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시작은 패전조, 하지만 (3)
그라운드 볼러.
땅볼 유도를 무기로 삼는 투수들에게 있어 자신의 실력 다음으로 중요한 건 무엇일까?
아마도 팀의 수비력일 것이다.
땅볼은 필연적으로 수비가 병행돼야 아웃카운트로 이어진다. 모든 타구가 투수 정면으로 가지 않는 한, 수비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다.
땅의 정령으로부터 땅볼 확률이 2배로 증가하는 축복을 미션의 보상으로 받았다.
수직 무브먼트가 뛰어난 포심 패스트볼과 싱커를 연상시키는 무브먼트의 투심 패스트볼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유현에게는 엄청난 메리트가 되는 보상인 게 사실이다.
그리고 유현은 자신에게 주어진 땅의 정령의 축복을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투수였다.
삼진을 잡으려는 피칭을 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타자의 허를 찌를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철저하게 범타를 유도할 코스와 타자가 약점을 가진 코스만을 노렸다.
혹여 안타를 맞더라도, 실책으로 주자가 나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그리고 팀의 수비를 믿었다.
행복수비라는 오명과 달리, 2017시즌 대전 펠컨스는 실책 5위를 기록했다.
워낙 임팩트가 크거나 어이없는 실책이 자주 나와서 그렇지, 대전 펠컨스의 수비지표 자체는 리그 평균 수준이었다.
좋지도 않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다는 뜻.
게다가 2018시즌을 앞두고 안용석 감독은 야수들에게 반쪽짜리 타자는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아무리 타격이 뛰어나더라도 최소한 기본 수준의 수비를 보여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렇다고 시즌 초, 대전 펠컨스의 수비진이 행복 야구를 하지 않았느냐.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현은 팀의 첫 열 경기 중 네 경기에서 등판 기회를 얻었고, 8이닝을 투구하면서 무려 다섯 번의 실책으로 출루를 허용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무실점 피칭을 선보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보였다. 실책과 상관없이 야수진을 믿고서 묵묵히 자신의 공을 던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패전조인 유현이 첫 열 경기에서 무려 네 경기에 등판했다는 건, 대전 펠컨스가 시즌 초에 고전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3승 7패.
유현은 기가 막힌 역전승으로 시즌 첫 승을 수확한 경기를 제외하면 지는 경기에서 최소한의 실점으로 이닝을 틀어막는, 문자 그대로 패전조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연히 미션 조건은 개막전에서의 1승을 제외하면 충족시킬 수 없었다.
유현은 분명 호투했다.
하지만 개인이 아니라 대전 펠컨스라는 팀만 놓고 보면 문제가 많았다. 10경기에서 7패를 당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 7패 중 4패가 역전패라는 게 더욱 뼈아팠다.
승부처마다 필승조가 무너지고 말았다.
마무리 정우연은 두 경기에서 2이닝 6탈삼진 무실점으로 2세이브를 기록했지만, 문제는 정우연이 등판하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하다는 거였다.
안용석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이제 고작 열 경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시즌은 길고 결국 언젠가는 필승조들이 제 몫을 해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제 몫을 해주기까지 필요한 시간이다.
이겨야 할 경기에서 역전패로 승리를 내주면 앞선 10년과 다를 게 없다. 잡을 경기를 확실하게 잡아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줘야 패배 의식을 걷어 내고 체질 개선을 할 수 있다.
결국 안용석 감독은 결단을 내렸다.
[대전 펠컨스, 필승조 셋 2군행 결단]
[4경기 완벽투 유현, 필승조로 급부상?]
필승조 세 명을 모두 2군으로 내리고, 2군에서 투수 세 명을 올렸다.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선언했다.
도망가는 피칭을 하는 투수는 자신이 감독으로 있는 한 1군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도망가는 피칭을 하는 투수는 1군에 남겨 두지 않을 겁니다. 2군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설사 연봉이 10억이라도 도망가는 피칭을 하면 자리가 없을 겁니다. 싸움을 피하는 투수는 마운드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필승조 세 명을 동시에 2군으로 내리는 결단을 내리셨는데요, 빈자리는 어떻게 채우실 생각이십니까? 2군에서 올라온 투수들이 채웁니까?”
“일단은 지난해까지 선발투수로 활약했던 이재왕을 불펜으로 돌릴 겁니다. 한 자리는 2군에서 올라온 서규영이 채울 거고요.”
“나머지 한 자리는 누가 채웁니까?”
“현재까지 저희 팀의 유이한 평균자책점 0점 투수 중 한 명이 채우게 될 겁니다.”
* * *
유현이 감독실에 불려갔다.
그리고 유현은 자신이 감독실로 소환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쳤던 기자로부터 필승조 합류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유현의 새로운 보직은 셋업맨이었다.
패전조가 고작 네 경기 만에 불펜의 핵심 요원으로 보직이 변경된 것이다.
-내가 뭐라고 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기회가 올 거라고 했지?
‘그러게. 필승조라…….’
-기분이 어때?
‘아, 포스트시즌 진출하고 싶어. 이길 경기를 확실하게 잡아주면 진출할 수 있을까?’
-포스트시즌이라……. 필승조만 제대로 자리 잡으면 가능할걸? 팬들은 3승 7패라고 작년과 똑같을 거라 욕하지만, 내가 봤을 때 대전 펠컨스는 나쁘지 않은 팀이야.
지난해와 다를 바가 없다.
11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가 유력하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해설위원들은 대전 펠컨스를 꼴찌 후보로 뽑았다. 그것도 대전 펠컨스 출신의 해설위원 두 명을 제외한, 모든 해설위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마땅한 전력 보강이 없었던 것, 세미 제이슨 외에 새로 뽑은 외국인 선수 두 명의 몸값이 총합 140만 달러인 것, 지난해 불펜진에서 두 명이 수술을 받으며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나 합류가 가능한 것 등, 이유를 만들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반면 땅의 정령의 생각은 달랐다.
‘정말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할까?’
-물론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긴 해. 그 필승조에 네가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명심해. 필승조는 선발투수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일 뿐이야. 절대 필승조에 안주하지 마.
‘당연하지.’
유현과 계약을 한 이후.
땅의 정령은 항상 목표를 강조했다.
한 가지를 이뤄도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볼 것을 요구했다.
처음 목표는 시범경기에서 기회를 얻는 거였고, 그다음 목표는 개막전 엔트리에 이름이라도 올리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필승조에 합류하겠다는 목표 또한 이뤄 냈다.
다음 목표는 선발투수로의 보직 변경이었다.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바라는 최종 목표는 사이영 상이다. 자신에게 배운 이상 사이영 상 정도는 받아줘야 한다나 뭐라나.
중요한 건 불펜투수가 사이영 상을 수상한 게 2003년이 마지막이라는 거다.
해당 투수는 메이저리그 최다 세이브 신기록을 갱신하며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를 보냈고, 2003시즌에 사이영 상을 수상할 만큼 압도적인 성적을 냈던 선발투수가 없었던 것도 수상에 한몫했다.
뭐, 불펜투수로서 사이영 상을 수상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못할 건 없다.
한 시즌이 끝나면 내 팔은 더 이상 팔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70세이브 정도 거두고, 부족하면 세이브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때도 올라가서 죽어라 던지면 가능하겠지.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이 나올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고, 하더라도 선수 생명을 담보로 거는 게 아니면 약물의 힘을 빌려야 하니까 그게 문제다.
그리고 2003년에 마무리투수로 사이영 상을 받았던 투수는 후자였다.
게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도 불펜투수보다 선발투수가 더 용이하다. 이러나 저러나 필승조는 거쳐 가는 과정일 뿐, 결국 유현의 최종 목적지는 선발투수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필승조에 들었으니까 미션을 달성하는 걸 목표로 해야겠지? 선발에 합류하려면 구종 하나 정돈 더 있는 게 좋잖아.’
-당연한 말씀. 전반기 안에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길 바라겠어. 나한테 배웠으니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유현의 피지컬은 뛰어나다.
땅의 정령은 그 피지컬을 제대로 사용할 방법을 가르쳐 줬고, 두 달 사이 전혀 다른 투수가 됐다.
물론 마냥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현재로서 유현의 단점을 꼽자면 구종이다.
현재 유현이 구사하는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 단 두 가지다.
커브와 슬라이더도 던질 수는 있다.
다만 패스트볼과 같은 폼으로 던지질 못하고, 구위와 무브먼트 모두 기대 이하라 실전에서는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구종들이었다.
그때마다 땅의 정령은 말했다.
-넌 변화구에 소질이 없어. 지금은 구종 늘리려고 하지 말고 마운드 위에서의 네 할 일에만 집중해. 미션을 달성하면 이 몸이 너에게 딱 어울리는 새 구종을 가르쳐 줄 테니 말이야!
결국 유현은 과감하게 커브와 슬라이더를 버렸다. 시범경기까지는 간간이 던지기도 했지만, 개막전 이후로는 두 패스트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필승조로 전환한 첫날.
유현은 이날 또한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만 던질 생각을 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지난 시즌까지 2년 동안 자신이 몸담았던 서울 레오파즈와의 시즌 첫 맞대결에서, 1선발 세미 제이슨이 7이닝 4피안타 1사사구 12탈삼진 무실점 호투를 펼친 후 바통을 넘겨받은 거였다.
스코어는 2대0.
타율 1위를 기록 중인 서울 레오파즈의 타선을 감안했을 때, 조금이라도 경기가 꼬이면 대번에 역전 당할 수 있는 점수 차였다.
그리고 유현의 희망고문이 시작됐다.
딱!
선두타자가 2구로 들어온 투심 패스트볼을 쳐서 유격수 앞 땅볼로 아웃.
딱!
다음으로 타석에 선 3번 타자 오채운도 상황은 비슷했다. 2구째 들어온 투심 패스트볼을 건드려 2루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를 만드는 데에 그쳤다.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궤적이 좋아도 노리고 치면 안타를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결과는 두 타자 모두 땅볼이었다.
8회 초 2아웃.
서울 레오파즈의 4번 타자 구재훈이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경기 전에 봤던 전력분석을 떠올리며 유현과의 승부에 앞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유현을 상대하는 건 까다롭다. 스트라이크 존에 무조건적으로 공을 집어넣지만, 같은 폼에서 나오는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을 육안으로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나마 공략법이 있다면 2스트라이크가 되기 전에 포심 패스트볼을 노려서 공략하는 거다. 2스트라이크 이후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마구다. 명심해라. 무조건 포심 패스트볼만 노려라.
투심 패스트볼은 포기하고 포심 패스트볼만 노려서 쳐라.
어떻게 보면 마구와도 같은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공략법이라고 볼 수 있었다.
포심 패스트볼만 공략한다. 무조건 포심 패스트볼이 들어오면 받아쳐서 넘긴다. 구재훈의 머릿속은 포심 패스트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았다.
2구 연속으로 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초구는 스트라이크였고 2구는 파울, 카운트는 순식간에 유현에게 유리해졌다.
한 번 더 투심 패스트볼?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포심 패스트볼? 투심도 궤적이 눈에 익어서 잘만하면 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구재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유현은, 구재훈에게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 따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포수 지석한의 사인을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투구를 했다.
높은 코스로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
가만히 있었으면 살짝 빠지는 볼이 됐을 테지만, 치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구재훈은 거의 본능적으로 배트를 휘둘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시원하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스윙 타이밍도 맞지 않았고, 높은 코스에 상대적으로 약점이 있는 구재훈의 허를 제대로 찔러서 잡아낸 삼진이었다.
원정 팀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구재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전광판을 바라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155km? 어쩐지 방금 전보다 빠른 거 같더라. 유현 저 자식, 도대체 몇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된 거야.’
초구와 2구, 유현이 던진 투심 패스트볼의 구속은 152km였다.
그리고 방금 전.
유현이 구재훈의 방망이를 이끌어 낸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은 155km였다.
하지만 구재훈이 느끼는 속도 차이는 그 이상이었다. 155km가 아니라 160km짜리 강속구가 들어온 것처럼 빨라 보였다.
그만큼 유현의 공이 좋았다.
-유현! 유현! 유현!
팬들이 유현의 이름을 연호했다.
앞서가는 경기에서 올라온 불펜투수가 모처럼만에 안정적인 경기를 펼치자, 다들 아낌없는 박수갈채와 환호성으로 보답해 줬다.
유현의 임무는 그걸로 끝이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땅의 정령이 말했다.
-나이스 피칭. 내가 뭐라고 했지?
‘생각이 얼굴에 뻔히 보이는 바보들은 삼진을 잡아 줘야 제 맛이다.’
-걸려라. 걸려라. 큰 거 한 방 날리면 1점 차. 9회 초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한 점 더 따라붙고 연장전으로 가자. 투심도 두 번 연속으로 보니까 궤적이 익숙해져서 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너무 티 나지 않냐?
‘응. 엄청 티 나.’
-새 구종을 배우기 전까지는 억지로 삼진을 잡으려고 하지 마. 하지만 뻔히 생각이 보이는 바보들에겐 삼진을 잡아 줘야 해. 네가 탈삼진 능력이 있다는 걸 간간이 보여 줘야 타자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거든. 레퍼토리는?
‘최대한 다양하게.’
9회 초.
마운드에 올라온 정우연이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시즌 3세이브를 수확하며, 대전 펠컨스는 시즌 4승을 수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치러진 부산 유니콘스와의 시즌 첫 맞대결에서도 유현과 정우연 콤비가 8회와 9회를 깔끔하게 지워 버리며 5대4로 승리, 대전 펠컨스는 2연승을 거뒀다.
그리고 대전 펠컨스 팬들은, 아직까지 방어율 0을 기록 중인 좌완 파이어볼러 셋업맨의 안정적인 투구를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