그 역사상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대기록을 정조준했다.
애석하게도 강태영의 대기록 달성 여부는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주중 3연전으로 미뤄졌다.
1회와 2회에 출루를 하며 강태영에게 밥상을 차려준 타자들이, 3회 이후 단 하나의 안타도 만들어내지 못하며 강태영에게 다섯 번째 타석을 허락해주지 않은 것이다.
월요일 휴식 후 이어진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주중 3연전 첫 경기가 시작하기 전.
강태영은 유현에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오늘까지는 네가 푹 쉴 수 있도록 해줄게. 나만 믿어.”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현은 강태영이 말한 대로 이 날 경기에서 등판하지 않았다.
딱!
강태영은 첫 타석에서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140km짜리 스플리터를 받아쳐 KBO리그 사상 최초의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캬아. 역시 슈퍼스타야. 스플리터가 제대로 떨어졌는데 그걸 받아쳐서 홈런을 만들어버리네. 진짜 미쳤다, 미쳤어.
‘쟤는 메이저리그도 씹어 먹을 걸?’
-동의하는 바야. 메이저리그에서도 최소 40홈런 이상은 거뜬히 칠 수 있을 거야.
이 날.
강태영은 3타수 3안타 1홈런 1사사구 2타점을 기록하며 매서운 타격감을 이어갔지만, 애석하게도 팀의 승리와 이어지진 못했다.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선 베테랑 배형준이 3과 3분의 2이닝 8피안타 1사사구 1피홈런 7실점으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후 불펜투수들이 남은 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문제는 득점이었다.
강태영의 2타점과 제라드 캠프의 1타점이 이 날 경기에서 대전 펠컨스가 만든 득점의 전부였고, 안타도 두 사람이 합작해 낸 5개가 다였다.
팀 타율 8위.
강태영이 3할 8푼 5리, 제라드 캠프가 3할 6푼 8리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대전 펠컨스는 팀 타율 8위를 기록하고 있는 팀이다. 거기에 시즌 초 선발투수건 불펜투수건 가리지 않고 대부분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불펜은 유현의 셋업맨 전환과 이재왕과 서규영의 필승조 합류로 안정감을 찾은 모양새였지만, 불펜이 괜찮아지니 이젠 선발투수가 문제였다.
초반부터 대량실점을 하며 수비가 길어지면 타자들은 타석에서 집중력이 떨어진다. 가뜩이나 안 맞는 방망이가 더욱 침묵해버렸고, 거기에 잦은 출루로 수비가 길어지자 실책까지 더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타격 지표와 몇몇 경기에서의 수비 실책을 놓고 보면 이 날 경기를 포함해 시즌 15경기에서 7승 8패를 기록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5연타석 홈런을 친 경기에서 패배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눈물 나게 매운 불족발을 먹으면서 울분을 달래자!
8대3으로 패배한 경기에서 5연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만들어 낸 강태영은, 예상보다도 패배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괜찮아. 15경기 기준으로 작년에는 4승 11패였고, 재작년에는 5승 10패였고, 그 전에는 13연패 하고 1승 거둔 다음에 다시 4연패 했으니까. 7승 8패면 아주 잘하고 있는 거고,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잘 할 거야.”
“…….”
야구 팬들은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해도 매년 홈 경기 최다 매진을 기록하는 대전 펠컨스 팬들을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팬들이 사랑하는 팀의 핵심 선수는, 팬들 만큼이나 엄청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앞선 시즌들의 기록을 언급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강태영에게, 유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땅의 정령은 유현의 머리 위에서 그런 강태영을 향해 박수를 치며 외쳤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펠컨스라 행복합니다~ 올해는 꼭 가을야구 하자! 최강 펠컨스!
순간. 유현은 생각했다.
정령 이 자식, 분명 대전 펠컨스 광팬이라서 나와 계약을 한 게 분명해. 나중에 펠꼴딱이라 말하라고 한 번 해봐야겠어.
* * *
서울 나인테일즈와의 3연전 두 번째 경기.
경기는 초반부터 난타전 양상을 띄웠다.
양 팀의 선발투수가 1회부터 나란히 3실점을 허용하더니, 사이좋게 4이닝 7실점을 기록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가고 만 것이다.
그렇게 양 팀의 불펜 싸움이 시작됐다.
9회 초까지.
승리의 여신은 서울 나인테일즈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대전 펠컨스는 이재왕이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1실점을 한 걸 제외하면 남은 5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았으나, 문제는 서울 나인테일즈가 8회 말까지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9회 말.
강태영은 서울 나일테일스의 마무리투수 정찬성을 상대로 3구 체인지업을 받아쳐 우측 펜스를 통타하는 장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익수가 포구를 매끄럽게 하지 못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미친 듯이 3루까지 전력질주를 했다. 우익수가 다급히 송구를 해보았지만 강태영의 발이 3루 베이스에 닿는 게 더 빨랐다.
그리고 이어진 제라드 캠프의 희생 플라이로서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린 대전 펠컨스가 서울 나인테일즈에게 말했다.
연장 가서 한 번 붙어보자.
우리가 부산 유니콘스한테 역전하는 거 봤지?
너희도 그렇게 해줄게.
10회 초.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대전 펠컨스가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10회 초. 대전 펠컨스가 셋업맨 유현을 마운드에 올립니다. 설사 무승부가 되더라도 절대 점수를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