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화 (1/155)

1화 기회 (1)

[서울 레오파즈, 유현 포함 4인 보호선수 명단 제외]

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광주 앨리펀츠가 통산 11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은 다음 날, 대전 펠컨스가 2017시즌 준우승 팀인 서울 레오파즈의 수석코치이자 펠컨스타디움에서 세 번째로 영구결번이 된 안용석을 12대 감독으로 선임하던 그날.

투수 유현은 서울 레오파즈에서 방출됐다. 이로써 프로 팀에서의 다섯 번째 방출이었다.

은퇴를 해야 하나.

난 정말 야구에 재능이 없는 걸까.

그런 그에게 대전 펠컨스의 12대 감독으로 부임한 안용석 감독이 손을 내밀었다.

유현은 안용석 감독의 손을 잡았다.

부산 유니콘스와 광주 앨리펀츠에서도 현을 영입하기를 원했지만, 유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친정팀 대전 펠컨스행을 결정했다.

이유는 단 하나.

데뷔 시즌, 당시 투수코치로 있던 안용석 감독과 함께 하면서 41경기 6승 4패 9홀드 3세이브 방어율 2.51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한 좋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데뷔 시즌에 31홈런 121타점을 올린 괴물 고졸 루키의 등장으로 신인왕 투표에서 2위에 머물러야 했지만, 당시 유현은 분명 리그에서 손꼽히는 불펜 투수였다.

물론 그 다음 해에 새 감독이 부임하면서 안용석 감독은 투수코치직을 내려놓고서 LA 다저스로 연수를 떠났고, 유현은 토미존 서저리를 받은 뒤 그저 그런 투수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데뷔 시즌은 유현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성기였다. 안용석 감독과 함께 다시 한 번 그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절치부심했다.

어느덧 데뷔 8년 차.

더 이상 물러날 곳도, 물러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자진해서 마무리 캠프에 참가해서 신인들 사이에 뒤섞여 구슬땀을 흘렸다.

목표는 두 가지였다.

데뷔 시즌의 투구폼을 되찾는 것, 그리고 최고 구속 153km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을 받쳐줄 세컨드 피치를 찾는 것.

데뷔 시즌 유현의 세컨드 피치는 커브였다.

좌완 파이어볼러가 던지는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의 조합은 타자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충분한 무기였다.

하지만 토미존 서저리 이후, 유현의 커브는 무브먼트와 제구를 모두 잃고 말았다. 타자들을 속이고 타이밍을 뺏는 게 불가능해졌다.

이후 별의 별 구종을 다 배우면서 새로운 세컨드 피치를 찾으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투구폼을 바꾸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변화가 성공했다면 다섯 번이나 방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유현은 죽어라 노력했다. 일단은 노력을 인정받아 1군 스프링캠프 명단에 들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연습경기에서 부진을 거듭하던 유현은 결국 2군 캠프가 차려진 대만으로 향해야 했다.

대만 팀들과의 연습경기에서도 유현은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다. 구위도 제구도 무브먼트도, 포심 패스트볼이건 변화구건 할 거 없이 모조리 말을 듣지 않았다.

답답했다.

노력에 비해 성과가 따라오지 않는 게,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이번 기회마저도 놓친다면 자신의 야구 인생은 끝이란 걸 알았으니까.

구단에서 자신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늦은 시간까지도 남아 전성기 시절의 투구 동작을 보며 연습도 하고, 불펜에서 홀로 연습을 하며 새로운 변화구 장착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스프링캠프 막바지까지 1군에서 유현을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야. 애리조나에서부터 계속 지켜봤는데 너 진짜 못 던진다. 구속만 빠르지 아무것도 없잖아. 심지어 구속도 빠르기만 하지 구위와 무브먼트도 별로고, 제구가 잘 잡힌 것도 아니고. 그 정도면 그냥 153km짜리 배팅볼인데? 그러니까 네가 2군에 있는 거야.

늦은 저녁, 불펜에서 홀로 연습에 매진하던 유현은 환청을 들었다.

그 순간 유현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너무 야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미쳐 버렸거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이 환청으로 이어졌거나.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게다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슬라이더를 던질 때와 커브를 던질 때, 저마다 폼이 달라서 뭘 던질지 티가 너무 나. 그러니까 변화구를 던졌다 하면 난타를 당하지. 뭘 던질지 뻔히 보이는 밋밋한 변화구 못 치면 그게 프로야?

“……보양식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나. 아까부터 자꾸 환청이 들리네.”

-날 귀신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큰맘 먹고 말을 건 이 몸한테 환청이라니!

“여기에 나밖에 없는데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그게 환청이지.”

-여기 있잖아! 난 아까부터 계속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어! 네가 안 쳐다본 거지!

“여기가 어딘데?”

-고개 숙이고 오른쪽으로 45도!

유현은 환청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보였다.

고개를 바짝 든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새하얀 햄스터 한 마리가 말이다.

“……네가 나한테 말을 건 거야?”

-그럼 여기에 나 말고 누가 있어?

“햄스터가 말을 하다니, 신기하네. 음. 아닌가? 이건 말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리는 느낌인데, 텔레파시라고 해야 하나?”

-햄스터라니! 이 몸은 땅의 정령이라고!

햄스터가 아니라 땅의 정령이란다.

유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애초에 햄스터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신병원에 가봐야 하나.

하지만.

유현은 몇 분 후 눈앞에 있는 햄스터가 땅의 정령이란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땅이 제멋대로 솟구쳐 올랐다가 사라지기를 수차례 반복하는 걸 두 눈으로 봤으니까.

“……정말 땅의 정령이라고?”

-그렇다니까!

“근데 땅의 정령이 왜 대만에 있어? 그것도 이 야밤에,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 있는데.”

-공 못 던지는 허접한 야구선수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게 내 취미거든.

“악취미네. 몰래 구경하는 게 취미인 것 치고는 너무 당당한 거 아냐.”

-구경만 하기엔 너무 답답해서 말이야. 그 좋은 피지컬을 가지고도 그렇게 지지리도 못 던질 수 있다는 게 용하다. 너 바보지? 솔직히 말해 봐. 아이큐 한 자릿수 아냐?

“야. 말이 좀 심한 거 아…….”

-1군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불 지르다가 2군으로 쫓겨났는데, 여기서도 못하니까 불안해 미칠 것 같지? 이러다가 방출될까 봐? 걱정하지 마. 지금 네 실력으로는 1군에서 기회를 잡아도 대전 역사상 최악의 방화범이 될 테니까 말이야. 어쩌면 한 시즌 풀로 소화하면서 방어율 무한대를 기록할지도 몰라. 말 나온 김에 도전해보는 건 어때? 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을 대기록을 세우고 은퇴할 수 있을 거야.

“…….”

유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과장되긴 했지만 땅의 정령이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스프링캠프를 1군에서 시작했지만 2군으로 밀려났고, 2군에서도 영 부진한 모습한 보여주고 있는 게 현 상황이다.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2군에서 쭉 눌러 앉아 있다가 방출되거나, 1군에 올라가더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기분은 나쁜데 팩트라서 할 말이 없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지는 마. 다른 선수들과 달리 너에게는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으니까!

“그 행운이 설마 널 만난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넌 평생 운을 다 써서 오늘 이 기회를 잡은 거야. 어때? 나랑 계약하면 네 재능을 마지막으로 꽃피울 기회를 줄 수 있는데. 완전 솔깃하고 설레지 않아?

“별로…….”

유현은 땅의 정령의 말이 내키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햄스터가 땅의 정령이라는 건 증거를 봐서 납득했지만, 납득한 것과 계약을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솔직한 말로 뭘 믿고 계약을 하겠는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게 말처럼 쉬운 거라면 토미존 서저리 이후 몇 년 동안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을 거다.

-왜? 사기꾼 같아서 망설여져? 근데 솔직한 말로 넌 잃을 것도 없잖아. 이번 시즌도 말아먹으면 또 다시 방출될 건데, 그때도 또 다시 너에게 기회를 주는 구단이 있을까?

“그건 그렇긴 한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해봐. 난 너한테 엄청난 기회를 주려는 거야. 정 불안하면 체험판 한 번 돌려보고 계약하던가.

“체험판?”

-내가 시키는 대로 한 번만 던져 봐. 너에게 일어나게 될 기적을 맛보게 해줄게.

“흐음…… 좋아.”

유현은 땅의 정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스트라이드를 살짝 넓히고, 멈춤 동작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고, 릴리스 포인트를 최대한 끝까지 길게 끌고 간다는 느낌으로 던지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사소한 동작 수정을 거쳤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소한 것들을 고친다고 해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빡!

그물망을 파고든 야구공을 바라보는 유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느낌이 달랐다.

포수가 공을 받아주지 않아도, 타자가 타석에 서있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공이 살아 움직이는 걸 말이다.

토미존 서저리 이후 잃어버렸던 구위를 찾은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구위가 좋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현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확인한 땅의 정령은 그립 하나를 가르쳐줬다.

-포심 패스트볼과 똑같은 폼으로 던져. 명심해. 그립 외에는 완전히 똑같아야 해.

유현이 다시 한 번 투구를 했다.

느낌은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때와 비슷했다. 패스트볼은 패스트볼이지만…… 뭔가 달랐다.

새 투구폼과 새 구종.

땅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1군 무대에서 통할까?

유현이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결심을 굳힌 듯 주먹을 꽉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하자.”

-좋은 선택이야. 내가 너에게 사이영 상을 안겨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 * *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걸 꼬박꼬박 사줄 것, 내 정체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

계약을 대가로 땅의 정령이 요구한 건 세 가지였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솔직한 말로 지키지 않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 조건이었다.

“그게 전부야?”

-왜? 생각보다 별거 없어서 그래?

“어. 사이영 상 운운한 거 치고는 딱히 요구사항이 없어서 이게 제대로 된 계약인가 싶네.”

-허접 투수가 만렙이 되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내 즐거움 중 하나거든. 그리고 인간들의 먹거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고.

“뭐, 네가 좋다니까 상관은 없겠지.”

숙소로 들어가기 전.

유현은 야시장에 들려 몇몇 먹을거리를 샀다. 물론 음식을 고른 건 땅의 정령이었다.

유현과 함께 방을 쓰던 타자가 부상으로 인해 조기 귀국하면서, 졸지에 유현은 2인용 방을 혼자 쓰게 됐다.

덕분에 유현은 룸메이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땅의 정령과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땅의 정령의 먹성은 엄청났다.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 먹듯이 음식을 갉아먹는데, 그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선수들 중에서도 먹성이 좋은 편인 유현보다도 더 빠르고 더 많이 음식을 먹을 정도였다.

저 작은 햄스터가 자신보다 많은 음식을 먹는 걸 보니, 햄스터가 아니라 땅의 정령이라는 게 다시 한 번 실감이 됐다.

양껏 음식을 먹은 뒤 접시에 따라준 탄산음료를 흡입하며 땅의 정령이 본론을 꺼냈다.

-자. 그럼 이제 네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만 26살, 데뷔 8년 차인 만년 유망주를 어떻게 하면 야구 선수로서 성공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말이야. 유현. 넌 네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피지컬과 구속, 그리고 좌완이라는 것.”

-잘 알고 있네. 그럼 단점은?

“나머지 전부 다?”

-다행히 주제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네.

키 189, 몸무게 96kg, 최고 구속 153km에 이르는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 거기에 좌완이라는 게 유현의 가장 큰 장점이다.

문제는 그 외엔 죄다 단점이라는 것.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유현의 장점이 피지컬과 구속, 그리고 좌완이라는 것 외에 한두 개만 더 있었더라도 그의 커리어는 지금보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넌 변화구에 소질이 없어.

“인정해.”

-따라서 변화구는 포기할 거야. 백날 가르쳐도 일정 수준 이상 답이 안 나올 거거든.

“알겠어.”

-시범경기 전까지 네가 해야 할 건 세 가지야. 변화된 투구폼에 적응할 것, 내가 가르쳐 준 구종을 실전에 쓸 수 있도록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매일 아침마다 정화수 떠놓고 정성을 다해 비는 것.

“빌라고? 뭘 빌어?”

-시범경기 기간 동안 1군에 있는 누군가가 부진해서 2군으로 내려오기를.

“아, 맞다. 여긴…….”

-그래. 2군 캠프야. 네가 백날 잘해봐야 1군에서 누군가가 내려오지 않으면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곳, 너 같은 만년 유망주보다는 기량 확실한 베테랑이나 미래가 밝은 유망주한테 우선적으로 기회가 주어지는 곳.

유현은 다시 한 번 현실을 자각했다.

콜업 기회는 혼자서 잘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선수가 있어야 2군에서 누군가가 콜업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불과 이틀 전.

애리조나에서 네 명의 선수가 귀국했고, 대만에서 네 명의 선수가 애리조나에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그중 유현은 포함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땅의 정령을 만나 들떠있었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땅의 정령은 그런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앞발로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애리조나에서 보니까 불펜투수들 대부분 컨디션이 별로더라. 전임 감독이 팔꿈치를 갈아 버리려고 작정한 듯이 굴렸는데 컨디션이 멀쩡할 리가 없잖아? 분명 시범경기가 끝나기 전에 몇 차례 기회가 올 거야.

“난 그 몇 차례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될 테고.”

-그러기 위해선 시범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내가 가르쳐 준 투구폼과 구종을 어느 정도 네 것으로 만들어야만 해. 어렵진 않을 거야. 아까 가르쳐 준 투구폼은 네 몸에 최적화된 폼이거든.

“만약 못하면 어떻게 돼?”

-응. 2군에 있다가 방출당하면 돼. 떠먹여 주는데도 소화 못 시키는 투수한테 1군은 사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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