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기회 (3)
야구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 스포츠를, 땅의 정령은 확률 싸움으로 정의했다.
타자가 투수에게 안타를 칠 확률, 투수가 2스트라이크를 잡은 이후 삼진으로 아웃카운트를 늘릴 확률, 타자가 만루 상황에서 타점을 올릴 확률, 포수가 도루 저지를 해낼 확률 등.
야구에서 파생되는 대부분의 기록들은 확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감독들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략을 짠다. 오랜 시간 누적된 데이터는 높은 확률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투수가 실점을 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확실한 건 피안타율보다는 낮다는 거다. 애초에 피안타가 실점으로 모조리 연결되는 투수는 1군은커녕 2군에서조차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땅의 정령이 내린 미션은 야구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투수에게 있어 최고의 미덕은 자신이 마운드에 있는 동안 실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안타를 내주건 볼넷을 내주건 실점을 하지 않으면 된다.
주자를 출루시키면 실점을 할 확률이 발생하지만, 실점을 하지 않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유현이 새롭게 배운 구종은 설사 출루를 허용할지언정 실점을 허용하지 않기에는 제법 괜찮은 구종이기도 했다.
미션을 준 이후 땅의 정령은 더 이상 유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유현이 마운드에 올라오기 전 건네준 해바라기 씨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습관적으로 정수리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덕분에 유현은 투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컨디션 좋네. 구종에 상관없이 사인 내는 곳으로 알아서 던져. 어차피 뭘 던져도 한 번 ‘그 구종’을 보고 나면 타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져서 알아서 자폭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선배님.”
“긴장하지 말고. 긴장은 투수의 가장 큰 독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 긴장 같은 건 마누라한테 용돈 좀 올려 달라고 허락 받을 때나 하는 거야.”
사실 유현은 미션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미션보다는 자신의 투구에만 집중했고, 마운드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을 생각만을 하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물론 주는 걸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호투를 하면 보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리라 믿었다. 괜히 보상을 신경 쓰다가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유현이 상대해야 할 타순은 6번부터였다.
약속한 대로 차영석은 유현에게 코스에 대한 사인을 냈을 뿐 구종에 대한 사인을 내지 않았다. 어떤 구종을 던지건 유현의 공이 타자들에게 먹힐 거라는 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초구는 몸쪽으로 꽉 차는 포심 패스트볼.
움찔.
“스트라이크!”
타자는 당황했다.
분명 포심 패스트볼로 보였는데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순간 볼이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구속 또한 너무 빨라서 움찔하고야 말았다.
슬쩍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타자의 당혹스러움 두 배로 커졌다.
‘……147km? 고작 147km인데 이렇게 빠르다고? 잘못 측정한 거 아냐?’
147km.
느린 구속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빠른 구속도 아니다. 일본과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대만의 에이스급 투수들이 심심찮게 150km 이상을 던지니 제법 익숙한 구속이었다.
하지만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은 달랐다.
구속에 비해 체감구속이 더 빨랐다. 최소 5km는 더 빠른 것 같은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볼이 뜨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유현은 두 번째 투구를 준비했다.
이번에도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다만 몸쪽 높은 코스로 붙이려던 게 제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살짝 몰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타자는 2구 연속으로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을, 심지어 살짝 몰린 공을 놓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동시에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던 공이 급격한 변화를 시작했다. 몸쪽으로 거칠게 파고들면서 히팅 포인트를 흐려놓았다.
딱!
타격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격수는 자신의 앞으로 빠르게 굴러온 타구를 여유롭게 포구했고, 곧장 1루로 송구하며 3회 말의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만들어 냈다.
6구.
유현이 삼자범퇴로 3회 말을 마무리하기까지는 고작 6구면 충분했다.
그리고 세 개의 아웃카운트는 모두 유격수의 손을 통해 1루로 송구되며 만들어졌다.
* * *
정만찬 투수코치는 유현의 투구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베테랑 포수인 차영석이 호언장담을 한 만큼, 투구폼 변화의 효과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을지 궁금했다.
원래부터 정만찬 투수코치는 유현의 투구폼 변경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다만 투구폼에 익숙해지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거고, 빨라야 5월 전후로 1군에 올려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만약 투구폼 장착이 예상보다 빨리 됐다면?
그리고 차영석이 말한 대로 새 구종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본다면?
유현의 1군 콜업은 생각 이상으로 빨리 이뤄질 게 자명했다. 그리고 유현은 투구폼 변경 이후 첫 실전 등판에서 정만찬 투수코치의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줬다.
딱! 딱. 딱.
3회 말의 아웃카운트 세 개를 모두 유격수 앞 땅볼로 만들어낸 것이다.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살짝 몰리는 듯하다가 몸쪽으로 기가 막히게 파고드는 그 구종으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정만찬 투수코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감추지 못했다.
‘현이 저 녀석, 일부러 살짝 몰리게 던진 거야. 저 상황에서 스트라이크 하나를 내주면서 배트를 참을 타자는 거의 없으니까.’
유현은 확실한 목적 아래 투구를 했다.
초구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고 2구로 구속 차이가 거의 없는 패스트볼이 몰려서 들어온다면, 타자의 입장에서는 배트를 휘두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배트가 나오지 않으면 스트라이크가 하나 추가되고, 배트가 나오면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지 않아 안타가 되기 힘든 타구가 만들어진다. 들어오는 걸 알고 있어도 제대로 맞추기 힘들 정도로 무브먼트가 엄청났다.
더 큰 문제는…….
육안으로는 포심 패스트볼과 유현의 새 무기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전광판에 찍힌 2구의 구속은 146km, 초구 포심 패스트볼과의 차이는 고작 1km였다.
심지어 같은 폼으로 공을 던지다 보니 타자의 입장에서는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기 전에는 두 구종을 구분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4회 말.
정만찬 투수코치는 또다시 유현에게 마운드를 맡겼다. 5회 말에도 마운드에 선 대전 펠컨스의 투수는 역시나 유현이었다.
‘현이가 왕이롱을 어떻게 상대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괜찮겠지.’
* * *
투심 패스트볼.
유현이 땅의 정령으로부터 배운 새 무기의 위력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다.
보통 투심 패스트볼은 포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살짝 나지만, 무브먼트가 좋다 보니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범타를 유도하기에 최적화된 구종 중 하나다.
하지만…….
유현이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뭔가 달랐다.
무브먼트가 비정상적으로 뛰어나면서도 포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거의 없었다.
마구.
유현은 세 타자를 모두 유격수 땅볼로 잡아내며 자신이 배운 투심 패스트볼이 마구라고 생각했다.
삼진을 잡아내긴 힘들 수도 있다. 애초에 투심 패스트볼은 타자의 허를 찌르는 게 아니면 대부분 범타를 유도할 목적으로 투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건 27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잡아내야 경기가 끝나는 야구의 본질을 놓고 봤을 때,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이 지닌 가치는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다.
히팅 포인트에 제대로 맞지 않은 타구는 안타가 될 확률이 뚝 떨어지니까.
그리고 유현은, 5회 초 2사까지 8타자 연속 범타를 유도하며 자신이 새로 장착한 무기의 위력을 마음껏 뽐냈다.
-불펜이 준비하고 있는 걸 보니까 저 타자만 잡아내면 네 임무는 오늘 끝인 것 같아. 자. 드디어 퉁이 자이언츠의 보스 몬스터께서 등장하셨다. 어떻게 잡아낼 거야?
왕이롱.
3년 연속 4할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홈런과 타점 1위까지 먹어치운 대만 최고의 스타.
2017년 월드 베이스볼 토너먼트 대한민국 대표팀과의 예선전에서 홀로 3홈런 7타점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당시 경기는 대한민국 대표팀이 13대 9로 승리했지만, 왕이롱은 결승전까지 도합 10홈런 22타점을 기록하며 대만 대표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018시즌이 종료되면 일본 진출을 할 예정이기도 했다.
대만이라는 국적을 제외하고 보면 분명 훌륭한 타자다. 이전 타자들과 달리 땅의 정령이 경고를 하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처음 만나는 강타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까?
유현은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토미존 서저리 이후로는 방법을 알아도 실행할 능력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은 다르다.
땅의 정령과의 만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적으로 인해 유현은 타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이제, 그 능력을 이용해 괴물을 잡을 차례였다.
초구는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 볼 판정을 받았고, 2구는 몸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딱!
왕이롱은 포심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고 거침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제대로 당겨 쳤다고 생각했지만 히팅 포인트에 정확히 맞지 않으면서 큼지막한 파울이 되고 말았다.
3구는 다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 왕이롱은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고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동시에 왕이롱이 배트를 짧게 쥐었다.
2스트라이크 이후엔 정확한 컨택을 통한 출루를 최우선으로 삼는 왕이롱은,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공을 모두 커트할 생각이었다.
4구째.
몸쪽으로 깊게 들어오는 공에 왕이롱은 움찔하면서 살짝 몸을 옆으로 뺐다. 타자로서 지극히 본능적인 반응이었고, 누가 봐도 볼 판정을 받을 만한 궤적이었으니까.
뭔가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건 공이 스트라이크 존 코앞에서 바깥쪽으로 급격하게 흘러나가기 시작한 걸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였다.
반응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상황.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유현은 왕이롱에게 루킹 삼진을 잡아내면서 5회 또한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왕이롱은 한참 동안이나 포수 미트와 유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무슨 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가…… 어디서 저런 괴물이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보통 투심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 근처에서 살짝 변화가 시작된다. 이 미묘한 차이로 인해 타자들이 정타를 만들어 내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싱커라고 생각될 정도로 변화가 심했다. 심지어 포심 패스트볼과 비교했을 때 투구폼과 구속에서 차이가 없다시피 하니 육안으로 구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물론 방금 전 투구는 위험한 승부수였다.
루킹 삼진을 잡긴 했지만 어쨌거나 살짝 몰린 공이고, 타자가 투심 패스트볼을 노리고 들어왔다면 장타를 허용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유현은 망설이지 않고 투구했다. 몸쪽으로 바짝 붙인 공에 타자가 움찔한 채 반응하지 못할 걸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배짱과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투구였다.
“나이스 피칭. 마지막 공 죽였다. 그렇게 몸쪽으로 바짝 붙여 들어오다가 꺾이면 우타자 입장에서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지.”
“선배님 덕분에 편하게 투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날 유현의 투구는 왕이롱을 상대하는 걸로 마무리가 됐다. 연습경기이니만큼 보다 많은 투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 6회부터는 다른 투수에게 마운드를 넘겨야 했다.
결과적으로 유현은 3이닝 0피안타 무사사구 1탈삼진 무실점의 완벽 피칭으로 퉁이 자이언츠의 타자들을 압도했다.
-마지막의 루킹 삼진 아주 좋았어. 투심 패스트볼이라고 해서 삼진을 못 잡으라는 법은 없지. 가르친 보람이 있는데? 옛다, 보상.
[축하합니다! 미션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 땅의 정령님의 축복이 부여됩니다! 부상 확률이 현저히 감소합니다! 체력 회복 속도가 2배로 증가합니다! 땅볼 확률이 2배로 증가합니다!]
그리고 미션에 성공했다.
일주일 후.
유현은 대전 펠컨스의 시범경기 엔트리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