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5화 (5/155)

5화 시작은 패전투수, 하지만 (2)

[땅의 정령님의 두 번째 미션!]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세요! 홀드와 세이브는 두 번 기록할 때마다 1승으로 계산합니다! 단, 블론세이브를 할 경우 –1승으로 계산합니다!]

[미션을 달성할 경우 반반무많이를 선호하고 불화산치킨에 중독된 자비로운 땅의 정령님이 새 구종을 보상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10승 정도는 우습지?

‘응. 전반기에 달성할 수 있겠네.’

-흥! 당연히 그래야지! 사이영 상을 받아야 하는데 KBO리그 10승에 쩔쩔 매면 답도 없는 바보인 것이야!

8회 말.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7대4로 점수 차가 벌어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를 지닌 채.

땅의 정령이 무려 새 구종을 보상으로 내걸고 미션을 줬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0승.

패전 투수로 시즌을 시작하는 유현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먼 미래의 목표보다는 지금 당장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미션을 달성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올 시즌 주전 포수로 낙점 받은 데뷔 5년 차 군필 포수 지석환과 연습 투구를 주고받았다.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지석한이 미트로 입을 가린 채 유현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선배님. 오늘 공 완전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던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냐. 네가 사인 주는 대로 던질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응. 생각하는 대로 팍팍 사인을 내 줘. 인터벌을 길게 가져가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만 신경 써줘.”

“그럼 팍팍 사인 내겠습니다.”

“땡큐.”

후우우우우.

유현이 심호흡을 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이제는 유현의 정수리를 안방 침대처럼 생각하는 땅의 정령이 말을 걸었다.

-지고 있는 팀의 불펜투수가 마운드에 올랐을 때 제일 신경 써야 할 게 뭔지 알아?

‘내 공을 던지는 것.’

-아 진짜, 난 누굴 가르치는 데에 소질이 있나봐. 어쩜 이렇게 잘 기억하냐?

‘귀에서 피가 날 것처럼 들었는데 모르면 안 되지. 걱정하지 마.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마운드에서 긴장한 적이 거의 없거든.’

-응. 부디 계속 그랬으면 좋겠다.

패배가 유력한 경기에서 자신의 공을 던지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누구도 질 가능성이 높은 경기에서, 승리에 공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웃카운트를 잡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실점 확률은 늘어난다.

그 빌어먹을 상황을 이겨 내고서, 멘탈을 다잡은 채 자신의 공을 던질 줄 아는 투수만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유현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상대해야 할 타순은 공교롭게도 지난 시즌 120홈런 375타점을 합작한 울산 알바트로스의 클린업 트리오.

유현은 초구로 가운데로 몰린 듯하다가 귀신같이 몸쪽으로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을 구사했다. 퉁이 자이언츠와의 연습경기에서 왕이롱을 루킹삼진으로 잡아낸 바로 큰 코스였다.

딱!

실투로 생각한 타자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타구는 3루와 유격수 사이로 빠르게 흘러나갔다.

유격수가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타구의 방향을 보고서 다이빙 캐치를 하면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 과감하게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불규칙 바운드가 생성되며 글러브를 맞고 타구가 옆으로 튀어버렸다. 뒤늦게 좌익수가 백업을 해보았지만 타자주자는 이미 여유롭게 1루 베이스를 밟은 뒤였다.

결과는 안타가 아닌 실책으로 기록됐다.

불규칙 바운드가 형성되긴 했지만 잡지 못 할 정도로 어려운 타구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굳이 다이빙 캐치를 하며 잡을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침착하게 수비를 했다면 불규칙 바운드와 상관없이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실책으로 기록되는 게 당연했다.

유격수 하지성이 고개를 숙였다.

7회 말 수비가 길어지며 집중력을 잃은 걸까?

8회 초 공격에서 2루타를 쳐놓고도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런다운에 걸리며 달아오를 뻔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수비에서 만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몸을 던진 게 실책으로 이어졌다.

차마 동료들과 눈을 마주칠 면목이 없었다.

-어서 와. 행복 수비는 오랜만이지?

행복 수비.

행복하다는 가사가 들어간 응원가를 빗대어, 어려운 타구는 잘 처리하면서 확실하게 처리해야 할 타구에서 어이없게 실책을 남발하는 대전 펠컨스 야수들의 수비를 보고 붙은 별명이다.

수비가 불안한 팀은 강팀이 될 수 없다. 한두 시즌 반짝 좋은 성적을 낼 순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성이 유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응? 괜찮아, 괜찮아. 불규칙 바운드가 튀면 못 잡을 수도 있는 거지. 이번에도 그쪽으로 보낼게 잘 잡아줘.”

“네? 그게 무슨…….”

딱!

울산 알바트로스의 4번 타자 박영하가 3구로 들어온 투심 패스트볼에 타격을 했다.

그리고 타구의 방향은, 유현이 예고한 것처럼 이번에도 유격수 쪽으로 향했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정면으로 빠르게 굴러왔고 불규칙 바운드도 아니었다. 정신줄을 놓지 않는 한 실책이 나와서는 안 될 타구였다.

하지성이 타구를 잡아서 2루수에게 송구, 2루수가 1루수에게 송구했다.

순식간에 6-4-3 병살타가 완성됐다.

그리고 세 번째 아웃카운트도 유격수 하지성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안타가 되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타구가 3루와 2루 사이를 절묘하게 꿰뚫었지만, 하지성이 백핸드 캐치 후 기가 막힌 노스텝 송구를 하며 8회 말을 마무리한 것이다.

-와아아아!

-하지성! 하지성! 하지성!

원정 팀 응원석에서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기가 막힌 호수비를 보여준 하지성에게 팬들은 기꺼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앞서 보여줬던 주루사와 실책을 질책하기보다는 안타를 지워버린 기가 막힌 호수비에 열광했다.

유현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려 박수를 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며 하지성과 가볍게 주먹을 맞댔다.

“나이스 플레이!”

그리고 자신을 놀렸던 땅의 정령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 참 더럽게 행복하네. 그치?’

-쳇. 이번에는 흔들릴 줄 알았는데 안 흔들리네? 아쉽군.

‘이런 거에 흔들려서 사이영 상 받겠어? 실책이 나올 수도 있는 거고 호수비가 나올 수도 있는 거지, 그라운드 볼러가 수비 때문에 흔들리면 안 된다고 했던 게 누구였더라?’

-맞는 말인데 좀 재수가 없다? 벌칙으로 오늘 저녁은 히드라 치킨 3번 세트다!

* * *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는 데에 6구.

출루를 한 번 허용하긴 했지만 실책으로 인해서였고, 이후에는 병살타와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해내며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했다.

결정구는 역시나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울산 알바트로스의 클린업 트리오였지만, 그들은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에 전혀 대처를 하지 못했다.

유현은 인터벌을 최대한 짧게 가져가며 공격적인 투구를 펼쳤다.

건드리면 땅볼이 되고 건드리지 않으면 카운트가 몰려서 상황이 더욱 불리해졌다.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왕이면 이기는 경기에서 이런 호투를 펼쳤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유현의 호투는 팀이 7대4로 밀리고 있는 8회 말에 나왔다.

이제 남은 공격 기회는 단 한 번.

타선이 최소 3점을 내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현이 잡은 아웃카운트 세 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9회 초.

타순은 7번 포수 지석한으로부터 시작됐다.

카운트는 2볼 2스트라이크.

딱!

패스트볼에 강점이 있다고 평가받는 지석한은, 몸쪽 높은 코스로 바짝 붙어 들여온 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냈다.

이후 두 타자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며 2사 1루가 됐다.

첫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최고 구속 155km의 포심 패스트볼을 앞세운 울산 알바트로스의 마무리 투수 조영우가 이대로 경기를 마무리 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대전 펠컨스 타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근성의 상징, 악바리 타자, 커트 신공의 달인 이영우는 무려 16구까지 가는 집요한 괴롭힘 끝에 포볼을 얻어내며 출루했다.

이후 유격수 앞으로 가는 땅볼이 나왔으나 포구 실책이 나오며 주자 모두 세이프,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2사 만루가 되어 있었다.

-강태영! 강태영!

대정 펠컨스 팬들이 팀의 상징인 강태영의 이름을 목 놓아 외쳤다. 아웃카운트 하나만 올라가면 패배로 경기가 끝나는 상황에서, 오늘 경기 4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경기 내내 실망을 시켰던 거포에게 한 줄기 희망을 걸었다.

초구는 볼, 2구는 몸쪽으로 파고드는 스트라이크, 3구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하며 스트라이크, 볼카운트가 1볼 2스트라이크로 밀렸다.

그 순간.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재밌는 기록 하나 가르쳐 줄까?

‘뭔데?’

-주자가 없을 때 강태영의 통산 타율은 고작 2할 4푼 5리야. 반면 주자가 있을 때 강태영의 통산 타율은 3할 6푼 4리지. 그렇다면 2사 만루 상황, 그것도 2스트라이크를 내준 상황에서 강태영의 통산 타율은 얼마나 될 것 같아?

‘5할 정도 되려나?’

-정답은 단 한 번도 찬스를 놓친 적이 없다야.

‘……한 번도 놓친 적 없다고?’

-강태영의 만루에서의 통산 타율은 5할 9푼 1리로 말도 안 될 만큼 놓아.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만루 중에서도 2사일 때 2스트라이크를 잡힌 여섯 번의 상황에서 괴물 같은 집중력으로 모두 안타를 만들어 냈다는 거지. 괜히 통산 만루 홈런이 25개인 게 아냐. 연간 3개 이상씩 꾸준히 쳤다는 건데, 그건 보통 괴물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거든.

그 순간 유현은 1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2017시즌 초.

그가 강태영에게 12회 말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았던 것도 2아웃 상황에서 1볼 2스트라이크로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만들고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으러 들어갈 때였다.

그때는 악몽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을 무너트렸던 강태영이, 울산 알바트로스의 마무리투수 조영우를 무너트리기를 바랐다. 유현을 포함해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 코칭스태프, 응원을 온 팬들 모두 간절히 바랐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지 않기를 말이다.

딱! 딱! 딱!

“파울! 파울! 파울!”

강태영은 괴물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비슷하게 들어오는 모든 공을 파울로 만들며 조영우를 괴롭힌 것이다.

그러면서도 유인구에는 손도 대지 않으면 볼카운트를 자신에게 유리한 3볼 2스트라이크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파울 세 개를 연속으로 치며 조영우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영우를 상대할 때도 16구까지 갔는데, 이번에도 순식간에 10구를 넘어버렸다. 투구수는 어느새 30개를 넘어 40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젠장. 저 미친 새끼 진짜 약 하는 거 아냐? 어느 코스로 던져도 다 걷어내는 게 말이 되냐고!’

몸쪽, 바깥쪽, 높은 코스와 낮은 코스를 가리지 않고 존 근처로 들어가는 모든 공을 파울로 만들어 버리니 마운드 위에 선 투수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던질 곳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포수는 유인구 사인을 냈다.

설사 밀어내기로 1점을 내주더라도 강태영과 승부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냉정한 결단이었다.

하지만 조영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밀어내기를 허용하는 걸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 삼진 두 개가 있는 강태영에게 자신의 주 무기를 던져 삼진을 잡아 이기고 싶다는 욕심에 사로잡혔다.

때문에 타석에 들어서있는 괴물의 특이한 기록을 신경 쓰지 못했다.

2아웃 만루 상황에서 2스트라이크 이후일 때, 강태성이 6타수 6안타 4홈런 20타점을 기록하고 있다는 미친 기록을 말이다.

몸쪽 꽉 찬 포심 패스트볼.

155km의 구위로 윽박질러 삼진을 잡아내겠다고 계산했다. 실제로 조영우가 가장 많은 삼진을 잡아낸 코스이기도 했다.

그리고.

딱!

이 날 경기에서 4타수 무안타 2삼진을 기록하고 있던 강태영은 팬들의 믿음에 보답했다.

-호오오오오옴런! 스트라이크 하나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에서, 펠컨스의 심장이 경기를 단번에 뒤집어 버립니다! 점수는 8대7! 대전 펠컨스가 9회 초에 리드를 가져옵니다!

-역시 강태영입니다! 몸쪽 꽉 찬 155km의 포심 패스트볼을 팔로우 스로만으로 담장을 넘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홈런이 나올 때 가장 먼저 아는 건 타자가 아니라 투수다. 던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아 이건 x됐다.’라고 느낀다고들 말한다.

‘……x발.’

조영우는 자신이 만루 홈런을 맞았다는 걸 투구하자마자 깨닫고서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려 전광판 하단을 직격하는 큼지막한 만루 홈런을 바라보다, 교체를 위해 올라오는 투수코치의 모습이 보이자 신경질적으로 글러브를 내팽개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역전의 명수, 갯벌 야구.

2018시즌 대전 펠컨스의 상징이 될 야구가 팬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그즈음.

원정 팀 더그아웃 앞에서는 한 명의 좌완투수가 캐치볼을 하며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공격이 길어지며 살짝 식어버린 몸을 다시금 예열했다.

이어진 9회 말.

지난 시즌 강태영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으며 맛이 가 버렸던 투수는, 9구를 던져 세 타자를 모두 땅볼로 잡아낸 뒤 경기를 끝내버렸다.

그리고 그 투수는, 팀이 시즌 첫 승을 거두는 날 승리투수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제 9승 남았다. 쉽지? 이대로 전반기에 10승 채우고 새 구종 배우고 메이저리그로 꺼져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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