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4화 (4/155)

4화 시작은 패전투수, 하지만 (1)

한 투수가 있다.

데뷔 시즌 19승 3패 방어율 2.11 215탈삼진을 기록하며 신인왕과 MVP와 골든글러브를 석권한 KBO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투수, 메이저리그 진출 전까지 일곱 시즌 동안 117승을 거두며 네 차례나 MVP를 석권한 투수, 그리고 탈삼진왕을 무려 여섯 번이나 차지한 탈삼진 머신.

괴물투수 여환진.

그리고 여기, 한 타자가 있다.

데뷔 시즌 타율 2할 8푼 8리 31홈런 121타점을 기록하며 신인왕과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이 괴물 타자는, 일곱 시즌 동안 통산 타율 3할 1푼 3리 299홈런 927타점을 기록하며 문자 그대로 리그를 폭격했다.

심지어 발까지 빨라 통산 도루가 151개를 기록했으며, 하다하다 어깨마저 좋아 우익수로서 무려 다섯 시즌 연속 보살 1위에 올랐다.

KBO리그에서 진정한 5툴 플레이어를 꼽으라면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망설임 없이 1순위로 언급하는 선수.

괴물타자 강태영.

KBO를 대표하는 두 선수를 동시에 보유한 팀이, 10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대전 펠컨스는 그런 팀이었다.

비록 강태영이 2011년에 데뷔하고 여환진이 2014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며 함께 뛴 건 3년에 불과했지만, 여환진이 21승을 올리고 강태영이 50홈런을 쳐도 대전 펠컨스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10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대전 펠컨스는 팬들로부터 야구계의 오래된 격언을 허구한 날 떠올리게 하는 팀이었다.

야구는 혼자서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여환진이 아무리 잘 던져도 팀 평균자책점은 만년 하위권이었고, 강태영이 3연타석 홈런을 때려도 혼자 8타점을 올리고 10:8로 패배하는 게 대전 펠컨스였다.

그런 팀의 12대 감독으로 선임된 안용석 감독은 마무리캠프 멤버를 꾸리며 고민에 빠졌다.

구단에서 그에게 원하는 건 확실했다.

서울 레오파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화수분 야구를 대전 펠컨스에도 안착시키고, 패배 의식을 확실하게 걷어내는 거였다.

물론 말이 쉽지 결코 쉽지는 않았다.

3년.

당초 안용석 감독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3년이 걸릴 거라고 봤다. 그만큼 팀의 체질 개선을 하는 게 어렵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마무리 캠프 이후 생각이 달라졌다.

한 시즌만 리빌딩을 하고 나면 2019시즌에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전임 감독이 FA와 트레이드로 베테랑을 영입하며 유망주들을 다수 내줬음에도, 생각보다 괜찮은 재목들이 많이 있었다.

하긴.

10년 동안 하위권을 전전하고 꼴지도 네 번이나 했는데, 아무리 내줬어도 유망주가 남아 있지 않은 게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선수가 없는 게 아니라 안 썼을 뿐이다.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고 잘만 키운다면, 2019시즌에는 충분히 포스트 시즌 진출을 놓고 순위 싸움을 할 힘이 생기리라.

그중에는 서울 레오파즈에서 지켜볼 때부터 계속 안타까웠던 유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2017시즌 초.

유현은 슬라이더를 장착하며 괜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연장전 12회 말 강태영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은 뒤로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슬라이더의 제구는 완벽했다.

그저 강태영이 괴물이라서, 범주를 벗어난 미친 타자라서 쳐낸 것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예민하다.

사소한 차이로 인해 완봉승이 하는 괴물이 될 수도, 0.2이닝 9실점을 하는 배팅 머신이 되기도 하는 게 투수다.

2017년과 2018년, 유현에게 찾아온 두 번의 변화 또한 사소한 거였다.

2017년의 유현은 완벽하게 제구된 슬라이더가 맞은 이후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에는 시즌 대부분을 2군에서 보내다가 방출됐다.

2018년의 유현은 몇몇 문제점들을 고치고 새로운 구종 하나를 장착한 게 전부다.

그 사소한 변화가 유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투수로 만들었다.

대전 펠컨스는 시범경기에서 3승 3패를 거뒀다.

유현은 이 중 세 경기에서 4이닝을 투구하며 두 개의 피안타만 허용했을 뿐, 무실점으로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줬다.

특이한 건 삼진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과, 12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투구 수가 고작 35개에 그쳤다는 것, 그리고 플라이볼이 단 하나도 없었다는 거였다.

다시 말해서 12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땅볼을 유도해서 잡아낸 거였다.

이 특이한 기록이 나온 이유는 명확했다.

투심 패스트볼.

유현이 새로 장착한 무기를 타자들이 제대로 공략을 못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범경기에서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평균 152km가 나왔고, 투심 패스트볼의 구속은 평균 150km가 나왔다.

구속 차이는 고작 2km.

구위가 워낙 좋아 살짝 뜨는 것처럼 보이고 체감 구속이 유독 빠른 포심 패스트볼과, 싱커를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난 무브먼트를 지닌 투심 패스트볼의 시너지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삼진을 잡아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타자들로부터 확실하게 범타를 유도했으니까.

핵심은 플라이볼이 없었다는 것이다.

허용한 안타 두 개도 느슨한 수비와 맞물린 내야 안타였다. 공이 내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 유현의 투구 스타일이 통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몇몇 타자들은 투심 패스트볼에 땅볼을 치고 아웃되면서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저게 무슨 투심 패스트볼이냐고, 저런 건 그렉 매덕스나 던지는 거 아니었냐고, 저런 무지막지한 걸 던지는 건 사기라고 말이다.

과정이 어쨌건 유현은 4이닝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시범경기를 끝마쳤다.

덕분에 안용석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선수가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게 한 뒤, 시간을 두고 함께 문제점을 해결하는 스타일의 지도 방식을 고수해 왔다. 본인이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면 백날 가르쳐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현 또한 그렇게 가르칠 생각이었다.

정만철 투수코치를 통해 원래의 투구폼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한 뒤, 세컨드 피치를 가다듬고 1군에 올려 불펜 요원으로 쓰려고 했다.

동정심이나 막연한 기대감 따위로 방출당한 유현을 데려온 게 아니었다.

최고 구속 153km의 좌완 파이어볼러.

2017시즌 초반의 모습만 다시 보여 줄 수 있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

헌데 유현은 스스로 투구폼을 변경한 걸로도 모자라, 어디서 괴물 같은 새 무기까지 들고 왔다.

그리고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했다.

시즌 전, 안용석 감독은 모든 선수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할 거라고 말했다.

유현에게는 기회를 부여했고, 그 기대에 보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유현은 합당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다만…….

‘시작은 추격이나 패전으로 해야겠지. 뭐, 시범경기에서 보여준 공을 계속 던질 수 있다면 4월 안에 자리를 꿰차겠지만 말이야.’

육성선수는 5월 1일 이후 정식선수로 전환이 가능하지만, 2018시즌을 기점으로 한 가지 규정이 추가됐다. 육성선수 중 팀의 사정에 따라 최대 3명까지 5월 1일 이전에도 정식선수 전환이 가능하단 규정이었다.

개막 사흘 전.

안용석 감독이 발표한 1군 엔트리에는 유현의 이름 또한 포함됐다. 그리고 이날, 육성선수로 계약했던 유현은 정식선수로 전환됐다.

2018시즌, 그의 연봉은 고작 5500만 원이었다.

* * *

-한턱 쏴! 한턱 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불화산 치킨이라는 걸 먹고 싶다! 클래식한 반반 무 많이도 좋다!

“오케이. 오피스텔 상가에 치킨집 있던데 올라가면서 사가면 되겠네.”

유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했다.

계약을 한 기념으로 구입한 500만 원 짜리 중고차를 2억 원 상당의 스포츠카인 것처럼 몰면서 정식 선수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정식 선수가 됐고 개막전 엔트리에도 합류했다.

땅의 정령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어려워 보이기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유현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기적을 마음껏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 얼른 개막했으면 좋겠다.”

-일단 개막하면 멘탈 관리부터 해야 될 걸?

“어째서?”

-내가 감독이라면 개막전부터 널 필승조로 쓰지는 않을 거거든. 추격조 아니면 패전조야.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땅의 정령이 한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범경기에서 불펜 중 가장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건 누가 보더라도 자신이었다. 필승조로 시즌을 시작할 수 없다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 시범경기에서 제법 잘 던지지 않았어?”

-잘 던졌지. 그럼에도 넌 추격조나 패전조로 시즌을 시작하게 될 거야. 네가 개막전부터 필승조면 형평성에 어긋나거든.

“형평성이라…….

-넌 시범경기에서 분명 잘했고 앞으로도 잘 할 거야. 하지만 스프링캠프 때부터 줄곧 노력하며 필승조 자리를 따낸 투수 중 한 명의 자리를 덥석 너에게 주면, 과연 다른 선수들이 좋아할까?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할까?

“아아.”

그제야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됐지만 머리로는 이해했다. 안용석 감독의 입장에서 자신을 추격조나 패전조로 기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공감했다.

원칙이 없는 팀은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안용석 감독은, 서울 레오파즈에서 투수코치와 수석코치를 거치며 고집스러울 정도로 원칙을 지키며 한국시리즈 2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이끌어 낸 경험이 있다.

이제 와서 원칙을 어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안용석 감독은 똥고집이라 생각될 정도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야. 네가 개막전에 필승조로 마운드에 오를 가능성? 0퍼센트야.

“뭐……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으면, 추격조나 패전조에 만족하면서 살 거야?

“아니. 어쩔 수 없이 날 중요한 자리에 기용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시즌 내내 추격조나 패전조로 기용하는 딜레마를 감독님께 안길 순 없잖아?”

-좋은 대답이었어. 80점 줄게.

유현은 각오를 다졌다.

추격조나 패전조로 시즌을 시작하는 게 문제라면, 맹활약을 펼쳐서 자신을 중요한 상황에 기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겠다고 말이다.

땅의 정령이 미소를 지었다.

유현과 함께 지낸 지난 한 달.

그는 기술적인 면 외에도 유현에게 야구 선수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조한 건, 바로 승부욕과 확실한 목표 의식이었다.

-항상 잊지 마. 네 목표는 홀드왕이나 시즌 MVP가 아니라, 사이영 상이라는 걸. KBO리그는 네 수준에 어울리지 않다는 걸 등판할 때마다 확실하게 보여 주란 말이야.

* * *

울산 베이스볼 파크.

잠실 베이스볼 파크에 이은 대한민국 두 번째 돔 구장에서, 대전 펠컨스와 울산 알바트로스가 개막 2연전을 치르게 됐다.

경기 전.

안용석 감독은 선수단과의 미팅을 통해 각자가 맡은 역할과 결정을 내린 이유를 말해 줬다.

땅의 정령이 예상한 대로 유현은 점수 차가 제법 벌어진 경기에서 등판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유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은 채 노래를 들으며 그라운드 위의 동료들을 응원했다.

더그아웃에 대부분의 전자기기는 반입 금지지만, 음악을 듣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일부 전자기기는 반입이 가능한 덕분이었다.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음악을 들으며 멘탈을 관리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 모습을 보며 차영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노래 듣는데 콧노래까지 흥얼거려? 좋은 노래야?”

“선배님도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줘 봐.”

유현은 이어폰의 나머지 한 쪽을 차영석에게 건넸다. 동시에 차영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만한 게…….

“너 혼자 들어라. 난 됐다.”

“이 노래 신나지 않습니까?”

“신나기는 하는데 내 취향은 아니다. 걸그룹 노래나 들을 줄 알았더니 무슨 이런 노래를 듣고 있냐? 나이에 안 어울리게끔.”

“전 이 노래가 제일 좋습니다. 신나잖습니까.”

아모르 댄스~

유현의 MP3에서는 SNS를 통해 특유의 중독성을 인정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끈 트로트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20대 후반이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선곡임은 분명했다.

-여러분! 여기 제정신이 아닌 투수가 있어요! 트로트를 들으면서 멘탈 관리를 해요!

땅의 정령이 놀리거나 말거나, 유현은 흥겨운 트로트로 멘탈 관리를 하며 경기를 지켜봤다.

6이닝 5피안타 1사사구 10탈삼진 2실점.

대전 펠컨스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된 세미 제이슨이 기록한 성적이었다.

2017년 후반기에 대체 선수로 계약해 6승 2패 방어율 3.55 91탈삼진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줬던 세미 제이슨은, 개막전에서 선발투수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내려갔다.

6회 말, 스코어는 4대2.

불펜이 2점 차를 지켜주면 개막전 승리를 가져갈 수 있는 상황에서, 대전 펠컨스 필승조의 소름 끼치는 방화가 시작됐다.

7회 말.

세 명의 투수는 투입했지만 7대4로 스코어가 뒤집히고 말았다. 필승조의 그 어떤 투수도 지난 해 팀 홈런 2위를 기록한 울산 알바트로스의 타선을 막아 내지 못했다.

1군 투수코치를 맡은 대전 펠컨스의 레전드 송현수의 고민이 깊어졌다.

이미 필승조를 세 명이나 쓴 상황에서 점수 차는 3점으로 벌어졌다.

어떤 투수를 기용해야 하는 걸까?

필승조 셋이 무너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실점을 하지 않기 위해, 그는 전화기를 잡고서 시범경기 내내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투수를 호명했다.

“현이 준비시켜 주세요.”

유현의 2018시즌 첫 등판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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