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2화 (2/155)

2화 기회 (2)

땅의 정령은 야구 이론의 대가였다.

야구와 관련해서는 모르는 게 없었다.

KBO와 메이저리그 주요 선수들에 대한 장단점을 모조리 다 파악하고 있었고, 그 주요 선수 중에는 유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피지컬 좋은 좌완 파이어볼러.

하지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그저 그런 투수에게 변화를 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현은 자신의 변화를 또렷하게 느꼈다.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잘못된 투구를 했는지, 어째서 토미존 서저리 이후 부진의 부진을 거듭했는지 알 수 있었다.

타고난 신체 조건을 제대로 활용하지를 못하는데 좋은 투구를 할 턱이 있나.

땅의 정령이 유현에게 가르쳐 준 투구 폼은 그가 토미존 서저리를 받기 전의 투구폼과 유사했다. 다만 단점을 몇 가지 보완한 상태였다.

새 투구폼이 유현의 몸에 최적화된 투구폼이라는 땅의 정령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데뷔 시즌의 투구폼과 유사하지만 단점을 보완한 그 투구폼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익숙해졌다.

새 구종도 생각보다 빨리 적응됐다.

던지다 보니 땅의 정령이 포심 패스트볼과 같은 투구폼으로 던지라고 한 이유를 본능적으로 자각했다. 똑같은 폼으로 던져야지 위력이 극대화되는 구종임을 확신했다.

유현은 매일같이 가장 먼저 구장에 모습을 드러내, 가장 늦게 퇴근하는 선수가 됐다.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질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수가 유현과 함께 늦은 저녁까지 구장에 남아 연습에 매진했다.

포수 차영석.

데뷔 18년 차인 그는 통산 타율 2할 9푼 7리 1711안타 225홈런 1051 타점을 기록한 강타자임과 동시에 수비에서도 완성형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 포수였다.

2년 전까지는 말이다.

늦은 나이에 찾아온 햄스트링 부상으로 부진을 거듭하다 팀의 리빌딩 기조에 따라 신예 포수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인천 그리핀스에서 은퇴 후 코치 연수를 제안했지만 차영석이 거절했다.

백업 포수여도 괜찮았다.

단 한 경기라도 더 포수 마스크를 쓰고 싶었고, 아직은 젊은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실력으로 밀리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타격이 조금 부진하더라도 그에게는 포수로서 18년간 쌓아 온 엄청난 경험이 존재하니까.

결국 차영석은 신예 포수들에게 경험치를 나눠주길 바라는 대전 펠컨스의 선택을 받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데뷔 이후 줄곧 몸담아 온 인천 그리핀스를 떠났다.

그 동안 쌓아온 경험 덕분일까?

차영석은 늦은 밤까지 수건을 손에 쥔 채 쉐도우 피칭을 하는 유현의 변화를 대번에 눈치챘다.

“현아. 너 투구폼이 좀 바뀐 것 같다?”

“아, 네. 영상 자료를 보면서 좋았을 때의 투구폼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흐음. 간만에 내가 공 한번 받아 줄까?”

“영광입니다, 선배님.”

“영광은 무슨. 기다려 봐. 장비 차고 올게.”

차영석이 포수 장비를 차러 간 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땅의 정령이 유현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좋은 기회야. 날 만나고 네가 어떻게 변했는지 차영석에게 확실하게 보여줘. 그럼 투수 콜업 1순위는 네가 될 거야.

“연습경기도 아니고 불펜 피칭인데?”

-차영석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야. 2군 투수코치가 투수의 컨디션을 점검할 때 가장 먼저 의견을 묻는 게 누군지 알아? 바로 차영석이야. 볼 배합을 잘하는 포수가 되기 위해선 투수의 컨디션을 정확히 파악해야 돼. 차영석은 그게 되는 포수라서 성공한 거고.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불펜 피칭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게 투수코치님 귀에 어떻게든지 들어가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거네.”

-빙고. 너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는 투수코치의 생각을 대번에 바꿀 기회란 말씀.

대전 펠컨스의 레전드 중 한 명이자 2군 투수코치인 정만찬은 유현이 땅의 정령을 만난 다음 날 곧장 그의 변화를 눈치챘다.

변화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유현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투구폼을 바꾸는 게 하루이틀 사이에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걸 알기에, 좀 더 시간을 두고 유현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따라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고 스프링캠프가 끝나기 전에 최종 점검을 하고 구종 추가를 시도해 보자는 정도에서 유현과의 대화는 매듭지어졌다.

물론 유현은 시간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투구폼을 바꾼 이후 확신이 생겼다. 구종 추가라면 진즉 했고, 지금 당장이라도 1군 무대에서 자신의 공이 타자들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 말이다.

시범경기 중 1군에 올라가서 호투를 통해 개막전 엔트리에 합류한다, 그리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엔트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것이 유현과 땅의 정령의 목표였다.

차영석의 눈에 들면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고 하니, 유현은 투구를 하기 전부터 실전이라 생각을 하며 의욕을 끌어 올렸다.

“가볍게 포심 몇 개 던져봐.”

“알겠습니다, 선배님.”

팡! 팡! 팡!

유현이 던진 공이 차영석의 오른손에 쥐어진 미트에 시원시원하게 박혔다. 미트를 가져다 댄 곳에 정확히 공이 들어올 정도로 제구도 좋았다.

연신 나이스를 외치던 차영석은 투구를 끝마친 유현을 바라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이야. 공 죽이는데? 묵직하고 제구도 잘 되고, 구속도 벌써부터 제법 나오는 것 같아. 투구폼을 변경한 게 효과가 있나봐?”

“제구가 더 잘 되는 것 같고, 제가 봐도 공이 전보다 더 묵직한 느낌입니다.”

“현이 너, 포심 패스트볼을 받쳐줄 변화구 하나만 있으면 1군 올라갈 수 있겠다.”

“으음. 안 그래도 연습 중인 구종이 있는데, 선배님께서 한번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아! 한번 던져 봐! 너클볼을 던지더라도 완벽하게 받아 줄 테니까.”

“네. 그럼 던지겠습니다.”

유현은 아직까지 정만찬 투수코치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새로운 무기를 차영석에게 처음으로 보여 주기로 결정했다.

공을 건네받는 유현에게 땅의 정령이 속삭였다.

-내일 대만 팀과의 연습 경기지? 신무기를 공개하기엔 딱 좋은 무대야.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내일 선발투수가 3이닝도 못 채우고 내려오면서 불펜 투수들한테 기회가 주어질 거야. 그리고 넌 두 번째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가 되겠지.

유현은 대답도 제스처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와인드업을 했다.

부드럽고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힘을 실어 미트만을 바라보고 투구했다.

유현의 손에서 공이 떠났다.

포심 패스트볼과 똑같은 궤적으로 날아가던 공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며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차영석이 내밀어놓은 미트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팡!

차영석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글러브와 유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유현에게로 다가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대화를 나눴다.

“현아. 방금 전 그거 혹시…….”

“생각하시는 그 구종이 맞을 겁니다. 어떤 것 같습니까? 괜찮습니까?”

“너,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겠다.”

“엔트리야 거의 매년 들었었죠. 그리고 매년 불 지르고 2군으로 쫓겨났고요.”

“올해는 네가 아니라 널 상대하는 타자들이 죽 쑤다가 2군으로 쫓겨날 것 같은데?”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무려 18년 차 포수다.

포수에게는 경험이 곧 최고의 자산이다. 타격은 오락가락할 수 있지만 포수로서 쌓아온 경험치는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니까.

타격 스탯이 뛰어나서 그렇지 차영석은 수비형 포수에 가깝다. 타격도 타격이지만 포수로서의 본분, 수비와 투수 리드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이기에 확실히 알아봤다.

이전까지의 유현과 지금의 유현이 전혀 다른 투수라는 것을.

“내가 장담하는데, 올 시즌에는 2군으로 내려올 일 절대 없을 거다. 네가 2군으로 내려가는 순간 내 이번 시즌 연봉 전부 다 너한테 준다.”

그제야 유현은 미소를 지었다.

차영석의 확신에 찬 말 덕분에 유현 또한 확신이 견고해졌다. 땅의 정령과의 만남이, 자신의 변화가 결코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는 확신 말이다.

* * *

3월 4일, 타이난 시립 야구장.

대전 펠컨스 2군과 대만 퉁이 자이언츠와의 연습 경기 2연전 중 첫 경기가 열리는 날.

연습 경기를 앞두고 몸을 푸는 대전 펠컨스 2군 선수들의 각오는 남달랐다. 상당수의 선수들이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스프링캠프가 시작하기 전.

안용석 감독은 일찌감치 마무리투수로 낙점한 정우연 외엔 붙박이 주전은 없을 거라며 무한 경쟁 체제를 예고했다.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패배 의식에 물든 선수단의 체질 개선을 위한 선택이었다.

현재 2군에 있는 선수들은 마무리캠프, 그리고 스프링캠프에서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이들이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다.

시범경기를 치르다 보면 낙마하는 선수가 있길 마련이고, 해당 선수의 공백은 2군 선수들로 채우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시범경기까지는 이제 고작 열흘 남았다.

퉁이 자이언츠와의 연습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준 선수에게 우선적으로 1군 콜업의 기회가 주어질 건 당연했다.

잘해야 한다.

잘해서 반드시 1군에 올라갈 거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그 순간, 예상 외로 유현은 여유로웠다.

오직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땅의 정령에게 몰래몰래 해바라기 씨를 건네며 대화를 나눴다.

‘맛있어?’

-맛있지만 다음부터는 해바라기 씨 모양의 초콜릿 제품도 섞어 주면 좋겠어.

‘그건 야구장에 가지고 오기 좀 그렇잖아. 밖에서는 원하는 거 다 사줄 테니까 참아 줘.’

-흥. 오늘은 망고 빙수에 랍스타가 들어간 뿌빠퐁커리가 먹고 싶다! 후식은 사탕수수 주스!

‘그래그래. 너 원하는 거 다 먹어.’

땅의 정령과의 대화에서 유현에게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1군 콜업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선발투수로 내정된 정민수가 마운드에 올라 연습 투구를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땅의 정령이 혀를 찼다.

-쯧쯧. 몸이 굳어 버릴 정도로 과하게 긴장했는데? 쟤 오늘은 글러먹었다.

‘토미존 서저리 받고 작년 한 해 통째로 날렸거든. 스프링캠프에서는 컨디션이 안 올라와서 나랑 같이 낙마했고. 사실상 오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면 시범경기 중에 콜업은 물 건너가는 거니까 긴장할 만도 하지.’

-그래서 너도 긴장했어?

‘긴장해야 되는 거였어?’

-1군 콜업의 갈림길에 서 있는데 어느 정도는 긴장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난 원래 긴장을 잘 안 하는 성격이라.’

-다행이네. 새가슴을 고치는 건 그 어떤 이론으로도 불가능하거든.

기량은 가르쳐서 늘릴 수 있지만, 강심장은 타고나는 것이다. 누가 가르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현은 축복받은 투수였다.

자신의 기량과 상관없이 마운드에서 전력을 다 할 수 있는 심장을 지녔으니까.

땅의 정령이 예상한 대로 선발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른 정민수는 2회까지 4피안타 4사사구 6실점을 허용한 끝에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최고 구속은 148km로 나쁘지 않았지만 제구가 잡히지 않아 고전하는 모양새였다.

정민수가 당초 예정됐던 5회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가자, 코칭스태프는 다음으로 마운드에 설 투수를 두고서 고민에 빠졌다.

“1군에서 컨디션 좋은 투수들 위주로 체크를 부탁하더군. 필승조들의 컨디션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오지 않아서 고민이 많은 모양이야.”

“오늘과 내일, 호투를 한 투수가 우선적으로 시범경기에 합류하겠군요.”

“그렇지. 영식아. 네가 봤을 때 가장 컨디션이 좋은 투수가 누구였냐?”

가장 컨디션이 좋은 투수.

차영식은 질문을 받자마자 한 투수를 떠올렸다.

“현이가 컨디션이 좋았습니다.”

“유현? 흐음. 투구폼을 변경하면서 좋아지고 있지만 변화구 장착이 시급해서…… 우선적으로 기회를 줘야 할 이유는 있고?”

“이틀 전에 공을 받아줬는데 전과는 달랐습니다. 포심의 구위와 제구 모두 지난 연습경기 때보다 좋았고, 새 구종을 장착했습니다.”

“새 구종?”

“네. 제 눈으로 봤을 때는, 1군에서 확실히 먹힐 만한 구종이었습니다.”

“흐음…….”

무려 18년 차 포수다.

기량이 쇠퇴했을지언정 경험과 안목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때로는 투수코치인 자신보다 더 투수들의 컨디션을 냉정하게 파악하기도 했다.

고민하던 정만찬 투수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이를 준비시키도록 하지.”

* * *

3회 초.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유현의 허벅지에서 머리 위로 자리를 옮긴 땅의 정령이 연습 투구를 하는 내내 속삭였다.

-네 목표가 뭐라고? 탈삼진왕? 다승왕? 세이브왕? 방어율왕? 아니면 골드글러브나 MVP?

‘아니. 내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 타자가 홈 베이스를 밟지 못하게 하는 것.’

-제대로 알고 있네. 좋아. 오늘 등판을 무실점으로 끝마친다면, 너에게 선물을 줄게.

‘선물?’

-응. 완전 좋은 선물. 내가 설마 야구 가지고 입이나 털면서 맛있는 거 얻어먹으려고 너랑 계약했겠어?

[긴급 미션! 오늘 경기에서 이닝과 상관없이 마운드에 올라가 있는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시길 바랍니다!]

[미션에 성공할 경우 3년 동안 땅의 정령님의 축복이 부여됩니다! 부상 확률이 현저히 감소합니다. 체력 회복 속도가 2배로 증가합니다. 땅볼 확률이 2배로 증가합니다.]

-게임을 시작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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