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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IF: 하비가 임신을 한다면 (16/18)

외전 2 IF: 하비가 임신을 한다면

Chapter 1 출산 전

“오늘도 안 드시는 겁니까?”

“미안하네. 속이 좋지 않아서.”

하비의 집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노란 죽을 멀리 치워 버렸다. 고소한 향이 나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죽이었지만 하비는 그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집사가 안색이 좋지 않은 하비를 묵묵히 지켜보다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못 드세요? 아무리 속이 변변찮아도 이 죽은 잘 드셨잖아요.”

하비의 모친이 죽기 전까지 그에게 잘 해주었던 묽은 옥수수죽이었다. 질 좋은 옥수숫가루에 치즈를 녹이고 다랑어라는 익힌 생선의 하얀 생선 살을 부드럽게 찢어 버무린 죽이었는데, 입맛이 까다롭던 어린 시절의 하비도 곧잘 먹던 것이었다.

그의 모친은 바다 건너 ‘탈리아’라는 바닷가 인근 지역 출신의 명문가 귀족이었고, 옥수수죽은 그곳의 전통 음식이었다. 어머니 고향의 음식이라서인지 어린 하비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게다가 다랑어는 특정한 온도에 잘 익히면 생선 특유의 비린내도 거의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열이 나서 완전히 드러누웠을 때도 유효하던 음식이었는데, 지금은 이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하비가 의자에 앉은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절제 있는 동작으로 냅킨을 입가에 누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하군.”

“저도요. 진찰을 다시 한번 받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미 주치의로부터 진찰은 두어 번 받아봤지만 별문제 없다는 진단이었다. 하비가 한숨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아무 이상 없다고 나올 텐데.”

“그 의사를 불러서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다른 의사도 불러보고요.”

괜찮은 선택이었다. 여러 명에게 몸 상태를 점검받아 보는 것이 정확도를 높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하비는 먼저 집사가 불러온 의사와 대면했다. 빅터의 의뢰로 신약을 제조했고, 한쪽 눈을 반에게 잃은 그 의사였다. 갈색 수염이 턱의 절반가량을 덮은 걸로 모자라 관자놀이까지 뻗어 있고, 푸른빛의 안대를 하고 있었다.

“요즘 잘 지내고 계시죠?”

안 보면 더 좋을 사이 아니냐며 농담하는 의사에게 하비가 미소를 보였다. 확실히 전보다 많이 편안해진 모습에 의사는 흐뭇한 심정으로 진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사는 곧 멈칫했다. 특히 하비의 탄탄한 복부 쪽에 여러 번 손을 놀려 가늠해 보던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이건……?”

불길한 기운을 느낀 집사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세차게 말을 쏟아냈다.

“무슨 일이길래 그리 뜸을 들이나. 주인님께 문제라도 있는 건가?”

집사가 재촉할수록 의사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완연히 떠올라서, 하비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조용히 말했다.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일 테니 말해보게.”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 거지?”

말하다가 또 중단한 의사는 애매한 얼굴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평소 느끼시는 증상이나 배 안쪽의 작은 울혈을 봐서…….”

초조하게 집사가 다그쳤다.

“봐서?”

“이건 임신 전초 증세 같습니다.”

하비는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뜨겁게 몰려들었다.

그가 멍하게 아래를 보자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밋밋한 배가 보였다.

‘여기에 생긴다고?’

집사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다가, 급기야 베르텐 경이 무슨 짓을 또 벌인 거냐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우선 화가 난 집사를 진정시킨 하비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이럴수록 냉정해야 했다.

“혹시 오진인 건 아닌가?”

“제 눈과 오랜 돌팔이 생활이 틀린 게 아니라면, 맞습니다.”

하비가 갈라진 목소리로 의사에게 물었다.

“자세한 설명이 더 필요하네.”

의사는 수염을 매만지더니 집사를 흘끔 눈짓했다.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하비가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집사를 강제로 내보내고 나서야 의사는 입을 열었다.

“혹시 최근에 가신 장소 중에 기억에 남는 곳이 있습니까? 설마 또 베르텐 경이 이상한 약 같은 걸 썼을 리는……. 설마 그렇진 않았지요?”

신약 이야기는 아주 지긋지긋했다. 하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거부 반응을 보이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빅터와 엮이고 나서 그조차 이리 몸이 상해 버렸다. 당시 과정을 생각하면 의사도 그 신약 이야기는 넌덜머리가 났다.

아무튼 개과천선한 빅터가 하비에게 위험할 약을 썼을 리는 없을 테고, 의사는 다른 가능성을 점쳐본 것이었다.

하비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떠오르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해협 건너에 있는 유명한 온천에 간 적은 있네만.”

“어떤 온천이었습니까?”

“신체에 좋은 온갖 효능이 있고, 소원을 이뤄준다는 허황된 속설이 있더군.”

당시 설명을 들으면서 전형적인 사기 수법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로, 온천의 현지 관리인은 말도 안 되는 효능들을 줄줄 읊었었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이 온천에 일주일 정도 몸을 담갔더니 멀쩡해졌다거나, 아이가 들어서지 않는다던 여자가 효과를 봤다거나 하는 기적이었다.

설명을 마친 관리인이 사라진 뒤에야 하비는 주렁주렁 길게 늘어진 녹빛의 풀들이 절벽을 수놓은 것을 보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참으로 절경이었다. 고즈넉하고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빅터가 장난스럽게 말했던 것도 생생했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당연히 애가 생기는 거 아닌가.’

촤악!

물살을 헤치면서 다가온 빅터가 은근슬쩍 하비의 예민한 몸을 매만졌다.

‘분위기도 좋고 아무도 없는데 연인과 함께 있으면 할 짓이 하나밖에…….’

하비는 더한 말이 나올까 두려워 서둘러 손으로 빅터의 입술을 봉인했다.

‘그만.’

한동안 하비의 눈치를 보느라 빅터는 지척에 핀 꽃만 봐도 흠칫거리고 처량한 눈빛이 되었다. 게다가 집 안의 꽃이란 꽃을 죄 없애 버렸다. 자신의 저택에는 물론, 스터스가의 집사를 협박해서 하비의 저택에도 꽃을 두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랬던 것이 몇 년이 지나고 나자 빅터도 제법 원래 성격대로 돌아왔다.

물론 지금도 하비의 말 한마디에 모든 걸 내던지고 달려갈 남자지만, 하비와 평화롭게 사는 시간이 길어지니 아픔도 조금은 옅어졌다.

빅터가 피식 웃으며 입을 틀어막은 하비의 손에 키스를 하고, 제 손으로 쥐어 살짝 내렸다. 이번엔 더 가까이 다가와서 뺨과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관리인 놈도 없고 다른 온천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골랐는데?’

지형상 좁은 웅덩이 같은 온천이 띄엄띄엄 여러 개 있는 장소였고, 빅터는 고의성 다분하게 일부러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온천을 고른 것이었다.

간질거리는 감각과 뜨거운 온천의 열기 때문에 하비는 정신이 없었다.

‘아무튼 여기선 안 돼.’

결국 그날도 빅터의 화려한 언변과 사람을 녹이는 애무, 온천의 묘한 분위기에 설득되어 끝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거워지고 화끈거렸다.

하비는 표정을 급히 갈무리한 채 빅터와 있었던 일은 전면 생략하고 온천에 대해서만 말해주었다.

그러자 의사는 하비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파란 안대를 손으로 매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 온천이 있다면 저도 가보고 싶군요.”

의사는 하비의 안색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의 몸 상태에 대해 덧붙였다.

“자연적인 순리를 벗어나는 일이라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 증거로 울혈이 생겨 있지 않습니까.”

울혈이 생긴 부위를 의사가 가볍게 건드리자 하비가 흠칫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눌렀는데도 머릿속이 뒤집힐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하비의 반응을 지켜본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저번과 같은 경우지만, 그래도 많이 위험해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군요. 몸 상태는 좋으십니다.”

“어떤 경우를 말하는 거지?”

“저번처럼 몸만 오메가로 변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페로몬 샘이 망가지셔서 같은 현상이 일어나도 인지를 못 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오메가로 변했다면 빅터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의구심을 가진 하비가 지난 일을 머릿속에서 뒤져보았다.

‘아. 그런 일도 있었나.’

그러고 보니 이틀 전의 관계에서 빅터가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게 좋아? 평소보다 좀 더 미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은 그걸 기분 탓이라 넘겼다. 알파에게서도 과도한 흥분이 지속될 때 애액 같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던 터라, 크게 수상함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더 조심하셔야겠군요.”

의사의 진심 어린 염려에 하비의 얼굴도 점차 어두워졌다. 한 번 유산의 경험이 있다 보니 마냥 좋아하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도 같은 아픔을 겪는다면 이겨내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더 조심해야 할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건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몸 상태가 아니니 걱정되는 게 당연하죠. 거친 외부 활동은 삼가시고, 최대한 안전히 지내십시오. 게다가 보통 분보다 입덧도 많이 심하신 것 같고…….”

의사가 혀를 차며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주는 동안 하비는 기억의 저편에서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듯 어떤 따뜻한 환청을 들었다.

이제 와서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오를 게 뭔가.

‘아드님을 가졌을 때 많이 힘들었지만 기뻤답니다. 언제 나와서 그 반가운 얼굴을 보여줄까, 매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입덧이 심각해서 두어 차례 피까지 토했는데도, 그의 어머니는 하비를 가졌을 때를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즐거워 보였다.

스터스가의 독특하고 가혹한 훈육 때문에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걱정은 할지언정, 그토록 그의 탄생을 고대하고 마냥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해 줄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하비는 빅터를 떠올리고는 그에게는 어떤 얼굴로 사실을 알려야 할지 먹먹해졌다.

비록 빅터에게 굴욕을 당하고 수치스러웠던 괴로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빅터는 그때를 제 속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방황했던 어리석은 시기라고 고백했고, 결국 거리낌 없이 목숨을 던져 본심을 증명했다.

많은 일을 함께 지나왔고, 이제는 믿을 수 있는 동반자가 된 그 사람에게 이 소식을 어떤 얼굴로 전해야 할지 고민되고 흥분되었다.

“아무쪼록 몸조리 잘하십시오.”

불러온 의사를 보낸 뒤 방으로 돌아온 집사의 표정은 한껏 결연해 보였다.

집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약간의 염려가 함께 떠 있는 얼굴로 하비에게 다가갔다. 임신 소식은 정말로 축하할 일이었지만 하비의 몸이 또 상할까 걱정한 탓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집사가 말했다.

“큰 마님은 유일하게 과일만 잘 드셨습니다.”

어느새 집사가 데려온 사용인 하나가 하비에게 먹기 좋게 썬 붉은 과일을 접시째로 내밀었다. 정갈한 포크와 함께 6조각으로 잘린 루비 빛깔의 속살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리향이라는 과일입니다. 드셔보시죠.”

어디선가 시큼한 향이 난다고 했더니, 원인이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이건 냄새를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안 좋지는 않았다.

하비는 혼란스럽고 믿기지 않을 텐데도 내색 않고 대해주는 집사가 고마웠다. 평소처럼 대해주니 이토록 큰 사건이 작은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별것 아닌데 요란을 떠는 건가 생각될 정도로.

“큰 마님께선 그나마 몸이 좋아지셨을 때는 곡류가 들어간 죽 정도는 드셨지만요. 다만 생선이나 다른 해산물은 입도 대지 못하셔서 곤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필 주인님을 잉태하셨을 때 바다와 인접한 고향에 계셨는데 해산물을 못 드시니 더 난감해하셨지요.”

하비는 그제야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빅터와 멀리 떠나기 전, 별장으로 휴가를 갔을 때 해산물 요리를 전혀 먹지 못했던 기억이었다.

‘속이 계속 안 좋다더니, 아직도 그런가?’

당시 빅터는 하비가 못 먹겠다던 해산물을 팔을 걷어붙이고 열성적으로 뒤적거려 집요하게 다 골라냈다. 됐다고 말려도 요지부동이었다.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잖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전전긍긍하던 빅터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때는 모르고 지나쳤지만, 이제는 확실히 대비할 수 있다.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해 다른 의사들도 비밀 유지 조항하에 불러들였고, 모두 임신이라 진단 내렸다.

어떤 의사는 애초에 하비가 임신이라는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았기에 진단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하비가 임신을 염두에 두고 봐달라고 하자 임신 증상과 유사한 징조들이 보인다는 것을 인정했다.

결국 하비와 그의 집사는 결론 내렸다.

정말로 스터스가의 알파 가주는 임신한 것이라고.

* * *

그날 저녁, 여느 때처럼 하비의 저택을 방문한 빅터는 집 안의 기류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탄탄한 하체에 붙는 까만 쇼스 위로 선홍빛 푸르푸앵 때문에 빅터의 금발이 더욱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왠지 후끈거리는 실내 열기에 빅터는 오자마자 탈부착이 가능한 소매를 떼라 지시했다.

빅터는 응접실에서 얌전히 앉아 하비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바로 하비의 방으로 향해도 상관없지만, 걸핏하면 바로 침대행이 되는 바람에 하비가 제약을 건 것이었다.

우선 사람들의 눈이 많은 응접실에서 ‘품위 있게’ 대화를 한참 나눈 뒤 기력을 어느 정도 뺀 다음 방으로 들이겠다는 나름의 계획이었다.

‘의도가 귀엽긴 하지만, 소용없다는 거 알면서.’

못마땅한 듯 빅터의 녹색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고 불만스럽게 테이블을 검지로 툭툭 찍었다.

‘바로 들어가게 해주면 좀 좋아. 눈치 보인다고.’

스터스가에 새로 들어온 사용인들까지 모조리 절대적인 하비의 편이라 빅터는 응접실에서 대기하는 내내 불편한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사용인들은 빅터를 예의 주시하며 지나가곤 했고, 그 의미심장한 눈길에 빅터는 지나가는 사용인 몇몇을 붙들고 재차 물었다.

“무슨 일 있나?”

그러나 약속한 것처럼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빅터가 답답한 마음에 제 성질대로 할까 싶던 차, 다행히 에반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스터스가의 집사인 에반은 눈을 반짝이며 뭔갈 당장 말하고 싶다는 얼굴이고, 다른 사용인들도 그의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더욱 분주해 보였다. 이번에는 집사를 붙들고 물어보려던 때, 하비가 천천히 들어왔다.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밤색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푸른빛의 푸르푸앵에 여밈 단추 하나하나가 꼼꼼하게 다 잠겨 있었다. 답답하다며 이미 촘촘한 단추를 여러 개 풀어헤친 빅터와는 대조적이었다.

빅터는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 또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걸 입었나. 어쩔 수 없군.’

워낙 검소한 탓에 아무리 선물을 해줘도 몇 개를 돌려 입는 듯했다. 나머지는 기부를 하거나 고아원에 후원하는 데 썼을 테지.

그런데 평소의 하비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빅터가 왜 그런지 물어보려던 찰나, 하비가 부드러우면서 절제된 동작으로 빅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지하게 교제한 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하비는 여전히 빅터에게 경어를 쓰고, 격식을 차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미안하면 그 온천 때처럼 같이 뒹굴어주든지.”

집 안의 기류가 워낙 이상한 탓에 불안을 느낀 빅터도 평소보다 더 짓궂게 받아쳤다.

그런데 원래의 하비라면 기겁하며 얼굴을 붉혔을 말이건만 반응이 영 수상했다.

좋은 것 같기도, 근심이 있는 것 같기도, 혹은 두려움에 질린 것 같은 아주 묘한…….

빅터는 다시금 밀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인데, 왜 말을 안 해.”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인내심을 자극하는 묘한 분위기 때문에 빅터는 미칠 것 같았다.

끼익!

참다 못한 빅터가 벌떡 일어나 기어이 하비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뭔데. 궁금해 미칠 지경이니까 빨리 말해줘.”

하비는 입만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빅터가 올 때까지 수없이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막상 눈앞에 두고 보니 차마 말이 안 떨어졌다. 목이 꽉 잠기고 시선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방황했다.

포기하고 살았던 것인데, 갑자기 희망이 생겼다. 아슬아슬한 희망은 금세라도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렵기도 했다.

말했다가 또 저번처럼 사라져 버리면? 그땐 정말로 빅터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의사들이 여러 번 확인을 시켜줬지만, 그래도 배가 부르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말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오진이면 어떡하나.

여러 생각이 폭풍처럼 떠올라 하비는 임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주저되었다.

그때 지켜보던 집사 에반이 보다 못해 나서서 선수를 쳐버렸다. 이대로 기다리다간 천년만년 이야기도 못 하고 질질 끌 것 같아서였다. 하비가 제 입으로 말하겠다며 먼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베르텐 경.”

“뭘?”

탐탁지 않은 눈길로 의심스럽게 보는 빅터를 본체만체하고 집사 에반이 하비의 등을 밀었다.

“주인님. 어서요.”

빅터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제 품으로 떠밀린 하비를 팔로 안았다. 한 팔에 간신히 들어올 정도로 체격이 있는 알파의 우직한 등선이 파르르 떨렸다. 호흡마저 고르지 않았다.

빅터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하비를 더욱 꽉 끌어안고는 좋은 향이 나는 머리칼에 얼굴을 묻었다. 하비에게만 들리도록 빅터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뭔데 이래.”

안절부절못하는 하비를 토닥거리는 게 몹시 어색했다. 이렇게 약해진 하비 스터스를 보는 것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당혹스러워하던 빅터의 얼굴에 점점 분노가 번졌다.

“누가 옛일로 조롱하기라도 한 건가? 어떤 겁도 없는 새끼지? 당장 없애줘?”

하비의 뒤에서 집사 에반이 팔을 교차하며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고?’

잠시 생각하던 빅터는 하비가 타인이 조롱을 하든 말든 의외로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비더러 알파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것에도 무반응으로 대응하거나 아예 무시하곤 했다.

하비가 유독 발끈하고 화를 내는 건 빅터가 하는 모욕이나 그가 뱉는 저속한 농담이었다.

그것까지 떠올리고 나니 빅터는 더 심각해졌다. 하비는 모두 빅터 베르텐, 자신과 관련된 것들에만 감정적으로 큰 반응을 보였다.

‘얼마나 큰일이길래 이러지? 나랑 관련된 것 중에 대체 뭐가.’

덜컥 겁부터 났다. 약한 소린 죽어도 하지 않는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혹시…….

빅터의 부정적인 망상이 드디어 막장까지 치달았을 때, 하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생겼어.”

빅터는 오늘따라 유난히 작게 들리는 하비의 저음을 잡아내려 귀를 더욱 기울였다. 그러자 놀라운 말이 들려왔다.

“아이가 생겼다고.”

빅터는 깜짝 놀라 끌어안고 있던 하비를 멀찍이 떼어놓고 보았다. 하비의 양어깨를 붙들고 얼굴을 마주 보면서 그가 더듬거렸다. 충격으로 머릿속이 완전히 비어버렸다.

“뭐?! 어, 어떻게…….”

하비의 배를 흘끔 봤지만 너무 판판했다. 빅터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뒤로 보이는 집사 에반에게 진실을 구했다. 에반은 그제야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비가 말한 것이 진실인 것이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에 하비가 옅게 미소 지었다. 빅터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서. 하비 자신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저랬으니까. 바로 믿지 못하고 의사를 여러 명 돌려 확인할 정도로 의심만 했다.

“잠시만.”

빅터는 확인이라도 하듯 하비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페로몬을 맡았다. 시원하면서 온화한 느낌의, 하비의 페로몬 그대로였다. 기분 좋은 향이었다.

선 굵은 목덜미를 입술로 훑은 빅터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페로몬은 알파의 것인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순간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끔찍한 상상에, 빅터는 목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하비를 보았다. 하비가 저 고요하고 침착한 얼굴로 그를 안심시킨 뒤 몇 번이나 뒤통수를 쳤던 것이 떠올랐다.

빅터는 인정해야 했다.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과거의 생채기는 잊은 것 같아도 조금만 틈을 주면 금세 벌어져 피 흘린다는 것을.

한 번도 티 낸 적은 없지만 빅터는 아직도 하비가 언제든 자신을 훌쩍 떠날 수 있다는 불안에 종종 시달렸다.

그는 어떤 잔인한 모욕을 당해도 한 번도 굴하지 않던 하비가, 고작 거짓된 애정 하나에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은 채 정신까지 놓게 되었던 일을 결코 잊지 않았다.

초점 없는 밤색 눈동자가 지금도 선명했다. 백색 스터스가 저택의 살아 있는 유령처럼, 아무런 미동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던 망연한 눈빛도.

이성을 잃은 빅터가 억센 손으로 하비의 멱살을 꽉 쥐었다. 녹빛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설마, 나 몰래 약이라도 만들어 먹은 건 아니겠지?”

“베르텐 경!”

뒤에서 집사가 손을 떼놓으려 달려들었지만 하비가 다른 팔로 막았다. 내버려 두라는 단호한 눈빛에 집사는 일단 물러났지만 빅터의 행동을 주시했다.

분노로 떨리던 억센 손에 서서히 힘이 풀리고 있었지만, 빅터의 눈에 맺힌 작은 광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그렇게까지 해서 다시 가지고 싶었어?”

손에서 힘이 온전히 풀리더니 빅터가 하비의 단단한 가슴팍에 머리를 대었다. 자학하는 것처럼 하비의 어깨를 쥐고 가슴팍에 머리를 여러 번 쿵쿵 박았다.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그냥 나를 벌줘. 이런 식으로 사람 미치게 하지 말고.”

하비는 놀란 눈으로 두려운 듯 떨고 있는 커다란 덩치의 사내를 내려보았다. 커다란 선홍빛 푸르푸앵이 숨 가쁘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직 빅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악몽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불안으로 더욱 떨렸다.

“가끔 무슨 꿈을 꾸는지 알아?”

빅터의 눈이 슬쩍 올라가 하비를 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비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네가 핏덩어리만 남기고 죽어버리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무거운 고백에 열리던 하비의 입술이 도로 닫혔다.

“그러면 난 그 조그만 녀석과 죽지 못해 살아.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그리워하면서 혼자 살지. 얼마나 끔찍한지 넌 모를걸. 죽고 싶은데, 그 핏덩이 새끼 때문에 죽지도 못해. 불효자식이라고 욕해주고 싶어도 너랑 너무 닮아서 그 앞에선 욕도 못 한다고. 알아? 성격까지 너랑 닮아서 험한 말 하는 걸 싫어하거든.”

하비는 빅터의 넋 놓은 듯한 중얼거림을 들어주다가 그를 안아주었다. 허탈한 웃음이 하비의 입가에 그림처럼 걸렸다.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아직 빅터 베르텐은 그 어둠 속에서 지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쓸걸, 하비는 후회했다.

빅터가 어느 순간부터 잊은 것처럼 쾌활하게만 굴어서 괜찮을 줄 알았다. 가끔 아이와 관련된 뭔가를 함께 보게 되면 지나치게 자신의 눈치를 보거나 멈칫거리는 걸 알면서도.

빅터는 하비의 남색 푸르푸앵을 목숨줄처럼 구겨 쥐고 절망했다. 언제나 자신감 가득하던 빅터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흐릿했다.

“젠장, 얼마나 남은 거야.”

숨이 끊어질 것처럼 겨우 말하는 빅터를 하비가 일으켜 세웠다.

강인한 얼굴선 안에 하나하나 조각 같은 이목구비의 배율이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의 남자는 하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숨도 점점 거칠어졌다. 하비 스터스만 올곧게 비추던 선명한 녹색 눈동자가 깜박대자 투명한 눈물이 잔뜩 괴었다가 흘러내렸다. 눈물이 흘러내리다가 입술에 닿고, 빅터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나랑 함께 보낼 시간은…… 얼마나 남은 건데?”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의 거친 남자가 하비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꼼짝도 못 한 채 허덕이고 있었다. 나름대로 참으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에메랄드를 닮은 눈이 잔뜩 일그러져서 눈물이 금세 괴었다. 매끈하면서도 강건한 턱은 파르르 떨리고 입술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죽도록 괴로워 보여서, 하비의 마음도 같이 가닥가닥 찢어졌다.

한땐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눈물 흘리는 것조차 보기가 힘들 정도로 사랑하게 되었다.

심호흡을 한 하비는 빅터가 더 오해하기 전에 얼른 진실을 말해주었다.

“진정해. 내 몸 상하게 할 일은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해.”

멍한 얼굴이 된 빅터가 지그시 깨문 입술을 살짝 열었다.

“뭐?”

지켜보던 집사 에반도 평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베르텐 경, 절대로 오해십니다. 제가 주인님을 전처럼 두지도 않을 거고요.”

빅터가 눈을 깜박이는 통에 괴었던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한숨을 푹 내쉰 하비는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리고 임신을 하게 된 것 같은 원인에 대해 꺼내들었다.

“그 온천에서 시작된 것 같더군.”

“온천? 말도 안 돼. 관리인이 말해준 기적 같은 일 같은 건 다 홍보용이야. 그딴 건 그곳 원주민들의 미신…….”

하비가 횡설수설하는 빅터의 말허리를 차분하게 잘랐다.

“내일 한 번 더 확인해 볼 텐데, 그때 같이 가주었으면 해. 노스 해협을 건너온 유명한 의사를 하나 섭외했으니까. 왕가만 진찰한다던 사람인데, 어렵게 응했어.”

빅터는 굳은 얼굴로 잠잠히 서 있었다. 하비가 한 말을 이해하려는 듯 몇 번이나 곱씹으면서.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머리가 돌아가는지, 그제야 얼굴을 한 손으로 크게 훑어내렸다.

아무 말 없이 빅터는 테이블 앞에 털썩 앉아 술을 찾았다. 술을 따르지도 않고 술병째로 벌컥벌컥 마신 빅터가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훔쳤다. 아직도 놀람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손이 떨렸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하비는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담긴 얼굴로 빅터를 마주 보았다. 핼쑥해진 안색에, 몇 분 사이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언제나 생기 가득하던 녹음 같은 눈동자가 섬뜩할 정도로 빛이 없었다.

하비는 손을 뻗어 빅터의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잔 떨림이 조금씩 잦아졌다.

빅터를 달래듯 하비는 최대한 천천히, 차분하게 말했다.

“오해할 만하지. 좋은 소식부터 알리느라 먼저 과정을 말하지 않은 내 탓이야.”

다짜고짜 임신했다고 밝히니 놀랄 수밖에. 게다가 빅터는 하비에 비해 상상력도 풍부한 편이었고, 좋은 일보다 나쁜 일부터 예상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비는 좀 더 조심스럽게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했다.

‘내 일에 관한 건 이토록 과민 반응하는 걸 아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현실을 받아들인 빅터가 천천히 사람다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곧 혈색도 되찾은 그는 하비에게 잡힌 손을 들더니 몇 번이고 소중하게 손등에 키스했다. 반지가 끼워진 곳에 한 번 더 입 맞춘 빅터는 짐승처럼 그 위로 제 이마를 비볐다.

“아니. 내가 병신같이 군 탓이지. 빌어먹을 그 약부터 떠올리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건 두 사람과 두 사람의 일을 아는 모든 사람의 커다란 역린이었다. 바로 생각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너무 큰 고통을 겪었고, 죽음 같은 시간을 지나야 했다.

하비는 슬픈 눈으로 창백한 낯빛의 빅터를 응시했다. 1~2년간은 자주 악몽을 꾸었지만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데, 오히려 빅터가 더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악몽을 꾸는 건 미처 몰랐는데. 말하지 그랬나.”

빅터가 힘없이 웃더니 중얼거렸다.

“악몽 하나 정돈 내 몫이어야지.”

“그게 무슨 말이지?”

빅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하비를 보고 피식거렸다.

“가끔 너무 쉽게 용서받은 건 아닌가, 너무 쉽게 구원받아서 언젠가 또 불행이 닥치진 않을까 걱정스럽거든. 그 망할 불행이 벌써 찾아온 줄 알았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침묵하는 하비를 향해 빅터가 씨익 미소 지었다.

“악몽은 일종의 보험인 셈이지. 망한 보험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값은 했나 보군. 다행이야.”

이제 기분이 조금씩 풀리는지 슬슬 농담도 나왔다.

식은땀이 흥건한 빅터의 이마를 하비가 말없이 맨손으로 쓸어주었다. 금빛 머리칼이 하비의 손길에 기분 좋게 쓸려 갔다. 하비는 이마에 몇 가닥 붙은 남은 잔머리마저 떼어내 주었다.

이 다정한 손길을 또 잃는 줄 알고, 빅터는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그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이런 다정하고 완벽한 배우자를 얻었을까.”

듣고 있던 하비가 민망한 듯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이미 눈치 빠른 집사는 근처 사용인들을 다 물리고 그 자신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하비는 빅터를 쓰다듬던 손길을 거두며 말했다.

“실없는 소리 하는 걸 보니 이제 괜찮은가 보군.”

그러나 빅터는 그 손이 더 멀어지기 전에 다시 덥석 붙들었다. 하비가 힘을 주어 빼내려 하자 영악하게 다른 말로 돌렸다.

“아무튼, 늦었지만 축하해. 솔직히 너만 무사하면 난 다 좋아.”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는 굳이 없어도 하비만 있으면 괜찮았지만 그가 실망할까 봐 애써 속내는 구겨두었다. 하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한 것만으로도 이미 수명을 다 쓴 것 같은데,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쯤이야 이젠 그다지 충격도 아니었다.

하비가 손을 다시 빼내기 전에 빅터가 빠르게 다음 화제를 읊었다. 하비의 손을 만지작대다 손가락 사이를 은밀하게 문지르면서.

“그래서 출산 예정일이 언제라고?”

간지러운 기분에 흠칫하던 하비는 그만두라고 하려다 또 멈췄다.

겨우 기분이 나아진 듯한 빅터의 말간 표정을 보니 할 말이 쏙 들어갔다. 우는 모습을 봐서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예전에 용서를 구할 때 말고는 한 번도 눈물을 비친 적이 없는 그이기에 더더욱.

“아직 거기까진 제대로 확인 안 해봤지만, 처음 진찰했던 의사 말로는 내년 봄 즈음이라고 했어. 더 정확한 걸 알려면 역시 내일 보기로 한 그 의사와 만나봐야 해. 왕가만 진찰한다던 사람이라 여러 번 부탁해서 겨우 약속을 잡아서.”

뛰어난 의사 중에는 성격이 별난 자도 여럿 있었고, 저런 고집도 종종 생겼다.

빅터는 완전히 본래의 모습을 찾고 의기양양하게 평소처럼 투덜거렸다.

“그 재수 없는 의사 놈은 나한테 맡겼으면 한 번에 해결됐을 텐데.”

한 번에 해결은 됐겠지만 그 의사와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보통 자존심이 아니던데 빅터는 돈과 협박으로 의사를 짓누르는 걸로 해결 보려 했을 테고, 또 빅터 베르텐 경에 대한 악소문만 강화되겠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하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 빅터도 함께 일어나며 능글거렸다.

“드디어 관문 통과인가?”

응접실에서의 일정 시간이 끝났으니, 사적인 장소인 하비의 집무실이나 침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빅터가 좋아하면서 금세 따라붙자 하비는 엄중하게 경고했다.

“오늘부터 안정기까지는 절대 안 돼.”

하비가 말하는 건 ‘섹스’였고, 혹시나 해서 미리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빅터한테 휩쓸리다 못 이기는 척 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자신에게 대한 경고도 겸했다.

장난기 가득하던 빅터의 얼굴에도 나름의 비장한 진지함이 서렸다. 아무래도 하비의 몸 상태나 건강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보니 이제부터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알아.”

빅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비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손을 잡으면 하비는 결코 먼저 뿌리치는 법이 없었다. 그게 만족스러워서 얌전히 잡혀 있는 하비의 손을 흐뭇하게 보던 빅터가 문득 이맛살을 구겼다.

그는 아직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이것저것 질문했다.

“정말 몸은 괜찮은 건가? 이상은 없고? 또 어디 아프다거나.”

빅터가 손을 올려 하비의 뺨을 만졌다. 안색을 샅샅이 살피면서 걱정하자 하비가 미소 지었다.

“임신 동안 잘 못 먹을 테니 뭘 먹는 게 좋을지 생각해야 돼.”

“뭐? 아, 하긴 최근에 좀 못 먹는 것 같긴 했지. 못 본 사이 너무 말랐어.”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두고 빅터는 유리 다루듯 했다. 누가 들으면 마시던 것도 뿜을 소리를 태연하게 지껄이는 걸 들으니 하비는 낯이 뜨거워졌다.

얼굴에 올린 빅터의 손을 잡아 내리면서 하비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부디 밖에서는 함부로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어쩔 줄 몰라 하는 빅터를 보며 하비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불과 조금 전 임신 소식을 알릴 때 떨리고 긴장되던 게 벌써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빅터가 만에 하나라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염려했던 게 우스웠다. 이토록 전투적으로 눈을 빛내며 입덧의 해결책부터 논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빅터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누가 타고난 사업가 아니랄까 봐 구체적인 대안이 금방 세워졌다.

“앞으로 하나하나 먹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 보지. 전담 요리사를 대폭 늘려야겠어.”

“그렇게까진 안 해도 괜찮…….”

그러나 이미 그는 하비의 말이 안 들리는 듯했다.

“빠짐없이 기록해서 출산일까지 못 먹는 일 없이 잘 보내야 하니까. 누굴 족쳐야 준비가 가장 빠르지?”

하비는 벌써부터 자문자답하며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걱정하는 빅터를 보니 참 많은 것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 머리를 굴려 계획과 안을 내놓는 빅터를 물끄러미 보다 하비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걷다 보니 하비의 침실 쪽에 도착했고, 빅터가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한스 놈? 이자벨인가. 아니면 세드릭을 시키…….”

하비는 빅터의 턱을 붙들고 돌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사용인이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먼저 스킨십을 허하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순수한 충동이었다.

체념한 듯 묻던 빅터의 그 목소리가 잊히질 않았다.

‘나랑 함께 보낼 시간은…… 얼마나 남은 건데?’

절망 가득한 꺼진 눈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 눈빛과 눈물을 마주하자 이율배반적인 정복욕 같은 것이 솟았다.

알파로서의 본능이었다.

몸이 임시로 변했다고는 해도, 본성은 그대로였다.

아름다운 우성 알파를 차지했다는 만족감과 뿌듯한 고양감이 하비를 더욱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부채질했다.

눈만 깜빡대던 빅터가 입술을 맞댄 채로 피식 웃었다. 그가 그대로 하비의 몸을 돌려 문 바로 옆 공간에 한 팔로 가두었다. 키스가 더욱 깊어지고, 정신없이 혀가 얽혀들었다. 벽을 짚은 빅터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핏줄이 불거졌다.

미약하게 ‘쿵’ 소리가 났지만 등만 부딪친 거였다. 다치지 않게 하비의 정수리와 벽 사이에 손을 밀어 넣은 빅터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눈썹 하나하나가 보이는 거리에서 빅터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연인은 너무 잔인하군. 안정기가 끝나기 전엔 안 된다고 해놓고 이러면, 어떻게 참으란 거지?”

복도 내에 비치된 등불이 일렁여서 빅터의 흥분한 눈빛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하비는 바짝 당겨진 탄탄한 가슴에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래로는 벌써 뜨겁게 페니스가 일어나 있었다. 이를 알면서도 하비는 덤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참아봐야지.”

그리 말하는 하비의 밤색 눈에도 욕망이 들끓었다. 알아챈 빅터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분부대로 적당히 잘 참는 선에서 해봐야겠군.”

다시 키스를 하면서 빅터가 다른 팔로 문을 열었다.

* * *

왕가만 진찰한다던 의사의 판단도 ‘임신이 확실’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은 임신 소식을 알리는 건 확실히 배가 나온 이후의 시기로 잡았고, 솔직하게 밝히기로 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지언정 진실을 공표하기로.

친자인데 입양했다는 둥 헛소문이 도는 것을 하비가 원치 않아서였다.

안 그래도 알파였던 윈스턴 경의 임신과 출산 소식에 사교계와 귀족가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터였다. 사실 입양한 아이인데 윈스턴 경과 카멜 경이 회괴한 정신병에 걸려 착각하고 있다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빅터는 염려하는 하비를 달래면서 살벌하게 눈을 번뜩였다.

“감히 누가 우리 아이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어. 내가 그냥 두지 않을 텐데.”

빅터의 총기 사업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국왕의 눈을 피해 지하경제에 뻗어놓은 인맥과 묻어두었던 돈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냈다.

그 결과 한 번 죽었다 여겼던 빅터의 사업은 더욱 활개를 쳤고, 빅터 베르텐 경은 당대 가장 핵심 무역 소재로 꼽히는 ‘향신료’ 쪽에서 큰손이 되어 있었다.

대상인이 된 빅터의 어음은 가치가 최상등이었고, 신용도가 워낙 좋아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그러나 일과 관련해선 자비가 없는 데다 고약한 성질머리 때문에 상인들은 빅터에게 굽신거리면서도 치를 떨었다.

“헛소리를 하는 것들은 혀를 뽑아버려야지.”

이를 잘 아는 하비가 정말로 그럴 것처럼 험악한 표정인 빅터를 말렸다.

“마음은 고맙지만 거기까지. 정말로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이제 아이도 생기는데.”

빅터가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하비는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주변 사용인들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집사 에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거 증거 안 남기고 뒤에서 해결 보겠다는 소리 아닐까요……!’

어쨌든 하비의 임신이 기정사실화된 이후, 빅터는 더욱 열정적으로 갖은 재화를 퍼 날랐다.

안 그래도 그간 하비의 몸을 위해 좋은 약재나 식재료를 다 가져다주던 그였다. 몇 년간 지켜본 스터스가 저택의 사용인들은 빅터의 지극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조금은 불안해졌다.

여기서 얼마나 더하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용품이나 임산부에 좋다는 온갖 음식, 물건들이 그득그득 산처럼 쌓여갔다. 스터스가 사람들은 질린 표정으로 빅터가 보낸 것들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오죽하면 물건 정리하는 전담 사용인을 더 고용했을 정도였다.

하비가 은행에 찾아온 빅터에게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적당히 하라고 했을 텐데.”

“이래 봬도 적당히 하는 거야.”

한숨을 내쉰 하비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꾸했다.

“경의 참을성을 재고해 봐야겠어.”

“재고할 것도 없어. 정말 꾹꾹 참고 최소한으로 하고 있는 거니까. 마음 같아선 아예 섬을 통째로 사서 거기 모든 걸 갖춰놓고 둘만 지내는 것으로…….”

하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얼른 빅터의 망상을 끊어냈다.

“이미 전에 사둔 섬이 있는데 뭘 또 산다는 거지?”

“그 섬은 경치는 좋은 편이지만 무인도고, 주변 해류 상황이나 어획량도 그렇고 물량 공급하기도 어려운 지형이니까. 군사용이라 풍족하게 휴양 즐길 곳은 못 돼.”

“……그건 그렇지만.”

하비가 떨떠름하게 동의했다.

해적 사건 이후, 빅터는 군사 방어용으로 섬을 몇 개 사들였다.

워낙 어릴 때부터 지긋지긋하게 해적에게 당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유도 컸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비와 함께 살고 있는 이 도시를 더욱 견고히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 이후로도 막힘 없이 술술 나오는 핑계에 하비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빅터는 워낙 언변이 좋다 보니 언제나 핑계나 변명 하난 예술급이었다. 빅터와 입씨름을 하는 것으로 제 능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아서 자주 넘어가 줬더니 날이 갈수록 더 능구렁이처럼 굴었다.

낭비를 싫어하는 하비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빅터였고, 그는 눈치 빠르게 다음 말을 덧붙였다.

“요즘 기부도 더 많이 한다고. 너무 구박하지는 말아줘.”

풀 죽은 듯 늘어진 눈꼬리를 보고 하비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빅터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세인트 수도원 소속의 고아원 외에 중소 규모의 민간 고아원에도 골고루 기부한다고 전했다.

빅터의 약한 모습에 약한 하비답게 그는 오늘도 하려던 말을 집어넣었다.

“그런 게 아니라…… 알았다.”

당장 씨익 웃는 걸 보니 하비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졌지만 모른 척 넘어갔다. 늘 그렇듯이.

스터스가의 집사 에반이 봤다면 버릇 나빠진다며 한 소리 했을 법한 광경이었지만 근처에 있던 은행 직원들은 빅터가 두려워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하비의 자리는 널찍하게 나뉜 아래쪽의 창구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높은 단상에 있었다. 하비는 현장 인원이라기보다는 업무 조언자에 가까워서였다.

빅터는 하비의 업무 책상 앞의 의자를 당겨 앉고는 씨익 웃었다. 휴식 시간이었고, 의뢰인도 없었다.

“난 지금도 네가 은행에서 일한다는 게 신기해.”

하비가 무슨 의미냐는 뜻으로 올려보자 빅터는 가져온 봉투를 뒤적였다. 좋은 향이 나는 빵 하나를 꺼내 들고 한 입 베어 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자니 뭐니 하는 거, 성직자들이 질색하는 거잖아. 수도원 사람들과 친하지 않았나? 교회 쪽 사람들과도 연이 깊으면서 잘도 이런 일을 하는군.”

우물거리면서도 꽤 잘 들리도록 발음해서 의미 전달은 명확했다.

스터스가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교회나 성직자들과 친밀한 관계였고, 하비도 태어났을 때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었다. 심지어 ‘하비’라는 이름도 유명한 성직자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듣고 있던 하비가 펜대를 내려두고 말했다.

“돈이 제일 좋다며.”

하비가 빵에는 손도 안 대길래 하나 꺼내서 건네주던 빅터가 멈칫했다.

“……어?”

허공에서 굳어버린 손에서 작은 빵 덩이를 가져간 하비가 빵을 든 채로 미소 지었다.

“베르텐 경이 제일 좋아한다는 걸 한번 이해해 보고 싶어서. 마침 하던 일을 그만두려던 차에 가장 먼저 제안 온 곳이기도 했고.”

외교관 일과도 연계가 되는 업무라서 하비는 고민 끝에 수락했다. 국적이 다른 교역 상인들끼리 거래할 때 금융업자를 끼고 환어음 절차를 치르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발생하는 수수료나 이자는 물론 은행이 가져가는 구조였다.

외교관을 했던 하비는 국제법이나 다른 나라의 사정에도 밝아 주로 이런 쪽의 업무들에 조언을 주는 역할이었다.

직접 창구를 맡을 때는 일손이 바쁠 때에 한해서. 그게 하비가 은행 업무를 맡겠다고 내건 조건이었다.

그때 멀리서 직원 하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유쾌하게 말했다.

“베르텐 경! 일 보시려고 오신 겁니까, 아니면 스터스 경을 보러 오신 겁니까?”

“둘 다.”

시큰둥하게 답하는 빅터를 보며 하비가 빵을 든 손을 내려두었다. 유하던 얼굴이 조금 딱딱해졌다.

“은행 업무를 볼 거면 내게서 보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봐.”

“너한테 보나 다른 놈한테 보나 별 차이도 없는데 왜 매번…….”

빅터가 구시렁대도 하비는 들은 척도 않았다.

안 그래도 뛰어난 무역 상인인 빅터 베르텐 경과 배우자 관계인데, 그런 하비가 은행 일을 도맡았다는 이유로 별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빅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 처리를 해준다는 헛소문도 꽤 돌고 있기에 하비는 늘 조심했다.

마침 하비를 찾는 관계자가 있어 그가 일어섰다. 빅터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우선 기다리라 일렀다.

“잠시만.”

잠시 후 되돌아온 하비는 빅터가 가져온 빵을 그제야 맛볼 수 있었다. 부드러운 데다 건포도가 박혀 있었고, 굽기 조절도 워낙 잘 되어 있어 고소하고 맛있었다.

“역시 이나가 만드는 건 괜찮아. 이건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군. 고마워.”

그러나 빅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비가 좀 전에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뭐야. 그럼 은행으로 온 게 결국 나 때문이었나?”

쑥스럽게 뒷머리를 만지던 빅터는 영락없이 소년 같아 보여서 하비는 다시 웃었다. 자리를 비우고 돌아올 때까지 계속 같은 생각만 하며 곱씹고 있었다는 게, 귀엽게 느껴졌다.

물론 몸은 흉기고, 성격까지 악덕하다 유명한 빅터 베르텐을 그리 생각하는 건 오직 하비 스터스뿐이었다.

빅터의 눈길이 문득 하비의 배로 향했다. 이제 조금 부풀어 오르고 있는 정도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티도 나지 않았지만, 빅터는 늘 전전긍긍했다. 혹시라도 하비가 잘못될까 봐 매일이 걱정의 연속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게 너무 한정적이야.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고 있지.”

하비는 그사이 입덧 탓에 잘 못 먹어서 얼굴 살이 많이 내렸다. 하비가 잘 먹는 것이 흐뭇한 동시에 안타까워진 빅터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여긴 언제까지 다닐 생각인지 오늘은 답변을 꼭 들어야겠어.”

“은행 돌아가는 사정 봐가면서라고 몇 번 말했지 않았나.”

한숨과 동반한 하비의 답에 빅터의 금빛 눈썹이 꿈틀거렸다. 벌써 이 문제로 몇 번이나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해결이 나지 않았다.

빅터는 오래 생각한 결론을 슬쩍 내밀었다. 하비가 일에서 벗어나 쉴 수 있게 하면서 끌릴 만한 제안이었다.

“내 생각엔 경의 모친이 살던 곳에 가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하비의 눈이 가늘게 흔들렸다.

“우리 어머님 말인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입덧이 똑같이 심했다고 하셨잖아. 고향 음식은 잘 맞았다고 한 걸 들었는데, 어때?”

사람들의 귀를 의식해서 빅터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비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아무리 빅터가 입에 맞을 만한 음식을 수급해 준다 한들, 평소처럼 양껏 먹는 것보단 못해서 체력이 떨어지고 있던 차였다.

고민하는 하비를 보며 빅터가 악마처럼 유혹하듯 덧붙였다.

“가보고 영 아니면 바로 돌아오면 되잖아.”

하비는 미적지근한 표정이었지만 빅터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건강한 출산을 위해서는 음식도 입맛에 맞고 평안한 장소에서 머무는 것이 나을 거라는 판단도 섰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승낙한 거지?”

반듯하고 선 굵은 금발 미남의 얼굴에 화려한 미소가 꽃피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던 하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곁에서 알게 모르게 듣고 있던 은행 직원들은 차마 빅터가 두려워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속으로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들도 빅터가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비에게 제안하는 내내 음흉하게 웃고 있었기에.

하고 싶었던 말은 다 전달한 것인지 빅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어났다. 그는 하비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집에서 보지.”

하비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다정하게 답인사했다. 그런 다음, 그를 배웅하지 않고 바로 다음 업무를 위해 준비했다.

지켜보던 빅터가 씨익 웃었다. 흠칫한 하비가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찰나, 빅터의 손이 더 빨랐다. 빅터는 하비의 붉어진 귓불을 스치듯 만지더니 야릇하게 말했다.

“가면 어젯밤에 못다 한 걸 해보자고.”

가까운 곳에 있던 직원들의 얼굴도 일제히 붉게 익었다. 하비의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당장 나가.”

화가 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하비가 열기가 오른 얼굴로 이를 갈았다. 빅터가 손날을 아래로 기품 있게 그어 정중하게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분부대로.”

빅터는 가져왔던 모자를 손가락에 걸어 휙휙 돌리며 흥얼거리면서 나가고, 늘 그렇듯 부끄러움은 하비의 몫이었다.

곧 아버지가 될 사람이 저리 체면이 없다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건 빅터에게 이미 콩깍지가 씌고 그나마 좋은 면만을 보는 하비의 착각이었으니.

막 은행을 나서려던 빅터는 자신을 부르는 큰 목소리에 금세 싸늘해졌다. 그의 손가락에 걸려 풍차처럼 돌아가던 모자는 인기척을 눈치챈 순간 정중하게 머리로 올라가 있었다.

마침 기분 좋게 불던 바람도 멈춰서 흩날리던 금발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봐! 베르텐 경!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군그래.”

체면치레하던 의원 자리도 내놓은 지 오래고, 빅터는 본연의 사업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비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냉정한 녹빛 눈이 다가오는 중년 사내에게 향했다.

상대는 배가 터질 것처럼 나온 뚱뚱한 사내로, 길드를 총괄하는 행정관이었다. 그는 빅터의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흥겹게 주절거렸다.

“지난번에 선물로 준 와인은 잘 마셨네. 역시 자넨 보는 눈이 있어.”

껄껄거리며 웃는 행정관은 대낮부터 술기운으로 코와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빅터는 날카로운 눈매를 능숙한 미소로 감추며 공손한 척 굴었다.

“과찬이십니다.”

빅터의 손길은 이미 곳곳에 뻗쳐 있어 모든 길드를 총괄하는 행정관까지 제 입맛대로 주물렀다. 덕분에 빅터의 눈 밖에 난 상인은 이곳에 발도 디딜 수 없었다.

겉보기엔 폭군이나 다름없는 행태였으나 빅터가 길드를 틀어쥔 이후로는 수수료가 이유 없이 폭등하는 일이 없어져 반발은 크지 않았다.

행정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가 제시한 수수료를 길드 상인들이 마음에 들어 한 모양이야. 나만 만나면 다들 베르텐 경 칭찬만 한다네.”

“그거 다행이군요. 저만 보면 뒷걸음질 쳐대서 더 올렸어야 했나 고민했는데 말입니다.”

빅터의 뼈 있는 농에 은행을 방문했던 길드 상인들의 안색이 허옇게 탈색되었다. 수수료에 입을 대어 낮춰준 대가로 빅터가 그들에게서 뜯어내는 것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금전적인 것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수수료를 빌미로 빅터는 각 길드에서 내는 주중 보고서를 납품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길드에게서 오는 실시간 보고서는 시장 상황을 한 번에 판독할 수 있는 열쇠 그 자체였고, 빅터는 그 덕에 편하게 앉아서 돈방석에 오르는 중이었다. 어느 신문보다 빠른 실시간 정보였으니 말이다.

‘세상에서 투자가 제일 쉽지.’

아기용품은 뭘 사야 하비에게 덜 혼날까, 다음 고민으로 들어간 빅터는 행정관의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참, 스터스 경은 잘 지내는가. 마침 업무차 보러 가는 중이네만. 임신했다지? 축하하네.”

업무용으로 위장한 빅터의 가식적인 미소가 하비의 이름에 허물어졌다. 딱딱하고 경직되었던 미소가 한결 자연스러워지며 진실로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스터스 경에게도 그리 전하겠습니다.”

행정관은 여타 귀족과는 달리 알파나 오메가의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자였다. 어째서 알파인 하비가 임신을 할 수 있었냐는 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세. 이제 신혼은 끝, 전쟁 시작이니 잘해보게.”

두둑한 배를 두들기며 떠나가는 행정관의 뒷모습이 꽤 유쾌해 보였다.

은행을 나서자마자 벤과 진이 빠르게 붙어 보고를 올렸다.

“찾았답니다.”

몇 년째 지하경제에 묻어둔 금화 일부를 빼 간 일당을 추적 중이었는데, 오늘 꼬리 하나를 찾았다는 보고였다. 빅터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군지 면상이나 보러 가보실까.”

잠시 걸음을 멈춘 빅터가 하비가 있을 은행을 뒤돌아보더니 덧붙였다.

“아, 죽이지는 말고. 설마 벌써 죽이진 않았겠지?”

“네? 아직 고문 중입니다만…….”

진의 동그란 눈동자를 흘끗 본 빅터가 즐거운 듯 말했다.

“적당히 하고 방출해. 곧 아이도 태어나는 마당에 재수 없어지니까.”

제 주인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기하게 본 진이 다음 안건을 꺼내었다.

“참, 스터스 경은 동의하셨습니까?”

빅터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진도 의뭉스럽게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 되어가는군요.”

“그래.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돼.”

뜻 모를 암호 같은 말을 나눈 두 사람은 곧장 장소를 옮겼다. 모종의 계획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 * *

하비는 빅터의 의견을 수렴해서 이른 시기에 출산 휴가를 내었다. 정작 그 의견을 낸 사람은 너무 바빠져서 떠나는 하비를 제대로 배웅조차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빅터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은 처음이기에, 하비의 심경은 복잡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심란한 속내를 내색 않고 일에 치여 사는 빅터를 조용히 격려해 주기만 하고 왔다.

하비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출산이 다가올 때쯤 온다고 했으니까.’

저택을 떠난 하비는 우여곡절 끝에 친모가 살던 고향 땅에 도착했다. 산을 건너고, 여러 번 배를 갈아타고서야 올 수 있었다.

따사로운 남부 특유의 햇살과 여유로운 사람들의 분위기, 자연으로부터 오는 풍부한 먹거리 덕분에 몹시 평화로웠다. 길거리에 가끔 보이는 거지들조차도 도시에 사는 하비의 나라 사람들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였다.

하비가 주변을 둘러보다 집사 에반에게 묵묵히 말했다.

“특별한 곳이군.”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비는 이제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모의 다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행복하셨겠어.”

“큰 마님 말입니까? 그럴 것 같습니다.”

바로 알아들은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선 잘 드시겠군요. 다행입니다.”

“그러려고 온 것도 있지.”

무의식중에 배를 쓰다듬는 하비를 에반이 눈여겨보더니 슬쩍 말했다.

“신경을 많이 쓰고 계시니 건강히 나올 겁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래. 고맙네.”

그때 집사 에반이 무의식중에 본심을 이야기했다.

“곧 볼 아기씨가 부디 주인님을 닮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하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베르텐 경을 닮으면 안 되나? 무슨 이유로?”

스터스가의 충직한 집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걸 꼭 말로 해야겠냐는 집사의 불손한 눈빛에 하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아이를 만났으면 하는데.”

에반은 생각만 해도 귀엽겠다며 듯 미소 짓는 제 주인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답답했다.

비록 몇 년이 지났지만 빅터에게 호되게 당한 건 잊기라도 한 것인가. 범인으로서는 이해 못 할 감각이었다. 사랑이란 것이 현명한 주인마저 눈을 멀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함부로 누굴 좋아하지 말아야지.’

오늘도 독신 생활을 속으로 굳게 다짐한 에반은 입을 내밀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주인님은 베르텐 경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같이 지내다 보면 자네도 알 거야.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요즘 기부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돈에만 눈이 뒤집혔던 과거와 다르게, 빅터는 무늬만이 아니라 정말로 사회 환원이나 약자를 위한 각종 복지 정책에 큰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하비와 닮은 고아 아이를 봤던 것이 전환점이 된 것이다.

하비를 닮은 아이가 배를 굶주리며 길거리를 전전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결국 그 아이를 후원하기로 했고, 후원은 지금까지도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하비는 그런 빅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관심사를 공유하니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를 전보다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예예.”

대충 흘려들은 에반은 도착할 마차를 찾아 고개를 휘휘 돌렸다. 곧 약속된 작은 마차가 덜컹덜컹 다가오자 반갑게 한 손을 흔들었다.

짐이 무거워 에반의 한쪽 어깨가 금방 처지자 하비가 옆에서 은근히 도와주었다. 쇠약해졌다 해도 알파인지라 기본적인 근력 자체가 베타인 에반과는 달랐다.

“저깁니다. 젤가가 도착했네요.”

밝은 금발의 청년, 젤가가 마부와 대화를 하다가 훌쩍 뛰어내렸다.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호리호리한 허리선에 딱 떨어지는 푸른빛 쇼스, 뾰족한 신발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다정하고 옅은 녹색 눈이 한껏 휘었다.

“스터스 경!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세 사람은 사이좋게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젤가와 집사 에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비는 입을 닫고 창밖만 보았다. 하비가 살던 좁고 시끌벅적한 도시에 비해 시골과 자연의 정경은 넉넉하고 조용했다.

작은 창문 위로 갈색 회색 등이 고루 섞인 낮고 뾰족한 지붕들이 즐비하고, 돌로 쌓아 올린 낮은 돌담이 곳곳에 보였다. 높지 않은 산등성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널찍한 들판에서 푸릇하고 싱싱한 곡물들이 무르익고 있었다.

‘확실히 지내기는 좋겠어.’

낮은 지붕에 비해 높게 보이는 수도원 건물을 보니 마음마저 경건해지는 하비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수도원에서 세례도 받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장 문제의 인물이 떠올라 하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빅터가 싫어하려나.’

그는 워낙 종교를 믿지 않아 불손한 태도인 데다, 고아원 일을 제외하면 수도원 사람들과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비가 간다니 설렁설렁 따라서 예배를 보는 장소까지 온 적도 몇 번 있었지만, 하비는 그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에피소드를 몇 개나 겪어야 했다.

‘기도할 두 손으로 당장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이럴 시간에 뭐든 이뤘겠어.’

‘매번 기부하는 게 얼만데 건물 증축은 대체 언제 하는 거지? 정원 조각상 하나 달라진 게 없군. 수도승들 용돈이나 주려고 기부한 게 아닐 텐데.’

이런 소리나 해대며 수도원 내부를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하비는 정말 난감했다. 흘겨보는 수도승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하비가 대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준 적도 많았다.

‘신께 기도를 하면 나아갈 힘이 생기니까.’

‘건물 증축보다는 빈민 구제에 더 힘을 쓰고 있어서 그런 거다.’

그럴 때마다 빅터는 미적지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 같지만 하비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 수긍한 것이었다.

둘은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달랐다. 생존에만 치우쳐야 했던 빅터가 미신이나 수도원, 교회를 싫어하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인간이 된 건 어쩔 수 없었다.

빅터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몇 달간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하비는 입맛이 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평생을 함께하고자 한 반려와 소중한 기간을 같이 보내지 못하는 건 씁쓸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최근 빅터는 일이 너무 많아 보였다. 하비를 대하는 태도는 한가해 보였지만 실상은 한창 가주 대리직과 시의원 자리를 병행할 때만큼이나 할 일이 많았다. 잠도 거의 못 자고 일만 하는 것을 봐왔던 터라 같이 가자는 말을 차마 꺼낼 수도 없었다.

하비는 말없이 배 위를 습관처럼 만져보았다. 이제 제법 배 속 아이의 존재가 뚜렷해지고 있어서 만지면 볼록한 것이 느껴질 정도인데, 이 기쁨을 공유할 수 없다니.

그는 자신이 이제 제법 빅터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면 함께 해결하고 상의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빅터는 문제를 고치는 데 있어 정말 유능한 해결사였으니까.

하비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그리움을 키워가고 있을 때였다.

“어?”

창밖으로 고개를 빼어 경치 구경을 하던 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볼 것 봤다는 듯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덕분에 젤가도 고개를 갸웃하며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죠? 이제 거의 다 왔을 텐…… 데…….”

젤가의 뒷말이 급격히 흐려졌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하비도 바깥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동행인들의 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몸을 정비하기만 했다. 창밖으로 목을 빼어 상황을 주시하는 건 귀족으로서 방정하지 못한 일이라 여겨서였다.

마차가 서서히 멈추었고, 하비는 여기서 들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의 유쾌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 한참 기다렸잖아.”

반사적으로 하비의 상체가 마창 쪽으로 기울었다. 하비는 허겁지겁 상대를 확인했다.

‘여긴 어떻게…….’

거대한 흑마 위에 올라타 있는 체격 큰 금발의 남자가 거짓말처럼 하비의 시선 속에 있었다. 눈알을 쪼듯이 강렬한 남부의 햇살이 화려한 금발을 더욱 반짝거리게 했다. 성질머리만 아니라면 누구나 사랑할 법한 아름다운 외모도 빛을 발했다.

하비와 눈이 마주치자 빅터의 쾌활하면서도 진중한 녹안이 부드럽게 휘었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어째서 빅터가 이곳에 먼저 도착해 있는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하비는 침묵했다. 갑작스러운 빅터의 등장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꿈인가 의심도 해봤지만 마찬가지로 놀란 집사 에반이나 젤가를 보면 분명 현실이었다.

빅터는 말없이 굳어버린 하비의 얼굴을 마창 너머로 보더니 혀를 찼다. 즐거운 이벤트가 될 거라 예상했는데, 하비는 예상보다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괜한 짓 했나.’

마창을 사이에 두고 계속 대화하기는 그렇고 주변의 시선도 있기에 우선 두 사람은 별장 안으로 들었다. 빅터는 침묵하는 하비의 눈치를 살피느라 쩔쩔매었다.

“이쪽으로 임시 거처를 두느라 준비할 게 많았어.”

“…….”

“배웅도 안 해서 섭섭했지? 미안해.”

사실은 빨리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섭섭함을 애써 누르는 게 너무 귀여워서 숨긴 것도 있었다. 빅터는 이걸 말했다간 하비가 정말 화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았다.

하필 또 눈치 없는 사용인이 꽃병에 싱싱한 튤립을 한가득 담아 와서 더더욱.

‘이 꽃만은 절대 안 된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망할 자식들. 책임자가 누구야.’

젤가와 얽힌 가면 무도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아직도 빅터는 하비 앞에서 튤립을 내놓지 않았다. 아둔한 오해로 벌어진 일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비의 시선으로부터 어깨로 꽃병 쪽을 자연스럽게 차단한 빅터는 느닷없이 떨어진 하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마음의 각오를 하고 왔는데도.”

“응?”

“그래도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어.”

“무슨 생각?”

불안한 마음에 빅터의 말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초조함이 그대로 녹아나는 얼굴을 마주 보며 하비가 선선히 미소 지었다.

아주 예전에, 나스타와 떨어져 있게 된 레나가 제 짝이 곁에 없어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자신 또한 그 당시에 임신 한 상태로 빅터와 떨어져 있었기에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도 그랬다.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이 허전했다. 임신을 해서인지 감정에 기복도 조금씩 생기고, 그럴수록 한 가지 생각만 절실하게 들었다.

빅터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하비는 불편해 보이는 빅터의 얼굴에 제 손을 얹었다. 단단히 박인 굳은살이 빅터의 뺨을 감싸고, 외모만큼이나 단정한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앞으로도 계속-”

하비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포근한 햇살 향이 날 것 같은 웃음이었다.

“내 옆에 있어줘야겠어.”

입덧이 심해서인지 전보다 가늘어진 얼굴선이었지만 그 속에 어린 강인한 의지는 여전해 보였다.

하비는 아무 미동 없이 굳어버린, 수풀처럼 푸른 녹안을 향해 속삭였다.

“이제 네가 없으면 정말 안 될 것 같거든.”

멍하게 있던 빅터가 울컥 씹어뱉듯 말했다. 처절하도록 낮은 목소리였다.

“……그건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데.”

뺨에 놓인 하비의 손 위로 빅터가 제 손을 겹쳤다. 닳도록 보아서 손가락 핏줄의 형태까지 모두 기억했지만 닿을 때마다 무서울 정도로 좋았다.

빅터는 가만히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난 원래 겁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천천히 눈을 다시 뜨며 빅터는 밤색의 고요한 시선을 마주 보았다.

“네가 이럴 때마다 정말 심장이 남아나지 않아.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라고.”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마음고생을 시켰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계속 확인하게 된다.

정말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것이 맞는 건지, 어느 날 갑자기 질려서 떠나지는 않을지.

하지만 언제나 정직하고 바른말만 뱉는 이 고지식한 남자는 절대로 그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빅터는 두려움을 삼킬 수 있었다.

하비가 피식 웃으며 빅터의 뺨을 가까이 당겼다. 하비와 빅터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새들이 부리를 비비며 애정을 표하듯 높이 솟은 콧대가 서로 가벼이 부대꼈다.

붙은 입술 사이로 뱀들의 교미처럼 혀가 엉키고 길게 얽어졌다. 부드러운 입술이 각자에게 깊숙이 닿았다가 서서히 멀어졌다.

이윽고 아쉬운 듯 떨어지는 빅터에게 하비는 문득 속내를 말했다.

“이제 아이도 생기는데 오래 살아야지.”

하비의 낮은 목소리에 빅터의 눈에 흥분이 스쳐 지나갔다. 흘러나오는 숨이 점점 뜨거워지고, 빅터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안정기가 언제라고 했더라.”

“다음 달까지.”

빅터는 한숨을 내쉬며 하비의 배 위로 죽상인 얼굴을 드리웠다.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참아봐야겠군.”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뭔가를 필사적으로 인내하는 얼굴이었다. 하비의 미소를 닮은 소리 없는 바람이 기분 좋게 흘러갔다.

* * *

여름의 대정원이라 불리는 이 크고 너른 대저택은 온갖 꽃과 나무가 뽐내듯 피어 있었다. 그러나 유독 가장 인기 있는 품종인 튤립만 없는 것에 하비가 의문을 표했을 때는 벌써 저택에 온 지 3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걸 물었을 때 빅터의 표정이 어떠했더라. 하비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하던 빅터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나.’

하비도 빅터의 반응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가끔 놀릴 때 써먹으면 좋을 것 같다. 너무 놀려먹으면 가엾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쉴까.’

하비는 무거운 발을 이끌고 그늘로 들어갔다. 이제 제법 배가 많이 불러와서 걷는 것도 힘들었다.

일하는 임시 거처를 아예 이쪽으로 둬버린 빅터는 바람처럼 늘 하비의 곁에 붙어 다녔다. 임시 거처라고는 하지만 워낙 벌여놓은 사업이 많아 승인할 것도 많고 처리할 것도 많을 텐데 하비가 가는 곳은 빠짐없이 전부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멀리서 성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빅터가 불쑥 나타났다.

“왜 또 혼자 나와 있어? 옆에 사람 두고 있으라니까.”

“이 정돈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고 몇 번 말해.”

불안한 듯 말한 빅터가 하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비는 마음대로 보도록 내버려 두며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땀이 맺힌 이마에 서늘한 빅터의 손등이 닿았다. 시원한 감각에 기분이 좋아진 하비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일일이 과민 반응하는 것도 아이한테 안 좋아. 여유를 가져야지.”

어찌 된 것이 날이 갈수록 빅터는 조바심이 심해지고, 하비는 점점 더 느긋해졌다.

여유로운 건 빅터의 천성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비에게 조금만 이상 징후가 생겨도 두려워하고, 평화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하비는 그것이 늘 안쓰러웠다.

‘이제 마음을 놓을 때도 됐을 텐데.’

빅터가 완전히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비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기다려 주는 것뿐이었다. 언제든 그가 붙잡을 수 있도록, 같은 자리를 항상 지키면서.

곳곳에서 나는 꽃향과 싱그러운 풀냄새, 지저귀는 새소리들이 평온하게 하비의 마음을 녹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빅터의 손길을 즐기던 하비가 불쑥 상체를 바로 했다. 문득 생각난 것 때문이었다.

“알파 아버지만 둘이면 아이가 혼란스러워하지 않을까.”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거스른 존재라니. 아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하비에게 빅터가 핀잔을 주었다.

“별 이상한 걱정을 다 하는군.”

빅터의 핀잔에도 하비의 단정한 얼굴에 서서히 근심이 서렸다.

“남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

“감히 그딴 망발을 지껄이는 것들이 있다면 입을 찢어놓을 테니 염려 놔.”

험악한 얼굴로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빅터에게 하비가 주의를 주었다.

입술에 검지를 지그시 눌러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빅터는 바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지은 하비가 빅터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배로 이끌었다.

커다랗고 흉터 많은 손은 움찔거리다 이내 얌전하게 하비의 배 위에 안착했다.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츠리기까지 한 모양새가 행여 맹수가 상대를 다치게 할까 봐 발톱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빅터는 불룩하게 솟은 배 위를 경이로운 표정으로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지켜보던 하비가 조용히 말했다.

“들어봐. 이번엔 도망가지 말고.”

빅터가 찔끔한 얼굴로 슬그머니 다른 곳을 보았고,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도망이라니.”

“들어보라고 할 때마다 매번 핑계 대고 어디론가 가버리잖나. 왜 그러는 거지?”

빅터는 설명해 보라는 하비의 눈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먼 과거에 숙청했던 어느 해적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했다. 네가 가진 것은 불행해질 거라는, 그 저주 말이다. 그래서 혹여나 노심초사했다.

고민하던 빅터가 진지해진 얼굴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 손이 닿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듣자마자 어이없다는 듯 하비가 헛웃음을 지었고,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걱정 말고.”

하비의 손이 부드럽게 빅터의 금발을 헤집고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얼결에 빅터의 뺨과 귀가 하비의 복부에 닿았다. 볼록하지만 보통의 오메가 임산부에 비해서는 근육이 많은 편이라 조금 단단했다.

쿵, 쿵, 쿵.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의 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태동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듯이 파고드는 작은 소리가 힘있게 울렸다.

이것이 곧 태어날 아이의 증거인가. 신비로웠다. 빅터는 이것이 자신에게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듣고 바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빅터는 홀린 것처럼 가만히 귀를 대고 들었다. 그러다 곧 매끈한 미간을 찡그렸다.

“소리가 상당히 빠른데.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원래 그래.”

빅터의 온 신경이 배 속의 아이에게로 쏠려 있음을 확인한 하비는 만족스럽게 빅터의 뺨과 이어지는 귓불을 만지작댔다.

태동을 들어보라 하면 늘 내빼기 바빴던지라 아이에게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괜한 걱정을 했군.’

호기심 어린 녹안이 경이로움과 약간의 두려움을 안고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비의 손 아래서 쓸리는 금발이 길을 내면서 동그란 귀를 보였다. 빅터는 귀조차도 모양 좋고 잘생긴 걸 보면 아이도 그러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하비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 발로 차기도 하더군. 힘이 좋을 것 같아.”

“사내아이인가…….”

의미 없이 흘린 빅터의 말에 하비가 맞받아쳤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건강하기만 하면 돼.”

천천히 귀를 떼어낸 빅터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무엇보다 너도 건강해야 하고.”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반짝이는 빅터의 얼굴을 보며 하비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 뒤로 빅터는 부쩍 배 속의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고, 처음에 보였던 경계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비가 헛돈 쓰지 말라며 몇 번이나 이야기한 덕에 줄었던 소비가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들었고, 여름 대정원이라 불리는 저택은 아기용품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비는 이제 과소비를 말리는 것도 포기하고 빅터와 오로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언제 이런 식으로 돈을 써보겠나 싶기도 했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니까, 좀 더 온 마음을 쏟아 즐거이 보내고 싶었다.

그들은 출산일이 다가오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며 행복만 누렸다. 다가올 생명의 탄생이 고될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지도 못한 채로.

* * *

빅터가 고통스러운 신음만 간간이 터져 나오는 방 앞을 안절부절 누비고 다녔다. 보다 못한 집사 에반이 빅터를 붙들고 말했다.

“눈이라도 좀 붙이시지요. 어제부터 한숨도 주무시지 않으셨잖아요.”

“내가 이 상황에서 눈을 붙이겠어? 돌아버릴 것 같은데.”

그 와중에 하비의 억눌린 고통이 다시 터져 나오자 빅터는 충혈된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금방 나온다며. 벌써 반나절이나 저러고 있는데 이게 금방인가?! 최고라고 뻐기던 의사 놈들은 대체 뭐 하는 거지?”

저러다 하비가 잘못되면 방 안에 있는 놈들을 죄다 죽여 버릴 거라고 길길이 날뛰는 빅터를 집사가 간신히 말렸다.

“좀 더 기다려 보시죠. 지금 나리만 힘듭니까? 저도 돌겠다고요.”

에반도 안색이 창백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비가 걱정되어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지만 그래도 참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대처를 할 수 있어서였다.

안타깝게도 곧 아버지가 될 누군가는 하비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움으로 거의 반쯤 미쳐 있었다. 빅터가 날 선 시선으로 방 안을 노려보았다.

“그 망할 온천 같은 델 가는 게 아니었는데. 거기서 그걸 하는 게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난 왜 이렇게 항상 후회할 짓만 하는 거지?”

“후회할 힘이 있으시면 얌전히 앉아서 기도나 같이 하자고요. 곧 도착할 겁니다.”

이미 하비가 있는 방에 사제가 하나 들어가 있었지만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빅터가 추가적으로 더 불렀다. 긴급히 호출을 받고 수도원에서 급히 나온 수도사가 색이 짙은 카푸친을 벗었다.

사제라면 질색하던 빅터는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그를 반색했다. 그러나 반기던 것도 잠시, 빅터가 수도사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고 협박하듯 으르렁댔다.

“하비와 아이가 둘 다 무사하면 평생 생계 걱정 없이 살도록 해줄 테니까, 죽을 힘을 다해서 기도해. 만약 무사하지 못하면 쓸모없는 네 손부터 잘라 버릴 거다.”

지켜보던 벤과 진이 빅터를 뜯어말렸다. 겁에 질린 수도사가 당장에라도 도망갈 것 같아서였다.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놓아주셔야 이분도 기도를 하지요.”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을 때, 늙은 산파가 지친 얼굴로 나왔다. 그녀는 빠르게 다가서는 측근들과 빅터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난산이십니다. 나오는 길이 너무 좁기도 하고, 아이가 몸을 뒤집고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이대로면 스터스 경도 위험합니다.”

“……위험하다고?”

거의 정신을 놓고 멍하게 있는 빅터는 사고라는 걸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예측하지도 않고, 오로지 현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집요한 눈길은 하비가 괴로워하고 있는 방에만 꽂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방 문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와서 빅터는 더욱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기도하듯 공손하게 모아진 양손이 가끔 꿈틀거렸다. 고르게 모은 양손을 이마에 받치고 고통스러운 듯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어느덧 빅터는 아무에게도 얼굴도 보이지 않고, 쥐 죽은 듯이 고개 숙여 하비의 안전만을 빌었다. 으름장도, 협박도 없었다. 그저 죽은 것처럼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할 뿐이었다.

그 뒤로도 진통은 몇 시간 더 이어졌다. 간신히 아이가 태내에서 다시 몸을 뒤집은 뒤에야 그나마 순탄한 출산이 이어졌다.

하비는 온몸이 찢겨 나가는 듯한 격통 때문에 핏줄이 다 터져 눈이 붉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여러 번 기절하고도 남았을 고통이었지만 하비는 정신력과 의지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기절하는 것이 출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들어서였다. 의식이 있는 쪽이 수월하다는 이야기에 하비는 지체 없이 고통을 참는 것을 택했다.

예전에 신약을 제조하기도 했던 의사는 하비의 곁에서 일부러 거짓말도 섞어서 했다.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다 되어갑니다.”

너무 소리를 지르면 밖에 있는 빅터가 걱정할까 봐 하비는 스스로 제 입에 재갈을 물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너무 축축하게 젖어서 재갈도 수 번 갈아야 할 정도로 지독한 난산이었다. 최악의 경우 아이나 산모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치달을 수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아이를 살리라는 하비의 지시가 있었지만 의사와 산파의 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하나밖에 없었다.

‘무조건 하비를 살려. 아이도 살려야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무조건 하비야. 알겠나?’

다 죽어가는 하비 스터스보다는 밖에서 악귀처럼 버티고 서 있는 빅터 베르텐이 훨씬 더 두려웠으니까.

마침내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빅터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뛰쳐들었다. 들어가자마자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벌건 핏물을 받아놓은 통이 몇 개나 되었다. 밖에서 사용인들이 들락거리며 계속 신선하고 깨끗한 물을 공급했다.

빅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방 안에 펼쳐진 참극을 둘러보았다.

이게 전부 하비의 피였다니.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코를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빅터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침대까지 걸어갔다.

사용인들이 식은땀 범벅인 하비의 이마를 닦아내고 뒷마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입술도 다 터져서 갈라져 있고 남부에서 머무는 동안 올랐던 살이 내려가 있었다.

그의 품에서는 처음 보는 아주 작은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이 빠진 듯 하비는 축 늘어져서 고운 천으로 싸인 아기를 보고 있었다. 애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빅터에게는 오로지 하비만 보였다. 그가 무사한 것만이 전부인 양 하비의 안위만을 살폈다.

빅터는 하비의 곁에 앉아 땀 때문에 끈적거리는 손을 만지작대다가 꽉 붙들었다.

빅터가 목이 졸린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살아 있는 거…… 맞지?”

하비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목이 나가버려서 쉽게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하비를 보고 나서야 빅터는 막힌 숨을 터뜨렸다. 숨 쉬는 법조차 잊고 있었다.

한쪽 눈만 있는 의사가 빅터에게 다가와 위로하듯 말했다.

“아기씨가 울지 않아서 다들 걱정 많이 했답니다. 그래도 이제 한시름 놨어요.”

드디어 빅터가 초점 없는 눈으로 하비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았다. 곁에 있던 산파가 지친 얼굴로 권유했다.

“베르텐 경도 한번 안아보시지요.”

“내가 안아도…… 괜찮은 건가? 정말로?”

하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럽게 빅터에게 아이를 넘겼다. 천천히 떨리는 손을 내밀던 빅터가 흠칫하며 억지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혹여나 떨어뜨릴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는 간신히 떨림을 가라앉히고 부드러운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빅터의 머릿속에서 수억 개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비를 죽게 할 뻔한 아이라서 미워지면 어떡하지?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하비가 실망하면 어떡하지? 아이를 볼 때 무슨 얼굴로 있어야 하지? 웃어줘야 하나? 멍청해 보이면 어떡하지?

빅터를 닮은 금발의 아이였다. 하품을 하는 입술은 쪼글거리고, 꼬물거리는 손과 발은 빅터의 손가락 마디 하나도 채 되지 않아 보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자그마한 아기를 보고 있으니 빅터는 남은 경계마저 사르르 풀렸다. 감은 눈을 반짝 뜨게 되면 눈동자는 누구를 닮았을까, 온갖 궁금증이 치솟았다.

괜한 기우였다. 도무지 이 아이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보는 순간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기묘한 충격이 빅터를 내리쳤다. 마치 어린 날의 하비를 처음 봤을 때 같았다. 시끄럽던 세상이 멈추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았던 그날처럼.

그때 복잡한 얼굴인 빅터에게 아이가 방긋 웃었다. 그저 하품을 한 건지도 몰랐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빅터는 그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충격적으로 사랑스러웠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빅터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말했다.

“너무…….”

빅터의 녹안이 잘게 일렁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너무 작아. 손도, 발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데.”

지켜보던 하비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었지만 고생한 것에 비해서는 비교적 건강했다. 타고난 체격과 체력이 있어서였다.

“안 부서져.”

완전히 쉬어버린 쇳소리 섞인 목소리였다. 연신 기침을 해대서 빅터가 괜찮다며 말을 막았지만 하비는 고집스럽게 이어 말했다.

“널 닮은 튼튼한 아이니까 걱정 마.”

두 사람을 훈훈한 얼굴로 지켜보던 사용인 몇이 훌쩍거렸다. 그들이 얼마나 큰 고난을 거쳐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 너무나 잘 알기에, 오늘의 기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잘 알았다.

눈이 한 짝만 있는 의사가 감격한 얼굴로 고했다.

“건강한 베타 여자아이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가 비처럼 쏟아졌다. 산파에게 아이를 넘긴 빅터는 그제야 풀린 다리로 침대맡에 주저앉았고, 하비도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빅터는 하비의 손을 부서질 정도로 꽉 잡고 있어서, 하비는 그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밖에서 제 성질대로 거칠게 난동을 부렸다던데, 고생했을 사용인들에게 휴가도 줘야겠고 그 외에도 할 일이 많았다.

‘조금만 쉬고.’

빅터를 안심시켜 준 뒤 아이를 제대로 마주 보고 싶었다. 얼마나 예쁜 아이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미리 지어둔 여러 이름 중에서 뭐가 나은지도 결정해야 하고 말이다.

‘리에가 좋을 것 같은데…….’

하비는 몰려오는 수마를 받아들이며 고요히,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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