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7화 (7/155)

7화 벽 (1)

-유현 10이닝 연속 무실점 실화냐? 이번엔 작년이랑 다르게 진짜 제대로 각성한 듯.

-눈 감았다 뜨니 8회와 9회가 없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강 불펜 보고 암이 나았습니다.

-설레발 자제 좀;; 유현 작년도 재작년도 시즌 초에는 언터쳐블이었던 거 벌써 잊었음?

-ㄴㄴ 올해는 다름.

-응. 아니야. 작년에도 다르다고 했다가 연장 끝내기 만루홈런 맞고 맛탱이 감ㅋㅋㅋ

-맛탱이 가도 좋다. 필승조들 불 지르는 거 보다가 유현+정우연 조합 보니까 행복함.

-그래도 이번엔 개막 13연패도 안하고 잘 하네. 펠컨스 이러다가 포스트시즌 가는 거 아님?

-응. 아니야. 못 가. 포기해.

-펠꼴딱^^

-님들 펠컨스 무시함? 포스트 시즌 갈 수 있음. 테이블 세터가 매 경기 4출루씩 하고 강태영이랑 제라드 캠프가 연타석 백투백 날려주고 선발투수가 7회까지만 무실점으로 막아주고 유현이 70홀드 하고 정우연이 70세이브 하면 펠컨스 우승할 수 있을 듯?

-해석: 올해도 포스트시즌 못 감.

환골탈태한 왕년의 유망주.

유현이 방출될 때 안타까워했고 어느 팀에 가서도 잘되기를 바랐던 팬들은, 돌고 돌아 친정팀에서 부활한 유현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유현은 자신을 전혀 다른 투수로 바꿔준 기적에 매일같이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열광해 주는 팬들에게 감사했다.

원정 경기, 홈경기 가릴 것 없이.

자신을 알아보고 사인 요청을 하는 모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 줬다. 모든 스포츠는 팬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땅의 정령의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항상 웃는 얼굴로 팬들을 대했다.

반면.

마운드 위에서의 유현은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실책이 나왔을 때 괜찮다며 미소를 짓는 거 말곤 좀처럼 표정 변화를 볼 수 없었다.

유현은 영리한 투수였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영리한 피칭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생각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마라, 타자의 생각을 읽어라, 야구는 힘 대 힘의 싸움이 아니다, 절대 타자가 원하는 공을 주지 마라, 패턴이 같으면 170km를 던져도 맞는다 등등.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한 요령들을 가르쳐 줬다. 유현에게 새겨져 있던 안 좋은 습관들을 하나둘 지워 나갔다.

표정 관리 또한 투구의 일환이었다.

인터벌을 빠르게 가져가고 대부분의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는 극단적인 공격적 피칭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표정 관리를 통해 어떤 공을 던질지 타자들이 예상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만 하니까.

그렇다고 마냥 공격적으로만 던진 건 아니었다.

전략이 없는 공격적 투구는 처음 한두 번은 먹힐지 몰라도 결국에는 수가 읽혀 타자들에게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타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어라.

투구 패턴을 예상할 수 없게 해라.

유현은 땅의 정령의 조언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여섯 경기에서 10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탈삼진을 네 개 잡았다. 그중 두 개는 루킹 삼진, 나머지 두 개는 헛스윙 삼진이었다.

그리고 이 네 개의 탈삼진 모두 타자들이 집요하게 노리는 포심 패스트볼로 만들어 낸 거였다.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강력한 무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타자들은 머릿속에 투심 패스트볼을 생각하고 들어온다. 단, 투심 패스트볼을 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포심 패스트볼만을 노리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유현은 오히려 그 점을 노렸다.

타자들의 머릿속이 투심 패스트볼로 가득 찼을 때, 허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간간이 삼진을 잡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타자들에게 말했다.

포심 패스트볼만 노린다고? 노리고 있어서 줬는데 왜 치지를 못해? 또 던져 줄까?

가끔씩 삼진을 잡으러 들어가면, 가뜩이나 복잡한 타자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고 머릿속이 복잡한 타자들은 유현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10이닝 연속 무실점.

좋은 성적이지만 유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반드시 전반기 내에 땅의 정령으로부터 받은 미션을 완료하고, 서드 피치를 습득해서 선발 투수로 전향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압도적인 성적.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한 발판, 선발 투수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무력시위.

2경기 연속 홀드에도 만족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리고 유현은 팀의 3연승이 걸린 부산 유니콘스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3일 연속으로 마운드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안용석 감독은 유현과의 독대에서 경기가 이기고 있을 때 투입할 거라고 말했다.

2경기 연속으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투구수가 도합 17개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만약 오늘 경기에서 마운드에 오르게 된다면, 내일은 출근하지 않아도 돼.”

“전 내일도 마운드에 설 수 있습니다. 컨디션 괜찮습니다, 감독님.”

“응. 내가 안 괜찮아. 3연투면 충분하고 지금도 매우 잘해 주고 있으니까 무리하지 마. 시즌은 길고 앞으로도 등판할 기회는 많으니까.”

마음 같아선 3연투가 아니라 30연투도 가능할 것 같았다. 땅의 정령의 축복으로 인해 자고 일어나면 컨디션이 말끔하게 회복됐으니까.

그러나 3연투 이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유현이 매 경기 호투 중이고 컨디션이 최고조인 건 분명하지만, 코칭스태프의 입장에서는 부상 방지를 위해서 3연투 이상을 시킬 이유가 없었다.

3연투도 투구수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는 유현이기에 가능한 거였다.

그마저도 자주 나올 가능성은 없었다.

3경기 연속 접전이고 유현이 효율적인 투구수 관리를 해야 가능한 이야기니까.

안용석 감독이 미리 이야기를 해둔 것과 달리, 경기는 3연투를 못할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세미 제이슨과 함께 원투펀치로 맹활약을 해줘야 할 선발투수 앤드류 헤일러가 4와 3분의 1이닝 8피안타 3사사구 7실점으로 무너진 것이다.

타자들이 1회 초 3득점을 얻어 줬음에도 우세를 이어 가지 못하고 7대3으로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4회 말 1사 1,2루.

실점 위기에서 올라온 이재왕이 7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6-4-3 병살타를 유도하며 추가 실점 위기를 틀어막았다.

그리고 6회 말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7회 초.

딱!

-넘어갑니다! 넘어갔어요!

-포수 지석한이 자신의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합니다! 점수는 7대6! 대전 펠컨스는 아직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부산 유니콘스 입장에서는 뼈아픈 1구였습니다. 패스트볼에 강점이 있는 지석한에게 초구 포심 패스트볼로 카운트를 잡으려고 하다니요! 아무리 자신의 공에 자신감이 있어도 이건 아니죠!

-만약 오늘 이 경기가 역전당한다면, 부산 유니콘스는 지석한 선수에게 던진 초구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겁니다.

포수 지석한이 데뷔 첫 홈런을 7대6으로 따라붙는 3점 홈런으로 기록했지만, 9번 타자 유격수 하지성이 2사 2루 상황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며 동점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점이 아쉽긴 해도 패색이 짙었던 경기를 1점 차이로 좁히는 성과를 낸 상황.

역전이 가시권으로 다가왔다.

안용석 감독이 송현수 투수코치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송현수 투수코치가 전화를 잡았다.

“유현 올려 주세요.”

* * *

7회 말.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주말 3연전의 마지막 경기에서 유현을 쓰는 걸 포기하고 1점 차로 지는 경기에서 등판시켰다는 건, 반드시 역전을 해서 이번 경기를 잡겠다는 안용석 감독의 의중을 드러낸 거였다.

-킁킁.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나.

‘무슨 냄새?’

-역전의 냄새가 나. 오늘 경기, 펠컨스가 역전할 거야. 그리고 넌 시즌 2승을 수확하겠지.

‘태영이나 제라드 캠프가 한 방 쳐줄 거라고 믿는 거야?’

-아니. 오늘 경기의 핵심은 2군 캠프에서 훈련할 때마다 네 공을 받아 주던, 은퇴를 앞둔 포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

‘차영석 선배님?’

-응. 중심타선 외에서 득점 찬스가 오면, 안용석 감독은 100퍼센트 차영석을 대타로 쓸 거야. 그리고 판이 뒤집히겠지. 뭐, 그 전에 뒤집히는 게 더 좋은 그림이겠지만.

유현은 7회 말 세 타자를 모두 땅볼로 잡아내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어진 8회 초.

1사 2루의 찬스에서 강태영과 제라드 캠프의 연속 안타가 나오며 대전 펠컨스가 동점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지만, 추가 안타가 나오지 않으며 아쉽게도 역전을 하진 못했다.

그리고 유현은 8회 말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선두타자를 3구 삼진으로 잡아낸 뒤, 유격수 앞 땅볼로 아웃카운트를 두 개를 추가하고서 마운드를 내려가는 걸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투구 수는 고작 15개.

최고구속은 155km였다.

3일 연속 마운드에 올랐고, 도합 4이닝을 투구하며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9회 초에 타선이 힘을 내서 한 점을 더 추가하고, 9회 말에 대전의 수호신이 마운드에 올라와 이닝을 지워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9회에 역전하고 시즌 2승 가즈아!

* * *

9회 초.

대전 펠컨스의 타순은 7회 초 3점 홈런을 때려내며 반격의 서막을 알렸던 지석한으로부터 시작됐다.

지석한이 타석에 서기 전.

장광한 타격코치는 지석한을 따로 불러서 조언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2스트라이크로 몰리기 전까지는 공을 봐. 아마 2스트라이크로 몰릴 일도 없을 거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투수가 볼을 남발하다 너에게 1루 베이스 직행 티켓을 끊어 줄 테니까.”

“넵. 출루율 올리고 오겠습니다.”

일단은 가만히 서 있어라.

타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말임에도 지석한은 지시대로 했다. 선두타자의 최우선 과제는 출루이고, 팀을 위해 선두타자 출루를 할 수 있다면 몸에 맞고 출루하더라도 괜찮았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장광한 타격코치의 판단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이전 타석에서 홈런을 때린 지석한에게 겁을 먹은 부산 유니콘스의 신인 투수가 2구 연속으로 유인구를 던진답시고 한참 빠지는 볼 2개를 연속으로 내준 건 맞았지만, 곧장 고의사구를 지시하고 투수 교체를 지시할 거라고는 그 역시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무사에서 2볼에 몰렸다고 고의사구?

그것도 첫 풀타임을 소화하는 선수를 상대로?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는, 상대 팀이 차려 준 밥상을 받아먹기로 작정했다.

부산 유니콘스는 자물쇠란 별명이 있는 마무리투수 손신익을 동점 상황에서 투입하며 대전 펠컨스의 유현 투입과 마찬가지로 승부수를 뒀다.

대전 펠컨스 또한 맞불을 놓았다.

부산 유니콘스와의 3연전을 앞두고 1군에 콜업됐지만 단 한 타석도 소화하지 않았던 베테랑 차영석을 대타로 기용하며 맞불을 놓았다.

팀이 차영석에게 원하는 건 하나.

지석한에 이어 연속 출루를 하면서 승리의 발판을 만드는 거였다.

-대전 펠컨스가 부산 유니콘스의 승부수에 승부수로 대답했습니다. 차영석 선수가 대타 투입되며 2018시즌 첫 타석에 서게 됐습니다.

-차영석 선수는 콜업 되기 전까지 2군 6경기에서 무려 5홈런을 때려 낼 정도로 타격감이 좋았습니다. 승부처에서 타격감 좋은 베테랑처럼 까다로운 상대도 없죠. 하물며 그 베테랑이 수비로 정평이 난 포수라면, 투수의 머릿속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손신익 선수가 차영석 선수를 상대할 때는 뭘 조심해야 할까요?

-일단 초구를 조심해야 합니다. 차영석 선수는 게스 히팅을 즐겨합니다. 10시즌 이상 활약한 선수 중 초구 타율이 가장 높고 초구 홈런이 가장 많은 게 차영석 선수라는 걸 잊으면 안 됩…….

딱!

1구.

차영석이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걸 넘어 이날 경기의 쐐기를 박는 데에는 1구면 충분했다.

카운트를 잡기 위해 바깥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치며 들어온 커터를 작심한 듯이 밀어 쳤고, 쭉쭉 뻗어나간 타구는 우측 담장을 그대로 넘어가버렸다.

차영석의 통산 최다 초구 홈런 기록이 1개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호오오오옴런! 자신의 시즌 첫 타석을 역전 2점 홈런으로 장식하는 차영석 선수! 부산 유니콘스의 수호신이 무너집니다! 경기는 9대7!

-작심하고 커터를 노리고 있었네요. 차영석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올 시즌 이후 은퇴를 선언한 선수가 맞나 싶어요.

땅의 정령의 예언이 적중했다.

차영석이 시즌 첫 타석에서 초구를 노려 역전 2점 홈런을 만들어 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승부수.

유현과 더불어 3연투를 한 대전의 수호신 정우연이 마운드에 올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아웃카운트 3개가 날아가 있었다.

팀의 3연승과 동시에 유현이 시즌 2승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안용석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3연투 투혼으로 마지막 세 이닝을 없애버린 유현과 정우연,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며 추격의 발판을 만든 지석한, 그리고 한 베이스만 나가랬더니 뛰기 귀찮다고 대번에 홈까지 들어와 버린 차영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후, 유현을 향해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이랑 우연이는 내일 불펜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보이면 바로 2군행이다.”

3연투에 대한 보상으로 유현과 정우연은 주말 3연전의 마지막 경기에서 휴식을 명령받았다.

샤워를 하고 나온 유현이 퇴근을 준비했다.

휴식이 주어졌으니 느긋하게 늦잠을 자다가 여유롭게 출근을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휴식날이라도 훈련을 빼먹을 수는 없으니까.

-맛있는 거 먹고 싶다. 부산에서 유명한 음식이 뭐가 있을까?

‘어제랑 그제, 웬만한 건 다 먹지 않았냐?’

-어제 먹었어도 오늘 또 먹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인 것을 왜 몰라!

‘너 사람 아니잖아.’

-정정한다. 정령의 심리인 것을 왜 몰라!

‘네네. 그래서 뭐 먹고 싶다고?’

-돼지국밥에 정구지 야물딱지게 넣어 먹고 따뜻한 수육을 새우젓에 살짝 찍어 먹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하자.’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유현은 땅의 정령과 저녁 메뉴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바로 그때.

강태영이 유현에게로 다가왔다.

대전 펠컨스에 복귀한 뒤 강태영과는 경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나누곤 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 사적으로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말을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던 강태영이 유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 돼지국밥 먹고 갈래? 수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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