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출산 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빅터는 원래 있던 저택을 처분하고 하비의 저택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렸다. 어차피 매일같이 하비의 저택에 들락거렸기에 별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온전한 가족 형태를 이룬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증축을 해서 저택 규모도 키우고 별관도 여러 개 늘렸다.
총집사는 원래 그 집에 있던 집사 에반이 했고, 레나는 부집사의 위치에 아주 만족해했다. 할 일이 줄어 나스타와 함께 보낼 시간이 충분해져서였다.
리에 스터스는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밝고 영특한 소녀로 자랐다. 얼마나 똑 부러지고 말도 잘하는지 주변 사람들은 어딜 나가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리에의 칭찬만 했다.
특히 총집사 에반의 리에 사랑은 지독했다. 빅터가 누구 딸인지 모르겠다며 불평할 정도였다.
진과 벤, 나스타, 레나도 리에를 보기 위해 자주 본관에 들렀다.
“웃는 얼굴이 스터스 경과 닮았던데요.”
“참 다행입니다.”
빅터의 사용인들이 곤히 잠든 리에를 보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자 빅터가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끼어들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주인님은 웃을 때 섬뜩하다고요.”
겁을 상실한 나스타가 중얼거리고 빅터의 매서운 손길이 나스타의 귀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아프다며 야단이 난 나스타와 이를 말리는 벤의 소리가 꽤 컸는지 리에가 잠에서 깨어났다. 진이 서둘러 그들을 말렸다.
“아가씨가 깨셨는데요?”
세 사람의 활극을 본 리에가 방긋방긋 웃자 세 사람은 동시에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통통한 볼로 오물거리다 웃는 리에 스터스는 너무 치명적이었다. 심장이 부서질 것 같은 귀여움이었다.
리에 스터스는 하비를 닮은 또렷한 밤색 눈동자를 지녔고, 이목구비도 벌써부터 선명했다.
턱을 괴고 보던 나스타가 감동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웃는 모습이 스터스 경을 닮아…… 악!”
있는 힘껏 귀가 잡아당겨진 나스타가 눈물을 찔끔 흘리는 사이 하비가 외출에서 돌아왔다. 리에의 요람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용인들과 빅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나스타가 쪼르르 달려가 하비에게 한이 담긴 고자질을 한 덕에 다시 한번 참극이 벌어질 뻔한 것을 빼고는 오늘도 평화로운 저택이었다.
빅터가 무료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바깥을 보았다.
“너무 방 안에만 있으면 좋지 않으니까, 다 같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고.”
따뜻한 차를 음미하던 하비도 흘끗 바깥 창을 보았다. 창이 덜컹거릴 정도로 바람이 거세어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오늘은 날이 안 좋은데.”
탐탁지 않은 얼굴로 대꾸하자 빅터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아이 땐 바깥바람도 좀 쐬고 해야 하는 법이야. 고작 이 정도 바람으론 안 죽어.”
집사 에반도 하비의 편을 들며 끼어들었다.
“고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날씨입니까, 이게? 아가씨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쩌려고요!”
“하여간 다들 과보호라니까.”
빅터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하비는 어이 없다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두었다.
“제일 심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
“내가 언제? 난 리에를 강하게 키울 거야.”
하비는 기세등등한 빅터를 보며 소리 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어젯밤에도 리에가 잠깐 재채기 한 번 한 것 가지고 온 마을 의사를 죄 호출하고 요란을 피운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래도 제 딸을 저리 끔찍하게 아끼는 걸 보면 안심이 되었다. 출산 당시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빅터가 아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만 보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하비는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아기방은 따로 두었고, 두 사람은 수시로 방에 들어가 리에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차피 24시간 내내 번갈아가며 지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비와 빅터는 짧은 밤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리에의 방에 머물렀다.
하비는 장기간 휴가를 내고 오늘도 리에 스터스의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제법 익숙한 자세로 아기의 엉덩이를 받치며 안아 든 하비는 미소를 지으며 자는 리에를 지켜보았다. 흔들의자에 앉은 덕에 일정한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기분 좋은 듯 리에는 계속 소리 내어 웃었다.
허공으로 손을 뻗으며 ‘아우아우’ 소리를 내며 품 안에서 잘 놀던 리에 스터스는 어느새 곤히 잠들었다.
하비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뺨을 쓸어내리자 리에는 자면서도 우우 입술을 내밀다가 손을 꼭 잡았다. 손가락 몇 개가 덥석 잡혀서 리에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하비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잠결에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기특해서였다.
문득 집사의 과장 섞인 자랑으로, 리에가 벌써 숫자도 아는 것 같다는 허풍이 생각났다. 리에가 앞으로 천재 수학자가 되면 지원해 주시겠냐는 진지한 집사의 얼굴도.
‘뭐가 되어도 상관없지만.’
하비는 앞으로 리에가 무얼 하든 그저 건강하고 즐겁게만 살았으면 했다.
다행히 빅터와 그런 부분에서는 생각이 일치했다.
막 찬바람을 묻히고 들어온 빅터가 하비의 의견을 듣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던 것이다.
“당연히 리에가 되고 싶은 대로 되어야지. 뭘 하든 다 지원해 줄 거야.”
빅터는 자고 있는 리에를 흐뭇하게 보며 속삭였다.
“크면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줄 테니 건강하게 자라기만 해.”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리에와 하비를 번갈아 보던 빅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
“천재 수학자? 그놈은 왜 매번 생각하는 게 그 모양이지? 그리고 리에 진로를 왜 자기 멋대로 정해. 웃긴 놈이라니까.”
보나마나 우연히 숫자 모양 종이를 잘 섞었거나, 손가락질해서 얻어 걸린 것으로 온갖 망상을 했을 것이라며 빅터가 집사 에반을 비난했다.
“정작 리에가 관심 보이는 건 돈이라고.”
“아, 그랬지.”
하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에 스터스가 유독 눈독을 들이는 것은 금화나 반짝거리는 보석이었다.
리에의 미래를 즐거이 상상하며 빅터가 잠든 리에의 통통한 볼을 살짝 찔렀다. 리에는 잠깐 미간을 구기긴 했지만 하비의 손가락을 끌어안은 채 잘만 잤다.
“정말 커서 뭐가 될까?”
빅터의 중얼거림에 하비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사람은 잘 만났으면 좋겠군. 특히 반려자는 더 그래야지.”
“……그래. 사람 잘 만나는 게 중요하지.”
조금 뜸을 들인 뒤 흘러나온 빅터의 목소리는 웬일인지 자신감이 뚝 떨어져 있었다. 그의 녹안에 죄책감과 후회와 뜨끔함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먼저 씻고 오지. 기다려.”
하비는 힘이 없는 빅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자고 있는 리에에게 들으라는 듯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이왕이면 나를 닮아서 괜찮은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집사가 들으면 경악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하비가 자고 있는 리에를 사랑스럽게 보았다. 아직도 손가락을 소중하게 품 안에 쥐고 있는 리에는 아버지의 말을 들었는지 작게 꿈틀댔다.
* * *
리에 스터스가 한 번 웃으면 하비의 저택에는 몇 배의 웃음이 번져 나갔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는 사용인들이 번갈아가며 붙어서 혹여 다치지는 않을까 감시하기도 했다.
스터스가의 유일한 꼬마 아가씨, 리에 스터스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광적인 집착에 가까웠다.
가족끼리 거리로 외출이라도 하면 또 다른 진풍경이 벌어졌다. 하비 스터스와 빅터 베르텐 사이에 낀 작은 여자아이에게 길드 상인들이 앞다퉈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는 일도 있었다.
“리에 아가씨 덕에 저희가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좀 살 만합니다.”
“이 지역이 전국에서 길드 세율이 가장 저렴하다고요. 아가씨가 태어나신 이후로요.”
커다란 밤색 눈동자가 무슨 말이냐는 듯 빅터를 올려다보았다. 빅터는 우선 리에에게 환하게 웃어준 뒤, 곧장 사나운 기세로 상인들을 내쫓았다.
“리에한테 어려운 말 쓰지 마. 외출할 때 거머리처럼 들러붙지도 말고. 꺼져.”
그러고 나면 반드시 하비의 한숨과 함께 핀잔이 따라왔다.
“리에 앞에선 좋은 말만 쓰라고 했을 텐데.”
뜨끔한 얼굴로 빅터가 다른 곳을 보자 하비는 생각난 것을 덧붙였다.
“그리고 리에가 사달라고 하기 전에는 자꾸 사 주지 마. 버릇 안 좋아지니까.”
“그 정도는 사 줘도 괜찮아. 다들 가지고 있는 건데.”
느긋한 빅터의 대답에 하비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방 한가득 쌓여 있는 장난감을 ‘다들 가지고 있는 것’이라 표현하다니.
심지어 저번에는 리에에게 말을 사 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대대적으로 목장을 차리고, 목장을 차린 김에 경마 사업까지 확장해 버렸다.
하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말해봤자 저 철면피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임을 너무 잘 알았다. 대신 마지막으로 경고만 남겼다.
“적당히 해. 경은 손이 너무 커.”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어차피 다 못 쓰고 죽겠지만. 지금도 자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부는 중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듣기로 했으니까.
중간에서 두 아버지를 번갈아 보던 금발의 리에가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말놀이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해맑게 웃는 리에를 보자 빅터는 방금 전에 하비가 했던 경고를 잊고 말았다.
“리에, 드레스 사 줄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가게가 있는데 웨스턴 해협을 건너온 최고급 원단이…….”
“빅터 베르텐 경.”
이번엔 의복 사업에까지 손을 댈까 봐 염려된 하비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그 뒤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리에 스터스가 아카데미에 갈 나이가 되었다.
거대한 규모의 자금이 리에가 입학할 아카데미로 흘러들어 가고, 입학식 때는 사상 최대 규모의 화려한 파티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하비의 눈을 피해 잘도 일을 벌인 빅터는 한동안 하비와 같은 방을 쓰지 못해 울상이 되었다. 그것 빼고는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발에 밤색 눈동자를 한 귀여운 여자아이, 리에 스터스가 복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정신없어 보이는 광경에 머리를 깔끔히 넘긴 교습 선생이 잔소리를 했다. 예절을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학생들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오메가였다.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것들을 대행하는 자이기도 했다.
“리에 스터스!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러다 스터스 경에게 또 혼납니다?”
“헤헤. 빅터가 잘 말려주겠죠, 뭐.”
그때였다.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리에 스터스의 밀밭 같은 부드러운 머리칼을 잔뜩 흩뜨려 놓았다.
“내가 혼날 것도 많은데 네 것까지 어떻게 막아줘?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말은 그리해도 빅터의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리에는 까르르 웃으며 양팔을 가득 벌려 빅터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빅터는 자신이 이토록 팔불출이 될 줄 몰랐다. 리에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하비를 닮은 똑 부러진 밤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휠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음. 성격은 날 닮은 것 같지만.’
사실 지금도 리에의 문제 행동을 지적받아 아카데미에 불려온 것이었다. 상담이 필요하다는 교습 선생의 편지를 받고 온 빅터는 굳은 표정이었다.
하비보다 먼저 나타난 빅터를 보자 리에는 신이 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교습 선생을 쏘아보았다. 교습 선생도 빅터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스터스 경만 불렀는데 어찌……?’
빅터가 와봤자 제대로 된 훈육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하비에게만 편지를 보냈는데, 중간에 편지가 가로채인 모양이었다.
안 봐도 누구 짓인지는 뻔했다. 반들거리는 얼굴로 웃고 있는 저 얼굴만 화려한 독사 같은 남자겠지.
역시나 하비에게 보냈던 편지는 빅터의 손에 처참히 구겨져서 등장했다.
그를 보자마자 교습 선생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보기만 해도 현혹되는 아름다운 외모나 은은하고 강한 페로몬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다가도, 커다란 체격에 걸맞는 강인한 기운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빅터가 페로몬을 잘 갈무리해도 우성 알파 특유의 위압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빅터는 이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상인이었다. 그에겐 잘못 보였다간 이곳에서 발붙이고 살기도 힘들었다.
섬뜩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빅터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근데, 이번엔 무슨 일로 하비를 부른 거지? 설마 또 이드 카멜, 그놈과의 일 때문인가?”
체념한 듯 교습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방은 어찌 됐든 아이라도 귀족이다. 호칭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걸 보면 이미 제대로 된 훈육도 글렀다.
“외람됩니다만, 그렇습니다.”
“후우…….”
빅터가 깊게 한숨을 내쉬길래 교습 선생은 혹시나 대책이 나올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 빅터 베르텐 경에게서 정상적인 사과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빅터는 오히려 화가 난다는 듯 당당하게 교습 선생에게 따져대었다.
“이렇게 연약한 아이한테 맞고 다니는 그 되다 만 놈이 잘못된 거 아닌가? 그리고, 그놈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길래 평화주의자인 우리 꼬마 숙녀 리에가 주먹까지 썼겠냐고.”
‘연약한’과 ‘평화주의자’, ‘꼬마 숙녀’라는 말이 거듭될수록 교습 선생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지만 그녀는 곧장 수습했다. 프로다운 자세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빅터의 말에 더는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총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군. 내가 온다는 걸 분명 알렸는데.”
“초, 총장님이요?”
“약삭빠른 녀석. 벌써 도망갔나.”
명문 자제들만 다닌다는 헤르크스 아카데미는 빅터에게서 막대한 후원금을 받고 있었다. 아카데미 총장은 도박으로 돈을 많이 잃었고, 빅터는 그걸 메꿔주며 리에를 맡겼다. 사실상 헤르크스 아카데미의 재정을 움켜쥐고 총장까지 쥐락펴락하는 사람이 빅터 베르텐이었다.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긴 했지만 교습 선생은 그게 진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다.
하지만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지도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강한 교습 선생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했다.
“총장님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리에는 다른 학생을 때렸어요. 명백한 규율 위반입니다.”
빅터는 총장을 들먹이며 협박을 해도 강하게 나오는 교습 선생의 모습에 의외라는 듯 호기심을 보였고, 교습 선생은 간신히 본연의 얼굴로 돌아갔다.
빅터도 이전과 다르게 진지하게 태도를 바꾸더니 협상을 하는 듯한 사업가의 자세로 말했다.
“왜 때렸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줘야 할 것 아닌가. 리에가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때렸을 리가 없어.”
그러자 교습 선생도 난감한 듯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이…….”
리에는 든든한 아군을 만나 기세가 더욱 등등했다. 팔짱을 끼고 교습 선생에게 어디 더 말해보라는 듯 거만한 표정까지 지었다.
이드 카멜은 데릭 윈스턴 경과 마크 카멜 경의 아이였다.
데릭 윈스턴은 알파였지만 빅터에게서 마지막 남은 신약을 가져간 대가로 하비보다 앞서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알파로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가문에서 쫓겨난지라, 후계자 자리를 내놓긴 했지만 입지는 건재한 마크 카멜 경의 성을 따른 것이었다.
리에 스터스와 이드 카멜.
두 아이는 같은 베타였고, 곧잘 부딪치고 싸웠다. 사이가 좋을 때는 또 괜찮은데, 한 번씩 과할 정도로 다투곤 했다.
리에는 또래 여자아이 중에 체격이 큰 편이었고, 늘 아이들을 리드하는 적극적인 역할이었다. 반면 이드는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품이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리에에게만 호전적인 태도였다.
리에는 이 자리에 없는 이드를 욕하며 씩씩댔다. 귀엽고 예쁜 얼굴에서 나오는 말치곤 굉장히 험했다.
“그 재수 없는 책벌레 자식. 더 두들겨 패줬어야 했는데.”
교습 선생의 얼굴이 인내심을 총동원하느라 벌겋게 달아오르고, 빅터는 역시 내 딸이라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서릿발같이 떨어지는 엄한 음성에 리에와 빅터, 두 사람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
“리에 스터스. 지금 그게 무슨 태도지?”
하비 스터스가 왔다. 편지를 빼돌렸음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제시간에 맞춰 온 것이다.
급히 온 것인지 아직도 바람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간소한 진청색 푸르푸앵 안에는 하얀 슈미즈를 허리띠로 고정시켜서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서둘러 온 것을 모를 정도로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차림새였다. 허리띠를 느슨하게 걸쳐둔 수준의 빅터와는 완전히 대비되었다.
“스터스 경! 오셨군요.”
교습 선생은 긴장을 푼 채 활짝 웃고, 리에와 빅터, 두 부녀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하비는 오자마자 편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편지 겉면에는 헤르크스 아카데미의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아래로 총장의 날인이 하나 더 보였다. 빅터가 그걸 보자마자 이를 갈았다.
교활한 여우 새끼.
“총장에게 편지를 받았네. 또 이드 카멜 영식과 다투었다지?”
지금쯤 베르텐 경이 가엾은 레니 선생을 쥐 잡듯 잡고 있을 테니 구해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더불어 자신은 바쁜 일이 있어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하비가 등장하자 리에는 방자한 태도를 즉시 버리고 반성하는 척했다.
빅터라면 몰라도, 하비는 절대로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귀족으로서의 품위와 예절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잔뜩 골이 난 채 눈을 굴리는 리에를 못 본 척한 하비가 교습 선생에게 말했다.
“뭐라 드릴 말이 없군. 카멜 경의 저택에 따로 찾아가 사과할 것이니 심려치 말게.”
리에와 빅터는 격렬하게 항의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아버지!”
“하비, 잠시만…….”
그러나 하비의 시선이 쏘아지자 두 사람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특히 리에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하비에게 대꾸를 하지는 않고 얌전히 고개만 숙였다.
교습 선생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 여러 번 약속한 하비는 두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하비의 묵묵한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조마조마해 보이는 얼굴로 하비의 눈치를 보는 두 사람이 영락없이 닮아서, 하비는 웃음이 먼저 나올 것 같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겨우 눌러 참았다.
그는 리에를 꾸중하는 대신 멋쩍게 서 있는 빅터를 나무랐다.
“늘 그런 식이니 리에가 잘못한 것도 모르지 않나.”
그때 리에가 반짝 고개를 들고 억울한 듯 말했다.
“이드 카멜이 잘못한 거예요!”
당황한 빅터가 리에를 말리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하비는 오히려 싸늘한 얼굴로 더 말하라며 턱만 까딱일 뿐이었다.
리에는 생각만 해도 열이 오른다는 듯 귀까지 붉어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책밖에 모르는 그 멍청한 자식이 감히 빅터를 모욕했으니까. 돈독 오른 천박한 남자라고 욕했단 말이에요.”
그 어떤 말을 들어도 꼼짝 않던 하비의 눈썹이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뭐?”
명백히 화가 난 얼굴이었지만 하비는 감정을 절제한 채 리에의 작은 어깨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리에.”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리에는 하비의 이런 억눌린 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때리는 건 정당화되지 않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빅터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너도 예전에 카멜 경을 때린 적이 있었…….”
“아무튼, 폭력은 나쁜 거야.”
서둘러 빅터의 다음 말을 가로막은 하비를 리에가 신기한 듯 보았다. 이토록 쩔쩔매는 하비의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었는지 다음에 꼭 이야기해 달라는 리에의 눈짓을 빅터가 알아들었다. 그는 하비 몰래 장난스럽게 리에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러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그쯤 해둬. 그 어린놈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타고난 귀족 태생들이 나 같은 부르주아들한테 억하심정 있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하비가 어두운 얼굴을 하자 빅터는 어깨를 으쓱하며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물론 너한테 해당되는 소린 아니고. 마크 카멜 같은 일부 귀족 놈들 이야기지.”
그런 빅터를 억울한 듯 보던 리에가 빽 소리를 질렀다.
“빅터는 천박하지 않아요! 나한텐 하비만큼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야! 함부로 말하는 것들이 나쁜 거야! 다 밟아줄 거야! 으아아앙!”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서 우는 리에를 빅터는 난감해하며 꼭 안아주었다. 결국 리에는 빅터의 품속에서 펑펑 울며 대성통곡을 했다. 많이 속상했던 모양이었다.
작은 등을 토닥거리며 빅터는 자신을 똑 닮은 금발의 땋은 머리를 사랑스럽게 보았다.
아이가 남과 싸운 이유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욕해서라니. 진정한 내 편이란 이런 기분일 것이다.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부르고 마음 한구석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빅터가 기분 좋게 웃으며 들썩거리는 여린 어깨를 감싸주고 있는데, 옆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흠칫한 빅터가 옆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야. 너까지 왜 그래?”
“…….”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극도로 분노하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하비 스터스의 냉정한 모습이란.
하비가 리에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것과는 별개로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리에, 이드 카멜 영식이 누구한테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
빅터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우는 리에와 화가 난 하비 사이에 끼어야 했다.
* * *
“리에가 또 무도한 일을 했다 하여 사과드리러 왔소만.”
하비는 풀 죽어 있는 리에의 등을 살짝 밀었다. 리에가 눈치를 살피더니 울적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린 아가씨의 야무진 사과에 데릭 윈스턴 경이 쓰게 웃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도 뒤에 숨은 이드를 엄한 얼굴로 앞에 내세우며 머리를 숙이도록 하고는 함께 머리를 숙였다. 데릭 윈스턴도 아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도는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이번엔 이드가 맞을 짓을 했던걸요. 아이들 일이라지만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는 겁니다. 저 또한 사과드리겠습니다.”
윈스턴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는 멀리 있는 카멜 경의 초상화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게…… 사실 이드가 마크의 말을 듣고 배운 것 같아서…….”
역시 그런 것이었나. 하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지었다.
빅터 베르텐과 마크 카멜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만나기만 하면 기 싸움을 해대서 피곤하던 차였다.
“이해합니다.”
하비가 진심을 먼저 밝히고는 한 박자 쉬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제 사람이 그런 무례한 말을 감내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이번엔 하비의 냉정한 눈길이 리에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리에가 움찔거리며 하비의 눈치를 살폈다.
“무례한 말을 했다고 반드시 폭력을 감수해야 할 의무도 없는 것처럼.”
데릭 윈스턴은 사람 좋게 웃으며 하비의 시선으로부터 리에를 감싸주었다. 리에는 일부러 훌쩍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데릭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스터스 경의 말씀이 전부 옳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마크에게도 단단히 일러놓겠습니다.”
고개를 내저은 하비는 엄한 얼굴로 거듭 정중히 다짐했다.
“리에도 똑바로 교육시키겠습니다. 다시는 이드에게 함부로 손대는 일 없을 겁니다.”
서로에게 몇 번이나 사과한 두 사람은 평소처럼 돌아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비와 데릭은 죽이 잘 맞았다. 좋아하는 것이나 취미도 비슷했고,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이야기도 잘 통했다.
알파가 어쩌다 오메가의 몸이 되어 아이를 낳은 이례적인 사례. 당연히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고, 특히 하비 덕분에 그 이상한 온천은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벌써 5년 후 예약까지 꽉 차 있다고 알려졌다.
마크 카멜의 변심을 의심해 임신을 한 직후 도망쳤던 전적이 있는 데릭 윈스턴은 언제나 하비가 고마웠다. 그가 물심양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안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스터스 경이 와주시니 집 안이 훨씬 밝아진 것 같습니다.”
티타임을 가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재중인 마크 카멜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마크 카멜은 데릭 윈스턴을 위해 그리 집착하던 후계자 자리를 스스로 내놓은 뒤로 돈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고 있었다.
타고난 사업가이자 거부인 빅터에게는 분노에 가까운 질투를 느끼고 있었고, 매일 초조해했다. 카멜가에서 재정 지원을 잘 해주고 있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데도 한시라도 빨리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많은 것을 쌓아 올린 사람인데…….”
“욕심이 많은 것이 탈이죠. 그 욕심을 이드에게 좀 더 쏟아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데릭은 하비를 마주 보며 부러운 얼굴로 말했다.
“베르텐 경은 리에와 잘 놀아주지 않습니까. 친구처럼 대해서 리에도 워낙 편하게 느끼는 것 같고……. 저로선 부럽습니다. 마크는 워낙 목석같아서 아이를 대하는 게 아직도 많이 어색하거든요.”
“카멜 경도 노력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베르텐 경이 리에한테 자주 목말을 태워준다고 하던데, 이드가 부러워하더군요. 제가 해줘도 마크가 하는 거랑은 다르다고 느끼는 것 같고.”
그때 리에가 아래에서 고개를 쑥 내밀며 작게 외쳤다.
“빅터가 이드한테도 목말 태워줬어요!”
언제 싸웠냐는 듯 다시 잘 지내는 두 아이를 흐뭇한 얼굴로 보던 데릭 윈스턴이 문득 물었다.
“참, 리에도 젖유모를 따로 두고 키우셨지요?”
하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리에를 볼 때마다 보통의 오메가처럼 평범하게 모유 수유를 못 해준 것이 신경이 쓰였다. 아무 탈 없이 잘 자라줘서 고맙긴 하지만.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것이 더 생각나는 죄스러운 부모의 마음이었다.
하비는 말이 없었지만 데릭 윈스턴은 다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알파였던 몸이다 보니……. 항상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왜 오메가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원망한 적도 있었다니까요.”
데릭의 말에 하비도 선선히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리에가 태어난 이후로 모유 수유는 거의 하지 못했다. 조금씩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아이가 양껏 먹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원래 알파였던 몸이라 그런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대신 수유를 해줄 이를 데려와 먹이긴 했지만, 하비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저도 그랬습니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하비의 말에 데릭이 쓰게 미소 지었다.
“나름대로 자신감 있게 살아와서 제가 쓸모없다 여긴 적은 없었는데, 처음 좌절감을 겪어봤습니다. 아, 물론 마크와 엮인 일에서는 많이 겪어봤지만…….”
데릭은 멋쩍게 웃으며 멀리서 리에와 잘 노는 이드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왠지 마음에 알싸하게 와닿는 말이었다.
‘쓸모없다라.’
그때 하비는 과거에서 선명하게 들려오는 빅터의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정말 쓸모없는 몸뚱이군. 리에한테 미안해.’
‘쓸모없기는. 리에가 못 먹는 대신 내가 먹고 있으니까 괜찮아.’
찔끔대며 나오는 묽은 액을 맛있게 빨면서 빅터가 흘끗 위를 보았다. 하비는 벌게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른 곳을 보았다.
갑자기 떠오른 야릇한 회상에 하비는 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이를 지우려 했다.
‘왜 그 일을 떠올린 거지?’
하비가 서둘러 찻잔을 들어 데릭 윈스턴이 보지 못하게 얼굴을 가렸다. 귓불이 붉어지고 아래에 피가 쏠려서 점점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데릭 윈스턴의 말은 잘 들리지 않고, 과거의 뜨거운 기억만 진해졌다. 심지어 가슴까지 욱신대는 것 같았다. 또다시 빅터의 야한 목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가슴 쪽은 이제 아프지 않고?’
빅터는 판판하고 윤곽 뚜렷한 하비의 반대편 가슴을 손바닥으로 훑었다. 끈적하고 묽은 액체가 묻어 나왔다. 짙은 갈색의 유두가 꼿꼿하게 서서 희끗한 모유를 흘리는 것을 보며 빅터가 중얼거렸다.
‘이런 걸로 흥분하게 될 줄은.’
가슴 근육을 터질 것처럼 꽉 쥐어짜면 새어 나오던 모유가 주르륵 흘러내려 이불을 더럽혔다.
헛숨을 들이켠 하비는 아예 제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이불을 힘껏 말아쥐고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그만…….’
옆얼굴만 보이는 하비의 반듯한 단정함도 흐트러져 있었다. 리에는 옆방에서 유모와 함께 자고 있었다. 큰 소리를 내면 들릴지도 몰랐다.
‘구제 불능인 건 아는데, 네가 나 때문에 엉망이 된 걸 보면 기분이 좋거든. 나한테만 보여주는 모습이잖아.’
빅터가 잔뜩 성이 난 페니스를 음탕하게 하비의 허벅지에 비비며 입술을 내려 탱탱하게 선 유두를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하비는 자지러지듯이 허리를 꿈틀거리고 신음을 내었다. 임신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섹스를 못 해서인지 조금만 건드려도 몸이 제멋대로 흠칫거렸다.
‘그렇게 좋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빅터는 달착지근하면서도 묘한 맛이 나는 액체를 짐승처럼 핥아 먹었다.
‘이 맛있는 걸 못 먹다니 내가 리에한테 더 미안한걸. 뺏어 먹는 기분이라.’
‘제발 그 입 좀 다물…… 읏!’
다시 한번 혀를 굴려 유두를 희롱한 빅터가 가슴에서 턱 끝, 그리고 하비의 입술로 고개를 올리고는 깊숙이 키스했다. 모유 특유의 단맛이 하비의 입에도 흘러 들어갔다. 질겁한 하비가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빅터가 입술을 혀로 축이며 농염한 눈빛을 던졌다. 튀어나온 목젖이 흥분으로 일렁였다.
‘못 참겠어. 넣는다.’
그때, 데릭의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하비는 뜨거운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정말 괜찮습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에 생각을 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빅터와의 야한 일상까지 함께 묶여 떠올라 버렸다.
아이들도 있고 여긴 다른 사람의 저택이다. 심지어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 중이었는데.
자괴감이 든 하비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어 일찍 자리를 파했다.
* * *
끼이익-!
침대 어디를 잘못 짚은 것인지 소리가 꽤 크게 나서 하비는 흠칫 멈추었다.
이른 저녁부터 자위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윈스턴 경의 저택에서 한번 떠올린 어마어마한 섹스는 도무지 잊을 수 없었고, 흥분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달아올라서 야단인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하지 못한 관계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비는 침대 위에서 손가락으로 뒤를 찌르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판판한 가슴도 만져보았다. 거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근육 때문에 모양이 분명한 가슴 위 유두를 집어서 비틀어도 통증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역시 이제 나오지 않는군.’
리에가 제법 크면서부터는 모유가 완전히 끊겼고, 빅터가 장난처럼 빨아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알파의 몸으로 돌아와 버린 것이다. 때문에 또 다른 임신은 불가능했다.
조용한 방 안에서 하비는 숨을 죽이고 쾌감을 구하려 애썼다.
모처럼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갈수록 성욕이 커지고 있었다. 이 구제할 길 없는 원초적인 욕구는 하비가 죽이려고 할수록 더 날뛰었다.
오랜 시간 빅터와의 거친 섹스에 길들여진 육체는 쾌감을 알았고, 하나하나 체득한 쾌감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었다.
아예 하지 못하는 시기가 오면 혼자서 뒤라도 쑤셔야 진정이 되었다. 앞만 만져서는 이제 끝까지 갈 수도 없었다.
하비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면서 반쯤 가려진 창가를 보았다. 뉘엿뉘엿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보랏빛 노을이 잔잔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으니까.’
어차피 빅터는 다시 바빠져서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했고, 들어와도 아주 늦은 시각이었다. 게다가 또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새벽까지 책상 앞에 붙어 있기 일쑤였다.
‘그래도 네가 옆에서 도와주니까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우성 알파 중 유일한 과로사로 기록됐을 거야.’
그런 말까지 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에게 차마 욕구불만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하비도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었지만 빅터만큼은 아니었다. 빅터 베르텐 경은 이 마을에서 가장 보기 힘든 사람으로 유명했으니까.
신음을 참기 위해 이불을 문 하비는 수치스러움을 묻어두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아직 약간의 애액은 나오기 때문에 뭔가를 발라줄 필요는 없었다. 이미 빅터에게 박히는 상상만으로도 페니스가 단단해지고 구멍이 젖었다. 낮은 목소리가 뭉개져서 흘러나왔다.
“읏! 으응…….”
그나마 하비의 손가락이 길고 굵기가 있어서 느끼는 부위를 찌를 수 있었다. 그래도 빅터가 직접 박아주는 것보다는 훨씬 얕았지만.
찌릿거리는 감각이 머릿속을 예민하게 긁었지만 아직 멀었다. 절정까지 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쾌감이었다.
‘이걸론 부족한데.’
빅터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박고 안았지. 하비는 빅터의 익숙한 전신 애무와 격렬한 섹스를 더듬어갔다.
기분 좋은 서늘한 체온과 너른 손이 하비의 옆구리를 잡아당기고, 간혹 빅터의 단단하고 큰 어깨뼈가 몸이 섞일 때마다 닿으면 오싹하게 좋았다.
삽입한 채로 누워서 가슴끼리 맞닿도록 비빌 때 땀에 흠뻑 젖은 빅터의 얼굴이 고양감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토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비…….’
빅터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그러자 버티고 있는 하비의 단단한 허벅지가 잘게 떨리고 대번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윽고 미끄러진 땀이 막 이불을 물고 있는 하비의 입술을 지나 턱에 맺힌 찰나였다.
타악.
문이 닫히는 소리에 깜짝 놀란 하비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휙 돌아보자 문 앞에 묘한 표정의 빅터가 서 있었다. 웬일인지 평소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하비는 물고 있던 이불로 온몸을 서둘러 감쌌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타는 듯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빨리…….’
잠근다고 했지만 급히 걸어 내린 탓에 문이 제대로 끝까지 잠기지 않은 탓이었다. 하비는 온몸을 타고 오르는 열기와 쾌락에 집중하느라 문이 열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빅터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잠깐 생각했어.”
“…….”
“기념일도 아니고 생일 지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얼어붙은 하비를 보며 빅터가 팔짱을 풀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녹안이 반달처럼 휘었다.
“도와줄까?”
괜찮다는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사라지고, 하비의 등과 어깨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광경을 들키다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빅터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까이 다가와 이불 위로 솟은 하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다 내 잘못이거든.”
하비가 물끄러미 무슨 말이냐는 눈빛을 보내자 빅터는 입을 열었다.
“물론 바빴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엔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궁금하기도 했거든. 내 몸 없이는 못 살게 만들어놨으니까.”
긴 시간 동안 공들여서 차근차근, 하비의 몸을 쾌감으로 길들였다. 빅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피식 웃었다.
“그러니 혼자서 해결 보려 할 정도로 방치한 건 확실히 내 잘못이지.”
침묵하던 하비는 이불을 내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빅터에게 휘말린 기분이었다.
“알고 있었나?”
“내가 오래 자리를 비울 때 가끔 혼자서 하잖아. 일부러 보이는 자리에 놔두고 간 적도 있는데. 상아로 된 모조 성기 같은 거.”
하비의 얼굴이 미약하게 붉어졌다. 역시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 장기 출장을 갔을 때 우연히 발견한 모조 성기를 쓴 적이 있었다는 것까지.
“직접 보고 싶었지만 제대로 잘 쓴 것 같아서 그걸로 만족했지.”
빅터가 씨익 웃더니 이불 속에 파묻힌 하비의 단단한 몸을 발굴하듯 손으로 더듬었다.
“다음엔 좀 더 색다른 걸로 구해 오도록 하지. 아, 그렇다고 너무 애용하면 곤란해. 언제나 날 잊지는 말고.”
웃음소리 섞인 말에 하비는 손을 쳐내며 부스스 일어났다. 수치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입 다물어.”
매끈하게 솟은 하비의 콧등에 키스하며 빅터가 작게 말했다.
“화내지 마. 오늘 제대로 봉사해 줄 테니까.”
다정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야한 목소리였다.
하비의 페니스를 끝까지 집어삼켰다가 애무하고, 혀로 농락하기를 수 번. 하비가 넣어달라고 말할 때까지 빅터는 꿋꿋하게 인내했다. 하비는 허리를 비틀면서 빅터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헉…….”
빅터의 입술이 능숙하게 하비의 것을 물고 옆면을 핥을 때마다 하비의 허벅지에 핏줄이 서고 단단해졌다. 발가락도 계속 움찔대면서 흥분을 여실히 보였다. 오랫동안 참은 탓인지 조금만 빨아도 사정할 것 같았다.
게다가 쑤시다가 만 뒷구멍이 녹을 듯 간지러웠다. 더는 못 참고 하비가 애원했다.
“이제 그만…… 넣어도 돼.”
격한 흥분으로 눈까지 붉어진 빅터가 다급하게 하비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꿈틀거리는 하비의 단단한 허벅지를 한계까지 벌리고, 빅터는 사정없이 페니스를 박아 넣었다.
퍼억!
이미 물이 질척하게 나와 있던 구멍은 허무할 정도로 수월하게 빅터의 것을 집어삼켰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하비의 굵은 허리가 연신 격렬하게 튀어 올랐다. 삽입할 때마다 빅터의 커다란 등에도 성난 근육이 잡혔다.
“아윽! 흣!”
빅터는 하비의 허벅지 하나를 들어 올리며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너무 극심한 쾌감에 부르르 떨며 벗어나려 하는 하비를 끌어당겨 박으면서, 빅터가 물었다.
“계속할 수 있겠나? 힘들어? 그만둘까?”
말은 그리하면서 빅터는 오싹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안고 있는 하비의 다리에 입술을 묻었다.
허벅지 사이를 혀로 긁듯이 애무하는 빅터의 얼굴은 너무 야해서 심장에 해로웠다. 하비가 헐떡이면서도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아니. 계속해.”
계속해 줬으면 좋겠다. 배 속이 뚫리는 것처럼 구멍에 처박힌 거대한 페니스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상상을 하면서, 하비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저도 모르게 만졌다.
이제는 나올 리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자꾸 손이 갔다. 예전에는 이렇게 만지면 끈적한 것이 손에 묻어 달달한 향을 풍기곤 했는데. 리에가 그것마저도 아쉬운 듯 가슴에 달라붙던 게 떠올랐다.
문득 아래를 처박던 허릿짓이 우뚝 멈추었다. 하비가 의아한 얼굴로 위를 보자 빅터의 눈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왜 저러는 걸까 물어보려던 찰나, 빅터가 불쑥 내뱉었다.
“나야, 리에야.”
뜬금없는 선택지 종용에 하비는 더욱 의아해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네가 그럴 때마다 미친 소리 같지만 리에한테 질투가 나.”
아연해진 하비가 멍하게 되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아쉬운 얼굴로 가슴을 만져대면 또 리에 생각 하는구나 싶다고.”
빅터가 페니스를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허리를 부르르 떠는 하비에게 고개를 숙여 빅터가 속삭였다.
“리에도 좋지만 적어도 섹스를 할 땐 나만 생각해.”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하비는 빅터의 투정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도 자신을 필요로 해주는 것 같아 가슴 한구석이 충만해졌다.
하비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빅터가 미간을 구기고 재촉하듯 허리를 쳐올렸다.
“알아들었으면 대답.”
“읏! ……그래.”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쾌감에 부들거리면서도 하비는 성실하게 답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는 빅터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좋을까.’
하비는 보잘것없는 고백에도 일일이 감동하고 기뻐하는 빅터가 새삼 사랑스러웠다.
시간이 흐르고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생겨도 빅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애정은 깊어지기만 했다. 숙성될수록 맛이 깊어지는 포도주처럼 향기롭고 감미로웠다. 아버지가 되어서도 아직 잘생긴 외모 탓에 인기가 많은데도, 눈 한번 돌리지 않았다.
묘한 정복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결된 아랫부분을 만지작대며 하비가 충동적으로 고백했다.
“빅터.”
느릿하게 쑤셔대던 빅터가 갑자기 이름을 불리자 눈을 들었다. 하비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드물었다.
구멍 가득 채워진 빅터의 페니스가 흥분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야릇한 충족감이 하비의 입을 움직였다.
“사랑해.”
멈칫한 빅터가 한참이나 말없이 하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금빛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튀어나온 목울대가 몇 번이나 일렁였다.
몇 번이나 입을 달싹대던 빅터가 피식 웃었다. 많이 자란 금발의 앞머리가 흔들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녹빛 눈동자에 알싸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줘도 나는 늘 불안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내 생각만 해.”
지독하게 이기적이었지만, 그게 또 빅터 베르텐다웠다. 사랑을 갈구하는 방식이 어떠한들, 결국 빅터는 언제나 하비의 주변을 맴돌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완전히 허리를 숙여 하비를 끌어안으면서 빅터가 조금씩 허리를 얕게 움직였다. 한 팔을 하비의 얼굴 옆에 지탱한 빅터는 신음을 흘리는 하비의 뺨에 키스했다.
“내가 더 사랑하는 거 알지? 넌 그냥 받기만 해. 그럴 자격 있어.”
하비는 어쩔 수 없이 빅터의 등을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랑에는 자격 같은 것이 없다고, 그러니 더는 혼자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이 무한한 애정을 받아 안정되는 만큼, 빅터도 같은 심정이기를 바랐다.
따뜻하게 안아주는 하비의 뜻을 빅터도 알아차리고 선선하게 미소 지었다. 이래서 하비 스터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거다.
‘달라는 만큼 자꾸 넉넉하게 주니까 내 버릇이 나빠지는 거라고.’
빅터는 다시 허리를 움직여 박으면서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나야, 리에야?”
빅터를 끌어안은 하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끈질기군.”
“오늘은 대답을 꼭 들어야겠어.”
하비는 빅터의 재촉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고민이 또 시작되었다. 어떻게 말해야 빅터도, 리에도 마음 상하지 않는 훌륭한 모범 답안일까.
빅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면서도 매번 휘말린다. 리에를 누구보다 아끼면서, 꼭 침대에서만 이런 식으로 짓궂게 굴었다.
생각하는 사이 페니스가 배 속을 뚫을 것처럼 깊게 박혔다. 하비가 목을 뒤로 젖히고 신음하자 빅터가 길게 혀로 목을 빨았다.
“아읏……!”
달이 오래 뜨는 만큼, 밤도 길었다.
* * *
쿠르릉! 콰앙!
먹구름이 몰린다 싶더니 갑자기 천둥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빗소리가 거세게 창가를 내리치고, 태풍이 몰려왔다.
죽은 듯 잠들었던 하비의 단단한 어깨가 움찔거리고, 이불이 흘러내렸다. 이미 잠에서 깨어난 빅터는 흘러내린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주고 하비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쾌감을 이기지 못한 낮은 신음이 나오는 볼륨 있는 입술도, 절정에 다다르면 떨리는 날렵한 턱끝까지도 보기 좋았다.
옆으로 길게 누워 하비의 입술과 턱을 만지던 빅터는 인기척에 방문 쪽을 보았다. 작고 귀여운 발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이미 들었기에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삐걱.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누군가가 슬리퍼 소리를 끌며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역시.
빅터가 피식거리며 반겼다.
“리에?”
졸린 듯 눈을 비비고 있는 금발의 아이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네. 저예요.”
귀여운 토끼 인형을 안고 있는 것에 비해 말투는 똑 부러지는 리에 스터스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두 사람의 아이가 거침없이 침대로 왔다.
하비도 발소리와 인기척에 감긴 눈을 떴고, 리에를 보자마자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자연스럽게 빅터가 덮어주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탄탄한 상체에 거친 섹스를 증명하는 잇자국과 키스 마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비는 그걸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리에가 보기 전에 서둘러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렸다.
우선은 아버지들의 눈치를 보며 풀썩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는 리에의 사랑스러운 밤색 눈동자가 일그러져 있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것이 분명했다.
빅터가 옆으로 길게 누워 턱을 괸 채로 씨익 웃었다.
“왜 그래. 잠이 안 와?”
“네. 오늘은 여기서 잘게요.”
하비가 얼른 이불을 들어 올려 자리를 만들고는 손짓했다.
“들어오거라.”
두 아버지 사이에 익숙하게 파고 들어간 리에가 길게 하품을 했다.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한 장소여서인지 달아났던 잠이 금세 돌아왔다. 리에가 가물거리는 눈으로 웅얼거렸다.
“나만 빼놓고 어디 가지 마요. 두 사람 다 평생 나랑 같이 있어야 해.”
혼자 남는 꿈을 꾼 모양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다부진 밤색 눈동자 근처에 눈물 자국이 아직도 보였다.
하비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눈물 자국을 지워주었고, 반대편에 있던 빅터는 작고 동그란 이마에 키스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연하지. 영광입니다, 아가씨.”
이번에는 하비에게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리에가 물끄러미 하비 쪽을 보았다. 그러자 하비가 웃으며 리에를 토닥거렸다. 하비 스터스는 엄하긴 해도 리에가 꼭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으면 결국 해주고 마는 마음 약한 아버지였다. 역시나 지금도 그녀가 가장 안심할 만한 약속을 해주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뭘 하든 항상 네 옆에 있을 거다.”
헤헤 웃은 리에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두 아버지는 언제나 그녀에게 든든한 울타리이자, 자랑이자, 끝없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이 영원했으면 했다.
“응!”
금세 잠들어 버린 리에를 사이에 두고 하비와 빅터가 눈길을 교환했다. 눈을 접어 웃은 빅터는 하비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하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인 채로 빅터가 속삭였다.
“사랑해.”
일상처럼 이어지는 고백에 하비는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언젠가, 하비는 어린 날에 소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소박한 소망이었다.
‘저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요, 아버지.’
아무 조건 없는 온전한 사랑. 그리고 소망.
그것을 드디어 이루었다.
* * *
일주일 후.
데릭 윈스턴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마크 카멜은 직접 사과를 하러 저택을 방문했다. 물론 하비도 리에의 잘못을 다시 한번 사과했다. 빅터는 아니꼬운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화해의 장에 어울려 주었다.
갑자기 두 아이가 교제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때 빅터 베르텐과 마크 카멜이 다시 한번 으르렁대며 길거리에서 맞붙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